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도 발끝을 들고 걷는다. 옛집은 지층이어서 내 걸음의 무게나 진동에 제약이 없었다. 대신 넓이와 높이가 몸을 옭아맸다. 제자리뛰기를 하면서, 나는 높이 갈 수 없겠구나. 멀리뛰기를 하면서는, 멀리도 못 가겠구나. 방은 매일 조금씩 좁아졌지만 나는 자유의 품이 줄어도 자유는 자유라고 믿었다. 어떤 믿음은 강한 체념인 줄 모르고. 체념을 몸에 칭칭 감고 터무니없이 믿고 또 믿고. - P21

밝을 때 잠이 들어 사위가 조용하고 깜깜한 시간에 눈을 뜨는 일이 두렵다. 그 상황은 내가 어찌해야 한다고 아직 배우지 못한 감정들을 배태한다. 내내 살기 귀찮고 싫었을 뿐이지 죽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저 상황에서는 간절히, 매번 그랬다. 그렇게 돌연 몸이 감정부화기가 되는 순간. 다행히 부화기를 끄는 법을 일찍 찾았다. 나는 손에 집중했다. 방안이 어둠과 침묵으로 꽉 차고 혼자일 때 손의 행방은 중요했다. 몸이 부엌으로 가도 손이 칼로 가지 않으면, 다리가 창문 위로 올라가도 손이 난간을 꽉 움켜쥐고 있으면 괜찮았다. 그게 어려울 때는 손과 손이 서로를 꽉 붙들도록 했다. 깍지를 끼고 손톱이 손등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힘을 줬다. 그렇게 서로를 꼭 쥔 두 손의 모양이 언제나 교차로에서 움찔움찔하는 심장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 P24

매일 낱말들이 나에게서 탈출한다. 적게는 몇 개가, 많게는 수십 개의 낱말들이. 그중 한둘만이 내게 잡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오늘 잡힌 건 단짝. 홑‘단‘에 한글 ‘짝‘이 손잡은 단어. ‘서로 뜻이 맞거나 매우 친하여 늘 함께 어울리는 사이. 또는 그러한 친구‘란 의미의 單짝은 태생부터 다른 두 단어의 조합으로 이질감, 불일치를 선천적 조건으로 갖고 있다. 單과 짝이 금방이라도 서로를 툭 치고 멀어질 것 같다. 발음할 때마다 자꾸 ‘혼자이면서 가끔 쌍을 이룬다‘라는 의미로 수정된다. - P25

다시 보니 單짝은 혼자가 문제인 사람과 쌍이 문제인 사람의 단합 같다. 두고 보니 삶의 문제가 대개 혼자이거나 쌍이어서 생긴다는 의미의 철학 개념어 같기도 하다. - P26

예상한 대로 엄마는 내게 병원에 함께 올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엄마가 보호자 없이 병원에 가는 건 싫다. 내가 싫어서 하는 일이다. 내 집에서 엄마 집까지 실려가며, 실려가는 일은 새삼 처지를 곱씹게 한다고 썼다. 연필을 쥐고 노트를 펼쳐서. 밤을 두려워하 면서 열렬히 사랑하는 나의 처지, 밤마다 숲을 거닐고 싶다고 남산을 보며 생각하는 나의 처지, 약을 한 움큼 먹고 엄마의 무릎 고름을 짜러가는 나의 처지, 매일 고양이의 꼬리에 매달리는 나의 처지, 눈을 뜨는 순간 머리 위로 하루가 주저앉아 짜부라지는 나의 처지를 이어서 쓰면서 누군가를 꼭꼭 씹어 사랑하고 싶어졌다. - P28

분명한 밤, 의심의 여지없이 까만 밤 꽃병의 물을 간다. 이 꽃의 이름이 뭐였더라. 캔자스 블루. 자잘한 보라색 꽃이 종이로 구깃구깃 접어놓은 것처럼 줄기에 꽂혀 있는데 잠시 손으로 꾹 눌러 생화임을 확인해볼까 망설이다가 마음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망설임이 추락을 부른 줄 알았다. ‘확인‘ 때문이었다. 생화의 반대는 조화이고 조화는 다른 재료를 가지고 인공적으로 만든 꽃을 의미하지만 살아 있는 것, 삶이야말로 가장 인공적인 게 아닌가 스산해서 내가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확인해서 뭘 우위에 두고 싶었던 건지 알 듯 모를 듯하여, 추락이다. 살아 있는 게 왜 모욕인 줄 모르냐고.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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