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는 계획이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훈장을 타고, 그런 다음 돌아오면 모든 사람이 나를 어른으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 적어도 그러는 척이라도 해줄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담배도 피울 수 있는데, 그야 뭐 텔레비전을 보면 언제나 그랬다. 게다가 그런다고 해서 딱히 불을 낼 위험도 없어 보였다. 어차피 전쟁터는 노상 불바다니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린다면, 군인들이 죄다 약간 더러워 보인다는 거였는데, 그게 과연 내 마음에 들지는 영 확신할 수 없었다. 나한테는 소총 한 자루와 매일 갈아 신을 깨끗한 양말이 필요할 터였다. 만일 그것들이 없다면,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 같았다. - P20

그렇긴 해도 주유소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펐다. 주유소는 태어나서 줄곧 살아왔던 곳이고, 또 주유소 말고는 다른 아는 곳도 없을뿐더러, 주유소는 나한테 썩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했다. 아빠는 다른 데도 여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보다 이런 게 약간 낫거나 저런 게 약간 낫거나 할 수 있지만, 결국 다 마찬가지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이따금 도(道) 소속 제설차를 고치기도 하던 소규모 자동차 정비소의 휘발유나 윤활유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냄새였다. 지금 이 순간 그 냄새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 P23

학교를 그만두게 되자, 그때부터 아빠는 나한테 일거리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나는 셸 점퍼를 입고서 자동차 기름 탱크 채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손님들이 그걸, 그러니까 셸 점퍼를 좋아할 뿐 아니라 쌈박해 보인다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쌈박하다는 건 뭔가 좀 멋진 건가 보다고 느꼈다. - P23

책상 위에 놓인 멋진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사진을 가리키며, 아빠는 나한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나도 겉모습은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와 비슷하지만, 그 속에 든 엔진은 2CV용 엔진이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아빠는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솔직히 확신은 들지 않았다. 알파 로메오처럼 멋진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도대체 뭐하러 기름 냄새 맡으며 엔진을 들여다본단 말인가? 나는 자동차란 잘 굴러가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알파 로메오처럼 그렇게 새빨갛고 그렇게 멋들어진 자동차라면 특히 더 그렇다. - P30

나는 기억을 잘 못한다. 적어도 기억해야 마땅한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이따금 쓸 데없는 세부 사항 같은 건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기도 했다. 예컨대 아빠의 연장통에 적힌 번호들은 절대 외우지 못하면서도 그 안의 확대기들을 정돈하는 순서는 틀리지 않는 식이었다. 어쨌든 숨을 헐떡이며 소나무 사이를 오르는 사이에 학교는 아득히 멀어져 갔고, 주유소에서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행여 누군가가 〈한 달 전〉 또는 〈10년 후〉라고 말한다면, 나는 지금, 바로 이 순간, 그러니까 내가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순간, 뭔가에 베이면 눈물이 나고, 입에 문 카랑바르가 턱에 철커덕 달라붙어 행복한 지금 이 순간에 비추어 어떻게 해야 그 시간을 위치시킬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 P32

고원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같았다. 풀이 짧게 깎여 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사방이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산들 사이사이로는 대양만큼이나 드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이곳을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본래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적어도 반짝이는 것만큼이나 좋다. 이내 깎아 놓은 꼴의 내음 속으로 나는 코를 들이박았다. - P41

별안간 붉은 빛이 희게 변하면서 고원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고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풀밭 위로는 엄청나게 큰 바위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와 있었는데, 그 바위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두 눈을 감기 직전에 나는 커다란 진홍빛 꽃이 달린 뿌연 잠두를 보았다. 꽃대에서는 이슬을 머금은 딱정벌레가 해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거룩한 아기야, 우리 동물들도 너를 경배한단다. - P41

산이라고 하면, 이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산은 언제나 거기에 꼼짝 않고 있고, 어느 누구한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 모양 그대로일 따름으로, 등만 돌리고 돌아서면 눈 깜짝할 사이에 초콜릿이나 18호 스패너로 변하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계곡이며 주유소, 고원을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언제나 한결같기 때문이다. 설사 겨울에 눈이 내린다 해도 금세 알아볼 수 있는데, 그건 그냥 변장을 했을 뿐 사실상 같은 거라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놀이 비슷한 것이었다. - P50

비비안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지금처럼 계속 바위 밑에 숨어 있으면 안 된다고, 사람들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때까지 지낼 만한 곳을 찾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나도 동감이었다. 정말이지 바깥에서 자는 거라면 질색이니까. 내 침대가 그리웠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그 침대에서 잤다. 아무튼 난 그렇게 믿고 있다. 비록 그사이 내가 자라서 발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다 하더라도 비행기 무늬가 찍힌 커다란 내 베개를 떠올리면 아랫배가 울컥하고 죄어 왔다. 난 내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느꼈다.
[…] 나는 노란색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 P69

나는 비비안이 계속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나의 제일 친한 친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전에 학교에서는 나를 빼고 모두가 친한 친구들이었다. 이를테면 커다란 우정의 비눗방울 같아서, 나만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에서 뱅뱅 맴도는 식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토성의 고리가 떠올랐는데, 어느 납작한 초콜릿 포장에 그 형태가 그려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 그림을 내 침대맡에 붙여 놓았다. - P78

