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세기에 걸친 침묵 속에 갇힌 난파선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지 못한다. 도서관, 학교, 박물관은 폭력적 환경에서는 오래 생존할 수 없는 취약한 기관이다. 내 상상 속에서, 광신적인 시대의 참상 앞에 놓인 알렉산드리아는 자신을 무국적자로 느낀 온유하고 교양 있고 평화주의적인 사람들의 슬픔에 물들어 있다. 팔라다스는 이렇게 썼다. "나는 죽은 자들과 평화롭게 책을 얘기하며 삶을 보냈다. "나는 비정한 시대에 존중을 퍼트리고자 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죽은 자들의 영사일 뿐이었다." - P293
"책이 타버리면, 책이 부서지면, 책이 죽으면, 우리 내면에서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뭔가가 훼손된다. 책이 불타면, 모든 생명,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생명과 그 책이 장차 모든 생명에게 줄 수 있었던 따스함, 지식, 지성, 기쁨, 희망도 죽는다. 책을 파괴하는 짓은 그야말로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불씨는 며칠이고 타올랐고 자욱한 연기는 어두운 눈처럼 도시를 떠다녔다. 사라예보 주민들은 행인 위로, 폐허가 된 땅 위로, 거리 위로, 반쯤 무너진 건물 위로 떨어지며 죽은 자들의 환영과 뒤섞이는 그 불타버린 책의 재를 ‘검은 나비‘라고 불렀다.
우연의 일치인지 『화씨 451』에 등장하는 소방관도 유사한 은유를 사용한다. 그는 책을 손에 들고 책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첫장을 태우라. 그리고 다음 장도 태우라. 그 종이들이 하나씩 검은 나비로 변하리라. 아름답지 않은가?" 미국의 환상소설 작가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에 묘사된 암울한 미래에선 독서가 엄격히 금지되고 모든 책은 파기된다. 그 세계에서 소방관은 불을 끄는 게 아니라 불을 지피고 부채질하여 위험하고 은밀한 물건을 숨기고 있는 집을 불태운다.
합법적인 책은 한 권뿐이다. 바로 불을 지르는 조직의 규정이다. 그 텍스트에는 1790년 미국에서 영어로 된 책을 불태우기 위한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최초의 소방관이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적혀 있다. 이 주장을 반박하는 글도 없으며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문서가 제거되고 책이 유통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역사를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다. - P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