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전장에서 젊은이들이 죽어가자 그 아버지들이 아들보다오래 살게 된다. 어느 날 밤 트로이의 왕은 죽어버린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으려고 적진으로 들어간다. 왕의 아들을 죽인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왕을 동정한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우는이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죽은 자를 묻을 권리를 공유한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는 인간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 P110

율리시스는 아킬레우스와 달리 위대하고 유일무이한 운명을 꿈꾸지 않는다. 그는 신이 될 수 있었으나 노쇠한 아버지와 성장한 아들, 그리고 나이 든 아내 페넬로페를 만나러 이타카로 돌아간다. 율리시스는 인위적인 행복보다는 진실한 슬픔을 원하는 인물이다. 칼립소가그에게 제안한 선물은 일종의 신기루이자, 환각을 일으키는 약이 만들어낸 꿈, 혹은 평행현실에 가깝다. 율리시스의 결정은 아킬레우스를 움직인 명예라는 코드와는 거리가 먼 새로운 지혜를 보여준다. 순박하고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인간의 삶이 더욱 살아볼 만한 가치가있다는 지혜다. 젊음은 흩어지고 육신이 말라가며 힘을 잃어갈지라도 말이다. - P111

서사시를 읊는 시인들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두 개의 세계, 즉 현실 세계와 전설의 세계에서 성장했다. 시인들은 시를 낭송하며 과거로 옮겨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글씨를 사용하지 않던, 따라서 역사가 없는 시대에 시인들은 뼈와 살로 된 살아 있는 책이었다. 그들은 모든 경험, 축적된 지식과 삶이 망각에 빠지지 않도록 붙드는 존재였다. - P117

모든 사회는 속되기를, 그리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글을 쓰는 행위는 사람의 기억을 연장하고 과거가 영원히 사라지는 걸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에도 시는 여전히 시인의 입을 통해 태어나고 여행했다. 그러나 몇몇 시인들이 문자를 배우고 미래를 위한 여권처럼 파피루스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무모한 행위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인지한 시인도 있었을 것이다. 시를 글로 쓴다는 것은 텍스트를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행위였다. 말은 책에서 결정체가 되어버린다. 그들은 여러 버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버전을 골라야 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노래는 성장하고 변화하는 살아 있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글은 그 노래를 석화할 터였다. 따라서 하나의 버전을 골라낸다는 것은 나머지 버전을 희생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최종 버전을 파괴와 망각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이었다. - P118

연구자마다 호메로스의 정체를 다르게 파악한다. 어떤 이는 글을 모르는 고대의 시인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결정판을 만든 작가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두 작품을 마지막으로 수정한 사람이라고 한다. 필사본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필경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책이라는 발명품에 미혹된 편집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의 문화에 초월적인 영향을 준 작가가 환영일 수도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 P119

어머니는 침대맡에 앉아서 매일 밤 책을 읽어주셨다. 어머니는 시를 낭송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거기 매료된 청중이었다. 장소, 시간, 표정, 고요함은 늘 같았다. 일종의 친근한 의례였다. 어머니가 읽기를 마친 곳을 찾으며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려고 앞서 읽었던 곳으로 되돌아가면 부드러운 바람 같은 이야기가 그날의 모든 걱정과 밤의 두려움을 없애줬다. 독서의 시간은 내게 작고 잠정적인 천국과 같았다. 나는훗날 모든 천국은 그렇게 소박하고 일시적이라는 걸 이해했다.
어머니의 목소리.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폈다. 뱃머리에 부딪히는 물소리, 눈을 밟는 소리, 칼이 부딪치는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미지의 걸음 소리, 늑대의 울음소리, 문밖에서 들리는 속삭임. 어머니와 나는 서로 다른 장소에, 서로 다른 차원에 있으면서도 하나가 된 듯했다. 침실의 시계가 반 시간 동안 째깍대는 사이에 수년에 이르는 이야기가 흘러갔으며 많은 사람과 친구와 염탐꾼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 P120

읽는다는 건 주술과도 같았다. 책 속에 있는 이상한 검은 벌레를 읽어내야 했다. 그 벌레들은 거대한 개미 같았다. - P121

헤블록에 따르면, 뮤즈가 글쓰기를 배우면서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 새로운 텍스트들은 무한히 다양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기억의 주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저장고는 독점적 청각에서 물질적 자료로 변했으며, 따라서 무한히 확장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문학은 사방으로 확장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며 기억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주제와 관점도 자유로워졌다. 전통적 형식과 아이디어에 유착된 구전성과 달리, 문자로 된 글은 독자에게 미지의 지평을 열어줬다. 독자가 고요한 상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흡수하고 사색할 시간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기발한 주장, 개인적 목소리, 전통에 대한 도전이 담겼다. - P127

