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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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문학동네은 연주회에서 들었던 바흐의 푸가가 주요 집필 동기로 작용해 1947년 초판 발행 후 음악, 연극, 시청각 자료 등 다양하게 변신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은 대표작이다.(152p) 대중 뿐 아니라 명사들의 찬사 또한 이어지며 전무후무한 글쓰기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독특한 타이포그래피로 저자와 제목이 단순하게 표지를 채우는데 반해 띠지는 시선을 사로잡는다. 1928년에 찍은 레몽 크노의 연속사진이라는 설명을 본 후, 그보다는 뒤쪽의 사람은 글을 쓸수록 달필가가 된다.”는 인용문이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격려로 다가오면서 용감하게 책장을 넘긴다.

 

문체 연습은 본문과 해제가 거의 동일한 분량을 차지한다. 그만큼 해제가 탄탄하게 실려있다. 늘 차례를 주의 깊게 보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급한 마음에 첫 번째 글 약기부터 읽기 시작했다. 세 네 편이 넘어가니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각주가 없음에 불안해하며 사전을 찾아 빈 공간에 용어설명을 적어 넣다 보니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읽던 도중에 해제를 발견했다. 이제 치밀한 해제가 있으니 안심하고 읽어나가도 된다.

 

기시감은 스토리텔링 연습(매트 매든/클라우드 나인)” 때문이었다. 몇 해 전에 읽고 이렇게 매력적인 책이 있다니 감탄하면서 중학생 친구들 논술에 활용했었다. 친구들아, 마법같지 않니? 제목을 줄테니 내용을 각자 만들어보자. 여덟 컷 만화 형식이라 그림이 많잖아? 하며 함께 탁월한 발상과 표현을 신기해 했었다. 다시 펴보니 이 책은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에서 영감을 받았다.(스토리텔링 연습, 4p)”는 문장에 밑줄을 치며 아, 레몽 크노라는 훌륭한 분이 계셨었구나 하고는 지나간 것이 기억난다.

 

스토리텔링 연습에서는 조작되지 않은 기준점이 되는 버전을 템플릿이라 지정하고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기준글을 찾아야 한다 생각했고 당연히 첫 글 약기라 여겼다. 해제를 보니 반은 맞았다. “약기와 더불어 객관적 이야기가 토대이야기이자 저본이라 밝히고 있다.(183p) 토대 글을 가지고 주어진 각 제목에 최대한 근접하게 써보고 작가의 글과 비교하는 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만 쉽지 않았고 시도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속출했다. 일단 주어진 글을 이해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계속 도전할 수는 있겠다.

 

뒤가 사라졌다’, ‘고유명사’, ‘고문투로’, ‘집합론’, ‘수학적으로등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웃음을 참으며 읽어야 하는 때도 있다. 낭독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번역하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역자의 주관적 해석이 많은 부분 스며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내내 들었는데 해제에서 궁금증은 대부분 풀린다. 원제와 원제의 의미, 번역어 선택 이유 뿐 아니라 번역의 의도와 착안, 진행방식까지 보여준다. 게다가 특별한 주제는 특별한 전문가의 검증도 있었기에 신뢰를 더한다. 어쩔 수 없이 원어로 읽을 독자가 마냥 부러웠다. 그래도 가장 즐겁게 읽은 곳은 역자 후기격인 번역가와 편집자였다. “문체 연습의 어투를 살려 , , 눈물, 으쓱함가득한 번역의 시간’, 몰입의 지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이 책을 한 번 본 후 과연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계속되는 질문, 해야 할 연습에 내내 적응해 나가는게 맞을 것 같다. 그렇게 한 번을 살펴보고 나니 띠지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음악으로 접한 변주의 힌트를 그는 글은 물론이고 자신의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떨지 말고 이렇게 해봐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크노가 펼쳐 낸 저 소박하고 수공업적이며 재미난아흔아홉 개의 놀이가 문체 연습에 바글거린다.(159p)” 유일한 정답은 없고 모든 시도는 가능하다. 아마도 뜻밖에 만난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을 오래도록 아끼고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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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기예르모 데쿠르헤즈 지음, 윤지원 옮김 / 지양어린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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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은 아르헨티나 작가 기예르모 데쿠르헤즈의 국내 소개되는 첫 작품입니다. 커다란 판형에 그림책이라기에는 꽤나 묵직한 부피감이 전해집니다. 초록 풀밭과 차 문을 열어놓은 채 화분을 내리는 듯한 여인, 또 무심코 어딘가를 응시하는 아이의 표지 그림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게 만듦니다. 표지의 특징은 목적을 가진 어떤 활자도 없이 책날개를 온전히 표지에 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펼쳤을 때 화면 가득한 초록 숲의 어떤 자리로 초대받아 들어가는 기분이 듭니다.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고풍스런 벽지를 연상시키는 면지를 지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엄마, 내 친구들은 이제 휴대전화 속에만 남아 있어요.

