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는 자기가 심각한 신경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필요한 약 상자들 각각의 위치를 주의 깊게 기억해 두고 있을지도 몰랐다. 한번 쓱 살펴보기만 해도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순서에 뭔가 이상이 생겼음을 즉시 눈치 챌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무섭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할 뿐이었다. 약이 필요했고, 어떻게든 침실을 빠져나와 마침내 약을 구했다. 결국 발각돼서 처벌된다 해도 적어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동안 애니가 한 짓들을 생각해 보건대, 그때 폴이 느낀 체념은 확실히 최악의 징조였다. 체념은 곧 애니가 폴을 어떠한 확실한 선택권도 가질 수 없는 고통에 찌든 한 마리 짐승으로 전락시켰다는 증거였다. - P161

폴은 한동안 날름쇠를 멍청하게 쳐다보면서 해군의 오랜 격언을 생각했다.
‘잘못될 조짐이 보이는 일은 결국 잘못된다.‘ - P171

‘네가 말하는 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uchim라는 거야. ‘기계 장치에서 나타난 신‘이라는 뜻인데,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다급할 때마다 신이 갑자기 기계 장치를 통해 나타나서 위험을 해결해 버리는 데서 유래한 말이지. 극작가가 글을 쓰다 영웅이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궁지에 몰리면, 꽃으로 장식한 기계 의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집어넣는 식이지. 영웅이 그 의자에 올라타면 하늘로 끌어 올려져서 위험에서 벗어나는 거야. 아무리 멍청한 시골뜨기라도 그 장면에 숨어 있는 상징성은 알아볼 수 있어. 영웅은 신에게 구원받은 거야. 그런데 가끔씩 전문 용어로 ‘케케묵은 비행기 좌석 밑에 낙하산 수법‘ 이라고 불리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1700년경이 되자 마침내 유행이 끝나 버렸어. 물론 『로켓맨』 시리즈나 『낸시 드루』 추리 소설 문고 같은 만병통치 장르에서는 예외였지만. 애니, 넌 그 소식을 못 들었나 보구나.‘ - P193

폴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상상은 할 수 있었다. 그의 원고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옳지 않다고 항변하는 애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애니는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고, 옳지 않은 이유를 편집자가 때때로 내뱉는 전혀 믿을 수 없는 문학적 궤변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독자로서 변함없이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폴은 그것을 이해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부끄러워함을 알고 놀랐다. 애니가 옳았다. 폴은 사기 치는 글을 썼던 것이다. - P197

애니가 갑자기 사나운 기세로 폴을 향해 껑충 뛰어올랐다. 폴은 애니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허드슨 자동차에서 로켓맨을 빼내려고 사기를 쳐 버린 더러운 영화 각본가 새끼를 붙잡을 수 없기에 대신 자신을 붙잡고 분명히 예전처럼 갖은 학대를 가할 거라고 느꼈지만,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애니가 폴을 위해 열어 보인 과거라는 창문 속에서 폴은 오늘날 그녀의 불안정한 정서를 만들어 낸 씨앗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공포에 질려 버렸다. 애니가 느끼는 불공정함은 유치한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명백하게 현실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 P199

‘좋아. 약을 가져올 때마다 두 번에 한 번은 두 알 중에 한 알을 먹지 않겠어. 한 알은 삼키고 나머지 한 알은 혀 밑에 숨겨 뒀다가 애니가 물 잔을 가지고 나가면 다른 약들과 함께 매트리스 밑에 집어넣을 거야. 그런데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내일부터 시작해야지.‘
이때 마음속에서 하트의 여왕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게 훈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우리는 어제 우리가 한 짓을 깨끗이 바로잡았고, 내일도 우리가 한 짓을 깨끗이 바로잡을 예정이다. 그러나 오늘은 결코 그러지 못하리라.‘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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