이 책을 쓰고 있는 나는 호메로스를 떠올린다. 호메로스를 뒤이은 무수히 많은 떠돌이 음유시인들 말이다. 그들은 궁전에서 부자들을 위해 노래하기도 했고 마을 광장에서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노래했다. 당시 시인은 등에 악기를 메고 닳아빠진 신발로 먼지 날리는 길을 걸으며 해가 지면 노래하는 사람들이었다. 방랑 예술가들, 뮤즈가 보낸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 노래로 세상을 이야기한 보헤미안 현자들, 반은 지식인이고 반은 광대인 그들이 작가의 조상이다. 그들의 시는 산문보다 앞섰으며, 그들의 음악은 말 없는 독서보다 앞섰다.
구술성에 수여된 노벨상 가장 오래된 것이 미래가 될 수도 있다. - P132

책과 관련된 나의 모든 경험은 내 어린 시절의 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에는 하나의 본질적인 모티브가 있다. 바로 큰 소리로 글을 읽으면서 문학을 접했다는 것. 그건 마치 문자라는 현재와 구술이라는 과거, 그 모든 시간이 만나는 교차로 같았다. 또 그것은 단 한 명의 관객이 있는 작은 연극이자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기도와도 같았다. 누군가 책을 읽어주며 당신이 기뻐하길 바란다면,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자 삶이라는 전투 속에서의 휴전이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여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서술자와 책은 하나의 목소리로 용해된다. 밤의 어스름속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당신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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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 좋다는 거야. 음악도 좋고 이 텅 빈 거리도 아름다워. 우린 우리의 예쁜 집으로 돌아가 함께 잠들 거고. 그게 중요한 거지?‘
그가 부드럽게, 단단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P112

말라붙은 피딱지가 코를 틀어막고 있고 여전히 옆 구리가 쑤시는데,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이 시간에 할 짓이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 저 불쌍한 놈들과 말이다. 그는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자조하면서, 방금 전까지 문 앞에서 두드려 맞은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우쭐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또다시 얻어맞을 수도 있었다. 여전히 통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는 용기를 냈다. 이번만은 자신이 뭘 할 지, 왜 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 댈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직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생각이었다. 홀가분했다. 그는 생생한 도취감을, 일종의 평온한 고양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의 감각임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음에도 알았다.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자유가 발길질당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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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피부로 된 자신의 책에 무엇을 쓰는지 궁금했다.
한번은 타투이스트를 만나 그의 직업에 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대부분 특정인이나 사건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문신을 한다고 했다. 문제는 우리가 말하는 ‘영원히‘가 너무나도 짧으며, 통계적으로 봤을 때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표현이나 노래 가사나 시를 새기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것이 상투적인 문구나 잘못된 번역 혹은 별 의미 없는 글일지라도, 몸에 새기고 나면 자신이 유일하고 특별하며 아름답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고 한다. 문신은 마술적인 생각의 잔존이자 말이 지닌 아우라에 대한 믿음인 것 같다. - P96

피부와 말은 크리스토퍼 놀런이 감독한 영화 「메멘토」의 핵심이다. 주인공 레너드는 트라우마로 인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물이다. 그는 최근에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에 대한 기억도, 지난달에 대한 기억도 없다. 그는 정신적 충격을 안겨준 비극적 사건 이후의 모든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상실증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자신의 부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는 음모와 조작과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기만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자신에대한 필수 정보를 손, 팔, 가슴에 문신으로 남기는 것이다. 기억상실로 인한 정체성의 위기를 문신을 통해 극복하고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게 된다. 진실은 인물들의 거짓말 속에서 흩어져버리고 우리는 레너드를의심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정신세계처럼 조각난 퍼즐 구조로 되어 있다. 또 간접적으로, 이 영화는 기억의 확장이자 시간과 장소에 대한 유일한 증인(불완전하고 모호하지만 대체할 수 없는)인 책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 P97

