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물과 아늑한 방, 새 옷과 목욕이 간절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건 그냥 물건일 뿐이다. 그것 이상은, 루시도 모른다. 몸 안에 생긴 텅 빈 자리에 전에 담고 있던 것들을 담을 수가 없다. 무덤을 파낸 자리에 원래 흙을 다 다시 넣지 못했던 것처럼. 너무 깊이 파면, 좋은 것들을 너무 많이 파내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광부들은 안다. 바의 시신, 마의 트렁크, 판잣집과 개울과 언덕—이 모든 걸 루시는 기꺼이 두고 왔다. 샘만은 곁에 남아서 함께 미래로 건너갈 거라 기대하면서. - P92

가족이 우선이야. 바가 말했고, 마도 그렇게 말했다. 바가 때리고 화를 내기는 했으나 그래도 루시는 마지막까지 바의 그 신념은 존중했다. 그 신념이 루시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 P94

샘은 이제 다가오지 않는다. 루시는 뒤로 물러선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다. 루시가 뒤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러서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 기쁨이 솟는다. 몸의 일부는 이미 스위트워터에 가 있고 자기가 고아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연습하고 있다. 마음속 아주 작은 부분, 맺히고 꼬인 부분은 샘하고 같이 가지 않는다는 것, 샘의 기이함을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란 것에 안도한다. - P96

샘이 공포에 질리자 도로 어려 보인다. 루시가 새로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으로 루시는 동생을 보면서 자기 몸에서 피와 함께 연민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아까와 다른 무엇을 두고 떠나는 기분이다. - P97

바가 흔들의자를 가져오라고 한다. 샘이 얼른 의자를 들고 문턱을 넘는데 의자 위에 쌓인 널빤지들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루시가 달려들어 널빤지를 잡는다. 그러다가 발끝으로 호랑이의 마지막 획을 건드린다.
루시는 말할까 말까 생각한다. 그러면 마는 그 의식을 처음 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할 것이고, 바는 루시에게 화를 내며 다쭈이 (수다쟁이)라고 하며 아무 때나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말 할 것이다. 루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냄새가 나는 집, 오래된 닭똥 얼룩에 대해서도 아무 말 않듯이. 그렇게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배운다. - P103

"당분간만이야." 하루의 시작일 수도 있는 하루의 끝이 되면 바가 약속한다. 밖은 다시 어두워져 있다. 이맘때면 늘 슬픔이 저 멀리 언덕 위로 사라지는 햇빛 줄기처럼 루시를 스치고 지나간다. 다른 광부들은 너덧씩 무리를 지어 서로 등을 치고 인사를 하고 불평을 나누지만, 바와 루시는 따로 걷는다. 바가 루시의 뻣뻣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팅워. 계획이 있어. 원한다면 곧 학교에 갈 수 있어, 뉘얼(딸)."
루시는 바의 말을 믿는다. 진심으로. 그렇지만 믿음이 고통을 더 쓰라리게 한다. 땅굴 안에서 그토록 갈구하던 랜턴 불빛이 눈을 시리게 하듯이. - P107

루시는 마가 욕을 하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날 밤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낀다. 마가 그 뼈와 함께 얼마나 많은 해를, 얼마나 많은 세기를 삼켰을까? 오늘 밤 무언가 다른 것이 마의 목구멍으로 기어 나오고도 남을 만큼은 될 것이다. 무언가 거대하고 거친 것이. 역사, 루시는 갑자기 그 말을 떠올린다. 이곳에 오기 전의 전 마을에서 술 취한 사람이 그들의 짐마차에 침을 뱉었던 일이 생각난다. 바와 마는 앞쪽 만 보고 있었지만 술꾼은 땅이 어쩌고 주인이 어쩌고 법적으로 누가 주인이고 뭐를 묻어야 한다며 소리를 질렀다. 루시는 그 사람이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마가 내뱉는 격앙된 소리에서 똑같은 사나운 짐승을 알아보았다. 그게 역사임이 분명했다. - P112

마가 고개를 흔든다. 마의 뺨에 그림자가 생긴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인다. 바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루시에게는 잘 들리지 않지만 오래된 약속들을 읊는 걸 알 수 있다. 마는 도중에 웃음을 짓더니, 다시 표정이 바뀐다. 얼굴이 굳는다. 여러 해 뒤에 루시는 그 단단함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마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결심이었는지, 용기였는지, 냉담함이었는지 판단하려 할 것이다. 자기 안에서도 그걸 끌어내려고 애쓰면서. - P113

