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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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예술가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사물과 형상, 나아가 자신의 삶의 태도와 사유를 소박하고 순수하게 표현한 안규철의 에세이집이다. 그는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이란 제목으로 월간 《현대문학》에서 2010년부터 11년 간 연재해오고 있다. 그 첫 번째 책으로 2013년 출간된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의 후속작인 <사물의 뒷모습>은 2014년 1월호부터 연재한 글과 그림 67편을 엮은 것이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없어지면 없는 대로 살고. 자꾸 달아나는 것들을 달아나도록 놔두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상자와 서랍을 더 많이 만들어서 그들을 그 안에 가두기보다는, 할 수만 있다면 수도승들의 단정한 생활을 따라 해봐야 한다. 때가 되면 부르지 않아도 어느새 피는 꽃들처럼 사라진 것들은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니, 지금은 어지러운 책상 위를 깨끗이 치우고 언제 쓸지 모르는 잡동사니들을 내다 버릴 시간, 내가 먼저 그들로부터 달아나야 할 시간이다. p39~41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나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연필 끝을 통해 전해지는 켄트지의 촉감과 그것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거기서 허용되는 자유, 그 위에서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일 수 있고, 마냥 멈춰 있을 수 있고, 또 언제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사랑한다. 딱딱한 A4 용지에 볼펜으로 쫓기듯 써내려가는 공문서 같은 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가 거기 있다. p177~179

밤새 퍼붓던 비가 새벽녘에 그쳤다. 건너편 산자락은 아직 낮은 구름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젖은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을 새들은 부산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계곡의 요란한 물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어제 내린 비는 앞으로 여러 날 동안 그렇게 골짜기를 흘러 내려갈 것이다. 비가 오는 시간이 있고, 비가 가는 시간이 있다. 바위와 모래 틈 사이에 머무는 물방울들의 시간. 그 시차가 숲을 만들고 풀벌레를 키우고 새들을 먹여 살린다.
빗물이 곧바로 강과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 구석구석에 스며들며 순환의 시간을 지연시키는 동안, 나무와 풀과 들짐승들이 자란다.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이 종결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시간,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물방울이 겪는 숱한 우여곡절의 시간, 뜻밖의 급류와 흙탕물의 시간, 얼음처럼 차갑고 어두운 지하수의 시간, 누군가의 땀과 뜨거운 눈물이 되는 시간을, 우리도 빗물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p243~244 




'사물의 뒷모습'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며

책을 고르는 이유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왠지 끌리는 제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은

대부분 순위에 상관없이 구입하는 편이고

자주 인터넷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는 책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곤 하는데

베스트셀러라고 덜컥 사서 읽다보면

전혀 내 취향(?)이 아니어서 낭패를 본 경험이 반복되다보니

근간엔 장바구니에서 좀 묵혀두었다가 구입하는 편이다.

오래전 누군가가 ‘살아지더라’고 말했을 때, 내게는 그 말이 ‘사라지더라’로 들렸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이 한동안 실제로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들렸을지 모른다.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살게 되더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냥, 그저 그렇게, 조용히, 그날그날, 회환과 그리움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다가오는 시간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서 등등의 수식어가

붙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말, '살아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의례적이지만 반가운 인사를 건넨 나에게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 이 짧은 대답 속에서

질문하는 사람을 밀어내는 단호한 거부가 들어 있었다. 

괜찮다는 말, 어쩔 수 없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는 말,

그래서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니 어설픈 위로 따위를 듣지 않겠다는 말.

‘살다’ ‘살아오다’ ‘살아가다’ ‘살아내다’ ‘살아남다’가 아니라,

‘살아버리’고, ‘살아치우’고, ‘살아 없애’는 삶,

그래서 결국 삶 속에서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그런 삶.  p83~84



이책도 처음 추천도서코너에서 보고 북카트에 넣어두었었는데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통해 배달된 한 문장에

이 구절만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지더라...

사라지더라...


다시 읽어도 이 구절을 되뇌이게 되고

그후에 만난 비 이야기도 참 좋았다.

어느해인가 동생들과 여름휴가를 떠났는데

밤새 비가 내렸드랬다.

낮은 구름속에 가려진 산자락

비에 젖어 더 싱그러웠던 나무와 꽃들

맑은 새들의 노랫소리...


늘 바다가 그리웠었는데

오늘은 산이 그립다.

아니다 그냥 비가 그리운 것 같다.


정막이 싫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기다리던 비소식이 들린다.

물방울이 겪는 숱한 우여곡절의 시간,

누군가의 땀과 뜨거운 눈물이 되는 시간,

내일은 그렇게 

빗물처럼 살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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