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소설 『해류 속의 섬들』에는 다이키리를 마시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 술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설탕을 넣지 않은 프로즌 다이키리를 마신다. 다이키리가 든 술잔을 들고 바다 같다고 생각하고, 죽음 같은 고요 속에서 해가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바다에 있을 때는 바다색 술을 마시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얕은 바닷물을 마셔 버리자면서 다이키리를 마신다. 얕은 바닷물이라니. 어디 사랑뿐일까. 이 말에는 슬픔이 있다. 죽음 같은 고요가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다이키리 를 마시는 남자를 떠올려 본다. 이제야 감이 온다. 달콤한 바다 같은 건 없다. 바다는 가혹해야 제맛이라고 말했던 남자가 떠오른다. 바다 같은 술이니 설탕을 뺄 수밖에 없다. 원래의 다이키리는 럼과 설탕과 라임즙을 섞어 만드는 술인데 헤밍웨이 다이키리는 설탕을 뺀다. 라임도 두 배, 럼도 두 배. 시고 씁쓸하다. 그리고 독하다. ‘바다‘는 가혹해야 제 맛이니까. 그렇다. 헤밍웨이 다이키리는 그런 술이다. 어딘지 정신 나가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마실 만한 딱 그런 술. 그런 사람과 바다를 떠올리며 그 ‘바다‘를 마셨던 밤을 생각해 본다. - P159
연잎은 발수성이라 조금만 흔들거려도 물방울이 죄다 흘러내린다. 이게 바로 진흙 속에서 자라도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의 비밀이라 들은 적이 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 라 꽃을 피우지만 끝내 진흙은 묻히지 않는다. 이런 연꽃의 생리가 좋아서 죽란시사들은 연잎에 술을 마셨을 것이다. 우리는 더러워지지 말자. 더러움이 묻겠지만 연잎처럼 털어 버리자. - P167
정약용과 친구들은 서대문 밖의 연못인 서지에서 연꽃을 보았다.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면. 정약용은 서인이었냐? 아니, 남인이었다. 남인인데 서쪽의 연못에 핀 연꽃을 보러 갔다. 아마 서쪽 연못의 연꽃이 그의 미의식에 맞아서였겠지. 여기서 하심주를 마셨다. 어디에서? 배 위에서다. 연못에 배를 띄우고 동트기 전 이른 새벽에 연꽃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피는 게 아니라 터지는 거다. 연꽃은 피울 때 퍽! 퍽!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연꽃은 크기도 하고, 한번 피면 3~4일 동안 개화가 지속된다고 한다. 꽃 피우기를 벼르다가 때가 되면 화려하게 터뜨렸던 것이다. 그 소리를 들으며 술을 안 할 수 있을 리가. 새벽이지만, 새벽인데도 말이다. 술을 마시면서 쓰지 않은 글이었다. 이 시대에 그 귀한 술을 구할 수 없어서. 서늘한 바람이 불고 찬비 내리는 날이었다. 빗방울을 통통 튕겨 내고 있을 연잎들을 생각하며 썼다. 오늘 밤의 연잎들은 더 부드럽겠지. - P168
술을 마시다가 알게 되었다. 시간과 재능과 경험과 물질이 고도로 응축된 액체가 술이라는 것을. 그런 술은 지극히 까다로워서 잘 대해 주어야 한다. 뭔가 하나가 틀어져 버리면 완전히 다른 물질이 되기 때문이다. - P185
이분의 진짜 삶은 퇴근 후에 시작되었다. 진토닉 1파인트를 마시며 새로운 재즈 음반을 들었다. 자기가 아는 한 이것이 일에 지친 사람을 위한 최고의 치료법이라며. 이 이야기를 듣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트레스로 점철된 낮을 달랠 수 있는 밤이 그에게 있어서.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시드니 베쳇 같은 비밥 이전의 재즈를 좋아했다고 한다. 「시드니 베쳇에게 바치는 시」 에서는 내게는 당신의 목소리가 사랑이 그러는 것처럼 내린다며, "막대한 예스"처럼 내린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셨다. 막대한 예스처럼 내리는 사랑이라니, 이런 표현 너무 좋잖아. - P200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는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며 마티니를 주문한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본드의 이런 마티니 주문법은 마티니 근본주의자들에게 딴지를 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단한 파격인 셈이다. 마티니는 흔들지 않고 젓는 법이라는 오랜 전통에 대한 반격이랄까.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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