마는 침대에 누워, 잔을 쥔 너무 마른 손을 바르르 떨면서 그걸 마신다. 목구멍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몇 시간 동안의 바의 노동, 수 세기의 생명이 아기 안으로 사라진다.
역사, 루시는 그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떤다. - P114

아기는 그렇지 않다. 아기는 입이 없으므로 마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아기는 바를 입 다물게 만들고 루시의 질문을 막고 샘을 뚱하게 만든다. 아기는 원하는 것은 뭐든 얻는다. - P118

마는 냄비 바닥에 깔린 국물에 달려든다. 마의 숟가락이 바닥을 긁어 대는 소리에 루시의 신경이 곤두선다. 마는 예전처럼 샘이나 루시에게 한 입 먹으라고 하지도 않는다. 루시는 아기가 이기적이지 않냐고 묻는다. 자기나 샘은 마를 아프게 한 적이 없는데. 마는 그 질문에 웃고 또 웃는다. 마는 다정한 목소리로 원래 남자들은 그렇게 법석을 떠는 거라고 말한다. - P119

바는 예상하지 않은 방향에서 온다. 집 뒤쪽에서 쩔렁거리고 덜그럭거리며 나타난다. 바가 식탁 위에 뚱뚱한 주머니를 던진다.
"어디서—"마가 말한다.
"급여일이잖아. 일찍 받았어." 돈주머니 솔기처럼 바의 목소리도 뿌듯함으로 터질 듯하다. "내가 약속했잖아, 친아이더?" - P119

샘의 매력은 뭘까? 루시는 오랫동안 샘을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샘한테서 무얼 보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사방으로 돌아가는 대담한 시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팔다리. 샘은 야생 동물처럼 움직임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그저 샘이 풀 속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보고 싶어 즐거이 샘을 쳐다본다. - P121

적막이 방 안을 가득 메운다. 탄광에서는 적막이 진동이나 화재보다 더 무시무시하다. 치명적인 가스에 앞서 적막이 찾아온다. 가스는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고 유일한 전조가 적막이다. - P127

루시는 까칠까칠한 것을 삼키는 법을 익힌다. 흙가루, 운동장의 욕설, 얼굴을 타고 흘러 입으로 들어가는 침, 리 선생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타나는 바의 까칠한 태도. 루시는 큰 입으로 뭐든 삼킨다. - P129

나중에 루시는 운동장에서 일어난 일이 고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고기가 샘의 피부와 머리카락을 더 반짝거리게 한다. 흙 먼지에도 가려지지 않는 윤기가 흐른다. 루시는 고기 탓을 할 것이고 더 나중에는 고기를 사느라 들어간 돈, 그 돈을 치르기 위해 뼈 빠지게 일했던 나날들, 고깃값을 정한 사람들, 탄광을 세우고 그토록 적은 임금을 준 사람들, 땅속을 비우고 강물을 말려 날씨를 건조하게 만들어 버린 사람들, 누구는 땅을 차지하고 다른 사람은 먼지가 떠도는 허공만 움키게 만든 세상을 탓할 테지만 그러나 너무 오래 생각하면 사방이 트인 언덕 위에서 햇빛 속에 서 있을 때처럼 어질어질해진다. 떨쳐 버릴 수 없는 이 단단한 금빛 땅이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까? - P129

마의 고운 외모하고 엇박자를 일으키는 낮은 목소리. 움찔거리는 토끼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는 마, 웅덩이에 빠진 노새를 끌 어 올리는 마. 루시의 생각에 답하듯 마는 말을 천천히 한다. 꿀단지 속에서 움직이는 칼날처럼. - P138

"징징대지 마." 마가 손끝을 닦는다. "니장다러(다 컸잖아). 어떤 게 거짓말이고 어떤 게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건지 알 만큼은 됐잖아. 너한테 땅에 묻는 법 가르쳐 준 거 기억해? 진실을 묻어야 할 때도 있어." - P140

루시는 묻고 싶었다. 왜 지금은 안 되는데요? 더 큰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 그러나 마는 다시 웃는다. 빛으로 가득한 응접실에는 걸맞지 않아 리 선생님은 절대 볼 수 없을 미소다. 그러나 마를 특히 아름답게 만드는 게 바로 이런 자기모순이란 걸, 루시는 다시 떠올린다. 매끈한 피부에 거친 목소리. 슬픔 위로 번지는 미소. 마의 눈이 한없이 멀고먼 곳을 응시하게 만드는 기이한 아픔. 큰 바다만큼의 물이 차서 넘친다. - P141

