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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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명한 책을 뒤늦게 읽을 때면 저절로 형성된 예상치 혹은 기댓값과 견주는 행위를 무심결에 반복한다. 그 결과 기대 범주 내로 안착하는 작품도 있지만 이를 빗나가는 경우에는 더욱 당혹스럽고, 이 당혹감은 한동안 여운을 남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장 자끄 상뻬 그림, 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1999, 1992, 122쪽 분량)를 당돌하고 유쾌한 소년의 성장 소설로 상상했으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책의 제목은 소년의 이야기가 아닌 좀머 씨 이야기다. 좀머 씨는 120쪽 내외의 많지 않은 분량 중에서도 간헐적으로 잠깐씩 출현하지만 인상은 강력하다. 주로 주인공 소년의 눈으로, 가끔 이웃의 눈으로 해석되는 좀머 캐릭터는 픽션 세계와 현실을 남모르게 넘나드는 인물처럼 가공적이면서 동시에 생생하게 육화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모든 문학상 수상과 인터뷰를 거절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는 기이한 은둔자로 이는 D, J. 샐린저를 연상케 한다. 그는 모노드라마 콘트라바스로 찬사를 받은 이후 좀머 씨 이야기와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향수등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언어의 연금술사다. 작가의 기량은 작품들이 증명하나 그의 기피는 독자가 추측하는 한편 존중할 뿐인데 좀머 씨 이야기는 세상을 향한 작은 힌트가 아닐까. 그와 같은 힌트의 메신저가 주인공 소년이다.

 

이 이야기는 소년이 자신의 유년을 회상하면서 우연히 쓰게 된 글은 아니다. “좀머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려고 작정”(p.14)하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늘 걸어 다니기만 했던 좀머 아저씨, 어디서나 쉽게 식별되는 사람이었던 좀머 아저씨의 모습을 꼼꼼히 묘사하지만 결코 알 수 없던 것은 그대로 남겨둔다. “그런데 정작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그러한 끝없는 방랑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잰 걸음으로 하루에 열둘, 열넷 혹은 열여섯 시간까지 근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p.22)라고.

 

좀머 아저씨는 단 한 번 분명하게 말한다. 빗줄기가 우박으로 변하여 수백만 개의 얼음덩이를 쏟아 붓던 날, 여전히 걷고 있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그러다 죽겠다며 차에 타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지팡이로 땅을 내려치며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p.35)라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던 순간도 완벽히 혼자라 여겼을 때였다.

 

현재 시점에서 돌아보면 대수롭지 않은, 그러나 당시에는 상황을, 감정을 감당하기 위해 모든 힘을 집중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카롤리나 퀴켈만이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p.47) 라고 말했을 때의 환희, 계획과 실망, 마리아 루이제 풍켈 선생님 댁에서 배우던 피아노, 선생님의 어머니가 과자를 주는 미세 연결 동작, 무엇보다 코딱지 사건과 참담함에 죽기를 각오하고 결행하려던 심정, 자신의 장례식을 그려보며 저절로 눈물을 쏟는,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상상 등 소년의 결정적 순간들은 독자의 유년기 한 순간을 불러낸다. 그 때마다 우연히 엿보게 된 좀머 아저씨가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그에 대해 쓴다.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 그림 속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다. 이런 문을 닫아 걸고 묵묵하고자 의지를 벼린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 중 한 사람이 작가 자신의 일정 부분을 대변하는 좀머 씨다. 좀머 씨가 소통의 문 손잡이를 내쳐버린 이유는 전쟁과 연관한 트라우마였을지, 다른 무엇이었을지 명확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를 조금 별난 사람으로 여긴다.

 

사람들에게 좀머 씨는 궁금하지만 굳이 본인이 원치 않는데 나의 시간과 품을 들여 그의 의식세계에 노크할 정도는 아닌 무명 씨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걱정거리들이 있”(p.97)기도 하니까. 소년의 기록으로 남은 은둔자의 몰락은 없음으로 수렴하기까지 멈추지 않고 그 원인은 짐작하고 추측할 뿐 미스테리로 남는다. 한편으로는 어떤 인생이건 미스테리 없이 쨍할 수 있을까 싶지만 좀머 씨 경우는 일상적 수용의 범위 밖에 있다. 우리 곁에는 좀머 씨가 과연 없을까.

