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을 둘러본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러시아산 가죽 소파에 앉은 마리아가 텅 빈 정원을 향해 열린 쪽문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한 손을 라디오 위에 올린 채, 미동 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게레가 자신을 보지 않는 그녀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마리아가 꾸민 태도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무방비한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것은 드문 일이면서, 그와 함께 있을 땐 짓는 법이 없는 표정이었으므로 어쩌면 비밀스러운 모습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는 좀더 슬프고 상념에 젖어 보였다. 공허한 모습이었다. - P122
걸어가면서 앞치마를 벗어 벽난로 모서리에 걸어둔 그녀가 벽장에서 유리잔 하나와 식전에 주로 마시는 드라이 마티니 한 병을 꺼내 한 잔 가득 따랐다. 상념에 잠겨, 곧 한 잔을 더 따랐다. 그녀는 잔을 들고서 가스레인지로 다가갔다. 마지못해 한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서 나무 스푼으로 냄비를 휘저었다. 그녀의 시선이 벽을 따라 못으로 고정해둔 할인마트의 거울로 이어지다,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차갑고 조금은 적대적인 얼굴로 자신을 대면했다. 스푼을 내려둔 손이 턱으로, 머리카락으로 올라갔다. 간단한 동작으로 풍성하게 볼륨을 만들어보았지만, 거기엔 눈에 띄는 흥미도 열의도 없었다. 꼼짝하지 않고 아득히 머물러 있는, 권태와 무관심 그 자체인 얼굴이었다. 그러므로 오만한 눈꺼풀 아래 맑고 단단한 눈에서 너무나 둥글고 응축된 눈물이 아무런 전조 없이 연달아 솟아올랐을 때, 그녀가 느낀 감정은 괴로움이 아닌 놀라움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귓가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 P131
게레는 어디선가 두려움에는 냄새가 있다는 걸 읽은 적이 있었다. 아마 그건 진실일 거였다. 그리고 어쩌면 개가 그에게서 그런 냄새를 맡은 게 아닐까? 밤에, 홀로 침울한 방에서 옷을 벗으며 게레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팔과 어깨에 코를 갖다 대보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피부에 서 식별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치의 냄새 였다. 낮엔 그 저주받은 직위를 거부한 것 때문에, 저녁엔 그걸 받아들이려 했다는 이유로 그는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이 수치심이란 것은 냄새는 물론이고 육안으로도 식별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 P157
그는 등나무집 문 앞의 고리버들 의자에 일광욕을 하며 토요일과 일 요일을 보냈다. 속옷 바람으로 때때로 《레키프》나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사둔 세네갈에 관한 책 따위를 던지며, 휘파람으로 그녀와 동시에 종적을 감춘 개를 불렀다. 이 번 주말엔 죄다 바다로 몰려간 모양이었다. 촌티 나는 의자에 앉아 태양이 흉측한 구릿빛 문양을 새겨넣도록 내 버려둔 채 오지 않는 개를 부르는 사람은 이 동네에서 게레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는 이 불운 속에서 어떤 위안을, 심지어 기쁨까지 느끼고 있었다. - P159
그는 천천히 발을 돌렸다. 순간 밤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미풍에 흔들리는 밀밭, 광재 더미에 뒤섞인 운모의 희미한 빛 같은 것들이. 열흘 만에 처음으로 그는 기분이 좋았다. 터무니없는 느낌이지만 확실히, 어디에선가 그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정의가 혹독하고도 분명하게 응답을 보내온 것 같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저 우연히 골칫거리에서 벗어난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꼭 운명이 그의 편을 들어주기라도 한 듯이, 내면의 누군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어깨를 펴주는 것만 같았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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