-친구들은 네 마음속에 남아 있단다, 로렌조. 저장 용량도 마음이 휴대전화보다 훨씬 크지!“

잠시 머무르게 하는 첫 문장입니다. 이사온 새 집에서 커다란 책상을 본 로렌조는 신기해 합니다. 여기 저기 열어보던 중 발견한 노트를 펼치는 순간 책 속의 책이 시작됩니다. ‘청동 드래곤이라는 제목을 보고 예상 가능한 내용을 열심히 상상한 후 책장을 넘겼는데 상상 너머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아이들의 마음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변신놀이일 수도 있지만요. 로렌조는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기로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장화와 모자입니다. 책 속의 노트는 노란 바탕으로, 현실은 초록 배경으로 차이를 주고 판타지 세계와 현실 세계가 자연스럽게 왕래합니다.

 

첫 이야기에서 는 토끼였는데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고양이입니다. 평소에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우연히 위험에서 구해주네요. 그런데 노트를 덮고 엄마의 심부름을 위해 가게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이 낯익어요. 글로 읽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마법처럼 변주되고 로렌조는 집없는 개 휴고를 만나 친구가 됩니다. ‘공장은 조금 더 생경한 광경을 보여줍니다. “겁을 집어먹은 공장장은 달아났지만, 우린 피할 수 없었다. 둥지에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면 일을 계속해야 했다.” 무시무시한 컨베이어 벨트와 더 이상 맞지 않는 내 연장과 어둠. 상징은 깊어집니다. “꿈의 여행자그레고리오?”를 지나면 모든 이야기의 비밀이 감동적으로 풀리고, 성장하고 살고 선물하는 인생의 아름다운 순환을 지켜보게 됩니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욱 빛나고 과정이 이미 꿈의 실현임을 말합니다.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는 상징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의미를 간직하기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해주는 멋진 작품입니다.

    

 

나는 누가 구해 주기를 바랐던 게 아니라, 발견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다시 깊은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그는 내 안에서 다시 솟아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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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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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의 “백치(열린책들/김근식옮김)”는 그의 5대 장편소설 중 하나로 “죄와 벌” 다음에 발표한 작품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창조한 인물 중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세 인물로 죄와 벌의 소냐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샤, 그리고 바로 백치의 미쉬낀 공작을 드는데(죄와 벌2/문학동네450p), 미쉬낀 공작이라고 확정하기 전 이름이 ‘그리스도 공작’이었다는 점에서도(946p) 작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치료를 위해 후원자의 도움으로 스위스에 머물던 미쉬낀 공작이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우연과 필연이 겹치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들이 관계를 맺고 각자의 목적을 향해 움직일 때의 파장과 현상을 사건의 중심인물로서, 때론 관찰자이자 중재자로서 그려보인다. 공작의 정체성이기도 한 육신의 병, 간질은 그의 약한 고리이지만 순수하고 선한 마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것은 물론 본능적 자기방어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를 기꺼이 내어주는 조건 없는 헌신 앞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평안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낀다. 사랑하면서도 자신은 결코 그럴 수 없기에 미워지는 양가감정의 충돌을 경험한다.