이윽고 밤이 되었고, 나는 할 수 없이 움막 안으로 돌아왔다. 한구석에서 바랜 짚단을 발견한 나는 그걸 바닥에 펼친 다음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 낀 채 그 위에 드러누웠다. 그제야 그간 전쟁이며 훈장, 영웅적인 금의환향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부끄러웠다. 나중에 집에 돌아갔을 때 비겁한 녀석이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여왕님이 있었다. 여왕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무슨 일이든 다 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맹세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영웅이 된다는 건 바로 그런 거라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80

나는 겨울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겨울은 흰색이고 회색이고 검은색이며 기분 좋은 연기 냄새가 난다고, 겨울은 거짓말의 계절이고, 주유 손잡이는 뜨거우니까 조심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손가락을 꽁꽁 얼게 만드는 계절, 사람들이 뭘 하겠다고 약속은 하지만 사실은 실내에 있는 게 더 좋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계절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아직 겨울이 되려면 기다려야 하니까 지금은 겨울에 대해 말하기기 쉽지 않았다. - P93

비비안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따라서 웃었다(나는 계속 울면서 동시에 웃었다). 그러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자동차 먼지를 싹 씻어 내리는 것과도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바깥으로 나가 비가 나를 씻어 내게 했는데, 그러는 나를 보고 엄마는 얼른 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죽게 된다면서 고함을 지르곤 했다. 비비안의 웃음소리가 나를 씻겨 주었으므로 앞으로 우리 사이에는 깨끗하고 맑은 공기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 P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영화감독(위대한 다큐멘터리 감독은 거의 없다)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동시대 많은 이들이 누린 뛰어난 재능도 그의 몫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분명히 있기는 했던 조금의 재능은 단지 좌절의 원천으로만 작용하며, 실현되지 않은 막연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 P18

나는 부엌 저편으로 걸어가 어머니가 액자에 끼워 벽에 걸어놓은 조그만 신문기사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아버지가 만든 첫번째 영화에 대한 기사였는데, 리뷰 내용 대부분이 호의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짧은 문장이 하나 있었다—기사 말미의 문장으로, 이 문장에서 그 비평가는 아버지의 영화를 "젊은 천재의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묘사했다. 이후 세월이 흐른 뒤 깨닫게 된 것인데,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단어들과 그것들에 실린 무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엌 식탁에 홰를 친 새처럼 앉아, 만트라를 암송하듯이, 나는 머릿속에서 그 단어들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내가 그 단어들을 충분히 여러 번 말하면, 그 뉘앙스를 모사하면, 분명 모든 것이 그 단어들처럼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 P20

어머니는 참을성 있게 아버지 말을 듣고 있었다. 데이비드를 옹호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생각하는 그의 결함들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데이비드를 나쁘게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가 싸움을 원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저 어안이 벙벙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앉아 있었고, 아버지가 마침내, 이 사람의 성격에 대해 당신이 진짜 아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알아야 할 건 많지 않아. 데이비드는 아주 단순한 사람이거든. 제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당신이 알지 모르겠지만." - P26

"기억해." 아버지가 말했다. "결국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은, 처음에 단순해 보이는 사람들이야." - P27

그해 여름의 저녁에는, 간혹 인근 언덕 지대에서 코요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데이비드와 나가고 없을 때 나는 걸핏하면 내 침실 창문 밖에 있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집 뒤쪽의 가파른 경사지에 사는 녀석들의 울음소리를 듣곤 했다. 녀석들은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 되어 해가 거리 저편으로 떨어지고 나면, 멀리서 개들처럼 우짖었다. 뒤뜰의 잔디 너머로,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어두운 대양과 요트 정박지에 있는 자그마한 집들의 불빛들이 보였다. 나는 내 유년의 모든 때를 그 지붕에서 보냈을 것이다. 바다를 내다보면서, 충분히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뭔가 의미심장한 발견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 P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그 저녁 식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거고 나의 삶은 마침내 평범해지리라고 정말로, 진지하게 믿었다. 하지만 시칠리아의 저택에서부터 제노바의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일 텐데, 오르시니 집안에서도 식사 자리는 역시 단순한 식사 자리 이상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무대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비극을 익살극처럼 연기했다. 이야기가 심각해질수록, 더 우스꽝스러워졌다. - P562

「말에는 의미가 있어, 미모. 명칭을 불러 주는 건 그걸 이해 한다는 거야. 〈바람이 부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죽음을 몰고 오는 바람인가? 파종의 바람인가? 수확하기도 전에 식물을 얼려 죽이거나 태워 죽이는 바람인가? 만약 말들에 의미가 없다면 내가 어떤 의원 노릇을 할까? 다른 의원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겠지.」 - P566

엠마누엘레는 하나의 관념이었다. 조금은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어긋남, 비정상이랄까. 혹은 아직 도래한 적 없는 정상성의 표현, 다른 세상을 알리는 선구자로서, 그 세상에서는 엠마누엘레와 같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라고는 지나치게 열렬하게 상대방을 끌어안는 것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관념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 P571

17시 56분 기차를 타고 이틀 뒤 피렌체에 도착했다. 치오가 나를 팔아넘겼을 때와 거의 같은 시각. 이제는 겨울이 아니라 봄이기는 했지만, 기차에서 내리면서 받은 인상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도시는 사람을 농락하며 수줍음을 가장했다.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척하면서도 황혼, 살짝 열린 문 등 미묘한 표시를 통해 자신이 품고 있는 거리로 섞여 들라고 권했다. 나는 피렌체를 사랑했다. 프랑스어로는 도시와 여자 사이에 철자 하나 차이밖에 없다. - P579

