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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평점 :
1995 년에 발표되었던 이 창래 작가의 데뷔작이다.
<척하는 삶>으로 이 창래의 작품 세계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을 했는데, 그것은 500 페이지 가까운 장편 소설 속에서 우리 문화와 우리의 역사적인 사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궁금했었고 그것이 작품을 읽게 한 동기 중의 하나였었다.
이 작품은 그 보다 좀 더 긴, 500 페이지를 훌쩍 넘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나, 박 병호, 미국으로 이민 간 부부의 이민 2세, 한국계 미국인, 헨리 파크이다.
작가도 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누구보다도 작품 속의 헨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겪었을 수도 있는, 동네 아이들의 놀림, 외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남의 나라에서 살아갈 때 맞딱뜨리는 남 다른 상황들 그런 것들에......
헨리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을 받았지만 늘 부모를 통해 한국을 느낀다.
어눌한 영어, 한국식 사고와 태도, 청과상을 하며 부지런히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책임을 다하는 아버지와 부엌에서 흘러 나오던 어머니의 한국 음식들의 냄새. 헨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아도 늘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릴리아 라는 미국 백인 여자와 결혼한 헨리, 그녀는 언어 치료사 이고 이민자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각 나라에서 이민을 온,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아이들의 언어교육, 구강 구조와 소리를 내는 입 모양을 보여주고 들려주기도 하며, 언어는 재미있는 것이다 는 것을 아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흥미로운 수업을 진행하려고 애 쓰며 그들의 발음을 교정한다.
28쪽
그리고 나는 발견했다. 그녀가 정말로 말을 할 줄 안다는 것. 처음에 나는 그녀가 지나치게 깍듯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녀는 단지 언어를 집행하고 있을 뿐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입은 어두운 집을 돌아다니며 불을 켤 수 있는 지점들을 점점이 또는 줄줄이 완벽하게 짚어내는 사람처럼 자신의 문장들 속을 휩쓸고 다녔다.
전체적으로 흘러가는 내용 속에는 그 나라 언어를 똑바로 말하지 못하는 이민자들의 방황이 묻어있다.
미국식 교육을 제대로 받고 대학도 졸업한 헨리이지만 말하지 않아도 풍겨오는, 미국 내부에 진입하지 못하고 경계에 서성이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미국인 아내가 있고 아들 미트가 태어나 자라고 있지만 완전한 융합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소설 전반에 흘러 넘치는 아들과의 추억, 아들을 통해 바라 본 이민자의 고충, 동네 아이들과의 사소한 인종적 다툼... 그 속에서 헨리 부부는 아들을 잃고, 부부사이도 냉각된다.
58쪽
어머니 속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서 어머니를 울거나 웃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뿐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든지 엄한 질책이나 오래 된 농담이나 한국어 말장난으로 어머니 얼굴의 평정을 깰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은 간단히 흘러가는 이야기의 전개가 아니다. 문장 속에 흘러 넘치는 단어들이 풍부하고, 섬세하다 못해 춤을 추듯 난립하기까지 해서, 머리 속에서 꼬이지 않으려면 나란히 줄을 세워 차근히 하나씩 입장 시켜야 할 정도다.
이런 점에서도 그의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영향도 클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고교생, 프린스턴 대학교의 필독서로 그의 작품이 리스트에 올라 있는 건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헨리가 하는 일은 의뢰받은 사람들의 배경을 조사하고 현재 상황을 알려주는, 스파이나 뒷조사를 하는 사람 같은, 사설업체의 요원이다. 한 정신과 의사의 정보를 보고하는 임무를 마친 후에도 그와의 일이 마음 속에 잔상들로 많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번에는 시워원인 존 강의 캠프로 들어가게 된다. 뉴욕 시장이 경계를 곤두세우고 있는 상태라서 강의 일거수 일투족이 언론에 비춰지는 상황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이방인 으로서의 삶이 주마등처럼 헨리의 머리 속을 지나고, 지난 날에 아버지 어머니가 미국인인 이웃간에 했었던 행동들, 존 강이 헨리에게 보이는 한국적 이미지들이 헨리의 눈을 통해 오버랩 되면서 부각이 된다.
89- 90 쪽
얼마나 나쁜 일이 생기기에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신경을 쓸까 궁금해 하던 기억이 난다. 마치 우리에게는 늘 모든 일이 괜찮은 것 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움직일 수 없고, 우리에게서 분노나 슬픔을 끌어낼 수 없는 것 처럼 멋지게 예의바른 태도를 꾸미고 다녀야 했다. 안 그러면 얼마나 나쁜 일이 생기기에 우리는 미국적인 것이면 다 믿고, 미국인들에게 감명을 주어야 한다고, 돈을 벌고, 한밤중에 사과를 반들반들하게 닦아야 한다고 믿고, 완벽하게 다림질한 바지, 완벽한 신용을 믿은걸까. 완벽해 지면서, 흑인들을 쏘면서, 우리 가게와 사무실이 불에 타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머니의 빈자리에 들어온, 한국에서 온 아줌마를 통해서 한국적인 상황, 미국인들처럼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살아서, 그저 아줌마로만 불렀고, 릴리아는 그것이 그녀의 이름인 줄 알고 있었다. 늘 신고 다니던 하얀 고무신을 작은 카누처럼 생긴.. 이라고 묘사한 부분도 인상적이기도 했다.
한인, 흑인, 남미인 군중들 앞에서 게릴라 식으로 즉석 연설을 하던 강, 군중을 휘어잡던 그 연설 전문이 끝나자마자 둔탁하게 뭔가가 폭발한다. 강을 보호하며 차 속으로 밀어 넣은 헨리에게 차창으로 보여지던 그의 입술이 고맙네 말하던 그것은 바로 한국어였다. 한 마디의 언어가 전달해 주는 동질감이 크게 닿아온 부분이기도 했다.
정치계에서의 강이 추락해 가는 그 과정 속에서 헨리는,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인으로서 진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여전히 경계선상 위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상태이던 그 마음이 강을 공격해 대던 그 군중들 속에서 주먹을 뻗어 날린다.
언어를 통해 바라 본 이방인으로서의 느낌과 그 속에 합류할 수 없는 그 미묘한 차이들, 한국적 정서와 이민자를 통해 바라 본 떠 다니던 마음들, 긴 장편 속에 어우러진 멋진 줄거리와 표현과 등장인물간의 갈등 구조는 소설을 이루는 주요 뼈대로써 일품이었다.
한국인인 덕분에 더 심오하게 느낄 수 있는 문장들은 외국인들이 이 책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일까 고 궁금한 쪽으로 슬며시 넘어 갔다. 시간을 널찍이 두고 음미하면서 읽어 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