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성은 고대부터 화롯불 곁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민요를 부르고 시를 엮어왔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속삭임으로 전승 되어온 이야기의 우주를 내게 펼쳐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는 우연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은 밤에 이야기의 기억을 풀어내는 일을 맡아왔다. 그녀들은 이야기의 직조자였다.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물레를 돌리며 이야기의 실을 감았다. 그녀들은 그물망을 쳐서 세계를 불든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은 기쁨, 환상, 고뇌, 공포, 내밀한 믿음을 엮어나갔다. 그녀들은 단조로운 세계에 색깔을 입혔다. 그녀들은 동사와 털실을, 형용사와 실크를 얽어 짰다. 그래서 텍스트(text) 와 직물(textile)은 수많은 단어를 공유한다. 우리는 줄거리의 씨실과 날실을 엮고, 논쟁의 매듭을 짓고, 서사의 갈등을 풀어내며, 연설을 미려한 말들로 수놓는다. 그렇기에 고대 신화가 페넬로페의 천, 나우시카의 튜닉, 아라크네의 자수, 아리아드네의 실, 모에라이가 관장하는 목숨의 실, 셰에라자드의 마법의 양탄자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주는 것이다. - P490
인종, 피부색, 출신지가 아닌 무엇으로 스코틀랜드,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카파도키아, 모리타니 주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을까? 방대한 확장을 통해 로마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열망을 공유하고, 하나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건 언어, 사상, 신화, 책이라는 날실이었다. - P495
스티븐 그린블랙(Stephen Greenblatt)이 지적하듯, 고대 세계에는 문화의 핵심이 책의 무한한 생산이던 시절(아주 긴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그 많은 책을 어디에 뒀을까? 어떤 방식으로 선반에 정리했을까? 그 방대한 지식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이런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이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책은 점진적으로 대량 멸종을 맞이했다. 끝나버렸다. 그리하여 안정적으로 보이던 것은 깨지기 쉬웠음이, 영원하다고 믿었던 것은 일시적이었음이 드러났다. - P496
새로운 시대가, 우리를 정의하던 사상들이 심연의 벼랑 끝에 몰린 수백 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병사들의 횃불과 책을 좀먹는 벌레들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의 꿈은 다시금 위험에 처했다. 인쇄기가 발명 될 때까지 수천 년에 걸친 지식을 보존하던 극소수의 사람들은 영웅적이면서도 거의 불가능한 구조 작업에 착수했다. 모든 것이 파멸되지 않은 이유,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사상과 과학적 업적과 상상력과 법률이 살아 있는 이유는 수 세기에 걸친 탐색과 실험 끝에 얻은 책이라는 단순한 완벽함 덕분이었다. 책 덕분에, 그리고 어둠 속의 여행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역사는, 스페인의 철학자 마리아 삼브라노(Maria Zambrano)가 지적하듯, 언제나 재탄생을 위한 길을 지니고 있었다. - P498
책의 발명은 파괴에 저항한 우리의 끈질긴 투쟁에서 가장 큰 승리일 것이다. 우리는 잃지 않고 싶은 지혜를 갈대, 가죽, 천, 나무, 빛에 맡겼다. 그것들의 도움으로 인류는 발전과 진보라는 경이로운 역사를 경험했다. 우리의 신화와 지식이 담긴 책은 세계 각지에서 수 세기에 걸쳐 이어진 여러 세대의 독자를 통합하여 협력의 가능성을 배가한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rg)는 「책벌레 멘델」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은 우리의 숨결을 초월하여 인간을 하나로 묶어내고 무상과 망각에 맞서 우리를 지켜내기 위해 존재한다." - P503
수 세기 동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언어와 지식을 잊어버렸듯이, 이 모든 발견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어로 작품활동을 한 영국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 (Elias Canetti)는 이렇게 답했다. "한 시대가 이전 시대와 단절되고 세기가 탯줄을 끊어버린다면 우리는 미래가 없는 우화밖에 만들지 못할 것이다. 질식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 P504
유럽의 토대를 마련한 문명들의 특징이 창의성, 화려함, 폭력, 분노의 이상한 조합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불안은 거의 후기 근대성의 공리이다. 유럽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해 중 하나였던 1940년, 점령당한 프랑스에서 탈주한 발터 베냐민은 이렇게 썼다. "문화에 대한 기록은 동시에 모두 야만에 대한 기록이다." 이성의 영역에서 야만이 지속되고 계몽이 악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뼈아픈 증거에 직면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1942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P505
우리는 누구든 불완전한 선조 를 정당하게 비난할 수 있고, 또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모순과 둔감함을 진단하게 될 후손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문학을 흑백 잣대로 단순화하려는 충동을 물리친다면 문학을 훨씬 잘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이해하는 통찰력을 키울수록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자 여행가인 페르난도 산마르틴(Fernando Sanmartin)은 이렇게 썼다. "과거는 우리를 정의하고,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우리를 정신분석이나 위장으로, 마약이나 신비주의로 이끌기도 한다. 독자인 우리에게 과거는 책 속에 있다. 좋건 나쁘건 말이다. 우리가 읽는 옛 책들은 오늘날에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열정이나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페이지를 마주하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은 언제나 하나의 메시지이다." - P506
책은 끔찍한 사건을 정당화하기도 했지만, 과거에 인류가 건설한 최고의 이야기, 상징, 지식, 발명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우리는 한 노인과 그의 아들을 살해한 살인자 사이의 가슴 아픈 화해에 관해 깊이 생각해본다. 사포의 시에서 우리는 욕망이 저항의 한 형태임을 발견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우리는 타자의 관점을 배우게 되고, 『안티고네』에서 우리는 국제법의 존재를 엿본다. 『트로이아 여인들』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야만성에 직면하며, 호라티우스의 글에서 우리는 "감히 알려고 하라."라는 문장을 만난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에서 우리는 쾌락을 엿보고, 타키투스의 책을 통해 우리는 독재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며, 세네카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최초의 평화주의자의 외침을 듣는다. 책은 우리에게 시들지 않는 선례를 물려주었다. 인간의 평등, 지도자 선택의 가능성, 아이들에게 노동보다 교육이 낫다는 직감, 병자와 약자와 노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 등, 이 모든 발명은 고대의 발견, 즉 불확실한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고전을 통해 가능했다. 책이 없었다면 우리 세계의 가장 좋은 것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 P506
그렇다면, 이야기란 무엇인가? 그건 말의 연속체이다. 폐를 떠나 후두를 통과하는 공기의 흐름이 성대에서 진동하고 혀가 입천장, 치아, 입술을 어루만지며 최종적인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깨지기 쉬운 것을 구해내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인류는 글과 책을 발명함으로써 절대적 파괴에 맞섰다. 그 발견 덕분에 타인과 만날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 생성됐고 사상의 기대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책에 대한 사랑은 신비롭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사슬을 만들어냈으며, 세월을 따라 훌륭한 이야기와 꿈과 사유의 보물을 구해냈다. - P511
이 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음유시인, 발명가, 필사가, 도안가, 사서, 번역가, 서점 운영자, 노점상, 선생, 현자, 스파이, 반역자, 여행자, 수녀, 노예, 모험가, 인쇄업자가 만들어낸 놀라운 집단적 모험이자 신비로운 충성심으로 단결한 그들의 가려진 열정이다. 사교 클럽에서, 집에서, 요란한 바다에 인접한 산봉우리에서, 에너지가 집중된 도시에서, 혼돈의 시기에 지식의 피난처가 된 외딴 지역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잊힌 사람들. 익명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우리를 위해 그리고 미래를 살아 갈 사람들을 위해 투쟁했다. - P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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