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들은 얘기입니다.
6•25전쟁 때,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지어 준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계셨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저녁에 체할 만큼 급하게 밥을 많이 먹었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내일 아침에 또 밥을 해주겠다고 해도, 아이들은 불안과 허기로 인해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다음 날부터는 아이들이 밥을 먹는 동안 볼 수 있는 곳에서 가마솥을 열고 밥과 국을 끓였다고 합니다.
그제야 아이들이 천천히, 딱 배부를 만큼만 먹었다고 합니다. - P33

제가 다른 데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수해 복구를 하러 갔을 때 일입니다. 20대 초반의 한 학생이 저에게 와서 고민을 털어 놨습니다.
"아저씨, 전 좀 이중적인 것 같아요." 제가 물었습니다.
"왜?"
"어제 클럽에서 친구들이랑 밤새도록 놀았어요. 근데 오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수해 복구를 하러 온 저를 보니, 제가 좀 이중적인 것처럼 느껴져요."


"밤새 클럽에서 놀기만 하는 것도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만, 밤새 노느라 피곤할 텐데도 여기 와줘서 고맙다야."
딱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겠지요. 덕분에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환하게 미소 지으며 흙을 퍼 나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좀 긴가민가 하는 표정을 짓는 학생에게 제가 물어봤어요.
"만약 저기 저 아이가 새벽 4시 반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 8시에 여기 와서 지금 땀 흘리면서 수해 복구를 돕고 있는 거라면 너는 저 아이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겠니?"
"되게 부지런한 아이구나, 싶은데요."
"맞아. 너도 마찬가지야.
따뜻하고 부지런하고 체력 좋은 사람이야.
따지고 보면 우린 다 이중적이야.
아니, 삼중적, 사중적, 다중적일 때도 있어.
근데 난 그게 나쁘다고 생각 안 해." - P35

처음에는 강형욱 씨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반려견 훈련법을 배우곤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만화가 강풀이 알려 준 방법을 썼더니 천재견이 되었어요.
"앉아라!" 그러면 앉고요.
"서라!" 그러면 서고요.
"똥 눠라!" 그러면 똥 누고요.
"자라!" 그러면 잡니다.
대체 어떤 방법을 썼기에 이렇게 말을 잘 듣냐고요?
쉽습니다. 탄이가 앉아 있을 때 "앉아"라고 얘기하고요, 서 있을 때 "서"라고 얘기하고요, 뛸 때 "뛰어"라고 얘기합니다.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간식 먹고 있을 때 "간식 먹어"라고 얘기합니다. 성격도 순합니다. 낯선 사람 봐도 꼬리 흔들고요, 사흘에 한 번 정도만 짖어요. 짖고 자기가 놀랍니다. (웃음) - P75

이상하게도 탄이랑 같이 살게 되면서 우리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굉장히 애틋해졌어요.
아, 세상에 내 똥을 더러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겠구나!
‘아, 우리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요즘 개똥 치우면서 이런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우리 어머니한테 잘합니다. 효도까지는 아니지만 자주 전화도 드리고 안부도 묻습니다. 예전엔 통화할 때 많이 싸웠는데. 요즘은 안 싸우고 그냥 "네, 네" 하면서 어머니가 하시는 얘기 듣습니다. 싸울 일이 별로 없어요. - P77

뒷산에 탄이와 산책하러 갔는데 초등학생쯤 되는 두 아이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와서 물어요.
"이 개는 순해요?" 그러면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맹견이야, 물어."
일부러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야 조심할 테니까요. - P78

제가 탄이하고 같이 하루에 아침저녁 두 번씩 산책을 다녔더니 그 모습을 보았는지 어느 날 우리 동네 통장님이 이렇게 말해요.
"제동씨, 맨날 개자식하고 같이 다니느라고 고생이 많네."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아니, 통장님 누구 보고 얘기한 건지 눈 방향을 똑바로 정해 주세요. 어느 쪽이 개자식인지 정해 달라고요." 통장님이 슬쩍 웃으면서 저보고 이래요.
"아휴, 탄이 아빠도 참."
"아빠 아니에요. 형이라고요. 아빠 소리는 딴 애한테 들을 거라고요."
"아이고, 희망은 안 버렸나 보네. 중성화 수술은 했어?" 우리 통장님 진짜 웃기거든요.
제가 "네, 하고 왔어요"라고 하니까 통장님이 뭐라고 하신 줄 아세요?
"같이 하지 그랬어."
통장님도 고소하려다 참았습니다. (웃음) - P80

