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무척이나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
아닌가
싫어하는 게 아니라
싫어지게 되는 이유.
뭔가 한 가지가 싫은 게 아니라
사소하게 싫은 몇 개가 마치
장롱 뒤의 먼지처럼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고
커디란 먼지 뭉치가 된다.
그렇게 청소기로 빨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미움이 커진다. - P32

혼쭐을 내면
혼쭐났던 기억만 남는다.
순순히 고치니까 부드럽게 얘기하면 그만이다.
윗사람은 그런 걸 귀찮아해서는 안 되는 거야.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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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성들은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수많은 벌떼들이 속이 빈 바위틈에서
끝없는 행렬을 지으며 쉼 없이 날아 나와서는
포도송이처럼 한데 엉겨 봄꽃 사이를
여기저기 떼 지어 날아다닐 때와 같이,
꼭 그처럼 숱한 부족들이 낮은 바닷가에 있는
그들의 함선들과 막사들에서 떼 지어 회의장으로 몰려왔다. - P54

자, 그대들은 전투를 시작할 수 있도록 가서 식사를 하시오!
모두들 창을 날카롭게 갈고 방패를 잘 손질해두시오.
그리고 걸음 잰 말들에게 먹이를 주고
전차를 두루 살펴보며 전쟁을 생각하시오.
온종일 가증스런 전투에서 승패를 걸고 싸울 수 있도록 말이오.
밤이 찾아와 전사들의 용기를 갈라놓기 전에는
그 사이 잠시의 휴식 시간도 없을 테니까요.
가슴 위에서는 몸을 두루 가려주는 방패의 멜빵이
땀에 젖을 것이고, 창을 쥔 손은 지칠 것이며,
반들반들 깎은 전차를 끄느라 말들도 땀을 흘릴 것이오. - P66

마치 잘 흩어지는 염소 떼가 목장에서 서로 뒤섞여도
염소치기들이 이들을 쉽사리 가려내듯이,
꼭 그처럼 지휘자들은 전투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들을 여기저기서
따로 나누어 정렬시켰다. 그 한복판에는 통치자 아가멤논이
서 있었는데 눈과 머리는 천둥을 좋아하는 제우스와 같았고,
허리는 아레스"와 같았으며, 가슴은 포세이돈과 같았다.
마치 소 떼 중에서 출중한 황소 한마리가
가축 떼 가운데서 유난히 돋보이듯이, 꼭 그처럼
이날 제우스는 아트레우스의 아들을 무리들 사이에서
출중하고 영웅들 사이에서 돋보이게 했다. - P70

"가증스런 파리스여, 외모만 멀쩡하지 계집에 미친 유혹자여!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거나 장가들기 전에 죽었어야 해.
그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었어. 이렇게 만인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멸시를 받느니 그 편이 훨씬 나았을 테니까.
아마 장발의 아카이오이족은 멀쩡한 네 외모만 보고
너를 우리의 선봉장인 줄 알았다가 네 마음속에
아무런 힘과 투지가 없음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겠지.
그런 주제에 감히 충실한 전우들을 모아 가지고
바다를 여행하는 함선들을 타고 대해를 건너가
이방인들과 사귀다가 머나먼 나라에서
창수들의 며느리인 미인을 데려와 네 아버지와
도시와 모든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이, 적에게는 기쁨이,
그리고 너 자신에게는 굴욕이 되게 했더란 말이냐?
어서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메넬라오스와 맞서지 못하겠느냐?
그러면 어떤 전사의 꽃다운 아내를 네가 빼앗아왔는지 알게 되련만.
네가 먼지 속에 나뒹구는 날에는 너의 키타리스도 아프로디테의 선물도
그리고 네 머리털과 외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트로이아인들은 정말로 겁쟁이들이다. 그렇지 않았던들 너는
그들에게 수많은 해악을 끼쳤으니 벌써 돌옷을 입었으리라." - P88

그리고 둘 다 슬기로운 우칼레곤과 안테노르가 앉아 있었다.
이들은 이제 늙어서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하지만
훌륭한 언변가들이었다. 숲 속의 나뭇가지에 앉아
가냘픈 목소리를 내보내는 매미들처럼, 꼭 그처럼
트로이아인들의 지휘자들은 탑위에 앉아 있었다. - P93

