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분노와 수치심이 들끓었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다리가 뻐근하게 쑤셔 왔다. 그렇다. 작품, 작품에 대한 자부심, 작품 그 자체의 귀한 가치······. 고통이 심해지기만 하면 그 모든 가치들이 검은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애니가 그런 꼴로 만들어 버릴 거라는 사실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작가라고 여기며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살아온 그를 애니가 그런 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폴로 하여금 애니를 너무 끔찍해서 도망쳐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게끔 했고, 애니가 그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그의 안에 들어 있는 무언가를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 P60

인사불성이 되어 편안하게 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인사불성은 폴의 초대를 거절했다. 대신 ‘30시간째‘가 찾아왔고 그 뒤 에 ‘40시간째‘가 찾아왔다. ‘고통왕‘ 과 ‘너무 목말라‘ 가 합체해서 한 마리가 되었다. (‘나 배고파‘는 오래전에 흙먼지 속으로 뒤처져 버렸다.) 폴은 자신이 현미경 검사판 위에 올려진 납작한 세포 쪼가리나 낚싯바늘 끝에 꿰인 지렁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하염없이 꿈틀대며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잖은가. - P79

애니가 재빠르게 주먹으로 원고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세 번 튀어나왔다. 19만 단어짜리 필생의 역작을 눈앞에 두고 폴은 고통 없이 평온한 상태가 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19만 단어짜리 필생의 역작을 눈앞에 두고, 폴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분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짐을 느꼈다.
알약. 알약. 망할 놈의 알약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필생의 역작이란 건 허울 좋은 허상일 뿐이지만, 알약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 P86

‘어휴, 네가 무슨 로마 시대 때 적에 맞서 홀로 다리를 지켰다는 호라티우스라도 돼? 도대체 그런 짓을 해서 누굴 감동시키겠 다는 거야? 너 이게 영화나 텔레비전 쇼인 줄 아냐? 용기를 과시 해서 청중들한테 점수 따고 싶은 거야? 애니의 소원을 들어주든가 아니면 버티는 수밖에 없어. 버티면 넌 죽고, 그러면 애니는 그냥 원고를 태워 버리면 그만이야. 이젠 어쩔 거야? 침대에 누워서 그깟 책 때문에 고통당할 거야? 이제까지 출간된 ‘미저리‘ 시리즈 중 가장 적게 팔린 책의 반만큼도 안 팔릴 책 한 권 때문에? 피터 프레스콧 같은 평론가가 위대한 문학의 전당 《뉴스위크》에다 가장 고상하고 신사적인 방식으로 비꼬고 욕하는 평론 기사나 써 댈 그런 책 때문에? 야, 야. 정신 차려! 갈릴레오 같은 위인도 사람들이 심각하게 밀어붙이니까 바짝 쫄아서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걸 알아야지.‘ - P87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마음속의 기회주의자가 저질러 버리라고 선동했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는 혼수상태 직전의 패배한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울부짖었다.
‘19만 단어짜리! 필생의 역작! 2년간의 고단한 작업이 일구어 낸 작품!‘
그리고 진정한 핵심은 이것이었다.
‘진실! 염병할 진실에 관하여 네가 알아낸 것이잖아!‘ - P88

항상 그랬듯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축복받은 안도감이 느껴졌고, 눈부신 빛으로 충만한 구멍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원하는 만큼 훌륭하게 써내지 못할 거라는 우울한 예감이 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작품을 끝내 완성할 수 없을 거라는,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 막다른 벽에 쏜살같이 부딪칠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항상 그랬듯이 여행을 시작한다는 놀랍고도 기쁘고 벅찬 설렘이 온몸을 휘감았다. - P90

다른 추리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엉성할지도 몰랐지만, 애니 윌크스를 바라보는 이런 시각은 지브롤터 해협의 험준한 바위산처럼 견고했다. 폴은 『미저리』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한 경험이 있어서 신경 불안과 정신 이상에 관해 보통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폴이 알기로 단순한 신경증과 정신병의 경계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는 환자의 경우 극도의 우울증과 공격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쾌활한 흥분 상태가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데, 그 모든 감정들 밑에는 우쭐대기 좋아하며 상처받기 쉬운 자아가 깔려 있고, 그런 자아는 모든 타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으며 자기가 위대한 드라마 속의 주인공으로 산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본성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수 백만 명이 폭발할 날만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 P105

그들의 자아는 연속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철저하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일련의 생각들은 예측이 가능하다. 모두들 같은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사람의 사고는 생각하고 있는 주제에 관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목표, 상황, 또는 어떤 인물에까지 도달한다. (또는 환상을 꿈꾸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신경증 환자는 통제 가능한 현실과 통제 불가능한 환상이 서로 다름을 인식하지만, 정신병 환자는 그 둘을 하나로 보고 똑같이 취급한다.) - P105

