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놀라운 일은 사헬 지대, 에티오피아, 서아프리카 등 아프리카 토종 농작물의 원산지가 모두 적도 이북이라는 점이다. 적도 이남산 아프리카 농작물은 단 1종도 없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미 적도 이북에서 발생한 니제르콩고계 언어의 사용자들이 적도 부근의 피그미족이나 적도 이남의 코이산족을 교체할 수 있었던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피그미족과 코이산족이 농업을 시작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농경민 자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남아프리카의 야생식물은 작물화 하기에 부적합했다는 우연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어온 반투족이나 백인 농경민들도 수천 년에 걸쳐 농경의 경험을 축적했으면서도 남아프리카의 토종 식물을 식량 작물로 개발하지는 못했다. - P598

아프리카의 가축 목록에서 뜻밖의 사실이 나타나는데, 그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특징이다. 그것은 오늘날 아프리카를 유명하게 만들며 그만큼 수효도 많은 얼룩말과 누(소와 비슷한 남아프리카 영양-옮긴이), 코뿔소, 하마, 기린, 들소 등의 대형 야생 포유류가 이 목록에는 단 1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적도 이남 아프리카에 토종 농작물이 없다는 현실과 더불어 아프리카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 P599

아프리카에서 실제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연대와 장소에 대해 고고학은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가르쳐주고 있을까? 서양 문명사에 푹 빠져있는 독자들이라면 아프리카의 식량 생산이 파라오와 피라미드의 땅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어쨌든 B.C. 3000년경의 고대 이집트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복잡한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곳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자를 사용했던 중심지 중 하나라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아프리카에서 식량 생산에 대한 가장 앞선 연대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는 곳은 바로 사하라사막이다. - P600

그렇다면 사라진 코이산족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수만 년 동안 코이산족이 살았던 땅에 지금은 반투족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다만 근대에 들어와서 강철을 가진 백인 농경민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나 캘리포니아 인디언 등 석기를 사용하던 수렵 채집민들이 충돌했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바탕으로 짐작할 수는 있다. 이 같은 경우에 수렵 채집민들은 여러 방법에 의해 신속하게 제거되었다. 쫓겨나고 남자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여자들은 신부감으로 약탈당했다. 또한 남녀를 불문하고 농경민들의 유행병에 감염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가 그러한 질병에 속하는데, 이것은 농경민들의 촌락 주변에서 번식한 모기가 옮기는 병으로, 침입해온 반투족은 이미 유전적 저항력을 갖고 있었지만 코이산족 수렵 채집민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 P610

야생동물이 가축화되기 위해서는 충분히 온순해야 하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하고, 먹이가 저렴해야 하고, 질 병에 면역성이 있어야 하고, 성장이 빨라야 하고, 감금 상태에서도 잘 번식해야 한다. 이 같은 시험을 모두 통과한 야생동물은 전 세계를 통틀어 얼마 되지 않는다. 유라시아 원산의 소, 양, 염소, 말, 돼지 등도 그 속에 포함된다. 반면에 그와 비슷한 아프리카 동물들(아프리카들소, 얼룩말, 강돼지, 코뿔소, 하마 등)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끝내 가축화되지 못했다. -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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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에 생긴 최초의 유럽 정착촌들은 1492년 콜럼버스가 세운 정착촌을 필두로 서인도제도에 몰려 있었다. 이들 섬의 인디언 인구는 ‘발견‘ 당시 100만 명이 넘었지만 질병, 추방, 노예화, 전쟁, 무차별 살인 등 으로 대부분의 섬에서 전멸되고 말았다. 1508년경 아메리카 본토에서는 처음으로 파나마지협에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그 이후 본토의 대제국이 었던 아즈텍과 잉카가 정복되었는데, 각각 1519~1520년과 1532~1533 년의 일이었다. 두 경우 모두 유럽인들이 퍼뜨린 유행병(아마 천연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제들을 포함하여 전체 인구의 많은 부분이 그 병으로죽었고 나머지는 말을 탄 스페인인들이 처리했다.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월성을 지녔으며 아울러 원주민들의 분열 상태를 교묘히 이용하는 정치적 기술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북부에 남아 있던 원주민 국가들마저 유럽에 정복당했다. - P576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살아온 기간은 그 어느 대륙보다도 훨씬 길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약 7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해부학적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도 아마 그곳에서 처음 발생했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상호작용을 한 덕분에 아프리카 선사시대의 역사 는 아주 흥미진진한데, 그중에서도 특히 반투족의 팽창과 인도네시아인의 마다가스카르 이주, 두 가지 사건은 지난 5000년을 통틀어 인구 이동의 가장 극적인 사례에 속한다. 과거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여전히 중요 성을 갖고 있다. 결국 누가 누구보다 먼저 어디에 도착했느냐는 문제가 오늘날의 아프리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 P582