 

뻬쩨르부르그 행 기차에서 세 사람은 우연히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레프 니꼴라예비치 미쉬낀 공작은 스위스에서 간질 치료를 하던 중 후원자의 죽음으로 예빤친 장군의 아내이자 유일한 공작의 먼 친척 리자베따 쁘로코피예브나를 찾아보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가는 중이고 빠르펜 로고진은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에게 빠져 아버지의 돈을 탕진한 이유로 심기를 건드려 피신해 있다가 아버지 사망 소식에 유산 상속을 받기 위해,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자신의 이익을 쫓아 분주히 웃음 짓거나 등 돌리거나를 반복하는 레베제프까지 여행의 목적을 나누며 서로를 기억하게 된다.

 

유일한 친척인 리자베따 쁘로코피예브나를 만난다는 목적을 위해 예빤친 장군의 집을 찾아간 미쉬낀 공작은 장군 부인과 그의 세 딸을 만나게 되고, 그 중 집안의 우상이라고도 할 만한 막내 아글라야는 매사에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관철시킴으로 미진함을 남기지 않고자 하는 성격이 눈에 띈다. 이볼긴 퇴역장군의 아들이자 예빤친 장군의 비서인 가브릴라와도 첫 대면을 한다. 미쉬낀 공작은 지병의 잦은 발작으로 거의 완전히 백치가 되었으며(49p) 사람들 또한 그를 으레히 얕보지만 시간을 함께 보낼수록 공작을 다른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아끼게 된다.

 

공작의 주변에는 불안요소가 끊임없이 출현한다. 전투적 행동력에 있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드미트리를 연상시키는 로고진은 집요한 열정, 강한 소유욕으로 대변되며 일면 ‘그루셴카-드미트리’구도를 ‘나스따시야-로고진’에게서 찾아보지만 그러기에 드미트리의 순수함과 밝음을 로고진에게서 발견하기 힘들다. 여인들에게서도 물론 간극이 크다. 로고진은 질투와 적개심에 사로잡혀 숨어 헤치려는 자다. 그에 머물지 않고 급기야 몸을 드러내 헤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한다.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의 절세미모는 자신에게 독이 된다. 처음 사진을 본 미쉬낀 공작의 ‘기가 막힌 미모군요! 이 여자의 운명이 평탄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81p)’라는 말이 복선처럼 깔린다. 장군 부인이 이런 얼굴을 좋아하느냐 공작에게 물었을 때 그는 좋아한다 답하며 ‘이 얼굴에는······많은 고뇌가 담겨 있어요······(129p)’ 라는 이유를 댄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는 드미트리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생각하며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했는데 그 장면이 떠올랐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권력 있는 양육자 또쯔끼에게 키워지고 상처받음으로 그를 비롯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원하는 자들에게 복수하는 것, 나아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것, 구원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그녀의 동력인 것 같다.

 

뻬쩨르부르크 도착 첫 날 저녁, 나스따시야는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생일파티에서 가브릴라와의 결혼 여부를 발표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양심에 반하는 자기만의 비밀을 돌아가며 털어놓는 프티죄 게임을 하는데 각각의 일화가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냄으로 악한 행위까지도 놀래키는 동시에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프티죄 게임의 마지막 당사자로 나스따시야는 자신의 결혼여부를 발표한다. 나스따시야의 최선을 다한 총정리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신의 오랜 고통을 드러내고 주변인들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새로운 시작을 갈망한다. 10만 루블을 불구덩이에 던지며 가브릴라를 시험하는 장면도 놀랍다. 그녀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으로 안식을 얻지 못한다.

 

도스또예프스끼답게 등장하는 인물이 소모적으로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 남녀 주인공 이외에도 가브릴라, 바르바라, 니콜라이 삼남매, 니콜라이의 친구인 이뽈리트, 레베제프 등의 전형을 직접 분석한다. 특히 4부 1장의 “유형적인 면에서나 성격적인 면에서 한마디로 어떤 인물이라고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707p)’로 시작하는 부분 부터는 심리분석과 인간 전형을 설명하며 소설 속 캐릭터의 작법과 기능까지 강의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인상 깊었던 양파 한 뿌리나 천 조 킬로미터 에피소드처럼 독자를 집중시키는 삽화들도 곳곳에 등장한다.

