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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한 책을 뒤늦게 읽을 때면 저절로 형성된 예상치 혹은 기댓값과 견주는 행위를 무심결에 반복한다. 그 결과 기대 범주 내로 안착하는 작품도 있지만 이를 빗나가는 경우에는 더욱 당혹스럽고, 이 당혹감은 한동안 여운을 남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장 자끄 상뻬 그림, 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1999, 1992, 122쪽 분량)』를 당돌하고 유쾌한 소년의 성장 소설로 상상했으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책의 제목은 소년의 이야기가 아닌 좀머 씨 이야기다. 좀머 씨는 120쪽 내외의 많지 않은 분량 중에서도 간헐적으로 잠깐씩 출현하지만 인상은 강력하다. 주로 주인공 소년의 눈으로, 가끔 이웃의 눈으로 해석되는 좀머 캐릭터는 픽션 세계와 현실을 남모르게 넘나드는 인물처럼 가공적이면서 동시에 생생하게 육화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모든 문학상 수상과 인터뷰를 거절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는 기이한 은둔자로 이는 D, J. 샐린저를 연상케 한다. 그는 모노드라마 『콘트라바스』로 찬사를 받은 이후 『좀머 씨 이야기』와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향수』등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언어의 연금술사다. 작가의 기량은 작품들이 증명하나 그의 기피는 독자가 추측하는 한편 존중할 뿐인데 『좀머 씨 이야기』는 세상을 향한 작은 힌트가 아닐까. 그와 같은 힌트의 메신저가 주인공 소년이다.
이 이야기는 소년이 자신의 유년을 회상하면서 우연히 쓰게 된 글은 아니다. “좀머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려고 작정”(p.14)하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늘 걸어 다니기만 했던 좀머 아저씨, 어디서나 쉽게 식별되는 사람이었던 좀머 아저씨의 모습을 꼼꼼히 묘사하지만 결코 알 수 없던 것은 그대로 남겨둔다. “그런데 정작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그러한 끝없는 방랑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잰 걸음으로 하루에 열둘, 열넷 혹은 열여섯 시간까지 근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p.22)라고.
좀머 아저씨는 단 한 번 분명하게 말한다. 빗줄기가 우박으로 변하여 수백만 개의 얼음덩이를 쏟아 붓던 날, 여전히 걷고 있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그러다 죽겠다며 차에 타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지팡이로 땅을 내려치며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p.35)라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던 순간도 완벽히 혼자라 여겼을 때였다.
현재 시점에서 돌아보면 대수롭지 않은, 그러나 당시에는 상황을, 감정을 감당하기 위해 모든 힘을 집중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카롤리나 퀴켈만이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p.47) 라고 말했을 때의 환희, 계획과 실망, 마리아 루이제 풍켈 선생님 댁에서 배우던 피아노, 선생님의 어머니가 과자를 주는 미세 연결 동작, 무엇보다 코딱지 사건과 참담함에 죽기를 각오하고 결행하려던 심정, 자신의 장례식을 그려보며 저절로 눈물을 쏟는,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상상 등 소년의 결정적 순간들은 독자의 유년기 한 순간을 불러낸다. 그 때마다 우연히 엿보게 된 좀머 아저씨가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그에 대해 쓴다.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 그림 속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다. 이런 문을 닫아 걸고 묵묵하고자 의지를 벼린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 중 한 사람이 작가 자신의 일정 부분을 대변하는 좀머 씨다. 좀머 씨가 소통의 문 손잡이를 내쳐버린 이유는 전쟁과 연관한 트라우마였을지, 다른 무엇이었을지 명확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를 조금 별난 사람으로 여긴다.
사람들에게 좀머 씨는 궁금하지만 굳이 본인이 원치 않는데 나의 시간과 품을 들여 그의 의식세계에 노크할 정도는 아닌 무명 씨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걱정거리들이 있”(p.97)기도 하니까. 소년의 기록으로 남은 은둔자의 몰락은 없음으로 수렴하기까지 멈추지 않고 그 원인은 짐작하고 추측할 뿐 미스테리로 남는다. 한편으로는 어떤 인생이건 미스테리 없이 쨍할 수 있을까 싶지만 좀머 씨 경우는 일상적 수용의 범위 밖에 있다. 우리 곁에는 좀머 씨가 과연 없을까.
『좀머 씨 이야기』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어린 소년이 화자인 성장 소설이고 숲과 나무가 자주 등장해 청량한 분위기를 지닌다. 장 자끄 상뻬의 삽화는 완벽한 마침표 역할을 한다. 성장과 죽음, 수용과 거절, 빛과 그림자 등 상승하는 이미지와 하강하는 이미지를 고루 담아낸 소설은 인간의 삶을 요약한다, 자신의 상황을 동화 속 장면에 견주거나 자라면서 읽게 되는 오디세이아까지 문학 작품들이 언급되는 부분에서 소년의 민감함 뿐 아니라 아무에게도 좀머 씨에 대해 말하지 않고 대신 기록하는 선택을 수긍하게 한다. 간결하지만 긴밀하게 연결시킨 문장은 활자를 읽는 느낌이 사라지고 이야기 속으로 단번에 몰입하게 만든다. 마치 문장은 이렇게 쓴다는 사례집과도 같다.
특히 아버지의 입을 빌어 작가는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은-너희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어중이떠중이들이 입이나 펜으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경고한다.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p.34) 늘 별표해 두지만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상투어, 추상어 금지 규정도 이에 속한다. 말 뿐만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누군가를 상투구가 아닌 꼭 필요한 진심으로 대하는 일은 기본일 것이다. 성장은 시기의 문제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과정 가운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성장을 꿈꾸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은-너희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어중이떠중이들이 입이나 펜으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
“(전략)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p.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