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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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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 진은영 │ 그린비 │ 2014. 08



문학과 정치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둘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생활 속에서 책을 곁에 두는 사람이라면 삶과 함께하는게 문학이라 여길것이다. 반대로 정치가 나의 삶과 관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정치라는 단어가 피부에 와닿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는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문학은 삶의 희노애락을 노래하고 정치는 투쟁과 요구를 통해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문학과 정치를 삶 속으로 들여와야 한다. 그렇다면 책 '문학의 아토포스'는 어떻게 정치와 문학을 연결시킬까. 저자는 책 제목 속 '아토포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영감에 강제되어 자신에게 문학적으로 새로운 공간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러한 문학적 기투는 롤랑 바르트가 '아토포스'라고 불렀던 것을 닮아 있다. 아토포스는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토포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여기서 'a'는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로서, 아토포스는 비장소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어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그에게 붙여 준 것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비장소성이 사랑의 사건에 내재한다고 보면서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다"라고 말한다. 179


아토포스는 비장소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저자가 문학의 아토포스라 명명한것은 문학이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그곳이 어디건 문학을 통해 공간과 사랑에 빠지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은 2008년 이후 제기된 문학과 정치의 상관성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 철거를 앞둔 장소에서 낭송되는 시, 연대와 투쟁의 장에서 함께 읽는 자작 글들은 문학과 정치가 떨어져있는 것이 아닌 삶에 속해있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장소는 '문학'을 만나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한다. 계급의 차별, 자본의 논리가 담긴 공간이 문학을 통해 파괴력을 가진 창조의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현재 많은 시위 현장에서 문학이 낭송되고 사람들의 글이 널리 읽히는 건 바로 이 문학이 공간과 만나 발생하는 시너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과 정치에 대해 저자가 언급한 부분을 보자


예술은 예술적 영역이라는 제한된 감성적 새장 안에서 활동의 최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식의 자율성을 벗어난다. 그것은 "생산과 재생산 및 복종의 자연적 주기들에 순응하는 몸짓들과 리듬들의 기능성을 손상시킴으로써 감각적인 것의 지도를 바꿔 놓는다"라는 의미에서 현실로부터 자율적이지만 현실을 변형하는 허구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랑시에르가 말하는 예술의 특이성, 다시 말해 감성적 자율성이다. 감성적 자율성은 예술의 자율성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낡은 감각적 분배를 파괴하고 다를 종류의 분배로 변환시킴으로써 삶의 새로운 형태들의 발명을 동반한다. 이렇게 해서 랑시에르는 감성적 체제에서 예술로 식별되는 활동을 정치와 조우시킨다. 그에게 정치는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에 다름 아니다. "'감성적' 혁명이란 공동체의 상징적 공간에(또는 외부에), 즉 생산과 재생산의 '사적' 영역에 노동자들의 자리를 지정하는 식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26


저자가 소개하는 랑시에르의 견해를 보면 예술과 정치는 기존에 정해진 낡은 기준과 분배를 파괴하는 '감성적' 힘을 지녔다. 이 감성적 자율성으로 인해 파괴가 일어나고 새로운 분배가 생긴다. 예술이 가진 감성적 자율성이 정치의 감성적 혁명과 만나 새로운 길이 탄생하는 셈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어낸 딱 그만큼이다. 총 1,2,3부로 나뉘어 문학의 비윤리, 비장소, 비시간이 소개되지만 내가 읽어낼 수 있었던건 6장 문학의 아토포스 뿐이다. 언급되는 철학자와 문학가들이 익숙치 않아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의 이론이 머릿속에 뒤섞여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책이 아쉬운점은 모호하기만한 책의 관점이다. 읽는 내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책의 시작인 저자의 말부터 얕은 지식을 가진 나와 같은 독자들에겐 참으로 어렵고 난해한 글이었다. 만약 저자가 문학이 삶 속으로 들어와 호흡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바랐다면 이 책 역시 평범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써야했지 않았을까. 책 속엔 저자가 주장하는 문학과 정치의 새로운 혁명보다는 화려한 지식만 돋보이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이게 한국 문학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참 어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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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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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홍익희 │ 행성비 │ 2014. 08



