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3
이반 부닌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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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부닌의 아르세니예프의 인생(1933)/문학동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5권 구성의 소설이다. 주인공 아르세니예프 알렉세이의 유년기부터 스무 살 청년기까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며, 작가의 일기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책을 쓰고 싶고, 이 책 속에 나의 영혼을 토로하고 나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 세상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미워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452p)”는 의지를 온전히 담아냈다. 프랑스에 망명해 러시아를 노래한 이반 부닌은 1983년 러시아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5권중 1권부터 4권까지는 연속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겪고 깨우친 평범하면서도 특별함을 간직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에 반해 5권은 두 번째 주인공 같은 리카와의 관계가 주로 그려진다. 아직 기록되지 않은 사실과 행위는 어둠에 덮여 망각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기록된 사실과 행위는 마치 생명을 얻은 것과 같다······(9p)” 첫문장은 작품의 필요충분조건이자 근거를 밝힌다. 되살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에서 시작해 모든 감각을 열고 배우고자 하는 어린 소년은 자연으로부터, 문학과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취한다. 풍뎅이와 제비 돌구유를 탐색하고 어렴풋한 느낌만 남긴 첫 번째 죽음과 맞닥뜨린다. 가족을 비롯해 인간관계가 넓어질 때도 각 인물의 원형을 작가의 삶에서 차용하기에 이야기는 느리지만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작가와 작품 인용은 넘치도록 풍성하다. 세상을 통해 작품을 확인하거나, 작품을 통해 삶에 깊이를 더하거나 순수한 열정은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교차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부딘의 문학적 취향이 고스란히 베어들어 함께 경청하다보면 찾아 읽어야 할 긴 도서목록을 얻게 된다. 그의 작품 해석을 엿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다. 후에는 방향을 달리했지만 부닌 속에서 만나는 톨스토이는 유독 감동적이다.

 

열린 관찰시기라 할 수 있는 유년의 시간에조차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이렇게 꾸밈없이, 솔직하게, 손에 잡힐 듯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열거법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아 오히려 마치 최면처럼 그 안으로 들어가 함께 경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또한 이토록 세밀하게 기록하는 마음, 무엇하나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을 마음, 몸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으며 썼을 순간을 상상하게 된다. 1편의 말미에 망각의 두려움을 자신의 것이었던 망아지에 빗대어 말한다. 그리고 이에 멈추지 않고 확장된 시선은 자신을 향하고 망아지를 잊었듯이 자신이 무엇을 망각할 것인지, 소중한 이들 또한 잊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바로 이날 저녁에 처음으로 나는 내가 러시아인이고 단지 카멘카에, 무슨 군, 무슨 읍이 아니라 러시아에 살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 거칠고 무시무시하지만 뭔가 매혹적인 러시아의 특성을 감지했고, 러시아와 나의 혈연관계를 느꼈던 것이다······(87p)“ ", 이 축제적인 것에 대한 러시아인의 영원한 요구여! 우리는 정말로 감각적이고 열렬히 삶에 도취되기를 갈망한다. 말하자면 단순히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삶에 도취되고자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술에 취하거나 발작적인 음주벽에 빠지고 싶어하고, 일상과 계획에 따른 노동을 정말로 따분해한다!(126p)” 조국 러시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곳곳에 급변하는 몰락의 징조와 그 안의 사람들을 말할 때 비판적으로, 때론 애정 깊은 안타까움으로 반복해서 그려낸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은 정밀화같이 그려지는 자연의 풍광, 기후, 계절 등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거칠고 광막한 땅의 느낌이, 혹독한 겨울 바람과 추위가, 봄날의 아지랑이와 새들까지 활자로 보지만 생생하게 느껴진다. 때론 소로의 '월든'이 떠오르기도 했다. 늙은 나무들의 아름다움은 이 고독의 침묵 속에서, 신성하고 축복받은 무익함 속에서 더욱더 경이로워 보였다. 하늘과 늙은 나무들은 나름의 표정, 나름의 형태, 나름의 영혼과 생각을 갖고 있다.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나는 정말로 다양한 나무들의 우죽과 가지와 잎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형상을 이해하고 통찰하여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두려고 그 아래를 오랫동안 돌아다녔다.(130p)" 극강의 감수성으로 정확하게 포착하고 표현함으로 순간은 영원이 되고 부닌은 글로 쓴 사진집이자 수채화의 페이지를 쌓는다.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레르몬토프와 하이네를 암송하던 십대 중반의 청소년기에도 마지막 대지주 귀족이었던, 아르세니예프 가문임에 자부심을 가졌던 아버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더 시간이 흘러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홀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만났을 때 스스로에게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아마도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마음을 누른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나는 언제나 후회하게 된다. 항상 아버지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인생, 특히 아버지의 젊은 날을 너무 몰랐다는 사실에 매번 죄책감을 느낀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 대해 알 수 있었을 때도 나는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442p)” 유년의 선물이기도 한 아버지의 서재에 그들은 함께 있다.

 

5권은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 여겨질 만큼 조금은 다른 분위기, 다른 결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아르세니예프가 성장함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 시기에 원하는 새로운 목표나 갈망 또는 기대하는 내적 성취라는 하나의 축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사랑이라는 또 다른 축은 헛도는 것처럼 그려진다. 아르세니예프의 행동은 무엇에 기반하는 걸까, 어리석음일까 자유일까. “나는 왜 즉시 ~하지 않았을까류의 얼마나 많은 후회와 한탄이 우리 삶을 채우는 걸까 마음이 아프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작 이십 세 라는 것이 놀랍다.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홀로 견뎌야 할, 또는 살아남아야 할 시간이 너무 많음에 난처해 해야 할지 그렇게 책을 덮는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연구했다고 해도, 당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365p)"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결코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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