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몇 밤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면 며칠 동안 적응이 안 돼. 돌아가고 싶어지지. 산새 소리, 풀잎 눕는 소리, 계곡물에 바람 스치는 소리, 두고 온 그런 것들 생각 때문에 오래 마음이 심란해지지. 도시는 나를 불안하게 해. 어디에 있어도 내 자리가 아니어서 불편해." - P117

"형이랑 같이 살 때, 난 밤마다 기다렸다가 형이 벗어둔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은 뒤에야 잠을 잤지. 냄새나는 형의 양말, 나 때문에 더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 양말을 주물러 빨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지금도 형 집에 가면 형수 몰래 가끔 형 양말을 빨아주고 돌아와."
착하고 착한 김장우. 나는 ‘그날 오후‘에서 하염없이 술을 마신다. 하염없이 마셔도 아버지를 닮은 나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도 김장우는 계산을 마치고 나서 얼른 나를 부축했다.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었는데, 가슴만 뜨거울 뿐 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맥주라는 술 따위에 정신을 앗긴다는 것은 이 안진진에겐 치욕이었다. - P119

그 밤, 어디로 어떻게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는지 나는 모른다. 대문 앞 외등에 비춰 본 내 손목시계는 아직 열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랑의 인사를 나누었던 젊은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기에는 너무도 이른 시각이어서 나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대문 옆 담장에 기대어 나는 피식 웃었다. 김장우는, 그 남자는, 왜 자신의 고물차에서 나를 내려놓을 장소가 여기뿐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왜 갑자기, 어딘가에서 그 남자의 냄새나는 양말을 깨끗이 빨아놓고 잠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 P120

이모의 초대를 전하면서 어머니는 애써 심드렁한 척한다. 외국에 나가 있던 주리와 주혁이 돌아왔고, 시장이 노는 날이고, 게다 가 이모부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다는 세 가지 조건이 다 맞아떨어졌으니 아니 갈 수가 없다는 식이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잘사는 이모가 가난한 어머니한테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두 사람 사이의 내왕은 완전 불가능이다. 이모는 어머니가 변했다 하고, 어머니는 이모가 변했다고 그랬다. 내가 보기엔 두 사람 다 변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삶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쌍둥이의 숙명이라는 것을. - P124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 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P127

"양보? 네가 양보한 것이 무엇인 줄 알기나 해?" 아무리 결혼 몇 년 만에 싸움닭처럼 거칠어진 어머니라 해도 차마 뒷말만은 더 이상 잇지 않았다. 너는 이 지긋지긋한 불행을 내게 양보한 대신 알짜만 가득한 행복을 넘겨받은 것이라고.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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