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 중 하나라고. 세련되면서 자연스러울 수 있다니, 이건 반칙 아닌가? 두 가지 미덕은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닌가 싶으므로. 세련이란 매끄럽고 미끈한 물건을 떠올리게 하고, 자연스러움이란 자연에서 왔듯이 애쓰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니 말이다. 또 그는 말했다. 순수하고 감각적인 것은 와인 말고도 많지만, 어떤 것도 와인만큼 폭넓은 즐거움과 찬사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고. - P269

정력을 다할 수밖에 없던 그의 인생에 대해 이해한답시고 그렇게 됐다. 인생은 유한하고, 살아 있는 동안만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니 그가 그렇게 발버둥 쳤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럭저럭 시들어 죽기 싫어 자신을 총으로 쏘기도 했고 말이다.
자연스럽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강렬하기는 하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와인을, 세련된 동시에 자연스러운 와인을 감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P270

얼마 지나지 않아 라가불린 16년산을 사러 갔다. 나는 실제로 라가불린을 보고 더 반했다. 아직 병을 따지도 않았 고, 그래서 냄새를 맡은 것도 아닌데. 병의 모양과 곡면의 경사도와 길쭉한 타원형 모양으로 붙어 있는 스티커가 마음에 들었다. 케이스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바위 폭포로 돌진 하는 호수의 물. 황야의 피트. 이것들로 만들어 느리게 증류 하고 길게 숙성시킨다. 이 모든 것이 그윽하고 스모키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고.
소금이 아니라 바다다. 라가불린을 처음 마시고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저 짠맛이라고 하기에는 더 복잡하고 오묘하고 원시적인 무엇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건 파도였다. 해조류와 바다의 돌과 해변의 모래 맛이 나는 듯했고, 연기도 실려 왔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냄새가 담긴 연기가. - P289

<미저리>의 첫 장면이 좋다는 것도 상당히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다. 완성된 원고를 막 송고한 소설가가 누리는 찰나의 기쁨에 대한 것이라. 첫 신은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 한 대와 성냥 한 개비, 두 번째 신은 빈 샴페인 잔, 세 번째 신은 샴페인 바스켓에서 칠링되고 있는 돔 페리뇽 한 병이다. 이 세 요소가 스탠바이하고 있다. 와, 이 정도면 한숨이 나오면서 막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아직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쏟아부은 소설을 막 끝냈고, 그 보상으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샴페인 한 병을 마신다. 멋지다. 한때 담배를 피웠으나 이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일 것이고, 술을 즐기지만 평소에 돔 페리뇽을 마시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맛있을까. - P290

내게 샴페인이란 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의식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의식의 핵심은 의전이다. 스스로 에게 하는 의전. 이 의전에는 계획과 환대, 그리고 끓어오름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비등점이. 열정이 최고조에 달한 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 P294

술집 ‘사슴‘을 떠올린 것은 김춘수 산문집을 읽다가였다. 바다의 표정은 파도에도 있지만 그건 너무 벅차고, 오히려 물빛에 있다고 쓰신 부분을 읽는데, 아… 술이 너무 당겼다. 이런 운치를 아는 사람과 함께 마시는 술이. 김춘수식으로 말하자면 바다의 표정을 닮은 사람과 물빛을 닮은 술집에서. 하지만 내가 아는 물빛을 닮은 술집 같은 건 없고, 바다의 표정을 닮은 사람도 없어서 참아야 했다. 그러고는 내가 꿈꾸는 술집의 이데아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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