 

총살형 직전 사면령 번복에 ‘정말이지, 인간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42p)’라는 말로 작가의 경험을 작품 속에 각인하는데 이런 폭력이 그 순간 이후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이라는 형벌일 수 있음을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는 듯하다. 마리 이야기부터 레베제프가 대기근 시기에 식인을 했던 수도사와 양심의 문제, 이뽈리트의 ‘해명’과 왜곡된 감정, 종교적 논점들, ‘고도의 예술적 모조’임을 아직 모르고 매혹을 느꼈던 공작의 사교계 데뷔 장면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공작은 말한다. ”나는 나무 옆을 지나가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뭘 보고 다니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아, 내가 모든 걸 표현해 낼 능력이 없음을 한탄할 따름입니다······(중략) 어린아이를 바라보세요, 신이 선물한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세요. 풀잎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바라보세요. 당신을 쳐다보며 사랑하고 있는 눈을 바라보세요······.(851p)“

 

 나스따시야만큼 아름답지만 상처는 없는 아글라야, 그녀는 미쉬낀 공작과 미래를 함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전개가 시작된다. 아글라야와 나스따시야의 만남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공작의 행동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지만 한 마디를 남긴다.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나스따시야는 반드시 죽었을 겁니다.(896p)” 이정도면 여기서부터는 순조로운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멈추지 않는다. 내가 오랜 시간 두려워 했던 문학 속 장면은 "죄와 벌"의 노파 살해 장면이다. 라스꼴리니코프의 회상 속에서는 더 소름끼치게 재현되었다. 그 장면을 연상시키기에, 무더운 백야의 뻬쩨르부르크, 밀실처럼 작은 방에서의 만져질 것 같은 현실적인 공포가 심장을 옥죄었다. 하지만 단순히 ‘두려움’이라는 하나의 감정일 수는 없고 각 인물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가며 허무함과 깊은 슬픔이 함께 차오른다.

 

“공작은 갑자기 깨달았다. 이 순간과 더불어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 왔고,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았으며, 반갑게 받아 쥔 이 카드가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937p)” 더 늦기 전에 내가 해야 할 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해내야 한다는 경종을 울리는 문장이다. 나스따시야에게 했듯이 로고진의 머리와 뺨을 쓰다듬어 주는 미쉬낀 공작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적 결말 앞에서 ‘왜 인간은 고통받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맹목적 자학이라거나 원래 성격이 거칠었어 라거나 그만 좀 하지, 멈출 수 있었을텐데, 너만 힘든게 아니잖아 등의 대답을 하는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런 말은 고통을 보탤 뿐이다.

 

어린시절의 상처는 흔적을 남기고 어떻게든 결과를 감당하게 한다. 내던져진 존재로서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받은 상처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모든 비극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의 첫 단추, 그 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만나게 되는 아픔을 떨치고 새로운 시간을 선택하게 하는 힘이 절실하다. 하지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공작이라 명했던 미쉬낀 공작을 작가는 정성껏 그려낸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그리스도를 닮은 세 인물 알료샤와 소냐, 미쉬낀 공작을 불러내 보고 싶다. 알료샤와 소냐에게 엿보이는 내적 충만, 미래에 대한 기대는 카타르시스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한다. 이에 반해 미쉬낀 공작은 가장 약한 자, 비난받는 자의 고통을 끌어안고 자신을 희생시킨다. 부활을 내포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희생 그 자체로 사랑을 실현한다. “인간이 서로에게 가하는 상처를 억제하는데 그리스도가 실패를 했듯이, 공작 역시도 실패작이다. 그러나 그는 그 상처를 자기에게 끌어들이려 하고 자신의 믿음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이미지를 안겨 주고 있다.(968p)” 책을 읽는 동안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고통받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사람에게, 약함이 악함의 겉모습을 취했을 때도 감추어진 본성에 초점을 맞췄던 미쉬낀 공작의 시선을 살필 수 있었고, 그가 관계 맺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법을 지켜볼 수 있었기에 그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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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가 영어 통달자가 되다
곽우영 지음 / 아마존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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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우영 박사의 피노키오가 영어 통달자가 되다(아마존북스)는 단순히 수를 보태는 또 한 권의 영어 학습서 같지만 특별한 비밀을 알려준다. 제목에서 말하는 영어 통달자는 누구나 이루고 싶은, 때론 늦은게 아닐까 불안해지기도 하는 소망이지만 이 책은 그 방법을 담고 있다. 바로 직독직해의 방법론이다. 많은 영어 강의에서 문장의 맨 끝으로 가서 역순행하는 독해를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몸에 벤 습관이 여전히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습관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 역시 올바른 행동 반복하기일 것이다.