마을 사람들의 약식 재판은 적어도 한 가지의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강도들의 급습이 그치면서 길이 다시 안전해졌다. 아마도 제거당한 자들이 진짜 범죄자였던 모양이었다. 혹은 이처럼 평온한 고장에서는 몹시 뜻밖이었던, 그런 행위를 저지른 자들에게조차 뜻밖이었던 폭력성에 나머지 강도들이 그런 짓을 그만두었던가. - P582

산피에트로 델레 라크리메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균열이 생긴 뒤로 후작은 더는 전과 같지 않았다. 일요일 미사에 데려다 놓으면 매번 긴 비명을 지르고 아직 유일하게 움직이는 한 쪽 팔을 지옥과 천국 사이가 담긴 손상된 천장화를 향해 내두르며 휠체어에서 버르적거렸다. 그는 거기에서 무엇을 보는가? 자신을 기다리는 여행? 예전 젊었던 시절에 수도 없이 응시했던 그 말끔했던 둥근 천장과 그곳의 프레스코화? 한없이 긴 성사를 보는 동안 꾸벅꾸벅 졸고 후작 부인과 결혼하고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장남의 장례를 치르는 그를 내려다봤던 그 말끔했던 둥근 천정과 그곳의 프레스코화? 길게 뻗어 나간 시커먼 균열 때문에 볼썽사납게 된 그 둥근 천장과 그곳의 프레스코화? - P584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순진하지 않았고, 고작 70년쯤 된 국가가 통합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한 이런저런 조직들이 그러한 실망을 이용하기 위해 생겨난다는 것도. 전쟁과 전후는 그런 조직들에게 엄청난 부를 쌓을 수많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도. - P591

「나는 교회를 믿어, 그 말이 그 말이긴 하지만. 정권이나 독재자와는 반대로 교회는 사라지지 않아.」
「그거야 교회의 약속이 지켜졌는지 아닌지를 말해 주러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이제껏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너희가 이걸 알까? 미치광이들 천지인 너희 가족은 정말이지 신물이 나는 것 이상이야.」 - P592

「독서할 때 안경이 필요한지는 몰랐네.」 내가 안경을 들어 올리면서 한마디 했다.
비올라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피기만 했다. 나는 책 겉표지 위에 안경을 다시 내려 놓았는데, 가족의 서재에서 나온 그 책은 가죽 장정에 영어로 된 제목이 금박으로 박혀 있었다.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 램프가 방 안의 유일한 불빛이었고, 비올라는 그 아래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어둠이 벽을 타고 기어오르며 녹색과 종이꽃들과 커튼의 장식 술을 슬금슬금 잡아먹었는데, 그 번잡스레 화려한 세계는 어느 모로 봐도 비올라와 닮지 않았고, 내가 이 방에 요란하게 처음 뛰어들었던 이래로 전혀 변화가 없었다. - P593

「빌어먹을, 넌 정상적일 순 없는 거야? 네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그저 정상적인 거 말이야.」
[…]
「아니야, 미모. 그 말이 맞아. 내 평생, 정상적이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어. 그런 노력을 할 때 넌 내 구심점 노릇을 하니까. 그래서 네가 늘 유쾌한 존재일 수는 없는 거지. 하지만 내 안에는 아무리 너라도 절대 고치지 못할 비정상성이 있어. 그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고 그 점에 관한 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 P594

「떠난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최악의 폭력, 그건 관습이지. 나 같은 여자, 똑똑한 여자, 난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 그런 여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관습. 그런 말을 하도 듣다 보니 그들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고, 뭔가 비밀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어. 그 유일한 비밀이라는 건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더라. 내 오빠들, 그리고 감발레네 사람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이 보호하려고 애쓰는 건 바로 그거야.」 - P595

「그 누구도 나에 대해 아무 짓도 할 수 없어. 난 모든 걸 겪 었어. 누가 나를 가장 아프게 한 줄 알아? 나야. 나도 그들 식으로 해보려고 애쓰다가, 그들이 옳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다가. 내가 지붕에서 뛰어내렸을 때, 미모, 내 추락은 고작 몇 초가 아니었어. 그건 26년 동안 계속됐지. 이제야 그게 끝나는 거야.」 - P595

고작 한 시간 전만 해도 나의 분노는 화강암 덩어리였다. 검게 번들거리며 모가 난. 하지만 그것은 환영으로, 비올라가 거는 그런 마법에 속했다. 우리가 피에트 라에서 멀어질수록 주술은 약해져 나의 화강암 덩어리는 진짜 모습으로, 단순한 모래 더미인 걸로 드러났다. 분노를 붙잡아 두려고 갖은 애를 써봤자 허사였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갔다. - P599

고원은 그날 아침 그 어느 때 보다도 장밋빛이었는데, 마치 부서지고 조각이 난 돌이 마지막 숨 대신 그리도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색채를 흘려보내는 듯 했다. - P607

메티가 작품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는 마리아의 얼굴을, 내가 알았던 그 무한한 온화함을 쓰다듬었고, 그러고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천천히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왼손이 존재하지 않는 오른팔을 향해 움직였지만, 좌절될 행위였다.
「털고 일어설 수 없는 부재들이 있지.」 - P612

