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시에 샹젤리제 부근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집과 나무들이 뿌연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노라니, 마치 현상 중인 사진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오가 되면 분명 태양이 안개를 꿰뚫을 것 같은, 그런 날씨의 아침이었다. - P119
전차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브 길을 돌 때는 문이 제멋대로 열렸다. 가끔씩 차내의 전등이 꺼지기도 했다. 비에 젖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거리풍경이 일그러져 보였다. 한여름에 피어오르는 열기로 거리가 일그러져 보일 때와 마찬가지였다. - P147
나는 집 안에 있는 침대를 떠올렸다. 밤새 발을 대고 있던 부근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방안의 닫힌 창문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속눈썹 끝으로 느끼는 새벽녘의 태양이 그리웠다. - P147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 정오에, 라카즈양과 만나는 것이 마치 약속돼 있던 일인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며칠 전부터 이날의 데이트를 기다려 오지 않았던가. 나를 부추기는 미지의 감정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소녀에게 육체적인 욕망 따위는 품고 있지 않다. 원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려는 생각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내 지론에 따르면, 그 순간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감미롭다. 나는 계속해서 거리를 걸었다. 이성을 잃은 내 영혼이 육체를 떠나 기뻐 날뛰었다. 지나는 행인들이 접어든 우산은 아직 물기로 빛나고 있었고, 벽과 인접한 보도에 깔린 포석들이 점차 말라 가며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 P151
가끔 하는 생각인데, 어쩌면 나는 머리가 좀 이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늘 행복을 손에 넣으려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 모든 걸 망쳐 버리고 만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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