 

피노키오가 영어 통달자가 되다는 영어 마스터를 위해 두 가지 행동을 함께 반복해보자고 권한다. 첫째는 문장이 쓰인 순서대로 직독직해 할 것, 둘째는 문장구조 분석이다.(11p) 영어 실력 상승을 위해, 또는 유학 전에 급하게 영어 준비를 하느라 영어성경 읽기를 선택하고 도움 받았다는 말을 들어왔기에 영어성경 읽기는 도전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에 있었다. 피노키오가 영어 통달자가 되다는 영어 성경 요한 복음을 텍스트로 선택하여 전체를 읽어나간다. 그래서 더 반가왔다.

 

본문은 하나의 챕터가 요한 복음 한 장으로 절마다 끊어, 표기와 함께 실었다. NIV 영문성경 원문과 한글 성경, 영문성경 원문분석, 글자 색을 달리한 영문성경 문법 분석 순으로 진행된다. 영문성경 원문 분석이 직독직해 연습 부분인데 옆에서 짚어가며 이야기해주는 것과 같은 입말체라 이해가 잘 되고 읽을수록 속도도 붙는다. 분량을 정해 꾸준히 읽고 또 반복한다면 어느새 읽기 뿐만 아니라 쓰기, 듣기, 말하기까지 자연스럽게 실력을 쌓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저자의 오랜 경험과 열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교재라는 점에서 믿음이 가고 새롭게 영어공부를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이라 여겨진다. 이에 그치지 않고 4대 복음서와 계시록, 로마서까지 편찬 예정에 있다는 에필로그를 보고 그 이전에 좀 더 열심을 내어 직독직해 훈련을 해보아야겠다 마음먹는다. 영어공부 여정에 훌륭하고 꼭 필요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고 아이와 함께 도전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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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3
이반 부닌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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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부닌의 아르세니예프의 인생(1933)/문학동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5권 구성의 소설이다. 주인공 아르세니예프 알렉세이의 유년기부터 스무 살 청년기까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며, 작가의 일기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책을 쓰고 싶고, 이 책 속에 나의 영혼을 토로하고 나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 세상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미워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452p)”는 의지를 온전히 담아냈다. 프랑스에 망명해 러시아를 노래한 이반 부닌은 1983년 러시아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5권중 1권부터 4권까지는 연속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겪고 깨우친 평범하면서도 특별함을 간직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에 반해 5권은 두 번째 주인공 같은 리카와의 관계가 주로 그려진다. 아직 기록되지 않은 사실과 행위는 어둠에 덮여 망각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기록된 사실과 행위는 마치 생명을 얻은 것과 같다······(9p)” 첫문장은 작품의 필요충분조건이자 근거를 밝힌다. 되살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에서 시작해 모든 감각을 열고 배우고자 하는 어린 소년은 자연으로부터, 문학과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취한다. 풍뎅이와 제비 돌구유를 탐색하고 어렴풋한 느낌만 남긴 첫 번째 죽음과 맞닥뜨린다. 가족을 비롯해 인간관계가 넓어질 때도 각 인물의 원형을 작가의 삶에서 차용하기에 이야기는 느리지만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작가와 작품 인용은 넘치도록 풍성하다. 세상을 통해 작품을 확인하거나, 작품을 통해 삶에 깊이를 더하거나 순수한 열정은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교차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부딘의 문학적 취향이 고스란히 베어들어 함께 경청하다보면 찾아 읽어야 할 긴 도서목록을 얻게 된다. 그의 작품 해석을 엿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다. 후에는 방향을 달리했지만 부닌 속에서 만나는 톨스토이는 유독 감동적이다.