어느 날은 통장님이 제게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그냥 돌아다닐 바에는 동네 순찰을 좀 하는 게 어때?"
제가 지나가는 말로 "네, 알겠습니다" 했는데, 바로 다음 날 통장님이 제게 경광봉과 형광 조끼를 주시는 거예요. 등 뒤에 크게
‘자율 방법‘이라고 적혀 있는 조끼를요. (웃음)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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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고양이는 쾅쾅거리며 매듭장이를 찾으러 떠났습니다.
"매듭장이님, 매듭장이님, 저에게 끈 좀 주세요.
끈을 우물에게 가져다주면 우물이 저에게 물을 줄 거고
그 물을 밀밭에 가져다주면 밀밭이 저에게 밀을 줄 거고
그 밀을 방앗간에 가져다주면 방앗간 주인이 저에게 밀가루를 줄 거고
그 밀가루를 제빵사에게 가져다주면 제빵사가 저에게 빵을 줄 거고
그 빵을 돼지에게 가져다주면 돼지가 저에게 뻣뻣한 털을 줄 거고
뻣뻣한 털을 재봉사에게 가져다주면 재봉사가 저에게 실을 줄 거고
그 실로 제 작은 쥐의 찢어진 코를 꿰매 줄 거예요."
"싫은데."
매듭장이가 말했습니다.
"부탁한다고 누구나 다 들어주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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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언제나 새로운 광경을 선사 했다. 색채의 교향곡, 바람에 날리는 날렵한 구름, 기러기 때, 그리고 때때로 장엄하게 날아가는 콘도르나 독수리의 날갯짓. 밤은 수백만 개의 빛을 수놓은 검은 망토처럼 느닷없이 내려왔고, 나는 원주민들의 땀 냄새가 배어 있는 별빛들의 토속적인 이름을 배우게 되었다. - P95

나는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고장인 나우엘도 한꺼풀만 벗기면 추악함과 부도덕함이 쉽게 드러나는 곳 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나 리바스 부부는 그것이 인간 조건의 내재적 악이 아니라 무지와 빈곤에서 비롯된다고 거듭 말했다. "배고픈 상태보다 배부른 상태에서 더 남을 배려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단다." 그들은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어느 쪽에서든 선과 악이 모두 발생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마을에서는 연령대가 다양한 아이들을 열 명쯤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종종 외따로 떨어진 집들을 들르기도 했는데, 그런 곳은 신발도 신지 않은 꼬맹이 서너 명만 모을 수 있었다. 그래서 대체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어른들도 수업에 참여시키려 했는데, 그런 노력은 사실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글자를 모르고도 살았다는 건 글자가 필요하지 않아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P108

브루노 삼촌과 함께 나는 부화하는 모든 병아리와 정원에서 식탁으로 올라오는 모든 토마토의 생명의 기적을 축하했다. 그에게서 나는 주의 깊게 관찰하고 듣는 법, 숲에서 내 위치를 알아내는 법, 얼어붙은 강과 호수 에서 수영하는 법, 성냥 없이 불을 피우는 법, 수분이 많은 수박에 얼굴을 파묻고 즐거움에 나 자신을 내맡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사람이나 동물과 작별하는 어쩔 수 없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도 배웠다. 죽음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으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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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전한 브뤼주의 회색빛 거리!
위그는 자신의 영혼이 이 회색빛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흩어져 있는 이 침묵에, 오가는 사람 없는 이 공허함에 감염되고 있었다. 검은 외투를 걸치고 머리에는 옷에 달린 모자를 쓴 그림자를 닮은 몇몇 노파들만이 성혈 예배당에 가서 촛불을 켜고 난 뒤 돌아오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오래된 도시에서만큼 그렇게 많은 노파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이가 든 그들은 말을 이미 모두 다 소진해버린 듯 흙빛을 띤 채 침묵하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예전의 고통과 지금의 걱정거리에 열중하여 무턱대고 걷던 위그는 겨우 그들을 알아보았다. - P102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오래된 동네를 떠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고, 막연하게, 비통한 마음으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진흙탕 속을 거닐었다. 비는 더 서둘러 내렸다. 실을 뽑아내듯 빗줄기를 풀어내며 서로 얽혀 그 짜임은 점점 더 촘촘해졌고, 보이지 않는 그 축축한 그물 아래 위그는 점차 부드러워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는 다시 회상하기 시작했다···.


