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한동안 생면부지의 그 남자 생각을 계속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도 자기가 나에게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지 신경 쓰고 있을까? 누구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남길 원할 것이다. - P67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컬이 있는 구불구불한 머리가램프 불빛 아래에서 타오르는 듯 물결쳤다. 나는 맥이 탁 풀린 나머지 멍하니 문 앞에 멈춰 섰다. 도망칠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하기위해 문 앞으로 걸어왔다.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지만 비야르의 어깨를 툭툭 쳐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나는 손을 슬그머니 집어넣으며 방금 전의 지나친 용기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튼 소리를 내어 웃고 싶었다.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비야르의 여자 친구는 절름발이였던 것이다. - P69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이미 떨어진 빗방울 위에 또 다른 빗방울이 겹쳐 떨어지지는 않았다. - P74

오후 3시였다. 하루 중 가장 끔찍한 시간이다. 일상의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사건에도 나는 즐거워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아주 작고 하찮은 일조차 생기지 않는다. - P76

니나를 만나러 가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조금씩 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럴 용기는 있었다. 왜냐하면 여자와 단둘이 있을 때는 나의 소심함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리 머뭇거려도, 그런 점이 오히려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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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 P252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 P264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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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들 쪽임이 분명한 자리에서 붉은 병을 집어 들었다. 그 병은 길쭉한 직사각형에 크기가 꽤 컸다. 병에 굵게 쓰인 붉고 희고 파란 글씨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3배 더 큰 용량
당신의 존엄만은 남겨 두고
남자의 향기로 무장하라.
더러움을 차버리고
악취를 박살내라.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뭐지? 내 아들이 여기서 사워를 하는 건지, 전쟁을 준비하는 건지?
나는 여자아이들의 가날프고 반짝이는 분홍 병들 중 하나를 들어 보았다. 그 병에는 나를 향해 짖어대던 군대식 명령문들 대신 필기체로 속삭이듯 흘려 쓴, 뜬금없는 형용사들이 있었다. 매혹적이고 윤기 있고 부드럽고 순수하고 반짝이고 도발적이며 가볍고 매끄러운. 동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해야 하는 행동은 없고, 그저 그렇게 보여야 하는 모습들의 목록만 있었다. - P29

샤워를 하는 것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의 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정말 잠시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당연히 아니었다. 21세기인데도 남자 아이들은 여전히 진정한 남자는 크고 거칠고 폭력적이며, 참을 성이 없고 여성성에 혐오감을 가지며, 여자와 세상을 정복할 책임이 있는 존재라고 배우고 있었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진정한 여자는 조용하고, 예쁘고 작고 수동적이며, 정복당할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어야만 하는 대상임을 배우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다. 우리의 아들과 딸들은 여전히 아침에 옷을 차려입기 전에 그들의 온전한 인간성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너무나 커다란 존재다. 대량 생산된 이 딱딱하고 작은 병 속에는 자신을 육여넣을 수가 없다. 그러나 결국은 어느새 거기에 맞춰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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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나무를 더 아래로 훑어 내려가 생명의 기원에 점점 더 다가가면 먹장어(찾아보지 마시라. 이름은 귀엽게 들릴지 모르지만 빨판 같은 주둥이와 면도날 같은 이빨을 지니고 있어 악몽 속 괴물 같다)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들은 흔히 칠성장어와 함께 무악류無類로 분류된다. 그다음으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게으름에 대한 경고의 예로 자주 지적하던, 고착생활을 하는 멍게 (피낭동물)가 있다. 멍게는 엄밀히 말해(어쨌든 오늘날 분류학자들에 따르면) 척추동물은 아니지만, 척삭이라는 척추와 비슷한 구조물을 가장 먼저 선구적으로 갖춘 생물 중 하나다. 다시 말해 멍게는 퇴보한 존재가 아니라 정반대로 혁신가였던 셈이다. - P241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메커니즘이 우리 내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가 자연을 분류하는 방법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믿음 체계를 획득할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누가 한 부류에 속하고, 누가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하며, 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는지 등을 판단하는 분류법을 말이다.
또 다른 연구들은 우리가 이런 직관적인 규칙들을 얼마나 일찍부터 따라왔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람은 생후 4개월째에 이미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직관적 질서가 우리 내부에 장착된 장치의 일부라는 사실이 그 질서가 진실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질서가 유용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 질서가 우리 인간 종이 우리를 둘러싼 혼돈을 성공적으로 항해하고 탐험하도록 도움으로써 수 세대에 걸쳐 기여해왔다는 뜻이다. - P245