 

좀머 씨 이야기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어린 소년이 화자인 성장 소설이고 숲과 나무가 자주 등장해 청량한 분위기를 지닌다. 장 자끄 상뻬의 삽화는 완벽한 마침표 역할을 한다. 성장과 죽음, 수용과 거절, 빛과 그림자 등 상승하는 이미지와 하강하는 이미지를 고루 담아낸 소설은 인간의 삶을 요약한다, 자신의 상황을 동화 속 장면에 견주거나 자라면서 읽게 되는 오디세이아까지 문학 작품들이 언급되는 부분에서 소년의 민감함 뿐 아니라 아무에게도 좀머 씨에 대해 말하지 않고 대신 기록하는 선택을 수긍하게 한다. 간결하지만 긴밀하게 연결시킨 문장은 활자를 읽는 느낌이 사라지고 이야기 속으로 단번에 몰입하게 만든다. 마치 문장은 이렇게 쓴다는 사례집과도 같다.

 

특히 아버지의 입을 빌어 작가는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은-너희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어중이떠중이들이 입이나 펜으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경고한다.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p.34) 늘 별표해 두지만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상투어, 추상어 금지 규정도 이에 속한다. 말 뿐만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누군가를 상투구가 아닌 꼭 필요한 진심으로 대하는 일은 기본일 것이다. 성장은 시기의 문제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과정 가운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성장을 꿈꾸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은-너희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어중이떠중이들이 입이나 펜으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

 

“(전략)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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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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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이상향을 뜻한다. 최선, 완전, 이상이라는 단어는 늘상 우리가 선망하고 추구하는 목표지점에 배치되고, 무엇과 결합해도 만족스러운 덕목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이상 사회는 질병 없고 위험이 없으며 눈물도 없으리라는 환상을 주고, 환상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는 마땅해보인다. 그 많은 감시카메라는 더 이상 사각지대를 허락하지 않고 철두철미 지킴이 역할을 한다. 안심은 때로 두려움 일부를 동반한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아이러니를 내포하듯, 유토피아의 반쪽 얼굴이 디스토피아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조지 오웰의 1984(정희성 옮김, 민음사. 2003, 1949, 444면 분량)는 디스토피아 문학의 대표격으로 <우리들(1922)>, <멋진 신세계(1932)와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다. 책이 나온 1948년에 설정한 미래 시점이 아주 먼 미래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변화는 급진적일 수 있고 회복 불가의 낙인이 절대적일 수 있다는 경고를 소설은 잘 보여준다. 조지 오웰은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며 계급의식을 풍자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탁월하였다. 소설가이자 언론인, 비평가로 십 칠년간의 본격적인 작가 생활 중 마지막 작품인 1984는 그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된다.

 

소설 속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작가가 구축한 디스토피아다. 오세아니아는 무엇보다 선명한 계급사회로 인구의 2퍼센트도 안되는 지배 계층인 내부당, 18퍼센트를 차지하는 지식인층인 외부당, 나머지 85퍼센트는 프롤이라 불리는 노동자 또는 최하층 무산계급으로 구성된다. 과거와 철저히 결별 할 뿐 아니라 해체하고 무화시키는 곳, 희망을 차단당하고 욕구를 무력화하는 전체주의 감시 사회는 다양한 요소들의 공조로 흔들림 없이 지탱된다. 포스터 속 눈동자는 감시카메라 기능을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라는 글로 재차 강조한다. 영원히 끌 수 없는 텔레스크린은 영원한 세뇌를 장담한다. 슬로건과 신어는 시스템의 근간이다. 그 장치들이 어떻게 발명 되었는가 이의를 제기하고 여정을 추적하고 답변을 요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잃었다. 시스템의 하위구조, 쳇바퀴의 부속품인 인간은 전적인 수용과 참여로 유일하게 허용된 삶의 방식을 따른다.

