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뜬금없는 말보다는 깡똥한 환자복 아래 드러난 앙상한 맨발이 오히려 짠하다. 그 맨발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에서 팔로 이어 지던 흉터가 떠올랐다. 꾹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잘못을 저질러놓고는 지레 눈을 감아버리는 아이처럼. 섭생을 게을리한 중년처럼 얼굴은 푸석한데 입술은 소년의 그것처럼 여릿하다. 현실 의 국경과 생의 국경을 연속장애물처럼 겁도 없이 훌쩍훌쩍 뛰어 넘게 한 동력은 오히려 이 유난한 연약함인지도 모르지. - P81

탈북이라는 단어는 그를 단숨에 파악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 단어 뒤에 가려진 것들은 모조리 지워버리기도 하는 것이어서, 이후로도 K를 볼 때마다 그를 보는 두개의 시선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엇갈리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 P97

전화기 너머에서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어깨에서 팔의 안쪽으로 이어지던 흉터의 모양새가 또렷이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그 불성실하기 짝이 없던 인터뷰이를 한번은 더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있었다. 진화생물학자가 자신이 인식표를 부착해놓은 야생동물을 일정기간 후 추적하여 그동안의 변화를 관 찰하는 심정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극단의 자본주의의 전시장인 이 도시에서 그사이 얼마나 적응했을까 하는 궁금함 같은 것. 기왕 새긴 흉터라면, 필요할 때마다 그걸 비표처럼 드러내어 자신이 찾아온 이 멋진 신세계를 우아하게 유영할 수 있는 오리발로 사용할 만 큼은 진화했을까. 가벼운 거짓말쯤은 스스로도 믿어버리며 뱉을 줄 아는,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이 내용물의 진정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가는 그의 변모를 확인하게 된다면, 나는 실망보다 안도를 느낄 것 같았다. - P97

누나,라고 불린 순간부터일까. 나는 K의 관계의 가난에 마음이 쓰였다. 그의 옆으로 목욕바구니를 든 여자가 겨우 따박따박 걷는 딸의 손을 잡고 지나갔다. 점퍼 차림의 중년 남자 하나도 그의 곁을 지나친다. 그건, 서로 다른 영화의 영상을 겹쳐놓은 것 같았다. 차 꽁무니를 바라보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그들과는 다른 시공간에 머물고 있었다. 차가 길 끝에 이를 때까지 그는 백미러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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