"니즈다오, 루시 걸, 불 속에서 사람 몸이 어떻게 되는지 아니?" 루시가 마를 일으키자 마가 말한다. 둘은 다른 광부들 집을 지나쳐 계속 간다. 집 안에 등이 켜져 있다. 문이 열려 있어 밤도 아닌데 어둑해진 바깥세상으로 노란빛을 쏜다. "난 알아." 여자들이 문 앞에 서서 구름을 본다. "불은 묻을 걸 하나도 안 남겨." 루시는 겁에 질린 노새를 달랠 때처럼 음음거리는 소리를 낸다. "귀신이 이베이쯔(평생) 따라와. 절대 놓아주지 않아." 재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커다란 조각은 마가 싫어하는 나방 같다. 마는 나방은 죽은 자가 찾아온 거라고 했다. - P141

일요일마다 바와 샘이 나간 직후에 루시도 집에서 나온다. 마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리 선생님 집으로 과외 수업을 받으러 간다.
예의범절의 교훈. 차만 마시고 배부른 척하는 법. 쿠키, 케이크, 가장자리를 잘라 낸 샌드위치 등의 음식을 사양하는 법. 은으로 된 통에 담겨 나오는 소금을 빤히 보지 않는 법. 소복하게 쌓여 하얗게 반짝이는 소금. 혀끝에서 짜릿하게 타는 그 느낌을 갈망하지 않는 법.
질문에 대답하는 법.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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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리를 타고 달리면서 보면 언덕이 물살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마가 늘 말하던 큰 바다가 누런 풀로 일렁인다. 멀리 보이던 산이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어느 날 루시는 산이 파란색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녹색 수풀과 회색 바위, 능선 깊이 새겨진 보라색 그림자가 있다.
땅에도 색이 생긴다. 물줄기가 넓어진다. 부들, 쇠비름, 야생 마늘과 당근. 산은 험준해지고 골짜기는 깊어진다. 이따금 그늘진 수풀 아래에서 선연한 녹색으로 풀이 자란다.
여기가 아빠가 그렇게 찾던 야생의 땅인가? 작은 몸뚱이가 땅에 완전히 집어삼켜질 듯한 이 느낌—땅이 그들을 보이지 않게, 용서처럼 묻어 버릴 것 같은 느낌. 루시의 몸이 줄어들며 루시 안의 텅 빈 자리도 줄어든다. 거대한 산 아래에서, 우뚝 솟은 참나무 사이로 걸러지며 녹색이 되는 금빛 빛살 아래에서 하찮디하찮은 존재가 된다. 먼지 맛보다 생명의 맛이 더 많이 나는 바람 속에서는 샘조차도 유순해진다. - P63

광부 아내들 중 땅 안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던 이들이 있었다. 문명 세계. 산지 너머 비옥한 평야 지대에 살다가 광부 남편의 뒤를 따라 서쪽으로 온 여자들이었다. 남편이 보낸 편지에는 탄가루 이야기는 없었다. 이 여자들은 밝은색 드레스를 입고 왔지만 서부의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드레스 색은 그들의 희망만큼이나 빠르게 바래 버렸다. - P64

루시의 가장 간절한 꿈,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은 용이나 호랑이를 물리치는 꿈이 아니다. 황금을 찾는 꿈도 아니다. 루시는 먼 땅에서 기적을 본다. 군중 속에서 자기 얼굴이 튀지 않는 곳. 집으로 가는 긴 도로를 따라 걸어갈 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곳. - P65

루시는 속으로 말한다. 기억해? 바가 탐광하는 법 가르쳐 주던 것. 기억해? 바 손목의 기름 화상 자국. 기억해? 바가 들려주던 이야기. 기억해? 생살이 나오도록 물어뜯은 손톱. 기억해? 술 마시면 코를 골던 것. 기억해? 바의 흰머리. 기억해? 바의 허풍. 기억해? 돼지고기에 후추를 친 걸 좋아하던 것. 기억해? 바의 냄새.
[…]
기억해? 말 타는 법 가르쳐 주던 것. 기억해? 벗어 놓은 바의 부츠가 바의 발 모양을 하고 있던 것. 기억해? 바의 냄새. 씻지 않게 된 이후 말고, 술을 마시게 된 이후 말고, 그 전의 냄새. - P69