 

다만 윈스턴 스미스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가 시작하려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p.16)이다. 일기쓰기는 유익은 찾기 어렵고 위험은 분명한 행위다. 그에게는 마침 구입해둔 노트가 있었고, “이 분 증오를 기억하기 위해서 쓰기를 선택했는데 무의식중에 페이지를 채운 글은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로 이는 사상죄에 해당한다. 사상범들은 밤중에 사라지고 등록부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그에 관한 모든 기록도 삭제되어 결국 증발”(p.33)한다. 조작과 증발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진리부 내의 기록국에서 일하는 윈스턴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인간이 소외되는 기록국의 광경은 카프카의 <>에 나오는 업무공간을 연상케 한다. 그의 일터는 오세아니아의 시민들,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에게 그에 알맞은 수준으로 낮춰서 되풀이”(p.63) 제공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정보를 생산한다.

 

2부의 기록은 사상경찰이라고 오해했던 줄리아와의 조심스런 밀회로 방향을 전환한다. 당의 강령에 관심이 없는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오로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그들이지만 함께하기 원하기에 둘만의 사생활을 누리고 싶다. “그것은 일부러 무덤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았”(p.198)으나 게의치 않는다. “그런데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이 개조시킬 수 없듯 그들 또한 사람들의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p.236)는게 윈스턴의 확신이다. 그는 자신과 동일한 입장이리라고 여겨왔던 오브라이언으로부터 형제단에 초대받는다. 비밀리에 넘겨받은 그 책은 조작된 세계를 설명하는 치밀한 지침서로 슬로건과 사회 구조, 빅 브라더 밑으로 내부당과 외부당, 프롤이 어떤 역학관계로 존재하는지 설명한다. 윈스턴은 새로운 가능성에 거의 근접했다고 여겼다. 적시에 필요한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의심치 않았다. 희망은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에게 있다고 다시금 확신하는 그때 새로운 대결, 막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카뮈식 인간조건을 윈스턴도 따르고 있었다. 그는 기록하는 자, 즉 깨어있는 자였고, 사랑하기 원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지켜냄으로 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는 조작된 인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이중사고에 속지 않는 인간이기를,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도 독자도 비참 끝에 납득할 만한 결실을 기대했으나 작가는 다른 결말을 준비한다. 분량상으로 간결하고 내용상으로도 단순한 3부는 과도할 정도의 구체적인 묘사로 윈스턴이 전 생애애 걸쳐 지켜내고자 했던 희망을 부순다. 작가가 형상화한 1984년에서 다시 40년이 지난 현재, 소설 속 많은 부분이 현실로 평행 이동하였음을, 그를 넘어 합동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은 바늘 하나 떨어질 틈 없이 치밀하기에 경고는 더욱 섬뜩하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오히려 윈스턴의 상황과 심정을 가늠케 만든다.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허구가 아닌 지금도 진행중인 상황을 전달받는 듯하다. 희망은 무산계급에만 있다던 그의 믿음은 좌절되었다. 책은 여전히 묻고 있다. 왜 그들은 양은냄비와 같은 사소한 시비에만 사로잡히는지를. ”그런데 왜 그들은 좀 더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그 같은 함성을 지르지 않는 걸까?“(p.100) 그리고 의식이 없다면 반란 또한 기대할 수 없다고 답한다. 어디서부터가 감시 내 상태였을지, 처음부터였다고는 믿고 싶지 않고 소설이야, 라고 덮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다. 작가는 마지막 작품,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 <신어의 원리>를 실었다. 사람을 규정하는 건 그가 쓰는 언어다. 그가 쓰는 말이 곧 그 사람이기에 생각을 규정하고 말을 왜곡하고 기록을 금지하고 검열하는 일은 가장 두려운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미래인에게 남기는 공개된 밀서와 같은 작품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실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큰 것은 못 보고 작은 것만 볼 줄 아는 개미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기억은 상실되고 기록은 날조되어 가는데도 인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었다는 당의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주장을 반박하거나 검증할 기준이 없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p.131)


