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는 계획이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훈장을 타고, 그런 다음 돌아오면 모든 사람이 나를 어른으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 적어도 그러는 척이라도 해줄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담배도 피울 수 있는데, 그야 뭐 텔레비전을 보면 언제나 그랬다. 게다가 그런다고 해서 딱히 불을 낼 위험도 없어 보였다. 어차피 전쟁터는 노상 불바다니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린다면, 군인들이 죄다 약간 더러워 보인다는 거였는데, 그게 과연 내 마음에 들지는 영 확신할 수 없었다. 나한테는 소총 한 자루와 매일 갈아 신을 깨끗한 양말이 필요할 터였다. 만일 그것들이 없다면,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 같았다. - P20

그렇긴 해도 주유소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펐다. 주유소는 태어나서 줄곧 살아왔던 곳이고, 또 주유소 말고는 다른 아는 곳도 없을뿐더러, 주유소는 나한테 썩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했다. 아빠는 다른 데도 여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보다 이런 게 약간 낫거나 저런 게 약간 낫거나 할 수 있지만, 결국 다 마찬가지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이따금 도(道) 소속 제설차를 고치기도 하던 소규모 자동차 정비소의 휘발유나 윤활유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냄새였다. 지금 이 순간 그 냄새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 P23

학교를 그만두게 되자, 그때부터 아빠는 나한테 일거리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나는 셸 점퍼를 입고서 자동차 기름 탱크 채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손님들이 그걸, 그러니까 셸 점퍼를 좋아할 뿐 아니라 쌈박해 보인다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쌈박하다는 건 뭔가 좀 멋진 건가 보다고 느꼈다. - P23

책상 위에 놓인 멋진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사진을 가리키며, 아빠는 나한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나도 겉모습은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와 비슷하지만, 그 속에 든 엔진은 2CV용 엔진이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아빠는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솔직히 확신은 들지 않았다. 알파 로메오처럼 멋진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도대체 뭐하러 기름 냄새 맡으며 엔진을 들여다본단 말인가? 나는 자동차란 잘 굴러가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알파 로메오처럼 그렇게 새빨갛고 그렇게 멋들어진 자동차라면 특히 더 그렇다. - P30

나는 기억을 잘 못한다. 적어도 기억해야 마땅한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이따금 쓸 데없는 세부 사항 같은 건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기도 했다. 예컨대 아빠의 연장통에 적힌 번호들은 절대 외우지 못하면서도 그 안의 확대기들을 정돈하는 순서는 틀리지 않는 식이었다. 어쨌든 숨을 헐떡이며 소나무 사이를 오르는 사이에 학교는 아득히 멀어져 갔고, 주유소에서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행여 누군가가 〈한 달 전〉 또는 〈10년 후〉라고 말한다면, 나는 지금, 바로 이 순간, 그러니까 내가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순간, 뭔가에 베이면 눈물이 나고, 입에 문 카랑바르가 턱에 철커덕 달라붙어 행복한 지금 이 순간에 비추어 어떻게 해야 그 시간을 위치시킬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 P32

고원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같았다. 풀이 짧게 깎여 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사방이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산들 사이사이로는 대양만큼이나 드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이곳을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본래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적어도 반짝이는 것만큼이나 좋다. 이내 깎아 놓은 꼴의 내음 속으로 나는 코를 들이박았다. - P41

별안간 붉은 빛이 희게 변하면서 고원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고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풀밭 위로는 엄청나게 큰 바위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와 있었는데, 그 바위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두 눈을 감기 직전에 나는 커다란 진홍빛 꽃이 달린 뿌연 잠두를 보았다. 꽃대에서는 이슬을 머금은 딱정벌레가 해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거룩한 아기야, 우리 동물들도 너를 경배한단다. - P41

산이라고 하면, 이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산은 언제나 거기에 꼼짝 않고 있고, 어느 누구한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 모양 그대로일 따름으로, 등만 돌리고 돌아서면 눈 깜짝할 사이에 초콜릿이나 18호 스패너로 변하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계곡이며 주유소, 고원을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언제나 한결같기 때문이다. 설사 겨울에 눈이 내린다 해도 금세 알아볼 수 있는데, 그건 그냥 변장을 했을 뿐 사실상 같은 거라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놀이 비슷한 것이었다. - P50

비비안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지금처럼 계속 바위 밑에 숨어 있으면 안 된다고, 사람들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때까지 지낼 만한 곳을 찾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나도 동감이었다. 정말이지 바깥에서 자는 거라면 질색이니까. 내 침대가 그리웠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그 침대에서 잤다. 아무튼 난 그렇게 믿고 있다. 비록 그사이 내가 자라서 발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다 하더라도 비행기 무늬가 찍힌 커다란 내 베개를 떠올리면 아랫배가 울컥하고 죄어 왔다. 난 내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느꼈다.
[…] 나는 노란색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 P69

나는 비비안이 계속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나의 제일 친한 친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전에 학교에서는 나를 빼고 모두가 친한 친구들이었다. 이를테면 커다란 우정의 비눗방울 같아서, 나만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에서 뱅뱅 맴도는 식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토성의 고리가 떠올랐는데, 어느 납작한 초콜릿 포장에 그 형태가 그려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 그림을 내 침대맡에 붙여 놓았다. - P78

이윽고 밤이 되었고, 나는 할 수 없이 움막 안으로 돌아왔다. 한구석에서 바랜 짚단을 발견한 나는 그걸 바닥에 펼친 다음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 낀 채 그 위에 드러누웠다. 그제야 그간 전쟁이며 훈장, 영웅적인 금의환향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부끄러웠다. 나중에 집에 돌아갔을 때 비겁한 녀석이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여왕님이 있었다. 여왕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무슨 일이든 다 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맹세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영웅이 된다는 건 바로 그런 거라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80

나는 겨울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겨울은 흰색이고 회색이고 검은색이며 기분 좋은 연기 냄새가 난다고, 겨울은 거짓말의 계절이고, 주유 손잡이는 뜨거우니까 조심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손가락을 꽁꽁 얼게 만드는 계절, 사람들이 뭘 하겠다고 약속은 하지만 사실은 실내에 있는 게 더 좋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계절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아직 겨울이 되려면 기다려야 하니까 지금은 겨울에 대해 말하기기 쉽지 않았다. - P93

비비안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따라서 웃었다(나는 계속 울면서 동시에 웃었다). 그러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자동차 먼지를 싹 씻어 내리는 것과도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바깥으로 나가 비가 나를 씻어 내게 했는데, 그러는 나를 보고 엄마는 얼른 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죽게 된다면서 고함을 지르곤 했다. 비비안의 웃음소리가 나를 씻겨 주었으므로 앞으로 우리 사이에는 깨끗하고 맑은 공기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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