서양의 역사는 결국 '종교'의 역사다. 서양사를 흔들어놓은 사건들을 떠올려보자. 십자군원정부터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 서양의 역사엔 '종교'가 깊게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종교라 한다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렇게 세가지 종교를 의미한다. 결국 이 세가지의 종교가 어떻게 반목과 대립을 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는 한가지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책 '세 종교 이야기'엔 각 종교의 탄생과 성장 과정이 소개된다. 이에 더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같이 현재에도 해결되지 않은 종교간 갈등 사례도 등장한다. 그렇기에 세 종교의 과거, 현재를 통해 나은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세 종교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종교는 유대교다. 수메르 문명이 타락의 길로 접어들자 하느님이 타락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그를 자신이 정한 가나안으로 보냈다는게 그 시작이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할례를 하고 제사를 지내며 유대민족의 축복을 약속받는다. 하지만 이후 이집트에서 유대인이 대거 노예가 되어 탄압을 받고 방랑의 시대를 살게된다. 고난과 탄압이 많아질수록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그들끼리 연대하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위해 투쟁의 삶을 산다. 가나안에 이미 살고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대립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대교가 이렇게 '하느님'만을 신으로 본다면 기독교는 그와 다르게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자 신이라고 믿는다. 또한 유대민족만의 종교가 유대교라면 기독교는 예수가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다. 둘이 가지는 입장 차이는 훗날 두 종교 사이의 반목과 분열의 계기가 된다. 특히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뒤 힘을 얻으면서 유대교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슬람교는 610년 무함마드가 창시한 아랍인 종교로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다. 결국 이슬람교 역시 유대교와 그 뿌리가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슬람교은 정치와 종교를 일원화하는 '신정일치'라는 특징을 가진다. 종교의 수장과 정치의 수장이 동일하기에 이슬람 세력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중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스페인, 인도 대륙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632년 무함마드가 죽으면서 이슬람교는 분열이 시작된다. 무함마드의 뒤를 이을 칼리프 선출에 대한 입장 차이가 종파 분열을 가져온 것이다. 이슬람교엔 가장 큰 종파인 수니파, 그 다음으로 큰 분파인 시아파 등 다양한 종파가 존재한다.


이 세 종교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넘어 가장 관심있던 부분은 각 종교들이 부딪혀 낳은 반목과 갈등의 역사였다. 그중에서도 유대교는 한마디로 고난의 역사였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과정에서 이들은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그들만의 연대를 공고히한다. 유대교가 유대인이라는 민족에 국한된 점, 그리고 하느님이 자신들만의 유일신임을 주장하는 점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겐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또 유대인들은 특별한 가치관과 그들만의 연대 방식으로 막대한 경제적 부를 거머쥔다. 이역시 반유대교 정서를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로마제국의 유대인 박해, 이슬람교의 유대인 박해, 나치의 대학살 등 유대인의 역사는 탄압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유대교는 반목과 갈등을 조장하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중동전쟁이 시작됐다. 이후 1988년 팔레스타인이 독립을 선언했지만 2003년 이스라엘이 두 나라의 접경지대인 가자지구를 공격하면서 두 나라의 전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 집권 세력은 광신적 시오니스트로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자비한 공격을 일삼고 있다. 한편 종교 내에서 반목과 갈등이 나타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슬람교의 경우 분열된 종파 내에서 벌어지는 내전으로 현재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선 수많은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책은 묻는다. 진정 '종교'가 나아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수천년간 종교 내,외의 반목과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참혹한 현실이다. 한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가 자신만이 옳음을 내세우고 무력으로 굴종시키는게 옳은 일인가. 또한 이슬람교와 같이 내부에서 분열돼 서로를 죽여도 되는 것인가. 저자는 책을 통해 역사는 자신과 다른 입장이 모두 틀렸다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할때마다 쇠퇴의 길을 걸었다고 말한다. 책 '세 종교 이야기'가 들려주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언해준다.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는 '종교'의 의미도 미래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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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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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 07