그건 단지 소극적인 것보다는 적극적인 것을 택했으면 하는 심리가 작용한 탓이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어. 하지만 같은 패배여도 더 나은 패배가 있는 법이야.”(p.192)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삑한 일인지도 납득하지 못할뿐더러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공적인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 파괴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무지로 인해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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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세계사 - 생명의 탄생부터 세계대전까지,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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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펜은 이 순간에도 세계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번 장의 소제목을 파국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우려의 정도는 별 다섯, 극심으로 기울 것이다. 이번에도 다음 장, 다음 페이지로 무사히 바통을 넘길 수 있기를 바라며 역사로부터 배우기 위해 잠시 뒤돌아본다. 인류의 세계사(육혜원 옮김, 이화북스, 2024, 392쪽 분량)는 하버트 조지 웰스가 집필한 역사서로 아인슈타인의 추천을 받은 저작이다. 하버트 조지 웰스는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인 생물학자 토마스 헉슬리를 만나며 과학에 관심을 가진 이후 정치, 문학 등으로 초점을 넓혀간 소설가이자 사회학자, 문명비평가이다. 또한 SF 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베르나르 베르베르, 조지 오웰 등의 작가들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독자를 일깨운다. 작품으로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등 유명 작품을 비롯해 맨해튼 계획”(p.6)의 아이디어를 발견케 한 해방된 세계가 있다. 역사학자가 아닌 문학가가 쓴 인류의 세계사는 망각의 강을 거슬러 제대로 보는 눈을 지니자고 권한다.

 

인류의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한 권짜리 역사 책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웰스의 통찰력으로 초판 출간 당시 나치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p.7) 많은 세계사 책의 첫 장을 문명의 탄생이 차지하는 것과 달리 저자는 생명의 탄생부터 열어간다. 뒤를 잇는 인류의 기원에서는 원시인들의 사고방식이 어떠했을지 추론하며 체계적 사고는 비교적 늦게 발달한 능력이며 지금도 진정으로 자기 생각을 통제하고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삶의 대부분을 이끄는 것은 상상과 열정“(p.48)이라고 밝힌다. 이 상상과 열정이 지혜와 철학을 꽃피울 때 인류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사상의 역사“(p.83)라는 시각처럼 사상과 삶이 밀착함으로 발전해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상상과 열정은 나의 지경을 공격적으로 넓혀가는 창과 칼의 싸움을 본격화하고, 승패의 자리바꿈은 끝을 알 수 없게 된다.

 

마지막 10,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서 저자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 회담인 베르사유 조약을 언급하면서 진정한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약 20년 뒤에 더 큰 규모의 전쟁이 일어나리라 예측하는데 불행히도 실현되고 만다. 또한 자원 개발을 위해 지구 차원의 종합적인 통제 체계가 필요하고 전염성 질환과 인구 증가 및 이동 역시 전 세계 차원에서 다루어야”(p.369)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모두의 진정한 국적은 인류’”(p.370)라고 강조한다. 예언자와도 같은 저자에게 현재였던 그 시간이 먼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 돌이키면 좋을 순간들이 이후로 켜켜이 쌓였다. 극단적 이기심은 첨예한 갈등을 불렀고 자연 파괴와 재발하는 전쟁이 공멸의 위기로 밀어붙이고 있다.

 

