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실험실 책상 위에 걸린 다윈의 인용구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라며 꾸짖었다. 획을 둥글게 굴린 갈색 캘리그래피로 쓴 이 글은 니스를 바른 나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에서 가져온 글귀다. 그것은 다윈의 달콤하지만 의미 없는 말, 자신이 이 세상에서 신이라는 꽃봉오리를 제거한 것에 대한 사과의 말, 장엄함이 존재한다는, 충분히 열심히 들여다본다면 찾게 될 거라는 약속의 말과도 같았다. 하지만 때로 그 말은 비난처럼 느껴졌다. 네가그 장엄함을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처럼. - P60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나는 아이에게 꼬리를 붙들려 카펫 위로 ‘끌려가는‘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진화론자들의 진영으로 넘어갔다!" - P68

바늘을 칼처럼 휘두르는 그가 뻔뻔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성의 자리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또한 부인이 반드시 굴욕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 희미한 빛을 발하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 P68

그동안 세상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던 남자가, 그가 추구하는 것들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때로는 괴롭힘까지 당하던 남자가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승격된 것일까? 나는 온순하고 음울하며, 먼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한 이 남자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은 채 미끄러지듯 슬그머니 지나다니다가, 어느새 어떤 목적의 빛으로, 공기로, 빛나는 물질로, 뭐가 되었든 아무튼 그 목적으로 서서히 차오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목적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 P75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이런 재해를 겪고도 멈추기를 거부했다. 자신이 잃은 것들을 되찾기 위해 재를 털고 곧바로 다시 물이 있는 곳들을 찾아갔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가 하는 생각을 붙잡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하려는 일, 그러니까 혼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질서를 만들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련 전체에서 얻은 교훈은 딱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게 뭐였을까? 겸손을 유지하라는 것? 이를테면 북미의 모든 담수어를 발견하겠다는 목표보다 좀 더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라는 것이었을까? 그는 "당장 출판하라는것"이라고 썼다. 아, 더 세게 밀어붙이라는 말이었구나. - P77

그는 자신의 과학관 입구에 아가시의 조각상을 올리는 일에 환호했다. 그는 아가시가 다윈을 거부한 것을 용서했으며, 그 이유는 "[아가시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정신이 ‘어떤 인간들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에 오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형 루퍼스를 따라 공공연히 자신을 노예제 폐지론자로 밝혀왔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그런 생각이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거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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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 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데크 아래 솔잎들이 쌓인 땅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위계의 지도를 들여다보느라 아버지는 여기서 잠시말을 멈췄다. "과연 네가 토양 속에서 환기를 시킬 수 있을까? 목재를 갉아 먹어 분해의 속도를 높이는 일은?" - P55

"나는 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런 면에서 지구에게 넌 개미 한 마리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 P55

"좋아. 이제 이게… 전체 시간의 길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버지는 자기 가슴 앞에 펼쳐진 눈에 보이지 않는 광대한 시간의 선을 손으로 더듬었다. "여기서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요만큼이야!" ‘요만큼‘이라는 말을 할 때 아버지는 연극적인 동작으로 꼬집듯이 손가락들을 모았다. "게다가 우리는 아마 곧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만약 지구 저 멀리서 떨어져서 본다면…" 여기서 아버지는 혀를 차서 끽끽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지. 거기엔 행성들이 있고, 그 너머엔 더 많은 태양계가 있어…" - P55

거의 20년 뒤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우리는 점 위의 점 위의 점이다" - P56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아버지는 수년 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고,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 P57

나는 더 용감한 여자아이, 더 견고한 영혼을 지닌 여자아이라면 그런 말도 웃으며 받아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문제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들인지도 잘 알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그게 없었다. 그게 뭐였든 간에 말이다. 튼튼한 뼈대처럼 강한 기개를 찾으려 더듬거렸을 때 내 손에 잡히는 건 모래뿐이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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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왔다. 수십 년간 강박적인 수집가들과 상담해온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Werner Muensterberger는 《수집: 다루기 어려운 열정Collecting: An Unruly Passion》에서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그라나다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 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31

이런 접근법을 우려스럽게 본 아가시는 "과학은 일반적으로 믿음을 싫어한다"고 경고했다. 예컨대 1850년이나 되어서도 다수의 존경받는 과학자들이 벼룩과 구더기 같은 것이 먼지 입자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는 ‘자연발생설’을 여전히 믿고 있었고, 그보다 몇십 년 전까지도 어떤 물질이 불에 탈 수 있는지 없는지를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마술적 물질이 결정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 바다생물의 살갗이라도 찾으려는듯 그 신비로운 파도를 눈으로 훑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 시절에도 여전히 수줍음과 새로운 장소에 대한 경계심이 남아 있었다고 고백한 걸 보면 말이다. - P40