A.D. 1000년 당시 이미 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주요 다섯 인종은 일반인들이 대충 흑인, 백인, 아프리카 피그미족, 코이산족, 아시아 인종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림 19-1은 그들의 분포 지역을 표시한 것이다.
이 책의 5장과 14장에 실린 사진들을 훑어보면 피부색, 머리카락의 태 및 색상, 얼굴 생김새 등에서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흑인은 아프리카에만 있었고 피그미족과 코이산족은 지금도 그곳에만 살고 있다. 백인과 아시아 인종의 경우에는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 다섯 인종 속에는 인류를 구분하는 주요 인종 중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그 친척들을 제외한 모든 인종이 포함되어 있다. - P582

아프리카에서 건너간 아메리카 흑인들은 주로 아프리카 서해안 출신으로 동아프리카(북으로는 수단, 남으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동남 해안까지)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인, 리비아인, 모로코인 등이 포함된 백인들은 아프리카 북해안 일대와 사하라 북부를 차지했다. 이 북아프리카인들은 백인이라고는 해도 푸른 눈에 금발을 가진 스웨덴 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남쪽에 있는 ‘흑인‘들에 비하면 피부색도 밝고 머리카락도 직모에 가까운 편이므로 일반인들은 대개 그들을 ‘백인‘ 이라고 부른다. 아프리카의 흑인과 백인은 대부분 농경이나 목축, 또는 두 가지를 겸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 P585

남아프리카 일대의 코사어를 비롯한 일부 니제르콩고계 언어에도 흡착폐쇄음이 많다. 더욱 의외인 것은 흡착폐쇄음이나 코이산 어 족의 낱말들이 케냐의 흑인들이 사용하는 아프로아시아계 두 언어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인 것이다. 케냐는 탄자니아의 하자족이나 산다웨족보다도 현존 코이산족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곳임을 생각한다면 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이 모든 사실로부터 우리는 코이산족과 그들의 언어가 원래는 현재의 분포 지역인 남아프리카보다 훨씬 북쪽까지 뻗어 있었는데 피그미족의 경우처럼 흑인들에게 침탈당하여 지금은 언어에서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신체를 연구하는 것으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우며 오직 언어학적 증거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 P591

반투족의 이점에 대한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 우선 살아 있는 현재로부터 또 다른 유형의 증거(가축화· 작물화된 동식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앞의 여러 장에서 확인했듯이 이 같은 증거가 중요한 까 닭은 높은 인구밀도, 병원균, 기술, 정치조직을 비롯한 힘의 요소들이 바로 식량 생산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지리적 입지라는 우연으로 인해 식량 생산을 시작하거나 물려받게 된 민족들은 그 덕분에 지리적 혜택을 덜 받은 사람들을 침탈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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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가축화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입된 유일한 포유류는 개 였다. 개는 B.C. 1500년경에 아시아로부터 (아마도 오스트로네시아인의 카누에 실려) 들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야생 상태에서 딩고가 되었다. 오스트레 일리아 원주민들은 딩고를 사로잡아 애완견, 번견, 심지어는 살아 있는 담요로도 활용했는데, 매우 추운 밤을 뜻하는 ‘개 다섯 마리의 밤‘ 이라 는 표현이 바로 거기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딩고나 개를 폴리네시아 인들처럼 먹거리로 이용하지도 않았고 뉴기니인들처럼 야생동물을 사냥하는데 이용하지도 않았다. - P484

