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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평점 :
문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이상향을 뜻한다. 최선, 완전, 이상이라는 단어는 늘상 우리가 선망하고 추구하는 목표지점에 배치되고, 무엇과 결합해도 만족스러운 덕목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이상 사회는 질병 없고 위험이 없으며 눈물도 없으리라는 환상을 주고, 환상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는 마땅해보인다. 그 많은 감시카메라는 더 이상 사각지대를 허락하지 않고 철두철미 지킴이 역할을 한다. 안심은 때로 두려움 일부를 동반한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아이러니를 내포하듯, 유토피아의 반쪽 얼굴이 디스토피아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조지 오웰의 『1984(정희성 옮김, 민음사. 2003, 1949, 444면 분량)』는 디스토피아 문학의 대표격으로 <우리들(1922)>, <멋진 신세계(1932)와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다. 책이 나온 1948년에 설정한 미래 시점이 아주 먼 미래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변화는 급진적일 수 있고 회복 불가의 낙인이 절대적일 수 있다는 경고를 소설은 잘 보여준다. 조지 오웰은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며 계급의식을 풍자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탁월하였다. 소설가이자 언론인, 비평가로 십 칠년간의 본격적인 작가 생활 중 마지막 작품인 『1984』는 그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된다.
소설 속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작가가 구축한 디스토피아다. 오세아니아는 무엇보다 선명한 계급사회로 인구의 2퍼센트도 안되는 지배 계층인 내부당, 18퍼센트를 차지하는 지식인층인 외부당, 나머지 85퍼센트는 프롤이라 불리는 노동자 또는 최하층 무산계급으로 구성된다. 과거와 철저히 결별 할 뿐 아니라 해체하고 무화시키는 곳, 희망을 차단당하고 욕구를 무력화하는 전체주의 감시 사회는 다양한 요소들의 공조로 흔들림 없이 지탱된다. 포스터 속 눈동자는 감시카메라 기능을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라는 글로 재차 강조한다. 영원히 끌 수 없는 “텔레스크린”은 영원한 세뇌를 장담한다. 슬로건과 신어는 시스템의 근간이다. 그 장치들이 어떻게 발명 되었는가 이의를 제기하고 여정을 추적하고 답변을 요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잃었다. 시스템의 하위구조, 쳇바퀴의 부속품인 인간은 전적인 수용과 참여로 유일하게 허용된 삶의 방식을 따른다.
다만 윈스턴 스미스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가 시작하려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p.16)이다. 일기쓰기는 유익은 찾기 어렵고 위험은 분명한 행위다. 그에게는 마침 구입해둔 노트가 있었고, “이 분 증오”를 기억하기 위해서 쓰기를 선택했는데 무의식중에 페이지를 채운 글은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로 이는 사상죄에 해당한다. 사상범들은 밤중에 사라지고 등록부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그에 관한 모든 기록도 삭제”되어 결국 “증발”(p.33)한다. 조작과 증발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진리부 내의 기록국에서 일하는 윈스턴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인간이 소외되는 기록국의 광경은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업무공간을 연상케 한다. 그의 일터는 오세아니아의 시민들,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에게 “그에 알맞은 수준으로 낮춰서 되풀이”(p.63) 제공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정보를 생산한다.
2부의 기록은 사상경찰이라고 오해했던 줄리아와의 조심스런 밀회로 방향을 전환한다. 당의 강령에 관심이 없는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오로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그들이지만 함께하기 원하기에 둘만의 사생활을 누리고 싶다. “그것은 일부러 무덤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았”(p.198)으나 게의치 않는다. “그런데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이 개조시킬 수 없듯 그들 또한 사람들의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p.236)는게 윈스턴의 확신이다. 그는 자신과 동일한 입장이리라고 여겨왔던 오브라이언으로부터 형제단에 초대받는다. 비밀리에 넘겨받은 “그 책”은 조작된 세계를 설명하는 치밀한 지침서로 슬로건과 사회 구조, 빅 브라더 밑으로 내부당과 외부당, 프롤이 어떤 역학관계로 존재하는지 설명한다. 윈스턴은 새로운 가능성에 거의 근접했다고 여겼다. 적시에 필요한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의심치 않았다. 희망은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에게 있다고 다시금 확신하는 그때 새로운 대결, 막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카뮈식 인간조건을 윈스턴도 따르고 있었다. 그는 기록하는 자, 즉 깨어있는 자였고, 사랑하기 원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지켜냄으로 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는 조작된 인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이중사고에 속지 않는 인간이기를,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도 독자도 비참 끝에 납득할 만한 결실을 기대했으나 작가는 다른 결말을 준비한다. 분량상으로 간결하고 내용상으로도 단순한 3부는 과도할 정도의 구체적인 묘사로 윈스턴이 전 생애애 걸쳐 지켜내고자 했던 희망을 부순다. 작가가 형상화한 1984년에서 다시 40년이 지난 현재, 소설 속 많은 부분이 현실로 평행 이동하였음을, 그를 넘어 합동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은 바늘 하나 떨어질 틈 없이 치밀하기에 경고는 더욱 섬뜩하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오히려 윈스턴의 상황과 심정을 가늠케 만든다.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허구가 아닌 지금도 진행중인 상황을 전달받는 듯하다. 희망은 무산계급에만 있다던 그의 믿음은 좌절되었다. 책은 여전히 묻고 있다. 왜 그들은 양은냄비와 같은 사소한 시비에만 사로잡히는지를. ”그런데 왜 그들은 좀 더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그 같은 함성을 지르지 않는 걸까?“(p.100) 그리고 의식이 없다면 반란 또한 기대할 수 없다고 답한다. 어디서부터가 감시 내 상태였을지, 처음부터였다고는 믿고 싶지 않고 소설이야, 라고 덮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다. 작가는 마지막 작품,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 <신어의 원리>를 실었다. 사람을 규정하는 건 그가 쓰는 언어다. 그가 쓰는 말이 곧 그 사람이기에 생각을 규정하고 말을 왜곡하고 기록을 금지하고 검열하는 일은 가장 두려운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미래인에게 남기는 공개된 밀서와 같은 작품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실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큰 것은 못 보고 작은 것만 볼 줄 아는 개미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기억은 상실되고 기록은 날조되어 가는데도 인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었다는 당의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주장을 반박하거나 검증할 기준이 없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p.131)
“그건 단지 소극적인 것보다는 적극적인 것을 택했으면 하는 심리가 작용한 탓이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어. 하지만 같은 패배여도 더 나은 패배가 있는 법이야.”(p.192)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삑한 일인지도 납득하지 못할뿐더러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공적인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 파괴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무지로 인해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p.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