「잘 들어라. 조각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거야. 우리 모두, 너와 나 그리고 이 도시 그리고 나라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 훼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그 이야기에 가닿을 때까지 켜켜이 덮인 사소한 이야기나 일화들을,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 내는 거란다. 그 이야기에 가닿은 바로 그 순간 돌을 쪼는 일을 멈춰야만 해. 이해하겠니?」 - P613

어머니는 나의 뺨에 손을 갖다 대면서 중얼거렸다. 「나의 큰아이.」 - P614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아야만 한다. 비올라를 보아야만 한다. 나는 그날 폐허에서 봤던 그녀를, 살짝 어긋난 다리와 눕혀 놓았기에 더욱더 납작해져 존재하지 않는 가슴과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 망가진 모습 그대로 숭고한 육신을 조각했다. 하지만 거기 누워 있는 건 아무리 양성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분명 여자로서, 여자의 쇄골과 여자의 가슴과 여자의 엉덩이를 지니고 있다. 눈이 남자를 기대하면 남자가 보이겠지만, 감상자의 온 감각이 담아 내는 것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고 은밀한 만큼 더욱더 폭발적인 여성성, 맹신자들의 박해로 단절되었다가 분출하는 여성성이다. 어떤 관객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극도로 민감한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오고, 그러한 반응은 이해하지 못한 자들, 결국 모두에게서 엉뚱하고 설명할 길 없는 욕망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들은 악마와 과학과 기타 등등을 찾아다녔지만, 사실 비올라만 존재 했다. 본의 아니게, 베드로 성인도 울고 갈 정도로 나 스스로 보기 좋게 배신했고 부인했던 비올라. - P616

하지만 봐라. 만약 그리스도가 고통이라면, 그렇다면 당신들에게는 아무리 고깝더라도 그리스도는 여자가 아니겠는가. - P617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알고 싶다. 문턱을 넘어서기, 마지막으로 내쉴 숨. 시작한 문장을 미처 맺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걸까? 허공에 걸린 말들, 그러고는 더는 아무것도 없고 아름다운 침묵, 뒤따르는 안도? 아니면 내 육신으로부터 나의 영혼을 빼내어 가는 동안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는 걸까? - P618

나는 나의 삶을, 겁쟁이와 배신자와 예술가의 삶을 사랑했고, 비올라가 내게 가르쳐 줬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어떤 것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그것과 이별하지 않는 법이다. - P618

나중에 그는 피에타를 보러 다시 돌아갈 거다. 그러고 나서도 이해할 때까지 보고 또 보리라. 아마도 조각가가 떠나기 전에 그에게 하려던 말이 그것일지도 모른다. 보고 또 봐라. 어쩌면 사소한 것을, 정말로 별것 아니지만 모이면 혁명을 만들어 내는 그런 작은 뭔가를 놓쳤을지도 몰랐다. - P620

시계추의 마지막 움직임, 마지막 째깍째깍, 추시계가 곧 멈추려고 한다. 멀리서 알프스산맥이 지평선에서부터 떨어져 나온다. 아직 어두운 하늘에서는 빛나는 한 점이 께느른하게 궤도를 그린다. - P6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항과 다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카르티에 때문에 잠깐 실랑이가 있었는데, 내가 선사한 시계의 호사로움에 그가 당혹스러워해서였다. 별항은 그에게 가장 관심 있는 시간인 나무의 시간은 그런 도구로 잴 수 없는 만큼, 그 시계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내게 돌려줬다. 나는 별항을 시골뜨기로 취급했다. - P403

나는 피렌체에서 발달시키고 로마에서 벼린 본능을 발휘해 타일 바닥과 양철 카운터로 된 암초를 금방 찾아냈고 그곳에 이 도시의 난파당한 모든 자가 매달려 있었다. 자동차 정비소와 오래전 폐업한 세탁소 사이에 끼어 있는, 셔터를 반쯤 내린 선술집. 비올라는 입술에 묻히는 정도로 찔끔찔끔 한 잔을 마셨고, 두 번째 잔과 세 번째 잔도 내켜하지 않으며 마셨고, 네 번째 잔은 스스로 주문했고, 그 나머지 잔들은 그 밤의 분위기에 속했다. 잠깐 동안 모든 것이 다시 예전처럼, 조각하는 미모와 하늘을 나는 비올라로 돌아갔고, 새벽 3시경에 곤죽이 되도록 취한 비올라가 한 일은 바로 카운터에 올라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는 뱃사람 무리의 푹신한 팔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였다. - P406

나는 비올라에게 내가 파시스트들만을 위해 일하는 건 아니라고, 게다가 그들은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비올라는 독일 내 유대인 문제를 거론하고 여러 도시들과 사람들의 이름을 읊어 대고 이런저런 장소들과 살인들, 내 눈앞에 있지만 내가 보지 않는 편을 택하고만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했는데, 그로 인해 그 몇 해를 수놓았던 수 많은 다툼에 또 다른 다툼을 하나 더 보탰다. 우리의 불만은 훌륭한 우주적 쌍둥이답게 완벽한 대칭을 이뤘다. 비올라는 내가 새로운 세계의 탄생에 참여한다고, 그 세계의 주요 행위자들 가운데 한 명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나는 비올라가 정확히 그와 반대라서 그녀를 비난했다. 어느 날 관객 앞에서 비틀거렸다는 핑계를 대고 무대를 떠났다고. - P408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그 무엇으로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두 존재 사이에서 점점 커져 가는 그 구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왔다. 살다 보니 어느 결에 피부밑에 박혔지만 사람들이 무시하는—누가 가시 하나 박혔다고 걱정하는가?—가시들, 하지만 어느 날 보면 곪게 하는 그런 가시들에 대해. - P413