그때 저 분류학자들이 잡초와 바위와 달팽이를 뚫어지게 관찰하면서 찾고 있었던 것은… 그 이름 붙일 수없는 존재, 유일자, 근원, 힘, 진리, 보이지않는 존재… 신이었던 것이다! - P43

갑자기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어쩌면 그 습지의 광활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습지의끝은 바다고, 바다의 끝은… 나로서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이었는데–나는 돛단배가 기울어지다 넘어가는 어떤 가장자리를 머릿속에 그렸다–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우리 모두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 P54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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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하는 건 멋있는 게 아니라 그저 술을 마시는 건데. - P153

그렇다. 여자들이 조금의, 아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법적으로 허용된 공간이라면 그 어디에서든지 밖혼술을 마실 수 있는 세상이 당연히 좋은 세상이다. 밖혼술의 기준에서 세상은 그리 좋아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나빠졌다. - P155

어쩌면 내 마음에는 절이 아니라 주막이 지어져 있을지도. - P156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술은 제2의 따옴표다. 평소에 따옴표 안에 차마 넣지 못한 말들을 넣을 수 있는 따옴표. 누군가에게는 술로만 열리는 마음과 말들이 따로 있다.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뾰족한 연필심은 뚝 부러져 나가거나 깨어지지만, 뭉툭한 연필심은 끄떡없듯이, 같이 뭉툭해졌을 때에서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말들이 있다. 쉽게 꺼낼 수 없는 말들.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영원히 속에서 맴돌며 나도 상대도 까맣게 태워버릴지 모를 말들. 꺼내놓고 보면 별것 아닌데 혼자 가슴에 품어서 괜한 몸집을 불리는 말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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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들어서 외울 정도인 그런 유의 비슷비슷한 점괘들 중에 그래도 하나 마음에 남은 건 ‘이 사람 마음 한구석에는 절이 지어져 있다‘는 말이었다. 같은 말이어도 그림이 그려지는 표현이어서였을까. 그 말을 들은 이후로는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서 쉬고 싶거나 속이 시끄러울 때면 내 마음속에 지어져있다는 절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 P141

하지만 소주를 따서 자작하기 시작하니 주변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오며 가며 쳐다보는 시선이 확연히 늘었고, 눈이 마주쳤는데 피할 생각도 없이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래 먹던 상에 그냥 술 한 병 더 추가됐을 뿐인데 갑자기 추가된 것들이 많아졌다. 권여선 소설가는 산문집 『오늘 뭐 먹지?』에서 순댓국집에서 순댓국에 소주를 시켜 혼자 마시는 여자에게 "쏟아지는 다종다기한 시선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이라고 썼는데, 정말 그랬다. 그동안 오직 바에서만 혼자 술을 마셔봤던 나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시선들이었다. 권여선 소설가처럼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라고 호쾌하게 받아넘기기까지 소주 반병이 소요됐다. - P147

"한 장만 먹으면 막걸리 남잖아요. 한 병엔 두 장이지."
난 그만 아주머니에게 반할 뻔했다. 김치전을 한 장 더 주신 것도 주신 거지만, 이렇게 한 쌍으로 묶이는 두 가지 음식의 소진 속도와 적절한 양적 균형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사람은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새 한 김 식은 김치전은 적당히 따뜻했고 당연히 맛있었고 아주머니 말대로 막걸리 한 병과 똑떨어졌다. - P150

이니셜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다. 사실 여자들의 혼술에는 예전부터 감수해야 할 몫들이늘 있어왔다. 냉채족발집에서 겪은 것 같은 묘한 시선들은 많게든 적게든 종종 따라붙었다. 주문을 받는 가게 주인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대면할 때도 있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이야~ 세상 참 좋아졌다. 여자가 초저녁부터 밖에서 혼자 술도 마실 수 있고" 같은, 세상이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이유 그 자체인 사람들의 비아냥 섞인 시비를 겪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때로는 그 뒤에 시비의 강도가 거세져도 말릴 생각 않고 거기에 슬쩍 묻어 힐난의 눈빛을 던지는 가게 주인이나 주변 손님들의 이야기가 덧붙기도 했다. 그런 경우 대개는 여자가 결국 자리를 떠나곤 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밥집에서 혼자 반주를 마시는 여자를 괘씸해하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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