그리하여 그들이 한곳으로 달려와 서로 마주치자
그들은 청동으로 무장한 전사들의 소가죽들과
창들과 힘을 서로 맞부딪쳤다. 배가 불룩한
방패들이 서로 맞닿으며 큰 소음이 일었다.
그러자 죽이는 자들과 죽는 자들의 신음소리와
환성이 동시에 울렸고, 대지에는 피가 내를 이루었다.
마치 겨울철에 두 줄기의 산골 급류가 큰 샘들에서
움푹 팬 골짜기를 따라 세차게 흘러내리다가 골짜기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합류할 때와도 같이 그것들의 둔중한
소리는 멀리 산속에 있는 목자의 귀에도 들린다ㅡ꼭 그처럼
어우러져 싸우는 자들에게서 함성이 일며 노고가 시작되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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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겁이 났다.
한 사람의 역사가
고요하게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이.
그 조각 중 하나를
쉽사리 받아버린 것이.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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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름이면 보리밥에 짜고 맵게 졸인 강된장과 연한 줄기의 열무김치를 넣고 비벼 먹는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렇게 비빈 밥을 먹다가 문득 입이 짜서 접시에 놓인 오이로 입가심을 했는데, 그때 뜬금없이 입안에 온통 은은한 버터의 맛이 퍼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말 오이에서 버터의 고소하고 느끼한 맛이 났습니다. 그 유사성을 저는 납득할 수 없었어요. 어쩌면 그건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라, 유사와 인접이 협조하여 만들어낸 복합적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입속에 남은 된장의 짠맛과 보리의 구수함, 오이 속씨의 달착지근함의 콤비네이션이 어느 경계에서 버터의 맛과 겹쳐진 것인지도요." 잠시 뒤 그는 자문하듯 물었다.
"유사성과 인접성,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일까요?"


"어느 쪽이든 간에 분명한 건, 시각을 잃게 되면 두 우주 모두에 서 참으로 넓은 기쁨의 영토를 잃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아마 그럴 것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런 대꾸는 어쩌면 추의 방식이었다. 그는 새도 나뭇가지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아마 그가 보았다면 발견하고 향유했을지 모를 유사도 인접도 결코 발생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게 가장 가슴 아팠다. - P165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 - P168

"나는 심지어 나하고도 눈을 마주칠 수 없습니다. 거울을 봐도 내 얼굴에서 분간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죠. 눈동자는 커녕 표정, 눈매, 주름 그 어느 것도. 누군가와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아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해가 지면 드리우는 땅거미처럼 자체의 엄격한 가속도로 내 눈에 그물을 찬찬히 드리우는, 도래할 어둠의 시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 P171

"당신은 누굽니까?"
그가 물었다.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놀란 그녀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신도 없는데 이런 나쁜 친절은 어디서 온 겁니까?" 그리고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 아니면 뭔가를 음미하는 듯 잠시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 P172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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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P106

통장에 입금된 여덟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 P107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 P136

흐린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멀고 가까운 산의 능선들, 아직은 덜 우거져 듬성한 봄 숲의 연한 잎들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며 바삭거리는 소리, 검은 비닐과 주황빛 흙의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 내는 교차가 땅의 파도를 보는 듯 현기증을 일으키는 밭들······ 어느 순간 그녀의 의식은 또 길을 잃었다. 호수로 통하는 희끗한 가르마 같은 오솔길, 모든 작별의 불가피성을 안다는 듯 손바닥 모양의 잎을 은밀하게 반짝거리는 발코니 앞의 단풍나무······ 이 모든 것들이 그녀 속으로 차곡차곡 흘러들어와 그녀와 동일한 분량으로 희석되었다. 풍경과 사물은 그녀의 절반을 차지하고 기저에서부터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녀는 까닭 모를 슬픔에 사로잡혀 격랑에 흔들리는 작은 배에 탄 듯 양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꽉 붙들었다. - P151

그날 숲을 산책하기로 결정한 것이 달의 얘기 때문인지 우연히 발견한 메모 때문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식사 후에 산책을 하자고 권유해도 번번이 겁에 질린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어 거절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 2층 발코니에서 그녀는 무심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구겨진 메모지 한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며칠 전 심한 불면과 숙취에 시달리다 격렬한 필체로 휘갈겨놓은 것으로, 더 많은 햇빛 산책 햇빛 산책,이라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어찌나 크고 기괴하게 써놓았는지 글자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화투짝처럼 보일 정도로, 아무리 눈이 먼 위현이라도 주의 깊게만 읽으면 알아볼 수 있을 성싶었다. 글자들 아래에는 메모지가 찢길 만큼 진한 밑줄이 그어져 있고 끝에는 부들부들 떨리는 세개의 느낌표가 찍혀 있었는데, 어느 쪽이든 녹슨 칼로 팔목을 마구 그어대는 듯한 살의와 파괴력으로 충만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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