도시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이제 도시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 빗속에 녹아버리고 잠겨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토록 걸맞은 슬픔이라니! 바로 이 죽음의 도시 브뤼주에 비로부터 살아남은 가장 큰 높이의 종탑에서 들려오는 본당의 종소리가 여전히 쏟아져 내리며 슬퍼하고 있다! - P103

도시가 그에게 다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숭고한 백조의 존재로 인해 고귀해진 흐르지 않는 운하로부터 얻은 교훈, 과묵한 둑길이 보여준 체념이라는 본보기, 특히 언제나 멀리서 보이는 노트르담 성당과 성 살바토르 성당의 높은 종탑에서 나오는 경건하고 엄격한 충고. 위그는 그곳에서 피난처를 찾으려는 듯 본능적으로 눈을 들었다. 하지만 종탑은 그의 불행한 사랑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다. - P107

도시들은 특히 개성과 독자적인 기질을 지니고, 기쁨, 새로운 사랑, 금욕, 사별한 사람의 생활에 상응하는 거의 외재화된 특징을 지닌다. 모든 도시는 마음의 상태이며,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 이내 마음의 상태가 공기의 미묘한 변화와 함께 뒤섞여 감염되는 액체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퍼진다. - P110

그는 결국 조금씩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몰래 감시했다. 저녁에는 집 주변으로 가서 잠든 이 도시 브뤼주에서 밤에 돌아다니는 유령처럼 어슬렁거렸다. 그는 숨어서 살피고, 조마조마하게 멈춰 서고, 침묵이 흐르는 통로에서 사라져가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짤막한 초인종 소리를 듣고, 불이 켜진 창문 앞에서 밤늦도록 바람을 맞으며 밤을 지새우고, 블라인드에서 매초 두 개인 것처럼 보이는 실루엣이 중국 그림자놀이를 하듯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죽은 아내가 문제가 아니었다. 제인의 매력이 점차 그를 사로잡았고, 그녀를 잃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는 그녀의 얼굴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까지도 문제였다. 커튼의 주름에 떠다니는 그림자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그녀의 온몸 이미지가 밤의 반대편에서 불타오르는 것처럼 그려졌다···. - P130

그렇다! 그는 그녀 자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한밤중의 종소리에, 이 북쪽 지역에서 구름이 끊이지 않고 이슬비로 흩어져버려 계속해서 내리는 가는 비에 미칠 것 같으면서도 그녀를 지켜보며 고통을 느끼고 슬퍼할 정도로 질투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비가 점점 거세지는 와중에도 겨울이 끝날 무렵의 흐린 하늘 아래 녹아내린 눈, 진흙, 가슴이 저리는 온갖 슬픔 속에서 그녀를 엿보고, 안마당에서처럼 짧은 거리를 이리저리 오가고 몽유병 환자처럼 모호한 말들을 큰 소리로 내뱉으며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알아내고, 밝혀내고, 보고 싶었다···. 아!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대체 이 여인은 어떤 영혼을 지녔길래 그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걸까. 이와 다르게 그녀와 다른 영혼, 그러니까 너무나도 착한 죽은 아내의 영혼은 그의 고뇌가 극에 달한 이 순간, 한밤중에 일어나 달처럼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 P131