인류의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는 원제와 같이 역사의 주요 장면을 간략히 다루지만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주제별로 기술한 역사서가 아니라 시간순 구성이고 객관적 사실과 저자의 견해가 균형을 이루어 독자의 관점도 세워갈 수 있다. 또한 사실 나열 위주가 아닌 스토리텔링식 서술이어서 흥미롭고, 가독성 있는 개론서이자 입문서로 추천할 만하다. 장점을 덧붙이자면 지도와 도판자료, 사진 등이 풍부해서 각주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이해를 돕는 덧붙인 글도 부가자료로 정보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위트 있게 인간의 속내를 포착하는 문장이 인상 깊다. 저자는 인류가 이제 겨우 청소년기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인류의 역사는 마음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 목적도 의미도 업는 싸움을 종식시켜줄 평화를 행해 가고 있으며 이 훌륭한 과업이 반드시 완수될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낸다. 믿음이라기보다는 간곡한 부탁이자 기원에 가까운 말에 우리는 응답할 수 있을까. 현자가 보내는 과거의 편지 같은 책으로 청소년과 성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새로운 발견과 발명은 늘어갔지만, 지적인 성찰은 더뎠다. 인류의 정신은 결국 20세기 초에 일어난 거대한 참사들이 벌어진 뒤에야 각성하였다. 16세기 이후 지난 4세기 동안의 인류 역사는 위험과 기회에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의 역사라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잠들어있는 역사에 가깝다. 잠든 인류를 가두어두는 동시에 보호해주기도 했던 감옥에 불이 났지만, 인류는 어색하고 불편한 듯 뒤척이기만 할 뿐이었다. 불의 열기와 바삭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이다.(p.270)

 

하지만 우리 모두의 진정한 국적은 인류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세대가 전쟁과 폐허, 불안과 곤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또 언제쯤 그러한 불행에서 벗어나 위대한 평화의 새벽에 이르게 될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바로 그러한 평화, 곧 마음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 목적도 의미도 없는 싸움을 종식시켜줄 평화를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이 훌륭한 과업은 반드시 완수될 것이다.(p.370)

 

(서평단_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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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
데이비드 댐로쉬 지음, 김재욱 옮김 / 앨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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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명작전집은 꿈과 사랑, 모험과 희망으로 동심을 이끌었다. 온세상이 책꽂이 안으로 사이좋게 모여있는 형국이었고 그 세계는 무한할 것 같았다. 성장하면서 지금까지 보았던 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깨닫고 축약과 편역을 아닌 완역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출발점 회귀현상이 벌어졌다. 선택해야 할 항목도 늘어났다. 이 작품은 누구의 번역으로 읽어야 할지, 어느 출판사가 나을지 정보를 모으고 판단을 내린다. 동시에 늘 아쉽다. 원어로 읽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마냥 부러워하며 현재 상태 최선과 타협한다. 지금까지 읽고 써온 내 서평의 많은 부분을 세계문학이 차지하므로 스스로를 총망라 서평러, 다나와 서평러가 아니라 편애 서평러라 칭했다. 그렇기에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는 반드시 읽어야 할 저작으로 대기 도서 리스트 상위에 자리 잡았다.

 

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김재욱 옮김, 앨피, 2022, 2018, 430쪽 분량)는 세계문학 독자를 위한 안내서이자 입문서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입문서라기에는 일반 독자에게 난도가 있지만 저자는 복잡해보이고 때로 굴곡진 길을 기꺼이 따르려는 열정 있는 자들을 불러 모은다. 하버드대학교 비교문학 학과장이자 세계문학연구소 소장이기도 한 데이비드 댐로쉬는 전 세계 50여개국에서 세계문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한 두 세기, 한 두 지역만의 전문가가 아닌 무려 4000년 지구문학의 종사자임을 자처”(p.15)하며 시공을 넘나든다. 역자는 세계문학 읽기에 전력해온 댐로쉬 작업의 정화가 바로 세계문학 읽기라고 전한다.

 

