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회사에서 정신없이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데 전화를 해왔다. 창문 한번 열어봐요. 왜? 달빛이 너무 좋아요. 사무실 창문은 열리지 않는 고정 창이었다…… 그러네. 열었다 해도 달이 보일 리 없는 콘크리트 숲이지만 넉넉한 달빛을 본 듯 마음이 환해졌다. 달은 어디나 똑같아요. K가 말했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구나. 아주 환한 게, 어디서나 똑같겠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고, 별이 아주 또렷이 보인다고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귀찮았고 가끔은 단순하게 반가웠다. 겨울의 끝에 처음 갔던 돼지껍데기집에 또 한번 갔다. 찬 소주와 먹는 돼지껍데기 맛은 처음과 달리 먹을 만했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했다. - P105

"그러니까, 점 같았어요. 그냥 하나의 점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자신이요. 이곳이 익숙해지는 만큼 그만큼 불안해졌어요. 내가 딛고 설 영토를 갖고 싶었어요." - P108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K는 죽이 든 봉투 위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제 삶의 뿌 리를 뽑아들고 달아난 까닭을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도망자처럼. - P109

차에서 내린 K는 내가 골목 끝에 이를 때까지 차 꽁무니를 바라 보고 있었다. 집 앞에 내려준 적이 몇번이지만 집에 들어가본 적은 없다. K는 정말 저기 살고 있는 걸까. 어둑한 골목에 서 있는 서른 살 청년은 백미러 속에만 출몰하는 창백한 유령처럼 부피감이 없다. 다시 어딘가로 날아갈 커다란 새 같기도 하고 이제 막 그곳에 부려진 정처없는 난민 같기도 하다. - P109

돌이킬 수 없을 때의 후회는 후회가 아니다. 핑곗거리가 되어줄 무언가를 건져오라고, 기억의 우물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짓이다. 무심히 보낸 시간들을 자잘하게 쪼개 연속사진 처럼 한장씩 한장씩 떠올리면서, 여기쯤이냐고, 아니면 어디서부터였느냐고, 길이 나누어지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라고, 저 자신을 다그치고 또 다그치는 짓이다. - P119

"인생의 어떤 순간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할 때가 있어. 그건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래."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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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이여, 깊은 밤 모든 게 심연으로 가라앉는 중에 삶이라는 게 그저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겉모습으로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죽어서야 살게 되는 것인가?" - P290

우리는 수세기에 걸친 침묵 속에 갇힌 난파선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지 못한다. 도서관, 학교, 박물관은 폭력적 환경에서는 오래 생존할 수 없는 취약한 기관이다. 내 상상 속에서, 광신적인 시대의 참상 앞에 놓인 알렉산드리아는 자신을 무국적자로 느낀 온유하고 교양 있고 평화주의적인 사람들의 슬픔에 물들어 있다. 팔라다스는 이렇게 썼다. "나는 죽은 자들과 평화롭게 책을 얘기하며 삶을 보냈다. "나는 비정한 시대에 존중을 퍼트리고자 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죽은 자들의 영사일 뿐이었다." - P293

"책이 타버리면, 책이 부서지면, 책이 죽으면, 우리 내면에서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뭔가가 훼손된다. 책이 불타면, 모든 생명,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생명과 그 책이 장차 모든 생명에게 줄 수 있었던 따스함, 지식, 지성, 기쁨, 희망도 죽는다. 책을 파괴하는 짓은 그야말로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불씨는 며칠이고 타올랐고 자욱한 연기는 어두운 눈처럼 도시를 떠다녔다. 사라예보 주민들은 행인 위로, 폐허가 된 땅 위로, 거리 위로, 반쯤 무너진 건물 위로 떨어지며 죽은 자들의 환영과 뒤섞이는 그 불타버린 책의 재를 ‘검은 나비‘라고 불렀다.
우연의 일치인지 『화씨 451』에 등장하는 소방관도 유사한 은유를 사용한다. 그는 책을 손에 들고 책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첫장을 태우라. 그리고 다음 장도 태우라. 그 종이들이 하나씩 검은 나비로 변하리라. 아름답지 않은가?" 미국의 환상소설 작가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에 묘사된 암울한 미래에선 독서가 엄격히 금지되고 모든 책은 파기된다. 그 세계에서 소방관은 불을 끄는 게 아니라 불을 지피고 부채질하여 위험하고 은밀한 물건을 숨기고 있는 집을 불태운다.
합법적인 책은 한 권뿐이다. 바로 불을 지르는 조직의 규정이다. 그 텍스트에는 1790년 미국에서 영어로 된 책을 불태우기 위한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최초의 소방관이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적혀 있다. 이 주장을 반박하는 글도 없으며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문서가 제거되고 책이 유통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역사를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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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근심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 감정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혼란스럽게 남아 있었다. 로즈 씨는 절대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러듯, 그도 희생의 불가피성을 일깨우고, 그것의 고귀함을 찬양했다. 시민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겼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무만 떠넘기고, 자신은 권리만 취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태도였으며, 거의 본능이었다. 그가 보고 듣고 읽는 모든 것은 무의식 중에 결국 그 자신과 연관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해를 통해 세상을 보았다. 자신의 이해가 세상의 운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운명은 그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보신을 합리화했다. 유럽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게 마음의 평화 를 버림으로써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다고 손쉽게 확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로즈씨는 이제 젊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게다가 각종 세금으로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 P96