모든 핵심적 발전의 궤적에서 왜 남북아메리카는 예외 없이 유라시아보다 뒤처졌을까? 네 가지 이유가 저절로 떠오른다. 우선 남북아메리카는 유라시아에 비하여 출발부터 늦었다는 점, 가축화· 작물화에 적합한 야생 동식물이 적었다는 점, 확산의 장애물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아마도 인구가 조밀한 지역들이 비교적 좁았거나 고립되어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 P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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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화된 종교는 도둑 정치가들에게 부가 이동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 말고도 중앙집권적 사회에 두 가지 중요한 이득을 가져다준다.
첫째,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공유하고 있으면 서로 무관한 개인들이 서로 죽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된다. 친인척 관계가 아니더라도 유대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이데올로기나 종교는 사람들에게 유전적인 이기심을 떠나서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사회 구성원 몇 명이 싸움터에서 전사함으로써 전체 사회는 훨씬 더 효과적으로 다른 사회를 정복하거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 P417

국가 내부의 갈등 해결 방법은 법률, 사법제도, 경찰 등으로 점점 공식화되었다. 법률은 흔히 성문화되기도 했는데, 문자를 아는 엘리트 계급을 가진 국가가 많았기 때문이다(눈에 띄는 예외도 몇 군데 있었다. 가령 잉카족의 경우가 그러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중앙아메리카에서 문자가 생겨난 시기는 이 두 지역에서 최초의 국가들이 형성되던 시기와 대략 일치했다. - P420

국가와 그보다 단순한 사회가 충돌할 때 대개 국가가 승리를 거두는 한 가지 이유는 무기류를 비롯한 기술들이 더 우수하며 인구도 더 많다는 이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추장 사회와 국가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이점이 두 가지 더 있다. 첫째, 중앙집권화된 결정권자가 있으면 군사력과 물자가 집중된다는 점, 둘째, 국가는 공인된 종교를 퍼뜨리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경우가 많아서, 그로 말미암아 군대는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된다는 점이다.
현대 국가에서도 학교, 교회, 정부 등이 국민에게 이같은 희생정신을 강력히 주입시키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런 태도가 인류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변화임을 흔히 잊어버린다. 모든 국가에는 국민에게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죽을 수도 있는 마음 자세를 종용하는 표어가 있다. 영국에는 ‘국왕과 조국을 위하여‘, 스페인에는 ‘신과 에스파 냐를 위하여‘ 라는 식이다. 이러한 정신은 16세기 아즈텍의 전사들에게도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고 생명을 주시는 신(아즈텍의 민족신 위칠로포치틀리)에게 이 꽃다운 죽음보다 귀중한 것은 없도다. 멀리 나의 죽음이 보이나니, 내 마음은 죽음을 갈망하노라!" - P421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정복 전쟁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광신적 행동이 지구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추장 사회가 생기기 시작한 이후, 특히 지난 6000년 사이에 국가들이 탄생하면서부터였다. - P422

동일한 수준의 복잡성을 가진 여러 사회가 경쟁하게 되었을 때, ‘만약‘ 상황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사회적 복잡성의 수준은 한 단계 상승하게 마련이다. 부족들은 다른 부족을 정복하거나 서로 합쳐 추장 사회의 규모에 이르게 되고 추장 사회들은 다른 추장 사회를 정복하거나 서로 합쳐 국가 규모에 이르게 되며 국가들은 또 다른 국가를 정복하 거나 서로 합쳐 제국이 된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큰 사회 단위는 ‘만약‘ (이 ‘만약‘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규모가 커진 데 따르는 각종 문제 (지도자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의 끊임없는 위협, 도둑 정치에 대한 평민들의 반감, 경제적 통합으로 인해 늘어나게 된 여러 가지 문제점 등)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각각의 작은 사회 단위에 비해 잠재적으로 유리하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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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이 꾸준히 조금씩 나타나지 않고 이따금씩 유행병으로 찾아오는 전염병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질병들은 감염된 환자 한 사람으로부터 그 부근의 건강한 사람들에게로 비교적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전파되어서 단기간에 전체 인구가 질병에 노출된다. 둘째, ‘급성병‘이므로 단기간에 죽거나 완치된다. 셋째, 운 좋게 회복되는 사람들에게는 항체가 형성되어 면역성이 생기므로 그때부터 꽤 오랫동안,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 동안 그 질병이 재발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질병들은 대체로 인간에게만 발생한다. 유행병을 일으키는 세균들은 대개 토양이나 다른 동물의 몸속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소아기의 급성 유행병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홍역, 풍진, 볼거리, 천연두 등도 이 네 가지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 P308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많은 세균에 대해 분자생물학자들은 이제 각 세균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역시 대중성 전염병을 일으키는 세균들이다. 다만 우리의 각종 가축이나 애완동물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유행병 은 동물의 경우에도 대규모의 조밀한 집단을 필요로 하며 아무 동물이나 무차별로 괴롭히지 않는다. 즉 대중적 전염병들은 대체로 대규모 집단을 이루고 있는 사회적 동물들에 국한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나 돼지 같은 사회적 동물을 가축화시켰을 때 이 동물들은 이미 그러한 유행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그 세균이 우리에게로 옮겨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예를 들어 홍역바이러스에 가장 가까운 것은 우역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다. 이 지독한 유행병은 소를 비롯하여 많은 야생 반추 포유류를 감염시키지만 인간은 우역에 걸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소도 홍역에 걸리지 않는다. 홍역바이러스와 우역 바이러스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곧 우역 바이러스가 소에게서 인간에게로 옮긴 후 우리 몸에 맞도록 특성을 변화시켜 홍역바이러스로 진화했다는 뜻이다.
많은 농부가 소의 똥, 오줌, 호흡, 상처, 피 등과 가까이 산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처럼 세균이 옮겨진 것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류는 소를 가축화한 이후로 장장 9000년 동안이나 소와 가까이 지내 왔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우역 바이러스가 가까이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도표 11-1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에게 낯익은 다른 전염병들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처럼 동물 친구들의 질병과 관련되어 있다. - P314