바야흐로 뉴스의 시대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인터넷 발달은 어디서나 손쉽게 실시간 뉴스를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각종 포털사이트는 클릭수가 높은 기사를 상위에 배치하고 실시간 검색어가 뜰때마다 자극적 기사들이 쏟아진다. 눈만 뜨면 세상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을 알 수 있는 시대, 그래서 넘쳐나는 뉴스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시대가 지금이 아닐까 싶다.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이 뉴스의 시대를 살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현대 사회가 뉴스를 '종교'로 여긴다 말한다. 그에 따르면 뉴스의 작동원리는 종교와 닮아있다. 혹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뉴스를 확인하는데 사용하고 있진 않은가? 종교 의식처럼 아침,점심,저녁으로 대수롭지않게 뉴스거리를 찾고있진 않은가? 이런 태도는 근대가 들어선 이후 종교가 빠져나간 자리를 뉴스가 채웠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언론의 위력은 그 어느때보다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본론은 정치, 해외, 경제, 셀러브리티, 재난, 소비자 정보 뉴스로 나눠 그 성격을 살펴본다. 이들 뉴스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경향이 강하며 자본주의의 순환을 돕는 성격이 강하다. 정치의 경우, 권력을 쥔 집단이 화제를 돌리고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넘쳐나는 뉴스거리를 만드는가 하면 편향된 시각의 기사를 쏟아내기도 한다. 경제 뉴스가 투자자들을 위한 기사이며 압축된 수치화를 통해 인간 개개인의 삶조차 압축해버린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굳이 몰라도 되는 셀러브리티의 기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제된 욕망을 들추고 대리만족하게 만들고 재난 뉴스는 지금 이순간 자신이 별탈없이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는 역할도 한다. 이렇게 뉴스안엔 복잡한 욕망과 목적이 뒤섞여있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을 통해 뉴스가 현대 사회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이는 중요한 관점이다.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뉴스에 어떻게 현대인이 종속되어있는지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아쉬움도 남는다. 분야별 뉴스의 성격을 살펴보는데 책의 많은 부분이 치중되어있다는 점이 아쉽다. 물론 뉴스의 성격을 꼼꼼히 따진다면 범람하는 기사들을 추스리고 쳐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건 어떤 시각으로 뉴스를 접하냐의 문제다. 이는 현재 한국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권력을 대변하는 언론, 방송이 범람하는 지금, 어떤 목적으로 기사를 만들고 뉴스거리를 만드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뉴스를 읽는 사람의 머릿속엔 어떠한 판단도 없이 뉴스가 들어온다. 비판과 의심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뉴스 읽기는 아무 소용도 없다. 


또 기사를 쓰는 기자 역시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만한다. 저자는 각종 사건 사고 뉴스가 그저 자극적인 뉴스를 쏟아내는데 급급하기보다 그리스 비극의 한 작품처럼 사건과 사람을 촘촘히 엮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을 통해 뉴스는 종이쪼가리를 넘어 하나의 '얻음'으로 다가온다. 결국 뉴스를 만드는 사람과 뉴스를 읽는이 모두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클릭수 높은 자극적인 기사보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고 진실을 알 수 있는 기사를 읽어야 한다. 그런 독자가 많아진다면 뉴스 역시 조금은더 인간의 삶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유난히 인터넷신문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명언이 떠올랐다. "보여주는 걸 믿지 말고 스스로 볼 수 있어야 한다"  


 by 슈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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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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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展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 07





"내가 먹는게 나다." 치킨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은 치킨이다.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를 담아낸다. 그에 더해 요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2014년 한국 사람이 곁에 두고 함께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진 음식을 주로 먹는지 살펴 본다면 우리네 삶 역시 그와 비슷한 궤도를 걷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인의 대표 메뉴인 '치킨'에 대해 두루 살펴본다. 한국에서 치킨이 걸어온 길을 살펴봄으로써 그에 얽힌 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요소에 접근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치킨이 한국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건 1970~80년대다. 물론 이 시기엔 '통닭'이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84년도에 처음 KFC가 오픈하기 이전 기름에 튀긴 닭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메뉴였다. 물론 당시 월급에 비해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던 통닭은 고급메뉴였다. 전쟁을 겪고 어려운 시절을 지나온 한국인에겐 기름에 튀긴 닭은 잔칫날에나 볼 수 있는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40대 이상에겐 치킨이 하나의 향수로 남아있다. 물론 초기 한국 치킨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후라이드 치킨과는 다르다.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먹었다고 알려진 후라이드 치킨이 한국에 건너와 지금의 모습을 갖춘건 80년대가 와서야의 일이니까.