장갑을 끼고 두 손에 양피지를 들던 그 순간, 인간의 잔인함이 떠올랐다. 오늘날 좋은 품질의 가죽옷을 만들려고 새끼 바다표범을 몽둥이로 내리쳐 죽이듯이 중세에도 가장 비싼 필사본은 극도의 잔학함을 요구했다. 비단처럼 부드럽고 아주 하얀 가죽으로 만든 아름다운 양피지가 있는데, 바로 ‘송아지 가죽‘이다. 갓 태어난 새끼나 어미의 배 속에서 유산된 태아의 가죽이다. 과거의 말이 이 시대까지 이를 수 있도록 수 세기 동안 피 흘린 동물들을 생각했다. 정교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양피지 속에는 상처받은 가죽과 그들이 흘린 피가 숨겨져 있다. 우리는 진보와 아름다움이 고통과 폭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인간의 그런 모순적 행동 속에서 무수한 책들이 사랑과 선과 동정에 대한 현자들의 말을 세계로 퍼트리는 데 활용됐다. - P100

역사가 피터 왓슨(Peter Watson)의 계산에 따르면, 가죽 한 장의 크기를 50제곱센티미터로 가정하고 150쪽의 책을 만들려면 열 마리에서 열두 마리의 가축이 필요했다. 또 다른 전문가에 따르면 구텐베르크 성경을 만드는 데 100장의 가죽이 필요했다고 한다. 따라서 책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양피지 사본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됐다. 그러니 책을 소유한다는 건 오랫동안 귀족과 종교인들의 절대적인 특권이었다. 한 서기는 13세기 성경에 재료의 결핍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 하늘이 양피지고 바다가 잉크라면 좋았을 것을." - P101

호메로스의 작품은 대중이 즐기는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꿈과 신화가 표현되어 있는 책이기도 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세대와 세대를 거치며 역사적 사건을 얘기해왔으며 모든 세대의 기억속에 흔적을 남겨왔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들을 전설화하는 경향이있다. 21세기에 영웅적 무훈을 창작한다는 건 언뜻 원시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문명은 과거의 전설에 자긍심을 느끼기 위해 영웅을 신성화한다. 그런 신화적 세계를 만들어낸 마지막 국가는 미국일 것이다. 미국의 서부극은 오늘날의 전 지구화된 세계를 향한 환각을 만들어냈다.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는 역사의 신화화에 관해 고찰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신문기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여긴 서부입니다. 서부에서는 전설이 사실이 되면, 전설을 인쇄합니다." 그리운 시절(원주민 말살의 시대, 내전, 골드러시, 카우보이들의 권력, 무법의 도시, 라이플총에 대한 상찬, 그리고 노예제)이 실제로는 영광스럽지 않았다는 건 중요치 않다. 헬레니즘시대의 위대한 사건인 트로이전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가 먼지투성이 서부의 풍경, 경계 지대, 개척정신, 정복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를 뒤흔들듯 호메로스는 전장과 베테랑들의 귀환에 관한 이야기로 그리스인들을 열광하게 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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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찢어지게 가난 했던 부자들 봤잖아. 그 사람들이 배워서 돈 벌었다는 소리 들어봤어? 말도 안 돼. 가난한 아이에게 누구도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 모두가 이 진창에서 벗어 나려면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기만 할 뿐이지. 방법 같은 건 없어. 각자 알아서 하는 거지?" - P70

그가 보고 싶은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마리아와 자기 자신과 보편적인 세상에 대해 지금 막 갖게 된 이 터무니없는 생각에 근거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마리아가 다른 사람들과 그 렇게까지 다른지, 그녀가 정말로 이 시대의 윤리 의식이나 이 시대의 유행, 이 시대의 기준, 이 시대의 합의와 규 칙, 이 시대의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지 확인해보아야 했다. 그래, 그녀가 그 점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인지 알고 싶었다. - P90