로즈 씨는 노르망디에 가서도 마음의 평온을 되찾지 못했다.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어떤 위험이 그를 노리겠는가? 게다가 그가 느끼는 것은 불안이 아니라 슬픔 같은 것이 었다. 그는 자신이 늙었다고, 나이보다 훨씬 늙었다고 느꼈다. 이곳에는 이제 그의 자리가 없었다. 그는 일종의 생존자, 옛 시대의 습관, 취향, 요구들과 더불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하나의 종이었다.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그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아마도 젊음? 하지만 그는 이제 젊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젊었던 적이 없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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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뜬금없는 말보다는 깡똥한 환자복 아래 드러난 앙상한 맨발이 오히려 짠하다. 그 맨발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에서 팔로 이어 지던 흉터가 떠올랐다. 꾹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잘못을 저질러놓고는 지레 눈을 감아버리는 아이처럼. 섭생을 게을리한 중년처럼 얼굴은 푸석한데 입술은 소년의 그것처럼 여릿하다. 현실 의 국경과 생의 국경을 연속장애물처럼 겁도 없이 훌쩍훌쩍 뛰어 넘게 한 동력은 오히려 이 유난한 연약함인지도 모르지. - P81

탈북이라는 단어는 그를 단숨에 파악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 단어 뒤에 가려진 것들은 모조리 지워버리기도 하는 것이어서, 이후로도 K를 볼 때마다 그를 보는 두개의 시선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엇갈리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 P97

전화기 너머에서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어깨에서 팔의 안쪽으로 이어지던 흉터의 모양새가 또렷이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그 불성실하기 짝이 없던 인터뷰이를 한번은 더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있었다. 진화생물학자가 자신이 인식표를 부착해놓은 야생동물을 일정기간 후 추적하여 그동안의 변화를 관 찰하는 심정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극단의 자본주의의 전시장인 이 도시에서 그사이 얼마나 적응했을까 하는 궁금함 같은 것. 기왕 새긴 흉터라면, 필요할 때마다 그걸 비표처럼 드러내어 자신이 찾아온 이 멋진 신세계를 우아하게 유영할 수 있는 오리발로 사용할 만 큼은 진화했을까. 가벼운 거짓말쯤은 스스로도 믿어버리며 뱉을 줄 아는,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이 내용물의 진정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가는 그의 변모를 확인하게 된다면, 나는 실망보다 안도를 느낄 것 같았다. - P97

누나,라고 불린 순간부터일까. 나는 K의 관계의 가난에 마음이 쓰였다. 그의 옆으로 목욕바구니를 든 여자가 겨우 따박따박 걷는 딸의 손을 잡고 지나갔다. 점퍼 차림의 중년 남자 하나도 그의 곁을 지나친다. 그건, 서로 다른 영화의 영상을 겹쳐놓은 것 같았다. 차 꽁무니를 바라보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그들과는 다른 시공간에 머물고 있었다. 차가 길 끝에 이를 때까지 그는 백미러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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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두는 생김새부터가 유머러스하거든요. 얄팍하고 쫄깃하게 잘 주무른 만두 꺼풀을 동그랗게 밀어서 참기름 냄새가 몰칵 나는 맛난 만두소를 볼록하도록 넣어서 반달 모양으로 아무린 것을 다시 양끝을 뒤로 당겨 맞붙이면 꼭 배불뚝이가 뒷짐 진 형상이 돼요.

어머니의 첫 소설 『나목』 속에 나오는 구절이 다. 소설 속의 태수가 맛도 없는 것을 하도 맛나게 먹길래 개성 음식 이야기를 자랑처럼 늘어놓는 장면이다. 음식 이야기가 리드미컬하고 생생하다. 그러나 실제 주인공의 상황은 삶의 생기를 잃은 어머니가 겨우 내놓은 시큼한 김칫국에 질려 그 "울적함이 쉽사리 달래지지 않은 채 목구멍 근처에 묵직하게 걸려 있"는 상태이다. - P47

엄마는 겨울이 되면 석유 난로 위에다 동그란 알루미늄 찬합을 올려 카스텔라를 구워주셨다. 오븐이 없었지만 엄마는 한쪽이 익을 때쯤 뒤집어서 오븐에 구운 것 같은 효과를 냈다. 당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엄마의 카스텔라를 떳떳하게 먹을 수 있었다. 베이킹파우더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미지근한 물에 녹인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 반죽을 따뜻한 이불 속에 파묻어두었다가 부푼 반죽으로 카스텔라를 굽던 엄마의 손길을 잊지 못한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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