그는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원했다. 위그는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마음속으로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 없이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누가 알겠는가? 세상은 너무나도 악의로 가득하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극심한 고통을 느꼈던 꿈이 끝나버린 순간 앞에서 그는 갑자기 엄청난 고뇌에 사로잡혔다(사랑이 깨지는 건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는 작은 죽음과도 같다). 그런데 이 순간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제인과 이별 을 하고, 닮은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깨져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특히 이 도시와 마주했을 때, 그와 그 도시 사이에 더는 아무도 없이 자신만 홀로 남게 될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물론 이 돌이킬 수 없는 브뤼주, 그 회색빛 우울한 분위기는 그가 직접 선택했다. 그렇지만 종탑의 그림자가 지닌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리고 제인은 그녀에게 구속된 그의 영혼이 그 그림자를 느끼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 도시의 모든 것에 어쩔 수 없이 따를 것이다. 그는 종에 사로잡혀 홀로 남게 될 것이었다! 두 번째 사별을 겪는 것처럼 더욱더 혼자가 될 것이었다! 도시 역시 그에게는 한층 더 죽은 듯 여겨지리라. - P136

그녀는 말없이 내려갔다. 그리고 1층에 도착했을 때 생각이 바뀌었다는 듯, 아니면 호기심에 사로잡혔다는 듯 입구에서 문이 이미 열려 있는 응접실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몇 발자국 걸음을 내디뎠고 서로 연결된 두 개의 널따란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근엄한 모습이 자신을 책망하는 듯했다. 방도 얼굴을, 표정을 갖고 있다. 방과 우리 사이에는 순간적인 우정, 반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인은 푸대접을 받는다고 느꼈고, 자신이 그곳에서 비정상적이고 이방인인 것처럼 느껴졌으며, 거울과 대립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녀의 존재로 인해 그 변함없는 태도에 위협을 받는 낡은 가구에 적대감을 느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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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과 물 밖. 시끄러움과 고요함. 오늘은 끝까지 가볼래요? 아니요. 저는 안 갈래요. 왜 안 가요. 희주와 주호는 실랑이를 한다. 희주가 먼저 간다. 주호가 뒤따른다. 물이 흔들리고 물이 다. 딱 그만큼 몸이 흔들리고 몸이 흰다. 떠오르는 몸. 가라앉는 몸. 물을 밀어내는 만큼 밀려가는 몸. 밀어내는 만큼의 무게. 딱 그만큼 두 사람은 손안에 들어오는 물을 만진다. 움켜쥔다. 갈 수 있는 만큼 간다. - P98

오아시스가 인터뷰에서 "우리는 예전에 끝났어"라며 위악적으로 남긴 말은 재미있었다. 그걸 이렇게 바꿔서 속으로 읊기도 했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그러니까 엿같은 월급이나 내놔.‘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데에 유용했다. 머그잔에는 『노인과 바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 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탕비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내리며 그 문장이 자신에게 사치라는 걸, 자신은 패배는커녕 파괴되지도 않았다는 걸 분명히 해두었다. - P115

"교사는 감사한 직업이고, 가끔은 아주 감사한 직업이에요. 학생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예요." - P116

곽은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를 밤마다 거리로 내모는 사회가 새삼 무서웠다. 각자의 삶에서 이 수업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차라리 오십 분의 숙면이 더 귀할 수도 있 지 않을까. 그들을 교실에 가두는 것은 어른들의 욕심이 아닐까. 엎드린 이 학생, 그리고 저 학생도, 억압적인 제도 교육에 대하여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속 바틀비처럼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그러니까 잠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아닐까. - P123

수업에서 소개하는 고전에 귀를 기울이는 게 장기적으로는 더 뛰어난 성취와 풍요로운 삶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문제집 아래 깔린 학습지에 곽 스스로 적어둔 것이 있었다.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의 행동이 설사 그 자신의 이익과 상충되는 듯 보이더라도, 그러할 자유를 보장하는 게 포괄적 공리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좋은 수업이란 훌륭한 예술품이 그러하듯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야 했다.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한 미성년자의 자유는 제한할 수 있다는 구절도 기억났으나, 밀이 같은 논리로 당시 식민지인에 대한 지배도 정당화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했다. 3월이 끝나갈 무렵 곽은 주체, 타자, 대상화, 전유, 포섭, 폭력 같은 단어들이 섞인 일기를 이렇게 끝맺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나의 식민지가 아니다.‘ - P124

왜 마르크스만 문제가 되나. 마르크스를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는 게 공자를 읽고 유교 원리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위험한가. 따지자면 추천 도서 중에서 카뮈의 『이방인』이 제일 위험하지 않나. 학생이 자기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대낮의 태양에 눈이 부셔서 아랍인을 총으로 쏠지도 모르니까.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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