이제 샘은 배가 고프다거나 춥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지평선 위에서 맴도는 나지막한 회색 구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집이 제대로 서지 못한다는 사실, 호랑이 두개골이 제아무리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내 봤자 귀리가 떨어지고 총알도 떨어진 지금 굶주림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고집으로 이겨 내겠다는 듯이. 루시는 앞날에 대해 말하려고 애쓴다. 샘이 하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죽은 과거에 관한 것뿐이다. - P77

풀밭이 평평하고 푸르게 펼쳐져 있다. 아픈 발을 쉴 수 있게 부드러운 벨벳 천을 펴 놓은 것 같다. 멀리 길게 이어진 강이 있고 그 옆에 작은 얼룩이 하나 보인다. 스위트워터가 틀림없다. 루시는 새로운 세계를 깊이 들이마신다. 냄새가 혀끝에 축축하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루시는 앞으로 나가는데—
바람이 어깨를 건드린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며칠간처럼 매섭고 거센 바람이 아니라 애잔한 느낌마저 든다. 다정하다. 바람에서 느껴지는 슬픔 때문에 루시는 뒤를 돌아본다. - P89

강에 닿자—
지금껏 루시에게 물은 탄광에서부터 시작해 목이 졸린 듯 얕게 졸졸 흘러내리는 물이었다. 이 강은 드넓다. 살아 있는 생명체다. 강둑에 부딪히며 사납게 날뛴다. 마가 바도 물이라고 했는데, 오늘 이전에는 물이 어떻게 그런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 P90

샘은 팔꿈치를 대고 뒤로 기대며 느긋하게 말한다. "사람들이 우리가 싫다고 하면 떠나면 되지. 우리도 싫으니까."
루시는 놀라서 샘을 쳐다본다. 샘은 어처구니없게도 씩 웃는다.
석 달 동안 두려워하며 숨어 다녔는데, 샘은 그걸 마치 게임처럼 여긴 거다. 어디에 있든 제집처럼 여기는 샘, 힘들수록 반짝이는 샘. 샘이 그렸던 지도, 샘이 가겠다고 한 경로가 단지 몇 달이나 몇 년의 여정이 아니었음을 루시는 깨닫는다. 그것은 한평생의 시작이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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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이 벌떡 일어나 모닥불에서 날아간 불씨를 밟는다. 풀에 옮겨붙었다. 불 피울 자리를 더 넓게 만들었어야 했다. 같이 풀을 뽑았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사소한 행동 하나가 요새는 자칫 재앙이 되려 한다. 깜박이는 별이 추적대의 호롱처럼 보이고, 넬리의 발굽 소리가 권총 공이치기를 당기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점점 더 루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속이 텅 비어서 바람에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언덕이 타 버리든가 말든가. - P44

그날 밤 몇 시간이고 기다렸지만 샘은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하릴없이 모닥불을 끄면서 필요 이상으로 흙을 높이 쌓는다. 양손 다 흙투성이로 더러워진다. 루시는 알았어야 한다. 개는 두 다리로 설 수 없고 가족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 P49

샘은 다시 빌린 목소리로 말을 한다. 어른 남자 목소리도 아니지만 샘의 본디 목소리도 아니다. "넬리가 똑똑하다면 충성을 알겠지. 똑똑하다면 벌도 달게 받을 거고."
"무거워서 지쳤어. 나도 지쳤고. 넌 아니니?"
"바라면 지쳤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아."
어쩌면 그게 바의 문제였을 것이다. 바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깨끗한 셔츠 한 장 없이 더러운 꼴로 침대에서 죽기 전에. 루시는 뜨거운 두피 위에 한 손을 얹는다. 머리가 아찔하다. 텅 빈 자리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온다. 밤이면 바람이 생각을 머릿속에 불어넣는 것 같을 때도 있다. - P52

"계속 가면 더 좋은 데가 나올 거야." 샘이 말한다.
이번에 가는 곳은 더 나을 거야, 바는 새로운 탄광으로 가려고 이삿짐을 쌀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더 나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 루시가 말한다. 그리고 그때 루시는 느닷없이 웃는다. 바가 죽은 뒤로 한 번도 웃지 않았다. 하, 하 웃는 억지웃음이 아니라 날것으로 터져 나오며 아프게 하는 웃음이다. 샘이 바의 무모한 꿈을 좇으려는 거라면 이 방랑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샘이 원하는 게 그것인지도. 바를 영원히 등에 지고 가는 것. - P53

