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의도적인 열정이 아니듯, 환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구나. - P78
나는 내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는, 무언가를 조잘거리듯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것들이 테두리를 따라 빼곡하게 박혀 있는 시계의 타원형 자판을 내려다본다.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 이상의 것이 확실히 이 시계에는 존재하고 있다. 이 시계가 주는 느낌은 뭐랄까,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이룬 땀 냄새나는 부유함이 아니라 자생하는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절대적인 부의 오만함 같은 것이다. 뭇별 속에서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을 때 다른 무엇이 있어 이걸 대체해 줄까. - P89
……쿠바에서 노년을 보내던 헤밍웨이는 밤이면 오랜 친구들인 어부들을 불러 놓고 문맹인 그들을 위해 자신의 소설을 읽어 주었다지요. 밤바람에 검푸르게 일렁이는 풀사이드에서 끊임없이 독주를 마시면서 말이에요. 헤밍웨이가 자신의 소설을 연극배우처럼 읽어 내릴 때면 갈라파고스의 거북처럼 검고 질기고 주름진 목을 가진 어부들은 그저 경외와 낡은 사랑만을 눈빛에 담고 그를 바라보았습 니다. 노벨상을 탄 그는 상금을 아바나의 성당에 전액 기부하며, 당신이 무엇을 소유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었을 때, 라고 말했다지요. 그 무렵의 그는 거의 글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자신의 삶의 서사시를 그렇게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밤의 작은 음악』을 사랑하는 여러분, 가진 것을 모두 누군가에게 줌으로써 스스로 충만해지는 삶의 비밀을 우리는 언제쯤 알게 될까요. - P90
시를 쓰는 일이 내 속에 있는 빈약한 샘에서 근근이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라면 이 일은 누군가에게 줄 한 컵의 물을 위해 개울이나 정수기나 유통기한이 지난 생수병에서, 혹은 하수구에서라도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을 무차별적으로 떠오는 일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혹은 이 일은 조각 천을 모아 눈부신 꽃밭 형상의 베드 스프레드를 만들어 내는 퀼트와도 닮았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 조각 천을 어디서 주워 왔건 원래의 용도나 섬유의 원단 조성 비율이나 뒷면의 이어 붙인 자국 같은 건 문제 되지 않는다. 색상을 잘 배치하고 흔적 없이 꿰매어 현실의 꽃밭보다 더 매혹적인 걸 만들어 놓으면 되는 것이다. 내 영혼에서 퍼낸 샘물이거나 내가 밭 갈고 씨 뿌려 키워 낸 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대해 근거 없는 애정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고 그 언어의 진실성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 P91
언젠가 서류를 찾으러 간 구청에서 엄마를 본 적이 있다. 엄마가 돌아볼까 봐 재빨리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회청색 유니폼을 입은 엄마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지 워지지 않고 여태 남아 있다. 선명치 못한 푸른색 옷은 내 게 수인(囚人)의 그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엄마는 여전히 자신의 형량도 모른 채 그 옷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엄마의 통장 속에 든 알량한 푼돈은 결국 그녀의 고통을 덜어 내는 대가로 동그라미를 하나씩 지워 나갈 것이다. - P97
바깥은, 봄이라기보단 겨울의 끝에 가까웠다. 바람이 몹시 차다. 버린 우편물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 가슴에 와서 얹힌다. 고개를 저으며 나는 다른 그림을 떠올린다. - P99
자정 5분 전. 허공에 걸려 만월처럼 둥글게 빛나는 시계. 분침은 자정 쪽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다. 초록 융단 같은 잔디밭 위로 밤은 별 하나 없이 칠흑으로 어둡고, 눈부신 유리 구두를 오른발에 신은 채 한 여자가 달려가고 있다. 둥근 시계는 밤의 한가운데 박혀 있다. 꿈결 같은 드레스 자락은 미풍에 마구 흩날리고 뒤로 뻗은 아름다운 왼발엔 신발이 없다. 초록색 잔디 위 어디에도. 어디로 간 것일까. 나에 대한 사랑으로 눈먼 왕자님만이 그 신발을 줍게 될 것이다. 밤의 신데렐라. 그토록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이 어느 순간 달리의 그림처럼 뜨겁게 녹아내린다. 갈망과 특별함에 대한 집착과 사물에 대한 욕정도 뜨거울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보다 더.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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