사람들이 나의 성공을 비난할 때마다 그랬듯이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나는 돈이 있다, 그래서? 마치 그 돈을 내가 벌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내가 그걸 누릴 자격이 없기라도 하다는 듯이! 변한 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다. - P415

「위대한 남자 같은 건 없어. 너희 모두 일상의 평범한 존재 들이니까. 자, 얘기해 봐, 홍미로운 주제니까. 너희들의 폭력성은 어디서 오는 거니? 응?」
비올라는 정말로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이 우리를 응시했다.
「어쩌면 버림을 받았기 때문인가? 하지만 누가 너희들을 버렸는데? 어머니가? 만약 그런 거라면, 대체 왜 세상의 어머니들과 미래의 모든 어머니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건데?」
「넌 여자들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비토리오가 중얼거렸다.
「물론 우리도 그렇지. 그런데 그 폭력은 우리 자신을 향해. 누군가를 괴롭히겠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지만, 우리가 들이마시고 우리를 중독시키는 이 폭력을 어디에선가는 분출해야 할 테니까.」 - P419

「모리셔스섬의 드론테가 뭔지 알아?」
[…]
「사라진 새지. 그리고 날지 못한다는 게 그 특성이고. 나는 도도 새야, 미모.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무덤에 눕고 허공으로 뛰어내리는 비올라가 아니라고 나를 원망하는 거 알아. 하지만 도도 새는 바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졌어. 너무 쉬운 먹잇감이었던 거지.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나 자신을 잘 돌봐야 해.」
「네가 사라지게 절대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 P419

어느 겨울밤, 지금은 서로 모셔 가려고 다투는 예술가가 되었다지만 나를, piccolo problema (작은 문제)를, 그런 하찮은 것을 그 거친 돌 위에 던져 놓았던 여자에게 느릿느릿 다가갔다. 그러다가 부끄러움이, 여전히 진지하게 아버지가 나보다 더 재능이 뛰어났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 누구도 내 아버지에게는 지불한 적 없으나 내가 누리는 그 돈들을 생각하자 부끄러움이 왈칵 치밀었다. - P421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만약 전부 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 미모. 네가 단 한 번도 틀리는 법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넌 신인 거야. 네게 품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신을 낳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P422

「네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어도, 네가 아무리 성공을 거뒀어도, 네가 밤에 주색에 빠져서 수많은 여자를 더럽혔어도, 네가 엄청난 술을 들이켜고 토해 냈어도, 네가 지금도 수많은 나쁜 짓들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네 어머니는 늘 네가 여섯 살이라고 생각하셔. 어머니와 관계가 좋은 아들은, 어머니에게 여섯 살이 아니라고 설득하기를 포기한다고.」 - P424

예술가의 생애를 시기별, 단계별, 시대별로 쪼개는 것이 관레인데, 생애를 진열한 매장에 분류 푯말이 없는 매대만 잔뜩 있으면 무척 당황할 구매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 몇 해 전 마그리트가 파이프가 아닌 파이프로 그들을 조롱했지만 그에 대해 뭔가를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관객은 이해를 못 할수록 더더욱 열광했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을 문제 삼겠는가? 시기, 단계, 시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 P425

파첼리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파첼리는 나를 칭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말은 열여섯 살 적과 똑같은데, 더 나아졌다는 게 전부였다. 인간은 어디 있는가? 신들의 비밀에 손끝을 갖다 대는 인간은? 그러니까, 이런 건가, 자란다는 건? 돈을 벌고, 돈을 버는 데 성공하면 약간 나아진다는 것? 나는 비올라를 비난했지만, 결국 내가 비올라보다 훨씬 더 멀리 날아간 건 아니었다. - P426

나는 부자들이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기이한 지점에 도달했는데, 그건 겪어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교수 봉급의 열 배를 벌었고 기업 총수만큼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직원들을 거느렸고 운전사가 필요했고 취향과 고객을 고려해서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어야 했다. 벌어들인 모든 돈을 지출했다. 이런 내리막길에서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면 계속 더 벌어야만 했고, 이는 더 많은 지출로 이어졌다. 이 방정식의 성격이 변화하는 것은 오로지 진정으로 부자가 될 때뿐이었고, 번 만큼 쓰는 것이 어려워질 때뿐이었는데, 로마에 체류하던 시기에 그런 능력이 뛰어난 인물 몇몇을 만나 보기는 했었다.
나는 정치를 하지 않았고 종교에 귀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종교는 피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치는 퇴폐적인 애인이라 그 열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 P427