폴과 타자기가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도록 남겨 둔 채 애니는 발랄한 소녀처럼 방을 뛰쳐나갔다. 애니가 등을 돌리는 순간 폴의 웃음이 사라졌다. 타자기의 웃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폴은 이 상황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때 이미 단번에 꿰뚫고 있었다. 직접 손으로 쳐 보기도 전에 타자기에서 어떤 소리가 날지, 그 타자기 특유의 웃는 표정 사이로 흘러나오는 옛날 만화 주인공 더키 대들스처럼 요란하게 딸깍딸깍거리는 소리가 어떨지 훤히 알 수 있었듯이 말이다. - P116

폴은 턱을 가슴뼈 있는 곳까지 푹 숙이고 겁에 질렸으면서도 영악함이 묻어 나오는 눈으로 잽싸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약을 금방 먹었으니 아직 약효가 나타날 때가 아님을 잘 알았지만, 이미 약 기운이 느껴졌다. 약을 먹는 행위보다 약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깊숙이 마음에 와 닿는 듯했다. 마치 달과 바닷물의 통제권을 선사받은 기분이었다. 또는 직접 가서 뺏어 온 기분이었다. 웅장하고 장엄한 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죄의식이 들게 하는 무서운 생각이기도 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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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볼 때, 어둠의 심연도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프리드리히 니체— - P13

고통은 소리 아래 어딘가에 있었다. 고통은 태양의 동쪽과 그의 귀 남쪽에 있었다. 확실히 아는 것이라곤 그게 다였다.
아주 오래전부터인 듯한 긴 시간 동안(그리고 고통과 폭풍에 뒤 덮인 안개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물이었던 때부터) 그 소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유일한 자극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고 싶었지만, 여름철 먹구름처럼 마음을 가득 채운 고통에 젖은 안개 속에서는 스스로 죽고 싶어 한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 P16

반쯤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말뚝과 현재의 상황을 연관 지을 수 있었다. 깨달음이 마치 손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고통은 바닷물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기억 속에 각인된 꿈의 교훈이었다. 고통은 단지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일 뿐, 말뚝과 같았다. 때로는 덮여 있었고 때로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항상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 고통이 짙고 단단한 회색 구름에 가려 그를 괴롭히지 않을 때, 바보스럽게도 그는 감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속지 않았다. 고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면서 다시 드러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고통은 두 개의 말뚝이었고, 마음으로 사실을 받아들이기 오래전부터 그의 일부는 그 부서진 말뚝들이 곧 그의 부서진 두 다 리를 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 P19

무엇보다 폴을 불안하게 한 것은 애니의 딱딱함이었다. 애니의 몸속에는 혈관도 내장도 없을 것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직 딱딱한 애니 윌크스일 것만 같았다. 폴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애니의 눈이 사실은 그려 넣은 것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했으며, 초상화가 걸린 방 안에서는 어디로 움직이든 간에 초상화 속 인물의 눈이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했다. 만약 두 손가락으로 V를 만들어 애니의 콧구멍을 찔러 보면 (만약 들어갈 틈이 있다면), 손가락이 구멍 속으로 1센티미터도 못 들어가서 딱딱한 장애물에 부딪칠 것 같았다. […] 그러므로 애니를 열광적인 숭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우상으로 여긴 폴의 생각은 사실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상처럼, 애니는 오직 한 가지만을 전해 주었다. 자꾸만 두려움으로 짙어지는 불안한 감정을. 우상처럼, 애니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 P23

"아니, 물론 그건 아니에요. 내 말은 그저······."
‘그저 지갑 안에 내 나머지 인생이 들어 있으니까 물어본 거지.
이 방을 벗어난 나의 인생이. 고통을 벗어난 나의 인생이. 시간이 마치 지루해진 꼬마가 길게 잡아당긴 입속의 풍선껌처럼 죽죽 늘어지는 이곳에서 벗어난 나의 인생이. 알약이 오기 바로 전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인생은 그렇게 엿가락처럼 늘어졌던 거야.‘ - P26

애니가 긴장을 풀었다. 웃었다. 균열이 닫혔다. 여름 꽃들이 다시 흥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폴은 그 웃음 속으로 손을 뻗었다가는 여차하면 튀어나오길 기다리는 어둠을 만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 P27