그들 위로 달이 고고하게, 그러나 사라지기 직전이라 반쯤 투명해진 채로 빛을 비추고 있었다. 일단 집 앞에 도착하자, 니콜은 게레의 얽히고 설킨 변명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추위에 떨었다. 어쩌면 좀 전의 공포가 다시 밀려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니콜이 어깨를 움츠린 채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등이 게레의 눈에 들어왔다. 니콜의 등은 무언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리아의 등이라면 결코 드러나지 않을 무언가였으나 게레 자신의 등에선 자주 나타났을 그것, 바로 모욕감이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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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이런 방식으로 글을 읽는 걸 보고 호기심을 느꼈으며 이 사실을 「고백록」에기록했다. 누군가 자기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처음 봤다고 한다. 그는 주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책을 읽는 그의 눈이 페이지를 훑어가며 글을 이해해갔다. 하지만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실은 자기 옆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주교는다른 세계로 달아나 있으며 움직이지도 않은 채 찾을 수 없는 곳을 여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장면은 당황스러웠으며 동시에 그를 매료시켰다.
따라서 당신은 아주 특별한 독자로서 혁신자들의 혈통을 물려받은 것이다.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당신과 나의 자유롭고 비밀스러운 대화는 엄청난 발명품이다. - P73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 페르시아 같은 근동의 가장 오래된 도서관에도 도둑이나 책을 훼손하는 자를 저주하는 말이 있다.
"태블릿을 훔치거나 우격다짐으로 가져가거나 노예를 시켜 도둑질하는 자는 샤마쉬가 눈을 뽑고 나부와 니사바가 귀를 멀게 할 것이며 나부가 육신을 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태블릿을 훼손하거나 물에 넣거나 볼 수 없게 지우는 자는 천상과 지상의 신들과 여신들의 무자비한 저주를 받을 것이며 이름과 가문이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고 육신은 개의 먹이가 될 것이다." - P83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대부분의 태블릿들이 화재의 불길 덕에 보존된 것들이다. 그렇게 책은 생존의 역사를 숨기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미케네의 화재, 이집트의 쓰레기장, 베수비오산의 화산 폭발 등, 드물긴 하지만 파괴적 힘이 책을 구한 경우도 있다. - P84

미지의 언어를 해독하려는 사람은 언어의 혼돈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도 없는 상태에서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다뤄야 한다면 해독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알고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면 길을 잃지 않는다. 미개척 영토의 지도를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언어학자들은 로제타석의 그리스어가 고대이집트의 잃어버린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직관했다. 그리고 해독의 모험은 암호 해독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발표된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황금벌레」와코넌 도일의 「춤추는 사람 그림」이 그런 상상력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다. - P89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모든 책이 유일본이었다. 사본을 만들려면 문자를 하나씩 그대로 옮겨 쓰는 인고의 작업을 해야 했다. 사본이 있는 책들은 아주 극소수였으며 특정 텍스트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건 실제적인 위협이었다. 고대에는 하나밖에 없는 판본이 언제든 벌레나 습기에 파괴될 수 있었다. 습기와 벌레가 책을 파먹으면 하나의 목소리가 영원히 사라졌다. - P91

책의 발명은 책의 물질적 측면(내구성, 가격, 저항성, 무게)을 개선하기 위한 시간과의 전투의 역사다. 책이 개선될수록 언어의 생명에 대한 기대 수명은 길어졌다. - P91

태블릿은 보통 사각이었다. 특정적이고 균형 잡힌 사각형은 야릇한 기쁨을 준다. 대부분의 유리창, 진열창, 화면, 사진, 그림이 사각형이다. 책도 여러 실험을 거친 뒤 사각형으로 특정됐다. - P93

이탈리아의 저술가 바스코 프라톨리니(Vasco Pratolini)는 문학이란가죽에 글을 쓰는 일이라고 했다. 비록 양피지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미지는 완벽하다. 새로운 재료가 생산되면서 책은 언어가 입혀진 몸, 가죽에 쓰인 생각이 되었다. - P95

우리의 피부는 종이와 마찬가지다. 몸은 하나의 책이다. 시간은 제역사를 얼굴에, 팔에, 배에, 성기에, 다리에 써 내려간다. 세상에 나온 인간의 배에는 커다란 0, 배꼽이 있다. 그 이후 다른 문자들이 천천히나타난다. 손금, 마침표 같은 주근깨, 의사들이 살을 갈랐다가 꿰맨 뒤에 남는 흔적들.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 주름, 몸의 반점, 혈관의 모양 등이 하나의 삶을 이야기하는 단어들을 엮어간다. - P95

어느 날 아흐마토바는 거울 속에서 여윈 얼굴과 고통이 얼굴에 남긴 주름을 보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오래된 태블릿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슬픈 시구를 남겼다. "이제 나는 어떻게 고통이 내 볼에 거친 쐐기꼴의 페이지를 그려내는지 이해하게 됐다" 나 또한 고통으로 얼굴이 갈기갈기 갈라진 점토판 같은 사람들을 봤다. 아흐마토바의 시를 읽은 뒤로는 고통스럽게 살아온 사람들의 얼굴에서 아시리아의 태블릿이 떠오르곤 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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