르네상스가 낳은 딸은 세상에 대해 책에서 얻은 지식만을 갖고 있었다. 오르시니 가문 사람들은 서품식 전날 도착했던 터라, 나는 비올라를 데리고 서품식 앞뒤로 빈 시간을 활용해 가볼 수 있는 모든 곳을 방문했다. 도시 구경을 시작하자마자 곧 우리의 역할은 뒤바뀌었다. 비올라는 이 기념물 혹은 저 기념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에 얽힌 역사를 설명했고, 나는 곧 내가 관광객이 가이드를 따라가듯 비올라를 따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장서의 힘을 과소평가했지만 사실 장서 덕분에 무지몽매에서 빠져나왔고 심지어 약간의 위안을 누렸었다. 나는 배은망덕했다. 죽도록 취해서는 진정한 삶은 여기, 나를 중심으로 미친 듯이 돌아가는 이 영원의 도시에 있다고 되뇌면서 얼마나 많은 밤 시간을 파티로 흘려보냈던가?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까지 나온 비올라가 새로운 교훈을 내게 줬다—진정한 삶은 책 속에 있었다. - P441

「거짓말이야.」 비올라가 대꾸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모르고 거짓말하는 걸 수는 있겠지.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어.」 - P445

루이지 프레디는 성공을 거뒀다. 미국인들과 경쟁하고 싶다던 그의 꿈은 도시 바깥의 이 도시에서, 착시의 예술에 전적으로 바쳐진 이 성채에서 구현되었다. 사람들이 곧 테베레 강가의 할리우드라고 부르게 될 이곳은 상냥하고 옷 잘 입고 미소가 끊이지 않는 이 상냥한 남자의 정신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착각은 금물이었다. 치네치타는 일종의 무기였다. 정부의 온갖 자산을 동원해 이 계획을 뒷받침했던 두체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국가의 가장 강력한 무기. - P451

나는 다시 호텔에서 나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 두 발은 예전의 발자취를, 내가 닳게 했던 포석의 미미한 흔적을 되찾아 그 자리에 가서 놓였다. 전차의 선로가 번들거렸고 번개가 칠 때마다 번쩍거리는 길이 드러났다. 두 발이 나를 장마당까지 인도했고, 그곳에는 낡은 서커스단의 천막이, 전보다 더 기운 자국이 많고 더 색이 바랜 천막이 서 있었다. 가장자리의 올이 풀린 비차로 서커스단의 깃발이 폭풍우 속에서 춤을 췄다. 두 대의 트레일러가 거기 그대로 있었는데, 사라의 트레일러는 불이 꺼진 상태였다. 비차로의 창가에서 불빛이 반짝였고, 잠시 어두운 형체가 그 빛을 가렸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돌아섰다. 내 삶의 이 부분은 끝났다. 고통, 가난, 뱃속 깊숙이 쌓이던 그 부재들. 어머니의, 비올라의, 미래의 부재, 내가 이 도시의 싸구려 술집마다 들러 메우려고 시도했던 그 헛헛함들. 두 번 다시는 안 하리라. - P462

각주에서 윌리엄스 교수는 모순적인 지점을 강조한다. 사건을 아만티니 신부에게 위임한 이 때늦은 종교 재판소, 비록 명칭이 변경되었다고는 하나, 이 종교 재판소가 1573년에는 베로네제가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는 예수님」에 감히······ 난쟁이들을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그를 출두시켰다. 난쟁이들, 화가가 그린 장면의 성스러운 성격에 반하는 우스꽝스럽고 기괴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 그로부터 거의 4백 년이 흐른 시점에 바로 그 동일한 종교 재판소가 이번에는 난쟁이에게 지나치게 신성하다며 비난을 하게 된다. - P468

Habemus papam(교황이 새로 선출됐습니다).

17시 30분,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교황이 된다. 내가 경력을 쌓게 도움을 베푼 사람. 교황명은 비오 12세로, 그는 저녁에 침실로 들어가 자신의 가정부를 돌아보고 교황의 흰색 수단을 벗으며 중얼거린다. 「대체 저들이 나를 갖고 무슨 짓을 했는지 봐요.」 - P471

「리튬도, 전기 충격도 없을 거야.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나는 캄파나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미치광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본데, 나야 좋지, 어서 해보자고.」
캄파나는 나가면서 문을 쾅 닫았다. 이 빈약한 승리가 내게 불어넣어 준 생각은, 비올라는 내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부당하게 나를 배척한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과 할 수 있는 한 타협하기 마련 아닌가. - P474

「아주 논리적이라고. 자신의 빛을 절대 가리지 않을 사람이라면 왜 미워하겠어? 누군가를 찬미한다는 것, 그건 조금은 그를 싫어한다는 소리이고, 그 역도 성립이 돼. 베토벤은 하이든을 싫어했고, 스키아파렐리는 샤넬을 싫어하고, 헤밍웨이는 포크너를 싫어하지. 따라서 자코메티는 비탈리아니를 싫어하고. 우리가 같은 분야에 있는 한 나도 자네를 싫어하네. 하지만 우리, 루마니아 사람들은 못되게 싫어하지는 않아. 그래서, 뭘 마실 텐가?」
「충분히 마신 것 같아.」
「농담해? 지금 자네가 얼마나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봤어? 남자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면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첫 번째, 여자.」
「두 번째는?」
「여자.」 - P479

우리 둘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우스꽝스러워, 이 모든 일이.」
「뭐가 우스꽝스러워, 미모?」
「너와 나. 우리의 우정이. 하루는 서로 좋아하다가, 그다음 날이면 서로 미워하고·····. 우리는 두 개의 자석이야. 서로에게 다가갈수록 서로를 밀어내지.」
「우리는 자석이 아니야. 우리는 심포니야. 그리고 음악조차도 침묵의 순간을 필요로 해.」 - P488