폴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려 할 때마다 불쾌한 이미지들이 끼어들었다. 애니의 멍한 모습, 볼 때마다 우상과 암석을 연상시키던 애니의 모습, 그리고 노란 플라스틱 양동이가 무너져 내리는 달덩이처럼 얼굴로 돌진하던 모습. 그런 모습들을 떠올린다고 해서 처한 상태가 바뀔 리 없었고, 사실 아예 아무런 생각도 안 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지만, 일단 애니 윌크스와 그 집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생각나는 것이라곤 불쾌한 이미지들뿐이었고, 그 이미지들은 또 다른 불쾌한 이미지들을 줄줄이 불러올 것 같았다. 두려움과 약간의 수치심으로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고동칠 것 같았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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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수많은 정전이 공존했다. 비평가들은 서로 다른 정전의 목록을 작성하며 충돌했다. 반대자는 늘 반대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세대마다 좋은 취향(내 것)과 저속한 것(네 것)을 구별해왔다. 모든 문학적 흐름은 기존의 것을 비우고 제가 좋아하는 것으로 그 자리를 채워왔다. 그러니 결국엔 시간의 문제였다. 키케로는 혁신적인 카툴루스를 재능 없는 젊은이라고 생각했고, 카루스는 카이사르를 싫어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다 같이 로마의 정전으로 들어왔다. 에밀리 디킨슨은 생전에 단 일곱 편만의 시를 출판했으며 편집자들은 그녀가 쓴 글의 구문과 구두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앙드레 지드는 갈리마르 출판사에 들어온 프루스트의 원고를 거부했다. 보르헤스는 잡지 《엘 수르》에 「시민 케인」에 대한 혹독한 비평을 써놓고 나중엔 쓰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 P475

고전은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고, 다가올 시대를 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 고전은 매일 매일 시험받는 과정에서 온전히 출현한다. 암울한 시기를 지나도 그 지속성은 깨지지 않는다. 역사적 전환점을 극복하고, 심지어 파시즘과 독재에 의해 봉헌된 죽음의 입맞춤에서도 살아 남는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예이젠시테인(Sergei Bisenstein) 의 선전 영화도, 나치를 위한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선전 영화도 여전히 우리에게 뭔가의 인상을 남기고 있다. - P475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은 종이 재활용 업체에서 일한 바 있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출판하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는 지하실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동굴은 축축하게 썩은 종이로 지옥 같은 악취를 풍긴다. 일주일에 세 번 트럭이 종이뭉치를 역으로 가져가 마차에 싣고 제지공장으로 운반한다. 그러면 그곳 작업자들이 종이를 녹이는 알칼리와 산이 든 탱크에 종이뭉치를 내던진다. 책과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훌륭한 작품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파괴를 막을 길은 없다.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사랑 넘치는 정육점 주인일 뿐이다."라고 적는다. 그의 업무는 지하실에 들어오는 책의 마지막 독자가 되는 것, 그리고 책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이다. - P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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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르륵 소리를 내며 쉼 없이 흔들리던 나무가 움직임을 멈췄다. 저수지 수면에 윤슬이 반짝이며 빛났다. 바람이 멎고 새들도 지저귀지 않고 고요해졌다. 그때 어디선가 높은 휘파람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휘이이–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슬프기도 신비롭기도 한 귀신 새 울음소리. 12년 전 아득히 먼 곳에서 넘어와 지금 여기에 도착한 듯 한 소리. - P251

"한 번 깨진 관계는 다시 붙일 수 없다고 하는 건 비유일 뿐이야. 이렇게 생각해 봐. 우리는 깨진 게 아니라 조금 복잡하게 헝클어진 거야. 헝클어진 건 다시 풀 수 있어." - P252

도담은 불안이 익숙했다. 어쩌면 도담은 해솔과 운명처럼 얽힌 그 불안 자체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P281

도담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해솔에 대한 도담의 마음은 연애 감정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할머니의 사랑과 비슷할 것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하는 사랑처럼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이건 한때 끓고 식는 종류의 마음이 아니다. 남들이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도담은 그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다짐했다.
[…]
"난 빠진 게 아니라 사랑하기로 내가 선택한 거야." - P286

삶이 반복된다는 불안은 도담이 잘 아는 감정이었다. 승주가 내내 불안하게 생각해 오던 일이 기어이 찾아와 현실이 되었다는 점에서, 도담은 승주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다. 한편으론 화를 내고 애절하게 붙잡는 승주의 반응을 보니 다행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승주에게는 승주의 문제가 있었다. 도담은 조금 안심이 됐다. - P287

그러나 안전거리를 둔다고 이별이 쓰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자신에게 밀려드는 후회의 감정이었다. 승주는 자신의 계산이 틀렸음을 알았다. 문제는 거리가 아니었음을, 지금 승주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조차도. - P288