의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 철학자 트렌턴 메릭스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는 그의 화살통 속 화살의 수만 하나 늘었을 뿐이다.
"내겐 그리 충격적이지 않네요." 내가 어류의 범주가 해체된 일에 관해 숨 가쁘게 설명하고 나자 그가 한 말이다. 그것은 정확히 그가 자기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 P250

애나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는.… 뭐, 사실 애나가 물고기를포기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애나는 그것이 "부적합"이라는 단어와비슷한 게 아니냐고 물었다. 애나의 등짝에 찰싹 붙어 있는 단어. 애나를 수용소의 벽돌벽 뒤에 던져 넣고 애나가 세대를 이어갈 그 모든 가능성을 절단해버린 바로 그 단어. 나는 그렇다고,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물고기에 대해 연민이 느껴진다고 했다.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연민이었다. - P250

물고기들의 인지가 얼마나 폭넓고 복잡한지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물고기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색을 보며, 특정한 기억 과제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실력을 보이고, 도구를 사용하며, 바흐의 음악과 블루스를 구별할 줄 안다고 한다. 게다가 어떤 종들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 P251

에모리대학의 유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이것이 인간이 항상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상상 속 사다리에서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와 다른 동물들사이의 유사성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것 말이다. 드 발은 과학자들이 나머지 동물들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기술적인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장 큰 죄를 범하는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침팬지의 "키스"를 "입과 입 접촉"이라고 부르고, 영장류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제휴 파트너"라고 부르며, 까마귀와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인류를 정의하는 종류의 도구 제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해석한다. 어떤 인지과제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면–예를 들어 특정한 새종들은 수천 개의 씨앗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그들은 그것을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이와 같은 수많은 언어적 수법을 드 발은 "언어적 거세"라고 표현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자, 우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단어들을 발명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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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 P236

그 발견은 단순했고, 미묘했고, 특출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아주 놀라운 관계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박쥐는 날개가 달린 설치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낙타와 훨씬 더 가깝고, 고래는 실제로 유제류(발굽이 있는 동물로, 사슴이 속한 과)라는사실이 그렇다. - P238

새들이 공룡이라는 사실. 버섯은 식물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동물과 훨씬 가깝다는 사실. - P238

분기학자들은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을 찾는 일에 초점을 맞출 것을 상기시킨다. 한순간이라도 비늘이라는 외피에 시선을 다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걸 밝혀주는 다른 유사점들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거라고. 예를 들어 폐어와 소는 둘 다 호흡을 하게 해주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지만 연어에게는 없다. 폐어와 소는 둘 다 후두개(기관을 덮는 작은 덮개 모양의 피부)가 있다. 연어는? 유감스럽게도 후두개가 없다. 그리고 폐어의 심장은 연어의 심장보다는 소의 심장과 구조가 더 비슷하다. 이런 설명들이 계속 이어지며, 마침내 페어는 연어보다는 소와 더 가깝다는 결론으로 학생들을 이끌어간다. - P239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들 중 다수가 자기들끼리보다는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 - P239

실상 물속 세상을 들여다보면, 비늘로 된 의상 밑에 산꼭대기 산어류들만큼이나 서로 다른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숨어 있다. 이를테면 육기어류鰭魚類, Sarcopterygii–폐어와 실러캔스coelacanth–는 우리와 상당히 가까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진화적 사촌, 허파가 위에 있고 꼬리가 저 아래 있는 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거대한 진화의 분계선 너머에 조기어류條鰭魚類, Actinopterygii가 있다.
연어, 농어, 송어, 장어, 가아Gar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물고기처럼 미끌미끌하고 비늘이 있어 육기어류와 쌍둥이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연골어강이라 불리는 상어와 가오리들도 있는데, 이들은 참 수수께끼 같은 집단이다. 그 매끈한 피부와 곡선을 띤 몸을 볼 때마다 나는 늘 포유류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은 비늘이 있는 송어와 장어보다 우리와 훨씬 더 거리가 멀고, 진화상으로도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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