역자는 서두에 오늘날 세계 문학의 풍경을 조망한다. 그는 세계문학이 일으킨 변화 중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텍스트 산출량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두가지 이론을 대비한다. 프랑코 모렐리의 멀리서 읽기개념은 꼼꼼히 읽기와 대별되고 대략적인 얼개 파악하는 법’, ‘불필요한 부분 넘겨 읽는 법을 비롯한 읽지 않기의 방법론”(p.14)과 닿는다. 이와 같은 경향에 동의하지 않는 댐로쉬는 다양한 작품을 최대한 많이, 미련할 정도로 진득하게 읽어 나가는 경험론적 꼼꼼히 읽기야말로 작품에 대한 더 고차원적인 통찰을 추동하는 최선의 방략”(p.15)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은 공감하겠지만 과연 가능한 일인가는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세계문학용어는 괴테가 비서인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남긴 말 중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저자는 이 책이 세계문학을 이해하고 즐기면서 읽기 위해 개발하고 다듬어야 할 일련의 기술을 중심으로 구성했다고 밝힌다. 1<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문학 개념 자체, 문학의 범주를 살펴보고 독서의 방식편에서 두보의 시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소네트를 비교 분석한다. 소설의 사례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작품이 쓰여진 서기 1000년경의 시대상, 작품의 내용과 의미, 지금 발생하는 질문과 접근법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읽고 또 읽으면 각 작가가 이룩한 작업의 특수성을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p.83)라고 쓰는 한편 더 많은”(독서)보다 가장 중요한힌트를 건넨다. “(전략)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초기의 평평한 그림이 3차원으로 펼쳐지는 발판을 해당 전통에서 확보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거울을 통과해 새로운 문학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p.84).

 

2<시간을 가로질러 읽기>에서는 그 매력을 전임 작가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응답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세기를 가로지르는 상황, 인물, 주제, 이미지의 전개 과정을 추적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p.89)으로 본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오디세이아>를 글로 썼을까, 다양한 길이의 보관 문구와 고리 구성 등을 활용한 구술기법으로 전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며 문자로 쓰인 최초의 시와 <길가메시 서사시>를 추적한다. 또한 시적 서사시가 방대한 산문소설로 대체되는 지점에서 저자는 <율리시스>의 예를 든다. “가장 많이 쓰인현대소설 중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조이스는 베르길리우스조차 넌더리를 낼 만한 열의로 여러 편의 원고를 작업했다.”(p.102) 이 책을 읽으면서 필독도서 목록이 늘어가는 속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건 쉽지 않다.

 

3<문화를 가로질러 읽기>에서는 외국 작품을 읽을 때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한계와 난관을 짚어보고 어떻게 헤치고 나아갈지를 숙고한다. 저자는 희곡과 단편소설의 사례를 드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인도 시인 칼리다사의 <샤쿤탈라>가 희곡의 예로, 루쉰의 <광인일기>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가족의 유대>를 단편소설의 예로 든다. 저자는 <광인일기>의 서문을 재독하며 화자가 만나고 있는 대상의 실체를 단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전한다. 또한 더 많은 작품의 예를 들어 그 설명이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신뢰할 수 없어 내러티브의 결을 거슬러 읽어 그것을 변별해야 한다”(p.184)고 밝힌다. 역시 독자는 열심을 내야만 한다. 4<번역으로 읽기>에서는 문자주의의 극한인 직역, 자유로운 번역인 모방 번역, 직역과 모방의 중도로서 의역을 살펴본다.

 

5<멋진 신세계>는 낯선 곳으로 던져진 이들, 요셉과 요제프 K(소송)부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여행>, 그리고 <신곡>, <돈키호테>, <서유기>로 독서 여행을 이끈다. 특히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각 장이 하나의 상징적인 도시를 그려 내는 보석 같은 산문시라고 근사하게 소개한다. 6<제국을 쓰기>에서는 식민지, 탈식민지 작가 앞에 놓인 언어 선택 문제로 토착어로 작품을 쓸지, 제국어로 쓸지 판단하고 실행에 옮긴이들을 살핀다. 7<세계적 글쓰기>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빛을 보지 못한 지역에서 태어났던 카프카, 보르헤스, 베케트가 사실주의 규범을 벗어나 신비롭고 상징적인 장소를 작품 배경으로 삼은 점을 지적한다. 국제적 성향의 지역 작가가 선택한 탈지역화된 방식의 글쓰기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세계문학 독자의 로망을 자극한다. “작가가 살았던 곳에서 주의 깊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무라사키 시키부의 교토를, 비록 그 이후에 숱한 변화가 일어났더라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p.405)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학기행이 기약 없기에 관련 도서로 대리 만족하지만 아쉬움은 커질 뿐이다. 또한 무엇을 읽을지를 선택하는 방식도 제안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p.397)을 찾아 나서거나 의미 있는 흐름이나 문학 운동 등을 주제 삼아 읽기도 권한다. 두 가지 모두 끝이 없는 전진이고 애석하게도 인간에게는 한정된 시간만이 허락되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 읽어도 완전무결하게 읽었다고 자신할 수 없는 불안, 불안을 줄이겠다고 기록으로 남기는 자신과의 약속도 완벽은 보장할 수 없고 읽는 시간만 빼앗기는 건 아닐까 이중으로 고심을 부른다. 그래도 읽는 수밖에 없고 읽을 수 있어 감사하다. 그러니 이 책은 얼마나 특별하겠나.

