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은 그 소유자를 파괴하는 법, 이념을 품는다는 것은 가슴에 시한폭탄을 품은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그 이념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고 만다. - P201

이념이, 명분이 밥 먹여주나. 이 어려운 세월에 그건 오히려 입으로 가져가는 밥숟갈을 빼앗아가는 생존의 적이 아니냐. 이념이나 명분에 집착하는 것은 편집증일 뿐이다. 이념이란 사물을 바라보는 한가지 선입견에 불과하다. 선입견을 좀 바꿔 바라보자. […] 너무 외곬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감정의 혹사가 아닌가. 감상주의가 아닌가. - P204

너는 어서 골목길을 벗어나고 싶어 걸음을 빨리한다. 의사가 너에게 뭐라고 말했나. 날 저문 날 공장데기 아이가 길 잃기 쉬운 곳이란다. 공장 문은 닫히고, 놈팽이는 군대 가버리고, 돈은 떨어져, 고향엔 무조건 가기 싫고······ 그럴 땔수록 길을 잃기 쉽단다. - P217

동숙이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넓은 공터 가운데로 뚫려 있다. 알싸한 쓰레기 냄새. 어둠속에서 연탄재들이 발에 툭툭 차인다. 동숙이를 만나면 먼저 무슨 말을 할까? 뭐라고 거짓말을 둘러대지? 사실대로 말할까봐. 너무 피곤해. 거짓말할 힘도 없어. 따뜻한 아랫 목에 동숙이랑 나란히 누워 언 등허리를 녹이고 싶어.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싶어. 동숙아, 나 많이 다쳤나봐. 나 좀 만져줘. 이 겁먹은 응어리를 으깨뜨려줘. 난 금붕어를 죽여버리고 말았어. - P224

남자 손이 떠났다. 그 흉측스럽고 뻔뻔한 얼굴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주위에는 모두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뿐. 그 엉큼한 손은 어디로 사라졌나? 승객들은 허공의 우연한 한점 혹은 앞 사람의 뒤통수에 눈을 둔 채 멍청하게 굳어져 있다. 그것은 버스를 타고 한참 흔들리다보면 누구나 자연히 터득하게 되는 굳은 껍질이다. 치면 둔중한 금속성이 날 것 같다. 땀 젖고 끈적거리는 그 엉큼한 손은 어디로 빨려들어갔나? 모두 저렇게 단단히 굳어버렸는데 그 멀컹한 손을 무슨 수로 찾아낸단 말인가?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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