「당신은 늘 상상력이 부족했어, 리날도. 이 모든 게 당신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겠지? 그래요, 평행 세계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혹은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우리는 어떤 곰이 꾸는 꿈속에서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 P495

어느 날 저녁, 불안함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는데, 삐걱거리며 방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이마에 손을 얹고 쉿, 쉿, 괜찮다, 속삭이더니 오래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아주 먼 옛날에, 사부아에 살던 때 들었던 모양인 게, 편안함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계속 달려야만 하는 건 아니란다.」 어머니가 속삭였다. - P508

「이봐, 미모, 넌 내가 예전에 줬던 책들을 제대로 읽지 못했나 보다. 유감이야. 안 그랬더라면 조르다노 브루노가 이런저런 이단적 주장들 가운데에서도 지구가 너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사상을 옹호한 바람에 죽임을 당했다는 걸 배웠을 텐데.」 - P516

「난 이걸 누릴 자격이 있고, 그 누구도 내게서 그걸 빼앗지 못할 거야.」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거짓말을 하는구나, 비올라. 넌 이 정권을 싫어하잖아. 하지만 그 정권이 내게는 잘해줬거든.」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내 치명적 무기를 사용했다. 손짓으로 내 몸을 가리켰다.
「날 비난하지 마. 넌 내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비올라가 똑같은 동작을 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넌 내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비올라는 낚싯바늘로 약간 멍청한 물고기를 낚은 뒤 잔챙이 따위로 번거롭기 싫어서 물고기를 다시 강물에 던지는 어부처럼, 만족스러운 듯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벽난로의 불을 향해 몸을 돌렸다. - P517

왜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비차로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내가 그를 모른 척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비올라와 함께 피렌체에 갔을 때 그를 찾아가서도 만나지 않고 그냥 와버렸던 그때의 이유와 똑같았다. 비차로와 사라는 시궁창에 처박힌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었다. 내 최악의 모습을 알았던 누군가와 길에서 엇갈렸다가, 그 모습이 나의 진짜 모습임을 발견하게 될까 봐 그저 두려워서 그랬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카르티에의 탱크 시계를 차고 맞춤복을 입는 오늘날의 미모 비탈리아니는 사기꾼에 불과하니까. - P522

「당연히 우리는 유대인이지. 설마 내 이름이 정말 알폰소 비차로라고 믿었던 건 아니겠지? 나는 톨레도 근처에서 이삭 살티엘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어. 문제는 네가 알았더라면 네가 했던 몇 가지 선택들이 뭔가 바뀌었을 거냐를 아는 거지. 이봐, 친구, 난 자네가 조각가로서 경력을 쌓아 나가는 것을 지켜봤어. 어느 날 『코리에레』지에 네 사진이 실렸는데,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 널 봐, 맞아, 넌 난쟁이가 아니야. 넌 성공했어.」 - P525

「오, 칼을 놀리기엔 난 너무 늙었어. 네가 거절하면 나는 쓸쓸히 홀로 떠날 거야. 그저 이 말은 해두지. 아마도 네 양심이 네 손목에 찬 그 시계보다 더 값이 나갈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네 전 재산을 동원해도 되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거고.」 - P527

악의 아름다움은 바로 악이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결코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저 악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 P528

자기 마음에 드는 건 갖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버릴 수는 없어. - P530

「네 선택을 비난하지 않아, 미모. 내 친구 중 어떤 이들이 말하듯, If you can‘t beat them, join them. 네가 그들을 쓰러 뜨릴 수 없다면, 그들 편에 서라. 넌 아카데미의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어.」 - P531

비차로가 발판에서 꾸물댔고, 나는 그와 나란히 서서 걷다가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그 기차는 전기로 가는 기차가 아니었다. 1916년도를 떠올리게 하는 끈적이는 시꺼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우리 사이로 지나갔다. 소리가 점점 커졌다. 기차가 레일 위에서 삐걱대고, 끽끽대고, 덜커덩거렸다. 나는 비차로 옆에 조금 더 머무르려고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
플랫폼이 끝나는 지점에서 숨이 턱에 닿은 나는 내 젊은 날의 일부가 구불구불 길게 그을음을 끌며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보았다. - P532

내가 내린 결정의 타당성을 재검토해 볼 만도 했지만 나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나의 길을 선택했기에, 가던 길을 뒤돌아오지는 못한다. 만약 그 길이 불타는 숲을 지나간다 해도 그 숲을 통과해야 하리라. - P544

독일군의 침공 이후 수용소들은 가혹하게 바뀌었다. 트리에스테에 있는 리지에라 디 산사바나 슈탈라크 339는 폴란드의 최악의 수용소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해 유대인을 학살했다. 내가 그런 인간들을 위해 일했다. 악이 지나가도 모른 척 눈감았다. 나중에 가서야 징징거리며 자신들은 아무 것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내가 더 낫다면, 그건 바로 내가 징징거리지 않았다는 것, 그 어떤 변명도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 P545

그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선에서 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일주일 동안 나를 훈훈하게 했다. 그는 나를 보러 와서는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조금씩 조금씩 점점 더 많이 덜어 갔는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더는 죄책감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 찌꺼기, 잔 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침전물은 있었지만, 죄책감 때문에 나의 꿈들이 핏빛 하늘 아래서 소용돌이치는 일이 더는 없었다. - P546

