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방법도 있을 테니 더는 이런 식으로 학대받고 싶지 않다. 통증은 나를 작아지게 만든다. - P12

그에 반해 아침엔 기분이 좋았다. 나는 목욕을 하면서 볕에 그을린 납작한 몸과 다시 만났다. 나를 은근히 위로해주는 몸.
"걱정하지 마. 해변, 다른 사람들의 육체, 실크 드레스 등을 위해 나는 여기 있으니까"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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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자
공포란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이성으로 공포를 물리칠 수 있어요.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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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시에 샹젤리제 부근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집과 나무들이 뿌연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노라니, 마치 현상 중인 사진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오가 되면 분명 태양이 안개를 꿰뚫을 것 같은, 그런 날씨의 아침이었다. - P119

전차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브 길을 돌 때는 문이 제멋대로 열렸다. 가끔씩 차내의 전등이 꺼지기도 했다. 비에 젖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거리풍경이 일그러져 보였다. 한여름에 피어오르는 열기로 거리가 일그러져 보일 때와 마찬가지였다. - P147

나는 집 안에 있는 침대를 떠올렸다. 밤새 발을 대고 있던 부근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방안의 닫힌 창문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속눈썹 끝으로 느끼는 새벽녘의 태양이 그리웠다. - P147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 정오에, 라카즈양과 만나는 것이 마치 약속돼 있던 일인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며칠 전부터 이날의 데이트를 기다려 오지 않았던가.
나를 부추기는 미지의 감정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소녀에게 육체적인 욕망 따위는 품고 있지 않다. 원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려는 생각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내 지론에 따르면, 그 순간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감미롭다.
나는 계속해서 거리를 걸었다. 이성을 잃은 내 영혼이 육체를 떠나 기뻐 날뛰었다. 지나는 행인들이 접어든 우산은 아직 물기로 빛나고 있었고, 벽과 인접한 보도에 깔린 포석들이 점차 말라 가며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 P151

가끔 하는 생각인데, 어쩌면 나는 머리가 좀 이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늘 행복을 손에 넣으려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 모든 걸 망쳐 버리고 만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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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뵈에게는 역시 적당한 호텔의 작은 방을 구해줘야겠다. 일주일에 10프랑 정도면 꽤 괜찮은 옥탑방을 빌릴 수 있다.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하지만 느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애를 태우기로 했다. 나는 나 자신이 느뵈에게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의식했다. 언제쯤 구원의 손길을 뻗어 줄지 모르는 신인 것이다.
느뵈의 얼굴이 불안으로 창백해졌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예를 들어 뭔가 난처한 일이 생겨도 체면을 차릴 줄 안다. 하지만 느뵈는 가난뱅이라 그런기술이 몸에 배어 있지 않았다. 그의 손은 자고 있는 사람의 손이 파리에 반응하듯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켰고, 눈은 불안하게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과연 나쁜 짓일까. 이렇게느리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건 나중에 더욱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다. 만약 잠자리를 구해 줄 생각이 없었다면, 그를 애태우며 즐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 P102

유쾌하게 한잔했다. 그네를 탄 것처럼 어지러웠다.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걸 느꼈다. 아무런 저의도 없는 정말로 좋은 사람 말이다. - P103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가 마치 타인의 안경을 쓰고 보는 것처럼 뿌옇게 흐려 보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듯 느껴졌다. 내 허리춤 높이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스쳐지나갔다. 귓속에 솜방망이가들어 있는 것처럼 소리가 멀게만 들린다. 택시 엔진 따위는 뜨거운 고철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발밑의 보도가 흔들려 마치 체중계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거리가 온통 불빛으로 넘쳐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행복했다. ‘난 행복하다!‘ 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나는 이제 내가 가진 것을 느뵈와 나눠 갖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눠 갖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그에게 주고 싶었다. 가난하다고는 해도, 나는 아직 너무나 여유로운 편인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자신은 빈털터리가 되어,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행복해하는 이처럼 고귀한 환희가 또 있겠는가! - P104

내 마음은 친절함의 보고이다. 그는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한순간의 욕정을 채우고 만 것이다. 누군가에게 친절히 대해주면 언제나 항상 이런 식의 대접을 받고만다. 이 땅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게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 P110

자물쇠가 달려 있지 않은 역의 출입문이 계속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한다. 유리를 깐 바닥은 미끈거려 마치 전나무 잎이 쌓인 숲길을 걷는 것처럼 발밑이 미끄럽다.
매점의 습기찬 창문에는 전단지가 붙어 있다. 틈새로 들이치는 센 바람에, 사람들은 신문을 펼쳐 들고 읽는데 애를 먹었다. 매표소 안쪽은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불을 밝히고 있었다. 철도 직원은 거리의 경찰관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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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아, 군대에서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던 장소도 기억 속에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바뀌었다.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다. 어렸을 적에 배운 노래는 되도록 부르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자주 불러대면 추억이 퇴색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의 일들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회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추억은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해 두는 걸로 족하다. 내 머릿속에는 추억의 서랍이 있다. 나에게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P86

오후 5시였다. 거센 바람에 코트가 마치 스커트처럼 나부꼈다. - P90

일꾼 한 명이 거룻배에 연결된 판자 위를 튕겨 오를 듯한 발걸음으로 왔다 갔다 했다. 마치 침대 매트리스 위를 걷고 있는 듯했다. - P91

주위 풍경이 센강에 수직으로 비치고 있었다. 마치 물속에서 바다표범이 헤엄이라도 치고 있는 것처럼 수면은 쉬지 않고 흔들렸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반대편 강가에 있는 집들이 수면과 같은 높이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베네치아의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 P96

나는 죽기 싫었다. 게다가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끌려서 억지로 죽기는 싫었다. 자살이란 완벽하게 자유로워야 한다. 자살은 보통의 일반적인 죽음과는 다르니까. - P96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와 비슷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 원인은 언제나 나의 고독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갈망한다. 다만 아는 사람이 없으니,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기회가 없다.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이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나라는 인간은, 말하자면 한겨울밤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지와 비슷한 처지다. 사람들은 그거지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거지를가장해 돈을 구걸하려는 사람이 하도 많아, 이미 모두들이력이 나고 만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다리 난간에 팔을 괸 채 무료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있어도 어차피 시시한 연극이려니 생각하고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만다. 사실 그렇긴 하다. 연극이라는 걸 꿰뚫어 본 사람들이 정확히 본 것이다.
다만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해 한밤중에 다리 위에서 구걸을 한다거나, 난간에 기대 우울한 척을 하는 그 자체가 너무나도 서글픈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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