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화살표가 어긋날 것을 두려워하는 출연자들이 최선책보다 차선책을 더 많이 선택한다는 것을. 그게 아니라면 대개의 출연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이성을 선호한다는 것을. 그래서 천하의 매력남이나 매력녀는 의외로 불발이 많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별 볼 일 없이 생긴 출연자라 해도 화살표를 받는 일에 큰 애로는 없다. - P101

나는 두 남자를 놓고 종종 화살표 긋기를 해본다. 먼저 조심스럽게 나영규한테 화살표를 보내본다. 그러다 움찔 놀라 화살표를 북북 지워버린다. 김장우 대신 차선책인가··· 그래서 이번에는 김장우를 향해 화살표를 주욱 긋는다. 그렇다면 김장우와 내가 비슷한 수준의 인생들이란 말인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나는 스스로가 놓은 덫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 이미 갈등 한 번 없이 직진으로 내게 화살표를 보낸 사람은 나영규였다. 지나간 한 달이 내게 의미심장했던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정했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랬다고 했다. 망설임 끝에 희미하게 화살이 날아왔다는 자국만 남기고 있는 쪽은 김장우였다. 김장우라는 사람, 원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 P101

희미한 존재에게로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 P102

"이건 큰들별꽃.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고 계곡을 건너다가 기슭에서 이 꽃을 발견했는데······.
김장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놀라 쳐다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푸른 잎사귀 속에 숨어서, 저토록 아련한 큰들별꽃들이, 깜박 깜박 조용히 빛나고 있는 거야. 안진진. 나, 그냥 울어버렸다. 너무 작아서··· 아니, 저 홀로 숨어서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도 되는가 싶으니까 무지 눈물이 나대······." - P103

김장우는 사진을 봉투 안에 정성스럽게 담아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곤 괜히 민망해서 시선을 이리저리 황망하게 돌렸다. 김장우와 만나면 나는 이렇게 선명해진다. 그는 희미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는 가끔 그것들을 못 견뎌한다. - P104

큰들별꽃 사진은 그날로 내 방 벽의 가장 중심에 걸렸다. 그 좌우로 실꽃풀과 흰젖제비꽃도 걸었다. 한결같이 흰 꽃을 피우고, 한결같이 가냘프고 가냘퍼서 센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 버릴 듯 존재가 애매한 저 꽃들을 필름에 담기 위해 열흘씩이나 산과 들을 헤매는 사람, 김장우. - P104

"안진진. 인생은 한 장의 사진이 아냐. 잘못 찍었다 싶으면 인화 하지 않고 버리면 되는 사진하고는 달라. 그럴 수는 없어." 하긴 그랬다. 사진은 정지된 하나의 순간이고, 인생은 끝없이 흘러가는 순간순간들의 집합체인 것을, 멈춰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 P106

저 웃음. 그는 모든 말과 말 사이를, 모든 행동과 행동 사이를 언제나 웃음으로 연결 짓는다. 마치 수채화 붓으로 연푸른 선 하나를 짧게 긋듯이 씨익······. - P108

나영규의 활짝 웃음이 옆 사람까지도 웃게 만드는 전염성 강한 것이라면 김장우의 수채화 웃음은 여운이 길어 웃음이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묘한 웃음이다. - P110

김장우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잘 몰랐다. 나영규라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하지만 김장우라면, 아무 때나 씨익, 수채화 붓질하듯이 한 번 웃고는 얼른 입을 다무는 저 남자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유추하기란 몹시 어렵다. - P111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움찔한다. 착하고 착한 우리 안진진, 이라고 말하는 남자 앞에서는 더욱 착해지고 싶은 것이다. 또, 그런 남자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김장우가 나한테 거는 주문은 이것이다. 착하고 착한 안진진······.
나는 착한 인간이 아니었다. 통나무집에서의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그날 오후‘라는 카페를 찾아 장흥으로 넘어가는 시골길을 택하는 것만 보아도 나의 교활함은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었다. 통나무집에서 김장우가 다시 밥값이 모자라는 난처한 경우를 당할 까봐 내가 먼저 계산을 하는데도 어, 하는 표정을 짓다 말고 휘적 휘적 나가버리는 그에게 잠시 화가 났던 것만 보아도 나는 착하지 않았다. - P115

비비추 무더기의 이곳저곳에 렌즈를 들이대면서 김장우는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그늘에 서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한다.
처음이었다. 깊은 산 숲 속에서도 제 흥에 겨워 저렇게 혼잣말을 하며 사진을 찍을까. 숨어있는 야생화들을 찾아 온종일 걷다가 어느 순간 큰들별꽃 같은 작고 소박한 꽃을 만나면 눈물이 나기도 하겠지. 아무도 없이 너 홀로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느냐고 꽃을 쓰다듬으며 울 수도 있겠지······.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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