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어느 지점까지만 사랑했다. 그 지점을 넘어가면 내 안에서 무언가 불투명해졌고 그에게 줄 게 없어졌다. 나에겐 그 불투명한 막이 보였다. 입으로 맛볼 수 있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었다. 스테판을 향한 내 감정과 나 사이에, 아니 어떤 남자가 됐건 그와 나 사이에, 확신할 수 없는 일종의 투명 막이 드리워져 있고 나는 그 막으로 ‘사랑해‘라고 속삭일 수도 그 말이 들리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말이 느껴지게 할 수는 없었다. - P239

그 시절 사람들은 나 같은 여자들을 신여성, 해방된 여성, 별난 여자라고 불렀다(개인적으로는 별난 여자를 선호했고 지금도 그렇다). 낮에 사무실에서 일할 때면 내가 생각해도 난 신여성에, 해방된 별난 여자가 맞았다. 그러다 밤이 오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면 엄마가 나보다 먼저 구체화시켜놓은 바로 그곳을 응시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 일어날 때가 안 됐어. 불행과 난 아직 끝난 게 아냐.‘ - P241

데이비는 내 남자 역사의 재현부(소나타 형식에서 제시부의 주제를 형태를 바꾸어 반복•강화하는 부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색해지고 모질어졌다. 그의 약한 면을 보면 나는 기꺼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단 하나 달랐던 건 데이비와 있을 때만은 처음으로 이 배치가 완벽해졌다는 점이다. 내가 어디에 구속되었는지를 보았고, 그것을 내보이면서 부끄러워했다. 드디어 눈이 환해져 나의 실체가 보일 때면 얼마나 화가 나고 두려웠던가! 그리고 데이비를 통해서 나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나는 데이비를 알았던 것이다. 그 내면의 핵심까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식성과 취향을 좋아했고 그의 두려움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비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았고 그의 옆에 있으면 내가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 P251

나는 책상에 앉아서 생각하려고 기를 쓰는 중이다. 이 행동을 이렇게 묘사하기를 좋아해서 몇 년 동안이나 말해왔다. "생각하려고 기를 쓰는 중이야." 엄마가 살려고 기를 쓴 것처럼. 엄마는 아침에 다리를 침대 옆으로 내려놓는 행위만으로도 금메달감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도 그런 것 같다. 그냥 책상에 앉아 있을 뿐이면서 기를 쓴다고 말한다. - P256

상상해보라. 나는 이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서 살고 있고, 내일 아침에 분명 전화가 걸려 온다는 것만 빼곤 확언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 슬퍼하거나 눈물바람으로 지내거나 작은 일에 심장이 벌렁거리거나 화가 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재미만 있다. 분명 적응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세상 어느 누가 자기 인생과 진정 화해한단 말인가.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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