 

본문을 정리해주는 서론, 충실한 각주, 매 장마다 도입과 결론에서 다시 한번 내용을 간추려주는 구성은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다만 학구적이고 때론 현학적인 문체는 심리적 거리를 체감케 해 아쉬웠다. 주요 부분이나마 정리해보겠다고 의욕을 내어 보았지만 가당치 않다. 70여 권에 이르는 책들이 듀엣이나 트리오로 등장할 때 푹 빠져 읽다보면 어느 사이 다른 책들로 자리바꿈하는데 하나같이 명저라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속도를 가까스로 따라갈 때 독자는 읽어내지 못한 작품의 경험하지 못한 저작 환경과 작품의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상상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세계문학을 향한 저자의 열정과 헌신은 매우 인상 깊다. 댐로쉬의 책은 잠시 행복한 순간의 무수한 연결을 경험케 한다. 그리고 나면 무더기 책 목록과 읽으리라, 하리라, 다시 보리라 등 다양한 의지 표현 종결어미를 되뇌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챗 속에서>


제임스 조이스는 아마도 지금껏 쓰인 가장 세졔적인텍스트일 피네건의 경야에서 이상적인 불면증에 시달리는이상적인 독자를 상상한 적이 있다. 그 이상적인 불면증을 꿈꾸는 이상적인 독자가 되길 강요하는 광활한 작품 세계, 이보다 더 정확히 세계문학을 정의하는 말은 없을 것 같다.(p.39)

 

(전략)방금 논의된 가능성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같은 동시대 세계 여러 곳에서 쓰인 다양한 모더니즘적 내러티브를 환기한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그 설명이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신뢰할 수 없어 내러티브의 결을 거슬러 읽어 그것을 변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가들 중 누구도 언급한 이야기들을 쓸 때 서로의 작품을 알지 못했겠지만, 모두 도스트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같은 원형적 모더니즘에 정초하고 있었다. 문화를 가로질러 읽으면서 우리는 분리된 동시에 연결된 루쉰과 그의 위대한 모더니스트 동료들이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재설정하는 다양한 방식을 사유해 볼 수 있다.(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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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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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나온 과거는 어쩔 수 없는 고정이고 불변이라는 의미에서 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문학동네, 2023, 352쪽 분량)은 끝나도 끝난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온전한 마침을 위한 복기는 그 시간 함께였던 이들을 향하는 깊은 포옹이고 그 포옹 끝에 안기는 건 자기 자신이다. 과거는 털고 묻어야 할 게 아니라 응시하고 언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걸 배운다. 고되고 불편한 과정을 작가가 대신해줄 때 어떤 문장에서는 속이 시원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부끄럽고, 때론 독서실인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앉아있다. 한뼘 위로받기도, 다행이야 싶은 지점도 만난다.

