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라와 처음 만난 지 11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올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은밀했던 11년. 살을 저미듯 아렸고 뒤뚱거렸던 우리의 우정, 야행성의 우정이 마침내 햇볕에 의해 복권되고 그 위로 처음으로 햇살이 환히 부서졌다. - P369

비올라가 앞장서서 담벽에 난 비밀 문을 향해 걸었는데, 우리가 저택 지붕을 고치러 왔을 때 나는 그 문을 통해 처음으로 정원으로 들어왔었다.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이 안개와 뒤섞여 이전에는 무성했으나 지금은 앙상한 오렌지나무의 가지에 장밋빛 줄무늬로 걸려 있었다. 공기는 침묵에 어쩔 줄 모르며, 잎이 떨어진 거무스레한 오렌지나무의 줄기들 사이로 전장의 강아지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어떤 나무들에는 아직 열매가 달려 있었지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방치의 새로운 신호들이 눈에 띄었다. 고랑은 더는 예전만큼 경계가 뚜렷하지도, 청소가 되어 있지도 않았고, 나무들이 늘어선 이랑 역시 이제는 잡초를 뽑아 주지 않았다. 나무들 가운데 거의 3분의 1이 죽었다. 죽지 않은 나무들은 오래전부터 전지가위 코빼기도 보지 못한 터라 가지들이 미친 듯이 뻗어 나갔다. - P369

바람이 일면서 마지막 남아 있던 몇 조각의 안개들을 몰고 갔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지? 시로코인가? 포넨테인가, 미스트랄인가, 그레크인가? 혹은 비올라가 말해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바람일 수도? 나는 비올라를 다시 만나면 모든 것이 보다 단순해지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바람에도 수도 없이 많은 이름을 붙이는 세상에 단순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 P376

파드레 빈첸초는 수련 수도사의 사무실 난입에 아침부터 들여다보고 있던 문서에서 고개를 든다. 그가 그 수납장을 열 때마다 이렇게 된다. 똑같은 불가사의에 또다시 사로잡혀서 자료들을 낱낱이 해부하고 열정적으로 그 서류들을 조사한다. 마치 탈무드의 각각의 말은 하나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와 반대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하나의 진실, 올바른 조합이 존재하기에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갑자기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예시바의 랍비 혹은 초창기 신학자 같다. - P378

「미모. 난 네가 필요해. 하지만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이해하겠어?」
쀼루퉁한 내 표정을 마주한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열두 살의, 열여섯 살의 비올라가, 모든 것이 불안과 열광 등의 흔적을 남기던 그 존재가 갑자기 내 앞에 서 있었다. - P391

우리의 우정은 허공에 서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었지만, 하루살이 특유의 반짝거림과 가벼움 또한 지니고 있었다. 스테파노는 돼지처럼 상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는 나를 퇴화된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여겼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인간쓰레기들의 상호적 존중을 보여 줬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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