루시는 올라간다.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자 목마른 풀이 치맛단에 손을 뻗는다. 떠돌아다니는 동안에 치마가 짧아졌고 빛이 바랬다. 바싹 마른 풀이 루시의 다리에 정교한 무늬를 새기며 피를 낸다. 언덕 꼭대기에서 루시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는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귀를 꽉 닫는다. 팅러 (들려)? 마가 루시의 귀를 두 손으로 막으며 물었다. 처음에는 정적. 이어 들려오는 박동과 피가 흐르는 소리. 네 안에 있어. 너의 근원이. 바다 소리. - P54

마가 소금에 절인 자두를 생각한다. 절이면 효과가 더 강력해진다. 바가 잡아 온 짐승에 소금을 치던 것도 기억한다. 철을 닦을 때 쓰던 소금. 상처에 뿌리는 소금. 쓰라리지만 소독을 해 준다. 소금은 씻어 주고 소금은 지켜 준다. 일요일마다 부유한 남자의 식탁 위에 있던 소금, 한 주의 흐름을 각인하는 맛. 과일이나 고기를 쪼그라들게 하고, 변성시키고, 시간을 벌어 주는 소금. - P55

남자는 어때야 남자지? 트렁크를 연다. 세상에 보여 줄 얼굴이 있어야 하나? 세상을 바꿀 손과 발이 있어야 하나? 세상을 걸을 두 다리가 있어야 하나? 둥둥 뛰는 심장, 노래를 부를 이와 혀가 있어야 하나? 바에게는 남은 게 거의 없다. 남자의 형체조차 사라졌다. 스튜가 냄비 모양이듯 바는 트렁크 모양이 되어 있다. 루시는 가장자리가 녹색으로 변한 고기나 며칠 동안 얼린 고기를 염장한 적도 있다. 그래도 이런 건 한 번도 없었다. - P56

장례는 어떤 요리법을 따르는 거나 마찬가지야, 마가 말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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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작다. 그런데도 송아지 가죽 부츠를 신고 남자다운 걸음걸이로 걷는다. 샘의 그림자가 뒤로 뻗어 루시의 발끝을 건드린다. 샘은 그림자가 진짜 키이고 몸뚱이는 거추장스러운 일시적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내가 카우보이가 되면, 샘은 말한다. 내가 모험가가 되면. 최근에는, 내가 이름난 무법자가 되면. 내가 어른이 되면. 열망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다. - P18

먼지바람이 코를 쓸고 가 루시는 멈춰 서서 기침을 한다. 목구멍이 울컥거린다. 어제 저녁밥을 길에 쏟아 낸다.
바로 떠돌이 개들이 달려와 토사물을 핥는다. 순간 루시는 머뭇거린다. 샘의 부츠가 초조하게 바닥을 치고 있는데도. 루시는 하나 남은 혈육을 버리고 개들 사이에 쭈그리고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두고 개들과 싸우는 상상을 한다. 개의 삶은 배와 다리로 이 루어진 삶, 뛰고 먹는 삶이다. 단순한 삶. - P18

연기와 화약 구름 속에서 바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샘." 루시는 자기도 울고 싶지만 꾹 누른다. 이제 본디 자기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샘, 이 등신아, 바오베이(아가야), 멍청아." 달콤함과 신랄함을, 다정함과 욕을 섞어. 바처럼. "가자." - P22

샘이 학교에서 왼쪽 눈에 자두 같은 멍이 들어 돌아온 날, 바가 루시에게 으르렁거렸다. 루시의 옷은 잘못의 증거처럼 멀끔했다. 겁쟁이. 비겁한 계집애. 사실 루시는 샘이 놀리는 아이들에 맞서는 걸 보았지만 샘이 소리를 지르는 게 용감한 건지는 잘 몰랐다. 소란을 피우는 게 용감한 것인가, 아니면 루시가 그랬던 것처럼 침이 타고 흐르는 얼굴을 조용히 숙이고 있는 게 용감한 것인가?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 P29

루시는 내려다본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샘의 얼굴을 언제나 내려다본다. 진흙처럼 갈색이고 진흙처럼 무정형이고 질투 날 정도로 쉽게 감정이 나타나는 얼굴이다. 여러 감정이 나타나지만 두려움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려움이 있다. 처음으로 동생 얼굴에서 자기 모습을 본다. 그리고 지금이, 학교에서의 괴롭힘이나 차가운 총구의 감각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용기의 순간임을 루시는 깨닫는다. 루시는 눈을 감는다. 주저앉아 팔에 얼굴을 묻는다. 가만히 있는 게 지당한 방법이라고 판단한다. - P33