 

열린 관찰시기라 할 수 있는 유년의 시간에조차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이렇게 꾸밈없이, 솔직하게, 손에 잡힐 듯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열거법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아 오히려 마치 최면처럼 그 안으로 들어가 함께 경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또한 이토록 세밀하게 기록하는 마음, 무엇하나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을 마음, 몸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으며 썼을 순간을 상상하게 된다. 1편의 말미에 망각의 두려움을 자신의 것이었던 망아지에 빗대어 말한다. 그리고 이에 멈추지 않고 확장된 시선은 자신을 향하고 망아지를 잊었듯이 자신이 무엇을 망각할 것인지, 소중한 이들 또한 잊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바로 이날 저녁에 처음으로 나는 내가 러시아인이고 단지 카멘카에, 무슨 군, 무슨 읍이 아니라 러시아에 살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 거칠고 무시무시하지만 뭔가 매혹적인 러시아의 특성을 감지했고, 러시아와 나의 혈연관계를 느꼈던 것이다······(87p)“ ", 이 축제적인 것에 대한 러시아인의 영원한 요구여! 우리는 정말로 감각적이고 열렬히 삶에 도취되기를 갈망한다. 말하자면 단순히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삶에 도취되고자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술에 취하거나 발작적인 음주벽에 빠지고 싶어하고, 일상과 계획에 따른 노동을 정말로 따분해한다!(126p)” 조국 러시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곳곳에 급변하는 몰락의 징조와 그 안의 사람들을 말할 때 비판적으로, 때론 애정 깊은 안타까움으로 반복해서 그려낸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은 정밀화같이 그려지는 자연의 풍광, 기후, 계절 등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거칠고 광막한 땅의 느낌이, 혹독한 겨울 바람과 추위가, 봄날의 아지랑이와 새들까지 활자로 보지만 생생하게 느껴진다. 때론 소로의 '월든'이 떠오르기도 했다. 늙은 나무들의 아름다움은 이 고독의 침묵 속에서, 신성하고 축복받은 무익함 속에서 더욱더 경이로워 보였다. 하늘과 늙은 나무들은 나름의 표정, 나름의 형태, 나름의 영혼과 생각을 갖고 있다.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나는 정말로 다양한 나무들의 우죽과 가지와 잎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형상을 이해하고 통찰하여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두려고 그 아래를 오랫동안 돌아다녔다.(130p)" 극강의 감수성으로 정확하게 포착하고 표현함으로 순간은 영원이 되고 부닌은 글로 쓴 사진집이자 수채화의 페이지를 쌓는다.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레르몬토프와 하이네를 암송하던 십대 중반의 청소년기에도 마지막 대지주 귀족이었던, 아르세니예프 가문임에 자부심을 가졌던 아버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더 시간이 흘러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홀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만났을 때 스스로에게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아마도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마음을 누른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나는 언제나 후회하게 된다. 항상 아버지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인생, 특히 아버지의 젊은 날을 너무 몰랐다는 사실에 매번 죄책감을 느낀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 대해 알 수 있었을 때도 나는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442p)” 유년의 선물이기도 한 아버지의 서재에 그들은 함께 있다.

 

5권은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 여겨질 만큼 조금은 다른 분위기, 다른 결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아르세니예프가 성장함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 시기에 원하는 새로운 목표나 갈망 또는 기대하는 내적 성취라는 하나의 축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사랑이라는 또 다른 축은 헛도는 것처럼 그려진다. 아르세니예프의 행동은 무엇에 기반하는 걸까, 어리석음일까 자유일까. “나는 왜 즉시 ~하지 않았을까류의 얼마나 많은 후회와 한탄이 우리 삶을 채우는 걸까 마음이 아프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작 이십 세 라는 것이 놀랍다.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홀로 견뎌야 할, 또는 살아남아야 할 시간이 너무 많음에 난처해 해야 할지 그렇게 책을 덮는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연구했다고 해도, 당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365p)"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결코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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