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 보고 싶다. 이처럼 세상이 아름다우니까.

이 남자는 누구일까. 4월부터 7월까지의 날들을 적어 놓은 이 파일의 기록자는 누구일까. 내가 알았던, 그 사람 의 파일이 맞긴 한 것일까.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살고 아이를 낳고 웃고 때로 울며 함께 살아왔던 그 사람일까.
이건 아니야. 엉망으로 취해서 들어온 날이면 중얼거리던 그의 말처럼, 이건 아니야. 이제는 그의 침묵까지도 점자처럼 더듬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게 투명하다고 믿었는데. - P36

그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둘 사이엔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가 옆에 있을 땐 우물의 존재를 몰랐다. 너무 가까이 있는 건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의 시력이니까. 그 심연 속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도, 결핍도, 원심력도, 구심력도, 피로한 감정의 순간도, 은닉된 삶의 조각들도. 그 조각들을 다 맞추어도 기어이 떠오르지 않는 지난 생의 밑그림. 끝내 찾을 수 없는 몇 개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둘 사이의 우물은 너무 깊고 어둡고 그리고 차갑다. - P37

이건, 일기가 아닌 픽션이 아닐까. 이젠 스스로도 설득할 수 없는, 질문이 될 수 없는 바보 같은 질문만을 가까스로 떠올리며 유선은 일어섰다. 이건 제 팔에 스스로 칼을 꽂은 자의 비명이 가득한 기록. 스스로 그 비명을 즐기는 자의 기록일 뿐이었다. 온몸의 수분이 말라 버린 듯, 무릎이 입안이 어깨가 눈알이 파삭거리며 함부로 발굴된 미라처럼 한순간 삭아 내렸다.
그 밤부터 죽은 숙주 속에서 살아가는 에일리언처럼 가려움이 유선의 몸속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P37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밤이 되면 스멀스멀 시작하는 것이다. 통증보다 견디기 괴로운 것이 지독한 가려움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려운 곳은 피부가 아니다. 몸속 어딘가, 피부 한꺼풀 아래의 어느 지점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일어나 앉아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긁어 대면 가려운 곳은 점점 더 깊은 데로 내려간다. 미친 여자처럼 집중하여 제 살을 긁어 대다 보면 각성제를 먹은 것처럼 정신까지 맑아졌다.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을 때면, 차라리 아픈 게 낫겠어, 중얼거리며 창밖이 해질 때까지 청승스럽게 울 때도 있다. 붉게 부풀어오른 살갗을 쳐다보면 피부 아래 이상한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유선은 가려움을 증오했다.

약을 먹고 30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몽롱해졌다. 칼끝처럼 뾰족하던 신경줄이 말랑말랑하게 풀려나가고 못 견디게 잠이 쏟아졌다. 때론 그 잠의 언저리로 야습하는 적처럼 불쑥 가려움이 덤빌 때도 있지만 몽롱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몇 번 뒤치다 보면 이윽고 끈끈한 잠의 바닷속으로 가려움마저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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