바는 일확천금을 얻으려 했고 등 뒤에 몰아치는 비바람처럼 평생 식구들을 몰고 다녔다. 언제나 더 새로운 곳을 향해. 더 거친 땅으로. 반짝이는 부가 벼락같이 나타나리라는 약속을 좇아. 몇 해 동안 아버지는 금을, 주인 없는 땅이나 파헤쳐지지 않은 금맥이 있다는 소문을 좇았다. 가 보면 언제나 똑같이 파헤쳐지고 망가진 언덕, 돌 파편만 가득한 시내뿐이었다. 탐광은 바가 가끔 가는 도박 굴에서 하는 게임이나 마찬가지로 운에 좌우되는 일이었고 바는 언제나 운이 없는 쪽이었다. 마가 단호하게 이제부터는 석탄으로 일한 만큼 버는 삶을 살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탄광에서 탄광으로, 짐마차를 타고 언덕을 넘고 또 넘었다. 통 바닥에 마지막 남은 설탕을 긁어내는 손가락처럼. - P37

루시가 세 살인가 네 살 때 바가 가르쳐 준 요령이었다. 루시가 놀다가 짐마차를 놓쳐 버렸을 때다. 엄청나게 넓은 하늘이 루시를 짓눌렀다. 풀밭이 끝이 없이 일렁였다. 루시는 샘처럼 날 때부터 용감하고 항상 싸돌아다니는 아이가 아니었다. 루시는 울음을 터뜨렸다. 몇 시간 뒤에 바가 루시를 찾아내고는 루시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더니 위쪽을 보라고 했다.
이 지역에서 하늘 아래 한참 서 있다 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구름이 정처 없이 흘러간다. 그러다가 구름이 돌아서 나를 향해 소용돌이치듯 모여든다. 한참 있다 보면 언덕이 작아진다. 아니, 내가 자라난다. 원한다면 언덕을 넘어 저 멀리 파란 산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거인이 되었고 이 땅이 모두 내 땅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또 길을 잃으면,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너도 이 땅에 속한다는 걸 잊지 마라. 바가 말했다. 겁내지 말고. 팅워?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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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 모두 우리가 셋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잘 알고 있어서, 가끔 둘이고 자주 둘이고 영원히 혼자이지만 우리는 셋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관계가 된 게 좋았다. 언제나 곁눈질을 하던 관계에서 드디어 셋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 것이 좋았고 셋이서 오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음을 알고 있는 상태가 좋았다. - P172

비교할 게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할 확률이 높다. 아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근처를 둘러보면 민아와 해든이 있었다. 아름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을 때. 끼어 있다는 감각이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민아와 해든은 아름에게 부표 같았다. 망망대해 같은 세상을 전부 이해할 순 없고 부표가 떠다니는 것을 보며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었다. 이들이 이쯤 있으니, 나는 그보다 한두 파도 뒤를 떠다니고 있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다행이라고, 그 정도만 떨어져 있으면 좋겠다고, 손을 휘저어 가까스로 해든이든 민아든 누구의 손끝에라도 닿을 수 있다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왜 그들이 그렇게 필요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이 훌륭하니까, 라고밖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 P195

바람이 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아름은 우리를 묶은, 특히 나를 그들에게 묶은 이 마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그야 좋아하는 마음. 너에게 없는 것이 내게 있고 내게 없는 것이 너에게 있길 바라는 마음. 혹은 기꺼이 그렇게 착각하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 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단단해진 종아리를 쉬게 두었다. - P205

실은 출판사에서 표지 시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사진은 두 개였다. 민아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과, 언젠가 아름이 실수로 깨뜨린 도자기 사진. 그것은 아름이 처음으로 작품을 찍은, 작품으로서 찍은 사물, 인간 아닌 것이었다. 깨진 접시. 얼기설기 겹쳐진 사금파리 대여섯 조각. 늦은 오후의 빛을 온몸으로 반사하는 듯, 주변 공기를 금빛으로 부드럽게 부풀린 듯한 민아의 뒷모습과 깨진 그릇의 파편을 쌓아올린 무채색의 사진. 그것은 아름이 처음부터, 그리고 줄곧 남기고 싶어하던 우정과 결함의 흔적이었다. 애정과 서툶의 증거.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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