후라이드 치킨의 핵심은 바로 '튀김'이다. 많은 기름을 이용해 딥프라이한 닭을 튀긴게 후라이드 치킨이다. 물론 여기엔 닭에 묻히는 염지제와 파우더가 핵심이다. 이 두 가지를 거치지 않으면 제대로된 후라이드 치킨의 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프렌차이즈마다 그만의 염지법과 특별한 비법을 가지고 있다. 치킨이 유난히 프렌차이즈의 성격이 짙은데엔 이러한 요소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책 속엔 프렌차이즈별 치킨의 특징 및 마케팅이 소개되어 있어 다양한 한국 치킨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프렌차이즈 치킨집이 급증하기 시작한건 90년대 말 IMF가 터진 후다. 이후 2000년대 초엔 월드컵 붐을 타고 치킨의 인기 역시 껑충 뛰었다. 야구와 같은 스포츠를 보며 치킨을 먹는건 이젠 아주 당연한 일이 되버렸다. 늦은 밤, 스트레스를 풀어줄 야식으로 치킨을 찾는가 하면 불금엔 '치맥'을 외치며 기름진 밤을 보낸다. 기름에 듬뿍 담근 튀긴 맛에 달큰한 무는 환상의 짝궁이다. 모두가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 그리고 한껏 배부른 음식이 치킨 아닐까, 그렇기에 은퇴한 직장인들이 가장 눈여겨보는 사업 역시 치킨집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치킨사업은 결국 프렌차이즈이기 때문에 여기서 오는 문제점 역시 만만찮다.


치킨을 둘러싼 문제를 들여다보면 '갑의 횡포'를 만날 수 있다. 수많은 가맹점을 둔 프렌차이즈 회사는 자신들의 기술력을 앞세워 높은 창업자금을 요구한다. 점포를 연 뒤엔 본사에서 터무니 없는 판매량을 요구하거나 이윤이 남지 않는 무분별한 마케팅을 강요하는 등 '갑질'의 향연이 시작된다. 이는 책 뒷편에 소개되는 닭 사육 현실에서도 여실히 들어난다. 닭하면 떠오르는 브랜드인 '하림'의 경우 본사에서 각 종계장에 병아리와 사료를 공급하면 각각의 사육장은 이를 1.5kg 정도가 될때까지 키워 출하한다. 이 과정에서  하림은 높은 이윤 창출을 위해 양계 농민의 등골을 빼먹는다. 결국 치킨안엔 갑의 횡포로 얼룩진 한국 사회가 보인다.


그래서 책을 덮은 뒤 '내가 먹은게 나다'라는 문장이 마음으로 느껴졌다. 치킨이라는 음식안에 담긴 한국인의 정서, 애환 그리고 그 과정을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는 날카롭게 현실을 꼬집는다. 이윤창출을 위해 움직일 틈도 없는 공간에서 키워지는 닭, 그리고 그 닭이 프랜차이즈와 만나 치킨이 되는 과정은 지금 한국인의 삶과 참 닮아있다. '치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결국 이 문제는 우리 사는 세상을 어떻게 촘촘히 살펴볼 것인지를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남긴 마지막 문단은 유난히 따끔한 질책으로 다가온다.


