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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과 서쪽으로
베릴 마크햄 지음, 한유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한 마디로 걸작이고 명작이다. 섬세한 묘사력, 박진감 넘치는 상황, 숨까지 죽이고 읽게 만드는 문장들의 집합이 아주 압권이다. 긴장감을 고조 시키게도, 숨 죽이게도 하는 높낮이 변화가 뚜렷하게 생겨날 만큼 인생 자체가 모험으로 가득차 있다. 고전은 약간 지루함도 포함하고 있기 마련인데 통상적인 고전에서 그 지루함만 제외하고 나면 바로 이런 작품이다 할 수 있을만큼 빼어난 고전스러운 작품이다.
베릴 마크햄, Beryl, 우리식으로 발음하여 베릴일테고 이 책 처음부터 90% 이상 베릴로 등장하지만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름이 벌, 이라고 나와서 순간 당혹하게 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이름은 벌, 이지 싶다.
이 여성작가는 그전에 내가 알지 못하던 시간 속에서는 무명이었지만 지금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에 내게는, 1936년도에 그녀 인생 최고의 시간을 보냈던 작가로서 기억에 남게 되었다.
"기억을 순서대로 불러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아마 베틀 앞에 앉아 길쌈하는 사람처럼 진득하게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리라." (18쪽), 라고 쓴 첫 문장이 왜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지를, 이 책을 읽어가면서 서서히 닿아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그녀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시절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설같은 그녀의 일대기는 소설처럼 이어가지만 소설이 아닌 자전적 에세이이다. 너무나 디테일한 묘사는 실제 상황처럼 닿아오는 느낌을 주었고 몇 가지 사건들은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살았었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었던 일이었다.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원주민들과 맨 발로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던 어린 시절, 개와 함께 멧돼지를 잡으러 떠나고 우연히 사자와 대면하던 그 순간,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 순간의 묘사는 숨죽이게 했고 글자를 따라가는 눈에 힘을 주게 했다. 사자의 관심을 따돌리려고 괜히 농담하고 웃으려던 전략을 짜고, 그러다 도망치고, 사자를 끝까지 쫓아간 개를 찾아내기까지의 그 과정은 독자를 그 현장 속에 있게 했다.
" 사자가 으슥한 골짜기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왔다. 사자의 앞다리와 턱아래의 살, 그리고 가슴팍에 벌건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는 외로운 사냥꾼이었다. 개인주의자. 고독한 약탈자. 흔들리던 꼬리가 멈췄다. 커다란 머리는 우리가 걷는 속도와 정확히 비례해 돌아갔다. 진한 사자 냄새, 노린내, 톡 쏘는 듯한, 말로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냄새가 코를 찔렀다." (141쪽)
사자를 마치 애완용처럼 집에서 기르던 가정에 방문했다가 그 사자에게 혼쭐이 나던 그 상황도 대단히 극적이었다. 또, 농장 사람들이 휘파람을 부르면서 불러 모으던 개들을 앵무새가 연습하여 마치 사람들이 하던 것 처럼 휘파람을 불어 개들을 불러 들였으니 그 앵무새의 말로는 상상할 수 있을까. 문명 세계, 도시 생활에서는 결코 벌어지지 않을 상황들이 그녀에게는 온갖 종류의 에피소드로 남아있었다.
아버지의 농장 시절, 마굿간에서 태어난 망아지를 받아내고 말을 훈련시키던 그녀, 극심한 가뭄이 찾아온다.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다. 열 다섯 살의 여자아이가 아프리카에서 살아갔던 그 시간들은 우리에게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말 조련사로서, 그리고 비행사가 되기 까지의 그 우여곡절들은 말로써, 글로써 다 표현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흔히 들어보던, 내 인생 글로써 쓰면 책 몇 권은 족히 나온다는 말처럼.
"이제 두려움은 사라졌다. 두려움을 극복해서도, 합리적으로 떨쳐버려서도 아니다.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믿음, 발밑 땅이 안전하게 있다는 합리적인 믿음. 이제 이러한 믿음은 나의 비행기에도 전이된다. 땅이 사라지면 믿음을 걸 만한 다른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은 땅의 영원한 속박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탈주다." (437쪽)
아프리카 상공을 날며 코끼리 떼를 관찰하던 그녀와 그녀의 비행기 에이비언, 사람을 구조하고 우편물을 나르던 그녀, 베가 걸을 타고서 바다 위를 날아가기 전 그녀가 했던 생각들. 결코 지루하지 않았던 삶이었다.
그녀가 살아왔던 그 순간처럼 우리들이 직접 경험해 볼 수 없었기에,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고 한반도를 운전해 가는 것 처럼 비행기를 몰고 바다 위를 건너간 그 시도와 결과가 그 시절 여성이 해 낸, 여성이 살아낸 순간치고 너무나 알차고 꽉 찬 인생이었음을 들여다 보게 된 책이었다. 너무나 안전하고 오히려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 하루하루가 덧없고 소모적인 시간의 연속으로 비춰지게 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빼어난 묘사력, 구성력, 표현력은 한 번 읽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문장들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 이 책을 읽고 작가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라고 했던 것이 어떤 심정의 발로였던지를 이제는, 아주 약간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