 

최은영은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 시작하였고 작품으로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장편소설 밝은 밤등이 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등단 10년이 되는 해에 지면에 발표했던 중단편 7편을 묶어낸 소설집이다. 이중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2020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에서 최은영은 자신의 결핍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핍을 적대하지 않고 동행하겠으며 무엇보다 찾아오는 감정을 마다하지 않고 지켜보겠다고 전한다. 이는 살아가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읽기와 쓰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는 길이 무엇으로 채워지는지, 그 길을 걸어가는 두 여성을 통해 묻는다. 영어 에세이 강사는 희원에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멘토였고, 잃어버린 멘토가 된다. 희원은 그녀가 남긴 희미한 빛,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내뱉은 흰 숨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은 화자 자신(해진)을 이인칭 대명사 당신으로 칭하며 대학의 교지 편집부에서 만났던 정윤, 희영과의 시간을 복기한다. 자신을 당신으로 부르는 거리두기는 화자에게 더욱 엄격하겠다는 의지로 다가오고 독자 역시 긴장하여 세 인물의 선택을 읽는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후략)”(p.52) 이런 글은 이미 글이 아닐 것이고 글 안에 증명할 수 있는 실천이 녹아난 행위의 결집이지 않을까. 결국 글처럼 삶은 살아진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다르지 않다.

 

<일 년>은 이야기가 주제다. 이야기 수위 지침이라는게 있으면 어떨까. 적정선을 넘어 실례의 영역으로 무단 침입하는 상황을 그려볼 때 말하는 이에게 더 실례일까, 듣는 이에게 더 실례일까. 가끔 생각해온 이 문제가 여전히 어렵다. 그녀와 다희가 카풀을 하면서 일 년간 보낸 시간, 나눈 이야기를 그리는 <일 년>은 이야기의 대척점에 기계를 놓는다. 감정이 없고 단단한 속성은 오히려 안도감을 준다. 이 작품에서 희미한 빛은 이야기다.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p.123) 사라지는 것 없이 살아있는, 그 자체로 온점이 찍히는 결말도 담백하고 거리를 두는 시점도 이를 돕는다. 세 번째에 <답신>이 실렸다. 책 말미 해설에서 평론가 양경언은 <답신>언니의 개인사를 넘어서는 사회가 구조적 취약성의 문제를 방기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비극”(p.335)이라고 본다. 괴로운 이야기인데 현실 밀착형 사건이라 더 괴롭고 무력하게 읽고 있다는게 또 괴롭다. 그러나 간절한 소망을 담아 “‘그래도남기는 이야기로”(p.336) 라는 데에서 중요한 자리를 잡는다.

 

<파종>은 희미할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회복한다. <이모에게>에서 희진은 방화문을 닫듯이 마음을 닫아버리면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의 불길로부터 안전했다.”(p.258) 하지만 닫히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고백한다. 소설은 마음의 안전장치를 사수하는 열 가지, 스무 가지, 백 한 가지 방법 찾기가 인생인가 자문하게 한다. 하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이가 안심하기를, 그의 손을 이끌고 조종실에서 봤던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모아”(p.264) 이모에게 보여주기 원한다. 이 빛은 희미하지 않다. “저 너머의 눈빛”(p.265)은 꺼지는 법이 없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기남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부끄러워도 돼요.”(p.319)라고 말한다. 소년의 천진한 목소리는 단번에 어떠어떠했던 것이, 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러워 오래 자신을 옥죄었던 결박을 푼다.

 

작가는 스며드는 문장으로 말을 걸어 놓치고 온 것을 살피게 해준다. 외면하고 온 것을 다독이게 만든다. 무시로 겪는 감정을 친절하게 언어화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줄 때 이것만으로도 힘을 얻는다. <일년>에서 서운함, <답신>에서 수치심을 다시 들여다본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기만의 이유, 기만이 쓴 가면, 작동과 결과를 본다. 이번에는 밝은 밤이 아니다. 희미하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시공간을 밝힐 수 있을까? 우리 안에 흩어져 있는 어떤 때, 어떤 곳까지 파고들어 정확히 조명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어둠에 익숙해진 시각이 통로를 발견하고 탈출의 가능성은 보장받는다. 희미하지만 사그라들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 내리는 이야기들은 뿌리에서 잔뿌리로, 다시 솜털로 뻗은 끝에 조용히 단물을 빨아올린다. 버석거리던 갈증은 가라앉는다. 오아시스 곁에 마음 내려놓고 쉴 수 있다면 빛은 희미해도 고맙다. 이 고마운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책 속에서>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썼다. 나는 그녀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경험을 했다.(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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