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 솔직함으로 나영규를 시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 안진진이라면 이런 도박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교활하니까. 나는 마치 마지막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다 건 노름꾼처럼 굴고 있는 것이었다. 전부를 잃느냐, 아니면 전부를 얻느냐의 게임, 그러나 다 잃더라도 다음날이면 어딘가에서 다시 도박판을 벌이고 있을 노회한 노름꾼. - P157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 P164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P173
그건 옳지 못한 거야, 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주리는 내 아버지를 킹콩으로 비유했던 그 어린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더 성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주리를 그만 이해하기로 했다. 탐험해봐야 할 수많은 인생의 비밀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주리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인생의 비밀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말이다. 그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제 내 이종사촌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나와 그들 사이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그 많은 시간들이 우리들 사이의 소통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 P178
"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너한테 정말 미안해······." 참말이지, 이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모는 전화선 저쪽에서 몰랐을 것이다. 이모의 마지막 말 때문에 내가 그 순간 왈칵 울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벌써 가득 고여 흐르고 있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나는 창밖을 보았다. 거기 가을을 건너가고 있는 높고 푸른 하늘이 무심하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 P180
나는 타인들 앞에서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를 장악할 수 없어 스스로를 방치해버리는 순간을 맛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결단코 ‘나‘를 장악하며 한 생애를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못 했지만, 나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 P184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독서는 아닐 것이었다. 그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미래에 내 어머니가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또 어떤 난해한 분야의 책들을 골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는 결코 이모가 읽어왔던 그 많은 소설책이나 시집을 선택해 책값을 치르지 않을 것이란 점만은 분명했다. 이 쌍둥이 자매들은 똑같이 책에 의지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었지만, 선택하는 책은 이토록이나 정반대였던 것이다. 마치 그들의 삶처럼.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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