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물과 아늑한 방, 새 옷과 목욕이 간절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건 그냥 물건일 뿐이다. 그것 이상은, 루시도 모른다. 몸 안에 생긴 텅 빈 자리에 전에 담고 있던 것들을 담을 수가 없다. 무덤을 파낸 자리에 원래 흙을 다 다시 넣지 못했던 것처럼. 너무 깊이 파면, 좋은 것들을 너무 많이 파내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광부들은 안다. 바의 시신, 마의 트렁크, 판잣집과 개울과 언덕—이 모든 걸 루시는 기꺼이 두고 왔다. 샘만은 곁에 남아서 함께 미래로 건너갈 거라 기대하면서. - P92
가족이 우선이야. 바가 말했고, 마도 그렇게 말했다. 바가 때리고 화를 내기는 했으나 그래도 루시는 마지막까지 바의 그 신념은 존중했다. 그 신념이 루시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 P94
샘은 이제 다가오지 않는다. 루시는 뒤로 물러선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다. 루시가 뒤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러서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 기쁨이 솟는다. 몸의 일부는 이미 스위트워터에 가 있고 자기가 고아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연습하고 있다. 마음속 아주 작은 부분, 맺히고 꼬인 부분은 샘하고 같이 가지 않는다는 것, 샘의 기이함을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란 것에 안도한다. - P96
샘이 공포에 질리자 도로 어려 보인다. 루시가 새로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으로 루시는 동생을 보면서 자기 몸에서 피와 함께 연민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아까와 다른 무엇을 두고 떠나는 기분이다. - P97
바가 흔들의자를 가져오라고 한다. 샘이 얼른 의자를 들고 문턱을 넘는데 의자 위에 쌓인 널빤지들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루시가 달려들어 널빤지를 잡는다. 그러다가 발끝으로 호랑이의 마지막 획을 건드린다. 루시는 말할까 말까 생각한다. 그러면 마는 그 의식을 처음 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할 것이고, 바는 루시에게 화를 내며 다쭈이 (수다쟁이)라고 하며 아무 때나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말 할 것이다. 루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냄새가 나는 집, 오래된 닭똥 얼룩에 대해서도 아무 말 않듯이. 그렇게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배운다. - P103
"당분간만이야." 하루의 시작일 수도 있는 하루의 끝이 되면 바가 약속한다. 밖은 다시 어두워져 있다. 이맘때면 늘 슬픔이 저 멀리 언덕 위로 사라지는 햇빛 줄기처럼 루시를 스치고 지나간다. 다른 광부들은 너덧씩 무리를 지어 서로 등을 치고 인사를 하고 불평을 나누지만, 바와 루시는 따로 걷는다. 바가 루시의 뻣뻣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팅워. 계획이 있어. 원한다면 곧 학교에 갈 수 있어, 뉘얼(딸)." 루시는 바의 말을 믿는다. 진심으로. 그렇지만 믿음이 고통을 더 쓰라리게 한다. 땅굴 안에서 그토록 갈구하던 랜턴 불빛이 눈을 시리게 하듯이. - P107
루시는 마가 욕을 하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날 밤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낀다. 마가 그 뼈와 함께 얼마나 많은 해를, 얼마나 많은 세기를 삼켰을까? 오늘 밤 무언가 다른 것이 마의 목구멍으로 기어 나오고도 남을 만큼은 될 것이다. 무언가 거대하고 거친 것이. 역사, 루시는 갑자기 그 말을 떠올린다. 이곳에 오기 전의 전 마을에서 술 취한 사람이 그들의 짐마차에 침을 뱉었던 일이 생각난다. 바와 마는 앞쪽 만 보고 있었지만 술꾼은 땅이 어쩌고 주인이 어쩌고 법적으로 누가 주인이고 뭐를 묻어야 한다며 소리를 질렀다. 루시는 그 사람이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마가 내뱉는 격앙된 소리에서 똑같은 사나운 짐승을 알아보았다. 그게 역사임이 분명했다. - P112
마가 고개를 흔든다. 마의 뺨에 그림자가 생긴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인다. 바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루시에게는 잘 들리지 않지만 오래된 약속들을 읊는 걸 알 수 있다. 마는 도중에 웃음을 짓더니, 다시 표정이 바뀐다. 얼굴이 굳는다. 여러 해 뒤에 루시는 그 단단함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마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결심이었는지, 용기였는지, 냉담함이었는지 판단하려 할 것이다. 자기 안에서도 그걸 끌어내려고 애쓰면서. - P113
마는 침대에 누워, 잔을 쥔 너무 마른 손을 바르르 떨면서 그걸 마신다. 목구멍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몇 시간 동안의 바의 노동, 수 세기의 생명이 아기 안으로 사라진다. 역사, 루시는 그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떤다. - P114
