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분노와 수치심이 들끓었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다리가 뻐근하게 쑤셔 왔다. 그렇다. 작품, 작품에 대한 자부심, 작품 그 자체의 귀한 가치······. 고통이 심해지기만 하면 그 모든 가치들이 검은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애니가 그런 꼴로 만들어 버릴 거라는 사실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작가라고 여기며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살아온 그를 애니가 그런 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폴로 하여금 애니를 너무 끔찍해서 도망쳐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게끔 했고, 애니가 그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그의 안에 들어 있는 무언가를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 P60
인사불성이 되어 편안하게 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인사불성은 폴의 초대를 거절했다. 대신 ‘30시간째‘가 찾아왔고 그 뒤 에 ‘40시간째‘가 찾아왔다. ‘고통왕‘ 과 ‘너무 목말라‘ 가 합체해서 한 마리가 되었다. (‘나 배고파‘는 오래전에 흙먼지 속으로 뒤처져 버렸다.) 폴은 자신이 현미경 검사판 위에 올려진 납작한 세포 쪼가리나 낚싯바늘 끝에 꿰인 지렁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하염없이 꿈틀대며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잖은가. - P79
애니가 재빠르게 주먹으로 원고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세 번 튀어나왔다. 19만 단어짜리 필생의 역작을 눈앞에 두고 폴은 고통 없이 평온한 상태가 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19만 단어짜리 필생의 역작을 눈앞에 두고, 폴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분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짐을 느꼈다. 알약. 알약. 망할 놈의 알약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필생의 역작이란 건 허울 좋은 허상일 뿐이지만, 알약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 P86
‘어휴, 네가 무슨 로마 시대 때 적에 맞서 홀로 다리를 지켰다는 호라티우스라도 돼? 도대체 그런 짓을 해서 누굴 감동시키겠 다는 거야? 너 이게 영화나 텔레비전 쇼인 줄 아냐? 용기를 과시 해서 청중들한테 점수 따고 싶은 거야? 애니의 소원을 들어주든가 아니면 버티는 수밖에 없어. 버티면 넌 죽고, 그러면 애니는 그냥 원고를 태워 버리면 그만이야. 이젠 어쩔 거야? 침대에 누워서 그깟 책 때문에 고통당할 거야? 이제까지 출간된 ‘미저리‘ 시리즈 중 가장 적게 팔린 책의 반만큼도 안 팔릴 책 한 권 때문에? 피터 프레스콧 같은 평론가가 위대한 문학의 전당 《뉴스위크》에다 가장 고상하고 신사적인 방식으로 비꼬고 욕하는 평론 기사나 써 댈 그런 책 때문에? 야, 야. 정신 차려! 갈릴레오 같은 위인도 사람들이 심각하게 밀어붙이니까 바짝 쫄아서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걸 알아야지.‘ - P87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마음속의 기회주의자가 저질러 버리라고 선동했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는 혼수상태 직전의 패배한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울부짖었다. ‘19만 단어짜리! 필생의 역작! 2년간의 고단한 작업이 일구어 낸 작품!‘ 그리고 진정한 핵심은 이것이었다. ‘진실! 염병할 진실에 관하여 네가 알아낸 것이잖아!‘ - P88
항상 그랬듯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축복받은 안도감이 느껴졌고, 눈부신 빛으로 충만한 구멍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원하는 만큼 훌륭하게 써내지 못할 거라는 우울한 예감이 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작품을 끝내 완성할 수 없을 거라는,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 막다른 벽에 쏜살같이 부딪칠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항상 그랬듯이 여행을 시작한다는 놀랍고도 기쁘고 벅찬 설렘이 온몸을 휘감았다. - P90
다른 추리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엉성할지도 몰랐지만, 애니 윌크스를 바라보는 이런 시각은 지브롤터 해협의 험준한 바위산처럼 견고했다. 폴은 『미저리』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한 경험이 있어서 신경 불안과 정신 이상에 관해 보통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폴이 알기로 단순한 신경증과 정신병의 경계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는 환자의 경우 극도의 우울증과 공격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쾌활한 흥분 상태가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데, 그 모든 감정들 밑에는 우쭐대기 좋아하며 상처받기 쉬운 자아가 깔려 있고, 그런 자아는 모든 타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으며 자기가 위대한 드라마 속의 주인공으로 산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본성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수 백만 명이 폭발할 날만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 P105
그들의 자아는 연속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철저하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일련의 생각들은 예측이 가능하다. 모두들 같은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사람의 사고는 생각하고 있는 주제에 관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목표, 상황, 또는 어떤 인물에까지 도달한다. (또는 환상을 꿈꾸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신경증 환자는 통제 가능한 현실과 통제 불가능한 환상이 서로 다름을 인식하지만, 정신병 환자는 그 둘을 하나로 보고 똑같이 취급한다.) - P105
폴과 타자기가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도록 남겨 둔 채 애니는 발랄한 소녀처럼 방을 뛰쳐나갔다. 애니가 등을 돌리는 순간 폴의 웃음이 사라졌다. 타자기의 웃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폴은 이 상황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때 이미 단번에 꿰뚫고 있었다. 직접 손으로 쳐 보기도 전에 타자기에서 어떤 소리가 날지, 그 타자기 특유의 웃는 표정 사이로 흘러나오는 옛날 만화 주인공 더키 대들스처럼 요란하게 딸깍딸깍거리는 소리가 어떨지 훤히 알 수 있었듯이 말이다. - P116
폴은 턱을 가슴뼈 있는 곳까지 푹 숙이고 겁에 질렸으면서도 영악함이 묻어 나오는 눈으로 잽싸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약을 금방 먹었으니 아직 약효가 나타날 때가 아님을 잘 알았지만, 이미 약 기운이 느껴졌다. 약을 먹는 행위보다 약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깊숙이 마음에 와 닿는 듯했다. 마치 달과 바닷물의 통제권을 선사받은 기분이었다. 또는 직접 가서 뺏어 온 기분이었다. 웅장하고 장엄한 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죄의식이 들게 하는 무서운 생각이기도 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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