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화분의 세계는 신비로웠다. 인간의 세계와는 달랐다. 인간의 세계가 ‘말‘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식물과의 관계는 ‘손‘으로 이뤄졌다. 말로 이뤄진 인간의 세계가 불안하고 언제든 배신으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라면 식물과 만든 세계는 정직했다.


말이 필요 없는 관계였다. 말이 없더라도 교감하고 소통하고 구축할 수 있는 관계였다. 말에 의해 배신당하고, 배신의 고통을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또 다른 고통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에게 식물은 ‘손‘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알게 해주었다. 그 관계는 배신이 없는 깨끗한 세계였다. - P69

여기에는 다시 배신당하고 싶지 않다는 절망이 있었다. 그 배신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했다. 말하고 싶지 않음, 그러나 말하고 싶음. 말을 하지 않으면 아예 이해를 받을 수 없지만, 말을 하면 이해가 아니라 오해만 쌓이고 거리가 멀어졌다. 아예 이해를 기대하지 않는것이 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될수록 자신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살아 있기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식물‘뿐이었다. - P71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 측면뿐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모색해야 할 일은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해결하는 것이다. 실존적 측면을 ‘사회적‘으로 나누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고통의 실존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그 고통의 사회성을 환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 혹은 도구로서 의미가 있다. - P76

선아가 ‘분리‘라는 말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너무 확실하게 설명해버리는 이 단어는 종종 선아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했다. 모든 것이 다 ‘마음‘과 ‘분리‘의 문제로 귀결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두 단어는 확실히 그로 하여금 문제를 지나치게
‘심리학화‘하여 바라보게 만들었다. 문제의 사회적 측면이나 실존적 측면을 직면하지 않고 오히려 회피하게 만들고 있었다. 또한 말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선아는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 P87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 언어가 무너질 때마다 선아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럴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흐느끼고, 한숨 쉬고, 절규하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는 다시 ‘말‘의 세계에서 ‘소리‘의 세계로 돌아갔다. - P88

몇몇 모임은 당사자들이 겪은 사안을 지나치게 빨리 사회학적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렇게만 인식하게 만들어버린다그 결과 고통의 ‘개별성‘은 앙상한 것으로 날아간다. 고통을 개인화하는 잘못을 경계하면서 제거되지 않는 고통의 실존적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사회학적 언어는 고통의 고유함과 개별성보다는 사회성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당사자 개개인의 구체적 사연들이 종종 ‘공감‘이라는 말로 너무 빨리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개별성이 ‘사연‘이나 ‘사례‘로 여겨진다. 나눔의 자리에서는 개별성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경청‘되는 것같지만, 그것이 언어화되는 자리에서는 선언적인 사회학적 언어만 남는다. - P90

"인간의 언어로는 지금 내 심정이나 상황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어.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지.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거야." - P95

고통에 직면하여 언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파괴되는 집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말을 잃어버리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 붕괴되어버리는, 다시 지을 수 없는 공동의 집은 세 가지 차원이다. 하나는 사회적 차원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들과 짓는 집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안에서 자기 자신과 거하는 ‘내면‘이라는 집이다. 고통의 끔찍함은 이 모든 거주지를 파괴하고 사람을 존재로부터 추방해버린다는 것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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