" 그런데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맛있게 먹고 그걸로 끝인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면서 우리 또한 맛의 지옥에 갇힌 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늦은 시간까지 노동을 하고 그 노동의 고통을 치맥으로 달래다 결국 치킨집 사장님의 삶에서 내 미래를 간보고 있는 중이지 않은가. 오늘 한 마리의 치킨과 한 잔의 맥주가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


by 슈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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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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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 김희상 옮김 │ 2014. 06 │ 돌베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스포츠가 '축구'인 만큼 피파(FIFA)라는 이름은 참 친숙하다. 피파는 국제축구연맹으로 세계 축구 경기를 총괄하는 국제단체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월드컵이나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여자월드컵 등 9개의 국제대회를 직접 주관하고 국제경기를 지원 및 관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스포츠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피파가 단순히 세계적으로 축구 경기를 관장하는 협회 정도로 알 것이다. 나 역시 피파, 월드컵, 그리고 국가별 축구협회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에 축구를 그저 스포츠로만 봐왔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이면을 낱낱이 보여준다. 피파가 어떻게 월드컵을 개최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 및 거대회사를 상대로 노름을 벌이는지를 구체적으로 담아낸다. 저자인 토마스 키스트너는 스포츠 정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탐사보도 전문 기자다. 그가 말해주는 방대한 인물 정보, 사건 자료들을 읽고 있으면 피파라는 조직체가 어떻게 '마피아'로 변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피파의 시작엔 '아디다스'가 있다. 특히 아디다스를 창립한 아돌프 다슬러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는 피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선수들에게 무료로 운동화를 제공하면서 광고로 활용하거나 돈봉투를 줘가며 유명 선수 및 팀들을 적극 후원한 그는 탁월한 마케팅 덕택에 떼돈을 벌게 된다. 당시 경쟁사인 퓨마가 있었지만 갖은 편법을 동원해 아디다스라는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게 된다. 축구경기 및 올림픽에서 스포츠 브랜드가 노출될때마다 전세계 사람들의 지갑이 열렸기 때문에 그는 피파와 돈독한(?) 관계를 맺으려 노력한다. 그렇게 축구협회의 회장, 부회장, 사무총장 등 임원들을 매수하고 자신의 이익에 유리하도록 인사를 개편하는 등 그의 비리는 죽을때까지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노력으로 자신의 편으로 만든 수많은 제 2의 호르스트 다슬러가 지금까지 피파를 부패한 집단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피파라는 집단은 스포츠를 가장한 마피아 조직이다. 피파의 임원들은 스포츠를 사랑하고 축구를 사랑한다 열변을 토하지만 정작 관심있는건 '돈' 뿐이다. 뇌물을 받아가며개최지를 선정하고 글로벌 기업들에게 광고를 미끼로 천문학적 숫자의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국가별 축구협회 회장들에게 돈주머니를 꽂아줘가며 임원투표를 부탁한다. 호르스트 다슬러가 피파에 심어놓은 인물들은 그가 죽은 뒤 현재에도 피파를 움직이는 거물이 되어 있다. 74년부터 24년간 회장직을 독차지해온 주앙 아벨란제가 그렇고 그를 이어 현재 피파 독재를 펼치는 제프 블라터도 그렇다. 이들은 회장 선출권이 있는 각국의 축구협회 회장들에게 뇌물을 주고 몇십년간 회장을 해왔다. 그러는 동안 피파의 재정상태는 나빠지고 부패는 심해졌다.


저자 토마스 키스트너는 호르스트 다슬러가 피파와 만나면서부터 벌어진 부패의 역사를 책 한권에 무겁게 담아낸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피파 마피아의 비리가 궁금하다면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남아공 월드컵 당시 경기 티켓과 숙소 가격을 뻥튀기해 전세계 축구팬들이 얼마나 불편함을 겪었는지, 왜 2018, 2022년의 월드컵 개최지 선정을 동시에 했는지, 코카콜라는 어떻게 월드컵 마케팅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등 피파를 둘러싼 월드컵의 내막이 두루 소개되어 있다. 책 속에 소개된 수많은 피파 관련 인사들은 읽는 속도를 더디게 했지만 다 읽고 난 뒤 이것만은 확실해졌다. '피파'는 마피아 집단이다. 스포츠라는 이름을 팔아 큰 돈을 주무르는 국제적 마피아 집단이다. 그래서 혹여나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피파의 실상을 확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만 이들이 축구를 빙자해 구축한 마케팅에 속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용해 돈을 긁어모으려는 부패한 집단을 심판할 수 있다.


by 슈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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