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조금 더 어둠 쪽으로 옮겨 앉는다. 숲은 어둠의 입안으로 삼켜져 버렸다. 바람의 자락에 눅눅한 비 냄새가 실려 온다. 남자의 프로필이 유리창에 떠올랐다. 정면에 선 보이지 않는 강인함이 턱과 광대뼈의 선을 따라 드러나 있다. - P20

유선은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뜬다.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 버린 흐리멍덩한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삶은 이렇게 차갑고 날카롭게, 파도처럼 끊임없이 맨살에 부딪쳐 올 모양이다. - P21

퇴근 시간의 거리는 놀랍도록 생기가 넘쳤다. 희미한 가 을의 기색쯤은 무시해 버리겠다는 듯 커다란 꽃무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흘러 내릴 듯 통이 넓은 청바지를 입은 소년들이 도서관의 경사진 언덕을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려오면서 기름진 비명을 질러 댔다. 그중의 하나와 거의 부딪칠 뻔했던 오토바이 탄 청년이 욕설을 노래처럼 뱉으며 달아나는 소년을 노 려보았다. 건너편의 유리로 된 건물 벽에 밤의 풍경이 심해 처럼 일렁이며 매달려 있다. 낯선 활기는 유선을 벨 것처럼 사방에서 도도하게 밀려온다. 유선은 왜 바깥으로 달려 나왔는지도 잊고 홀린 듯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유선은 건물 모퉁이에 가까스로 서 있는 자신이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온 것처럼 어색하고 부끄럽다. 걸어간다면 자신의 관절에서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투명하고 두꺼운 유리, 자신은 통로를 찾을 수 없는 유리 칸막이가 놓인 것 같다. - P22

아직은, 지금은 아니야. 당신이 없어서 힘들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 아직은 당신이 그립지 않아. 아직은 당신, 밉기만 해. 당신 알아? 그리움보다 강한 미움 말이야. 슬픔보다 더한 미움. 그런 게 있어. 사람들은 날 괴롭히는 게 그리움과 슬픔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지금은, 미움과 부끄러움이야. 왠지는 몰라. 그런데 당신은 밉고 난 부끄러워. 왜 밉고 부끄러운지는 내가 되어 봐야 알 거야. 그렇게 갑자기 떠나면서,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그 소식을 들어야만 했어. 내가 뭘 잘못했기에? - P23

무언가 잘못됐어. 이건 아니야. 뭔가가. 전화를 하면서도 제 목소리의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는 유선을 유선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올 때까지 유선은 주차장에 나와 서 있었다. 그때 유선은 세상에 혼자 서 있었다. 여린 가로등 불빛 뒤로 겹겹의 어둠이 등등했다. 서늘한 바람을 쐬자 잠에서 깨듯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유선을 유선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상향등을 켠 앰뷸런스 한 대가 달려 들어왔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남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침대에 실려 나오는 사람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말 없는 수선스러움 속에 그들이 유리문 안 으로 사라지자 주차장은 다시 어둠과 고요함으로 채워졌다. 유선은 아주 잠깐 주현의 죽음을 잊고 있던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 놀라는 유선을 유선이 뚫어지게 바라 보고 있었다. 시동생 재현의 차가 주차장에 들어설 땐 짧은 여름밤이 병원 뒤편의 엉성한 숲 언저리로 슬금 밀려가 고 있을 때였다. - P26

유선은 스스로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안테나가 무딘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M은 누구일까. 유선 은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 보니 이 글들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다. 발췌해서 적어 놓은 글들까지 모두 하나의 뚜렷한 초점을 향하고 있다. 그건 M이라는 여자다. 성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눈으로 본 것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글을 읽다가, 혹은 떠오르는 생각들 중 M과 연 결되는 모든 것들을 여기 기록해 놓은 것이다. 아니면 이것을 기록하던 날들 동안 주현은 M이라는 인물에 대한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물도 어떤 단어도 그와 연결되어 버리는 지독한 강박증. 그것도 기꺼이. 일생 에 한 번 꿀까 말까 한 깨어나기 싫은 꿈과도 같이. 그는 그 강박을 마지막 순간까지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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