그때 깨달았어. 사랑한다는 말은 과거형은 힘이 없고 언제나 현재형이어야 한다는 걸. - P290

오랜 시간 외면하고 회피했던 창석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자 창석이 살아 있을 때 싸우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해졌다. 죽음. 모든 가능성이 종료되고 더는 회복할 수 없는 것.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게 삼켜 버리는 것. 창석은 그 무서운 것과 싸우던 사람이었다. 창석이 하던 일은 생명을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않도록 맞서는 일이었다. - P292

도담에게 있어서 타인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무언가를 감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 내밀면 함께 빠지지 않을까. 언제부턴가 도담은 먼저 손 내밀지 않았다. 사람이 무언가를 기꺼이 감수 하려는 마음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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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솔은 한참 입술을 움찔거리며 머뭇거리다 말았다. 도담은 답답하고 뭔지 궁금했지만 불편했기에 캐묻지는 않았다. 알 것 같았다. 해솔이 그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신을 보는 해솔의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 안에 슬픔이 있었다. 미안함이 있었다. 어쩌면 원망의 눈빛도······ - P130

평소 예지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랑 예찬론자였다. 도담은 예지가 그렇게 사랑을 최고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직 사랑에 충분히 당하지 않아서라고 믿었다. 도담은 불행의 크기를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양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다. 도담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이 가장 크고 가장 값졌다. - P135

"사랑을 믿는다는 게 대체 뭔데.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내 말은, 음······ 사랑이 무엇보다 큰 힘을 가졌다는 거야." 그 큰 힘이 아빠를 정신도 못 차리게 바보로 만들어 급류에 휩쓸리게 했나. 오직 사랑만이 최고라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말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랑은 종교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사랑만이 답이라는 허술한 교리를 가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랑을 믿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사랑스럽지 않겠지. 도담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도담에게는 하늘을 나는 빗자루만큼 현실과 먼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 P136

"배신감보다도 관계를 잃었다는 게 더 괴롭더라고요. 그 이후로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과거 때문에 연애는 안 하고 애매모호한 만남만 한다고요? 에이, 핑계 좋네요." 어쩐지 도담의 입에서는 냉소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승주가 사랑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남자이면서 그런 자신을 잘 포장한 것 같았다.
"그런가요?"
승주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도담은 아차, 싶었다. 무례했다. 어쩌면 승주는 자신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한 걸 수도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과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20대 내내 도담이 극복하려 했던 것이었다.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구나. 도담은 익숙한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왜 그랬을까. 상처를 받고 위험을 피하려는 승주의 모습이 나와 비슷해서 싫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승주에게 다른 뭔가를 기대했던 걸까. - P195

선화가 걱정할까 봐 말하지는 않았지만 민재가 느끼기에도 해솔은 문제가 있었다. 이번 일도 막말로 운이 좋았던 거지, 거의 자살 행위였다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끔찍한 현장을 계속 겪으면서 사람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처음엔 우울증이나 PTSD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것과 다른 뭔가가, 직업적 사명감과도 다른 종류의 무언가가 해솔에게 있었다. 동료들 모두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하지만 해솔은 정말 목숨을 던질 기세였다. 다른 사람을 구조하는 데는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이면서 자신을 구하는 데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동료로서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걱정이 더 컸다. 누군가는 해솔을 말려야 했다. - P206

해솔과 얽힌 사연 때문에 연상되는 슬픔. 같은 상처를 가진 동질감. 연민이다. 우리가 보통 지독한 인연은 아니지. 해솔과의 재회에 운명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건 우연에도 인과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이다. 추억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 버린 한때에 대한 슬픔일 수도.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걱정하고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 꽉 끌어안고 안기고 싶은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시커먼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 P226

도담은 감정에 솔직하다는 핑계로 대책 없이 저지르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자신의 수영 실력도 모른 채, 구명조끼도 없이 수심도 파고도 모르는 물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 같았다. - P227

"도담 씨, 그런 얘기 들어 본 적 없어? 7년인가 지나면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가 교체된대. 10년이면 도담 씨 온몸의 세포가 교체된 거야. 그러면 이제 도담 씨도 그 사람도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 P227

"너 때문이 아니야. 나는 출동을 나가서 매일 사고 현장을 목격해.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도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 자다가 말벌에 쏘여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음주운전을 한 운전자는 살아남고, 아무 잘못 없는 가족이 사망하는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져. 그런 현장을 수두룩하게 겪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신도 없고 인과응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져.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무도 바라지 않은 일이 었다는 걸, 뜻밖의 사고였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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