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을 때든 무너져 있을 때는 항상 가까이에서 나를 돌보고 염려해주었던 이들이 있다는 데 감사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삶의 시간을 만들어 나가는 거, 그게 기쁨이에요." 이처럼 고통은 "왜 하필 내가?"라는 억울함을 거치면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자기에 대한 앎‘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 P39

자기에 대한 앎이란 그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겪는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루는 과정이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제거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삶은 고통의 이유를 원인으로 착각하여 마치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통해 고통의 원인을 없앨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태에서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 채근하며 원인을 더 키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거되지 않은 원인은 대개의 경우 더 악화되고 더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닥쳐온다. 그럴 때 자기에 대한 앎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 P40

무엇이 가치가 있다고 여길 때는 그것이 어떤 좋은 열매, 즉 교훈을 남길 때다. 또한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이 있고, 그 끝이 더 좋은 열매를 남길 때 우리는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고통 역시 가치가 있다면 교훈을 남기며 끝이 나야 한다. 교훈을 바탕으로 자기 삶의 성장을 꾀할 수 있을 때 고통도 가치가 있다. - P44

정도가 압도적인 고통, 결말이 죽음에 이르는 절대적인 고통, 전적으로 자기와는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고통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런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삶에도 이르게 하지 못한다. 설혹 자기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 고통을 다루고 해결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 소위 말하는 ‘정신 승리‘에 불과하다. - P48

고통이 몸과 마음을 모두 장악하면 눈앞에 다른 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고통만이 타자이다. 그러나 그 타자와 주체의 자리는 바뀌어 있다. 고통이 주체가 되어 타자가 된 자신을 응시하고 이끌어간다. 귀신 들린 몸이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는 내 몸이 아닌 이 몸을 부수어버리고 싶고 절규하고 싶어진다.


고통은 소리치는 것 말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말은 고통을 묘사하고 설명하고 분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만이 아니다. ‘고통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고통의 가치와 의미다. 억지로 외부로부터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면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통이 만일 무의미한 것이라면 고통을 통해 우리는 어떤 내면과 세계도 지을 수 없다. 말을 통해 소통되는 ‘의미‘가 있어야 비로소 내면과 세계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54

결국 그가 알게 된 것은 이 고통을 말로 묘사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에게뿐만이 아니다. 종종 자기 스스로도 이게 정말 그렇게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병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자기 몸이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 별것 아닌 게 아니었다. 몸은 아니 ‘뇌‘는 이미 별것 아닌 게 아니라고 판정해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의식적으로 부정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면 할수록 그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속상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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