아기는 그렇지 않다. 아기는 입이 없으므로 마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아기는 바를 입 다물게 만들고 루시의 질문을 막고 샘을 뚱하게 만든다. 아기는 원하는 것은 뭐든 얻는다. - P118
마는 냄비 바닥에 깔린 국물에 달려든다. 마의 숟가락이 바닥을 긁어 대는 소리에 루시의 신경이 곤두선다. 마는 예전처럼 샘이나 루시에게 한 입 먹으라고 하지도 않는다. 루시는 아기가 이기적이지 않냐고 묻는다. 자기나 샘은 마를 아프게 한 적이 없는데. 마는 그 질문에 웃고 또 웃는다. 마는 다정한 목소리로 원래 남자들은 그렇게 법석을 떠는 거라고 말한다. - P119
바는 예상하지 않은 방향에서 온다. 집 뒤쪽에서 쩔렁거리고 덜그럭거리며 나타난다. 바가 식탁 위에 뚱뚱한 주머니를 던진다. "어디서—"마가 말한다. "급여일이잖아. 일찍 받았어." 돈주머니 솔기처럼 바의 목소리도 뿌듯함으로 터질 듯하다. "내가 약속했잖아, 친아이더?" - P119
샘의 매력은 뭘까? 루시는 오랫동안 샘을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샘한테서 무얼 보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사방으로 돌아가는 대담한 시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팔다리. 샘은 야생 동물처럼 움직임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그저 샘이 풀 속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보고 싶어 즐거이 샘을 쳐다본다. - P121
적막이 방 안을 가득 메운다. 탄광에서는 적막이 진동이나 화재보다 더 무시무시하다. 치명적인 가스에 앞서 적막이 찾아온다. 가스는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고 유일한 전조가 적막이다. - P127
루시는 까칠까칠한 것을 삼키는 법을 익힌다. 흙가루, 운동장의 욕설, 얼굴을 타고 흘러 입으로 들어가는 침, 리 선생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타나는 바의 까칠한 태도. 루시는 큰 입으로 뭐든 삼킨다. - P129
나중에 루시는 운동장에서 일어난 일이 고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고기가 샘의 피부와 머리카락을 더 반짝거리게 한다. 흙 먼지에도 가려지지 않는 윤기가 흐른다. 루시는 고기 탓을 할 것이고 더 나중에는 고기를 사느라 들어간 돈, 그 돈을 치르기 위해 뼈 빠지게 일했던 나날들, 고깃값을 정한 사람들, 탄광을 세우고 그토록 적은 임금을 준 사람들, 땅속을 비우고 강물을 말려 날씨를 건조하게 만들어 버린 사람들, 누구는 땅을 차지하고 다른 사람은 먼지가 떠도는 허공만 움키게 만든 세상을 탓할 테지만 그러나 너무 오래 생각하면 사방이 트인 언덕 위에서 햇빛 속에 서 있을 때처럼 어질어질해진다. 떨쳐 버릴 수 없는 이 단단한 금빛 땅이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까? - P129
마의 고운 외모하고 엇박자를 일으키는 낮은 목소리. 움찔거리는 토끼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는 마, 웅덩이에 빠진 노새를 끌 어 올리는 마. 루시의 생각에 답하듯 마는 말을 천천히 한다. 꿀단지 속에서 움직이는 칼날처럼. - P138
"징징대지 마." 마가 손끝을 닦는다. "니장다러(다 컸잖아). 어떤 게 거짓말이고 어떤 게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건지 알 만큼은 됐잖아. 너한테 땅에 묻는 법 가르쳐 준 거 기억해? 진실을 묻어야 할 때도 있어." - P140
루시는 묻고 싶었다. 왜 지금은 안 되는데요? 더 큰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 그러나 마는 다시 웃는다. 빛으로 가득한 응접실에는 걸맞지 않아 리 선생님은 절대 볼 수 없을 미소다. 그러나 마를 특히 아름답게 만드는 게 바로 이런 자기모순이란 걸, 루시는 다시 떠올린다. 매끈한 피부에 거친 목소리. 슬픔 위로 번지는 미소. 마의 눈이 한없이 멀고먼 곳을 응시하게 만드는 기이한 아픔. 큰 바다만큼의 물이 차서 넘친다. - P141
"니즈다오, 루시 걸, 불 속에서 사람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아니?" 루시가 마를 일으키자 마가 말한다. 둘은 다른 광부들 집을 지나쳐 계속 간다. 집 안에 등이 켜져 있다. 문이 열려 있어 밤도 아닌데 어둑해진 바깥세상으로 노란빛을 쏜다. "난 알아." 여자들이 문 앞에 서서 구름을 본다. "불은 묻을 걸 하나도 안 남겨." 루시는 겁에 질린 노새를 달랠 때처럼 음음거리는 소리를 낸다. "귀신이 이베이쯔(평생) 따라와. 절대 놓아주지 않아." 재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커다란 조각은 마가 싫어하는 나방 같다. 마는 나방은 죽은 자가 찾아온 거라고 했다. - P141
일요일마다 바와 샘이 나간 직후에 루시도 집에서 나온다. 마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리 선생님 집으로 과외 수업을 받으러 간다. 예의범절의 교훈. 차만 마시고 배부른 척하는 법. 쿠키, 케이크, 가장자리를 잘라 낸 샌드위치 등의 음식을 사양하는 법. 은으로 된 통에 담겨 나오는 소금을 빤히 보지 않는 법. 소복하게 쌓여 하얗게 반짝이는 소금. 혀끝에서 짜릿하게 타는 그 느낌을 갈망하지 않는 법. 질문에 대답하는 법.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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