19세기의 저술가들은 역사를 말할 때 흔히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행되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천의 핵심적 특징으로 농업, 야금술, 복잡한 기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문자의 발달 등을 들었다. 이 가운데서 문자는 전통적으로 가장 한정된 지역에서만 발달했다. 이슬람이 팽창하고 유럽의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기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적도 이남 아프리카,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의 한 지역을 제외한 신대륙 전역에 문자가 없었던 것이다. 문자를 사용하는 지역이 이렇게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민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미개인‘ 또는 ‘야만인‘ 과 구별해주는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문자를 꼽았다. - P327

초기 문자 체계는 그 모호함 때문에 문자 기능이 몇 가지로 제한되었고 소수의 필경사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들 사회가 어째서 그 같은 모호함을 그냥 내버려두었는지 의문을 품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일반 대중의 문자 사용을 당연시하는 현대와 고대 시각의 괴리를 보여주는 일이다. 초기 문자의 ‘의 도적인‘ 사용 제한은 덜 모호한 문자 체계를 고안하려는 의욕을 적극적으로 막는 작용을 했다. 즉 고대 수메르의 왕이나 사제들은 전문적인 필경사들이 거둬들여야 할 양의 수를 기록하는 데 문자 사용을 바랐을 뿐 일반 대중이 시를 쓰거나 음모를 꾸미는 데 사용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이 고대 문자의 주된 기능은 ‘타인의 예속화를 돕는 일‘ 이었던 것이다. 비전문가들이 문자를 개인 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즉 문자 체계가 점점 간소해지고 표현력도 늘어난 뒤의 일이었다. - P355

미국에서는 해마다 약 7만 건에 달하는 특허권이 발행된다. 그중에서 상업적인 생산에까지 이르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만약 쓰일 곳을 찾은 위대한 발명품이 하나 있다면 그 뒤에는 그렇지 못한 무수한 발명품 이 빛도 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이다. 심지어는 처음에 어떤 필요에 의해 고안되었던 발명품들조차도 나중에는 뜻밖의 다른 필요에 더욱 큰 가치가 있음이 밝혀지기도 한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고안한 것은 원래 광산에서 물을 퍼내기 위해서였지만 증기기관은 곧 방적 공장에 동력을 공급하게 되었고 다시 (훨씬 더 많은 수익을 거두면서) 기관차와 배를 움직이게 되었다. - P367

중세 이후의 석유 증류법에 대해 말하자면 19세기의 화학자들은 원유의 중간 분류층이 기름 램프의 연료로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학 자들은 휘발성이 가장 높은 분류층(휘발유)을 쓸모없는 폐기물로 간주하여 내버렸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내연기관의 이상적인 연료라는 점이 밝혀졌다. 현대 문명의 추진 연료라고 할 수 있는 휘발유가 처음에는 용도를 갖지 못한 또 하나의 발명품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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