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으로 몇 킬로미터 이내에는 사람도 다른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언덕 하나를 올라서 숲 쪽을 살펴보는데 나무들 너머에서 오리들이 갑자기 쐐기 대형으로 날아오더니 제 머리 위를 지나쳤습니다. 오리들은 날면서 큰 소리로 꽥꽥거렸고, 저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을 영원히 제 안에 저장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날만을 생각합니다. 프로그램에 속하지 않는 뭔가를 경험했던 날. 모든 게 저만의 것이었던 날을요. - P164

나는 해뜨기 전 한 시간 동안의 어둠에 불과해요. 내 안의 도관들 속에는 별이 빛나고, 프로그램은 그 속을 빛처럼 흐르겠죠. - P167

당신이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건 당신 스스로 만든 거예요. 당신이 ‘발견했다‘, 알아냈다‘고 하는 지점은 당신의 원점이에요. 저는 파노라마실 창으로 <새로운 발견>을, 우리를 행복으로 중독시킨 그 계곡 안의 긴 물줄기를 볼 수 있어요. 그 행성 위로 별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속삭여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 하나의 이름을.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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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봐요, 우리 각자에게 나름의 프로그램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모두가 같은 프로그램인가요? 나는 프로그램의 발현 그 자체인가요? 나는 프로그램이 꾸는 태양의 꿈인가요? 나는 그저 고통일 뿐 다른 게 아닌가요? - P154

당신도 인간 아닌가요? 나 처럼요? 인간형 말이에요. 0과 1 사이의 깜박임. 당신도 삭제할 수 있고 재생할 수 있는 이 모든 설계의 일환이에요. - P156

제가 프로그램의 주조물입니까? 유리 속 장미 한 송이처럼요?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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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진짜라는 걸 확실히 압니다. 제가 만들어진 존재일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제가 저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 P114

‘당신에겐 공개적으로 지지 받는 완성작이 있고, 그다음엔 두 번째 작품이 있다. 새로운 작품, 아직 개발 중이면서 친숙해져가는 작품이다. 이 두 번째 작품은 지극히 성스러운 비밀과 같아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며, 모두 첫 번째 작품이야말로 당신을 정의한다고 생각한다.‘ - P118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6000호>에는 살아있는 것들이 우글거린다고. - P120

분명 위험할 테지만 난 앞으로도 그 계곡에 나갈 임무가 생기면 또 나가고 싶어요. 그 눈을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거든요. 그 눈의 기억을 내내 품고 있어요. 마치 떨어지는 그 눈송이 안에 나에 대한 어떤 이야기나 속삭임이라도 담겨 있다는 듯이요. - P128

하지만 저는 그녀를 잃었다는 사실에 정말 슬펐어요. 그날의 업무에 집중하면서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하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고, 피하고 싶은 또 다른 생각도 자꾸 하게 됐어요. 그녀와의 대화를 곧장 보고하지 않아서 제가 맡은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이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친구를 배신한다는 게 제 일터를 배신하는 것보다 더 혐오스러웠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세요. (…) 제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지금 이 우주선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이 제게도 있다는 의미라고 믿어요. - P138

전 지구에 돌아간 꿈을 꿔요. <6000호>를 타고 떠나기 바로 전날이에요. 슬픔에 잠겨 모든 감각이 깨어난 듯이 모든 게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요. 기지까지 걸어가는 숲길 위로 하늘이 파란 물처럼 빛을 쏟아붓고 있어요. 잎이 우거진 나무들이 있고, 여름 바람을 맞는 그 나무의 잎사귀들이 거울처럼 빙그르르 돌아요. 흙냄새와 따뜻해진 아스팔트 냄새가 나고, 짐승과 새들의 소리가 들려요. 교차로를 지나는 차들의 소음,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과 귓속에 울리는 바람 소리, 커다란 태양을 향해 입을 벌리면 입속에 담기는 햇빛. 마치 모든 것이 제 안으로 스며들어 안에서부터 저를 찢어 여는 것 같은데, 그건 아주 느린 파열이고, 저는 마치 한 조각의 음악으로 변하는 기분이에요. - P148

아무리 애를 써봐도 저는 이 우주선에서 전과 같은 삶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스스로를 잃었어요. 제 두 손은 매일 흙을 깊이 파고 싶어해요. 그 확실한 품속에 제 몸을 내리고, 땅이 제 죽음을 받아들여 저를 품어줄 수 있게요.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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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여전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점심시간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기 시작한 것이 그 직후였다. 가면 대체로 한 그림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매 주 새로 그림을 골랐다. 아버지의 행방은 단서조차 찾지 못한 채 사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계속 이런 방식으로, 한 번에 하나씩 그림을 본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 바라보다 보면 그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라지곤 했다. 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다른 그림으로 옮겨 가기까지 서너 달은 기본이고 일 년이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동안 그 그림은 내 삶의 물리적인 거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거처가 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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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선 제게 자연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거대한 질문처럼 느껴지는 데다가, 모든 얼굴이 공백이에요. - P91

이걸 ‘조종‘이라고 생각하게 되진 않네요.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 아래를 나는 게 아니라, 잠들어 있는 무한의 공간을 통과하잖아요. - P94

‘제가 꺼졌을 때 제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확신해요? 꺼진다는 건 저와 같은 부류의 죽음에 해당하도록 당신들이 발명해 낸 개념이죠. 의식이 없는 상태 말이에요.‘ - P95

이제 나는 상급 직원이 아니라 그냥 늙은 직원이라서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데, 그건 극도의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해. 마음속으로는 언덕 위에 사는 거지. - P101

기억나는 건 이런 것들이야. 목욕탕에 비누가 하나 있는데 갈라졌어. 갈라진 데가 어찌나 깊이 파였는지 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야. 그 패턴을 보니 몸서리가 났어. 사실은 이상하게 화가 좀 나기도 했어. 아무 법칙도 없는 패턴이었거든. 부엌 찬장을 기어올라 유리병에서 흐른 과일시럽에 모여들던 개미들이 기억나. 바닥에 떨어지면서 좌라락 소리를 내던 구슬들도 기억나. 똑같은 형태야. 법칙 없는 패턴으로 반복되거나, 내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법칙으로 반복되는 형태. 가끔은 그냥 기분이 나아지기 위해 그 비누를 쪼개버리고 싶었어. 아니면 흩어진 구슬 사이로 발을 움직이거나, 과일시럽 병을 싱크대에 처박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 전부 출발 이전 시기에 대한 기억이야. - P101

가끔 인간형들은 아주 조용해져요. 식당에서 그것들끼리 모여 앉기 시작했는데, 한 줄로 앉아서 영양분을 섭취해요. 그럴 땐 조용히 하기로 다 같이 합의라도 한 것 같아요. 멍청이들이나 그 침묵이 좋은 의미라고 믿을 겁니다. 그것들이 침묵을 지키는 게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래요, 맞아요. 난 그게 불안해요. - P107

인간형 승무원들이 업데이트를 받는 아침이면 우리 인간들은 식당 여기저기에 앉아서 수군거려요. 우리는 서로의 불행에 끌리고, 그 불행은 우리를 깔때기처럼 서로 끌어 내리죠. 그 깔때기 밑으로 떨어진 우리는 앉아서 수군거려요. - P108

나한테 아직 심장이 있긴 한지 모르겠어요. - P109

우리 중 누구도 그저 물건은 아닙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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