비올라는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고마웠다. 비올라가 입원해 있으면서 왜 나를 멀리했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이제 그 시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련다. 모든 감옥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수감자들 역시 동일한 죄를 저질렀다. 즉,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믿었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냈다는 죄. - P546

자유를 잃는 것보다 더 고약한 게 있었으니, 바로 자유에 대한 의욕을 잃는 거였다. - P553

평소처럼 정말이지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 않았던 길인 데도, 평소라는 말을 떠올렸던 게 기억난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저녁의 대기는 온화했고 봄이 가까이에 와 있었다. 비밀스러운 기쁨과 짓궂은 농담과 더 늦게 사그라드는 빛으로 가득한 밤이었다. 5분 뒤 그녀가 나타났다. 나를 사로잡았던 감정, 그 감정을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숲에서 나온 비올라는 새처럼 날아 보겠다는 꿈이 전나무 발치에서 부서져 버린 소녀가 아니었다. 아보카토 캄파나의 유순한 아내가 아니었다. 완벽한 오르시니 후작 영애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그녀였다. 비올라. - P555

비올라가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저런, 기억이 안 나네······.」
비올라는 예전의 그 웃음을, 고개를 젖히고 달을 향해 발사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옮겨 작은 샛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이가 들어 몸의 유연성을 잃고 흰 머리카락이 생기고 마침내, 마침내, 무언가를 망각할 수 있게 되어서 은밀한 기쁨을 느끼며. - P560

그러니까 그런 일이 바로 내게도 일어났던 거였다. 내가 처음 생긴 흰 머리카락에 충격을 받았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러한 변화는 천천히 진행되면서 교활하게도 당신의 귀에 대고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속살거리지만, 그러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닥친다. - P560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기운찼지만, 내가 이곳에 처음 도착해서 만났던, 살짝 위압적이기까지 하던 그 열정적인 신부는 어디 있는가? 신부는 피부에 갈색 반점이 여기저기 돋았고 손을 살짝 떨었다. 눈을 깜빡했을 뿐인데 그들 모두 늙어 버렸다.
「난 이 가여운 성당과 같아.」 그는 둥근 천장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했는데, 그곳에 그려 놓은 프레스코화는 칠이 다 일어나 있었다. 「여기저기에 바람이 들었어.」 - P5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올라와 처음 만난 지 11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올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은밀했던 11년. 살을 저미듯 아렸고 뒤뚱거렸던 우리의 우정, 야행성의 우정이 마침내 햇볕에 의해 복권되고 그 위로 처음으로 햇살이 환히 부서졌다. - P369

비올라가 앞장서서 담벽에 난 비밀 문을 향해 걸었는데, 우리가 저택 지붕을 고치러 왔을 때 나는 그 문을 통해 처음으로 정원으로 들어왔었다.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이 안개와 뒤섞여 이전에는 무성했으나 지금은 앙상한 오렌지나무의 가지에 장밋빛 줄무늬로 걸려 있었다. 공기는 침묵에 어쩔 줄 모르며, 잎이 떨어진 거무스레한 오렌지나무의 줄기들 사이로 전장의 강아지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어떤 나무들에는 아직 열매가 달려 있었지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방치의 새로운 신호들이 눈에 띄었다. 고랑은 더는 예전만큼 경계가 뚜렷하지도, 청소가 되어 있지도 않았고, 나무들이 늘어선 이랑 역시 이제는 잡초를 뽑아 주지 않았다. 나무들 가운데 거의 3분의 1이 죽었다. 죽지 않은 나무들은 오래전부터 전지가위 코빼기도 보지 못한 터라 가지들이 미친 듯이 뻗어 나갔다. - P369

바람이 일면서 마지막 남아 있던 몇 조각의 안개들을 몰고 갔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지? 시로코인가? 포넨테인가, 미스트랄인가, 그레크인가? 혹은 비올라가 말해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바람일 수도? 나는 비올라를 다시 만나면 모든 것이 보다 단순해지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바람에도 수도 없이 많은 이름을 붙이는 세상에 단순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 P376

파드레 빈첸초는 수련 수도사의 사무실 난입에 아침부터 들여다보고 있던 문서에서 고개를 든다. 그가 그 수납장을 열 때마다 이렇게 된다. 똑같은 불가사의에 또다시 사로잡혀서 자료들을 낱낱이 해부하고 열정적으로 그 서류들을 조사한다. 마치 탈무드의 각각의 말은 하나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와 반대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하나의 진실, 올바른 조합이 존재하기에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갑자기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예시바의 랍비 혹은 초창기 신학자 같다. - P378

「미모. 난 네가 필요해. 하지만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이해하겠어?」
쀼루퉁한 내 표정을 마주한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열두 살의, 열여섯 살의 비올라가, 모든 것이 불안과 열광 등의 흔적을 남기던 그 존재가 갑자기 내 앞에 서 있었다. - P391

우리의 우정은 허공에 서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었지만, 하루살이 특유의 반짝거림과 가벼움 또한 지니고 있었다. 스테파노는 돼지처럼 상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는 나를 퇴화된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여겼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인간쓰레기들의 상호적 존중을 보여 줬다. - P3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