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생각해 보세요. 최근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한 적이 있습니까? 정신적인 충격이 신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거든요. 그런 경우엔 몸이 약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임상 사례 보고가 있긴 하지요."
"아니요. 그런 일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유선은 그렇게 잘라 말한다.
지나치게 빨리. 정신과 의사가 물었다 해도 유선은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인생은 당신이 공부한 교과서와는 다른 부분이 많아요. 아무리 두껍다 한들 몇 권의 의학 서적으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전부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아요. - P43

그래도 유선은 순간적으로 응석처럼 그와 몇 마디 더 나누어 보려는 자신을 본다. 냉온욕을 해 보면 도움이 될까요? 채식은 어떨까요? 절전 모드로 돌려놓은 가전제품처럼 근근이 움직이는 듯한 몸의 느낌은 약 때문인가요? 아니면 이것도 정신과적 질환일까요? 제게만 들리는 복화술처럼 그 말들은 유선의 목구멍 아래서 멈칫거린다. - P44

가려움은 계절이 바뀌어도 쉬 낫지 않을 것이다. 의사의 말처럼 그것의 원인이 정신적인 것이라면 더욱. 그저 이 약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점액질의 잠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면 끔찍한 가려움조차 힘을 못 쓰듯 머릿속에서 회오리처럼 맴도는 상처의 조각들도 같이 잠들어 줄 것이다. 분만통처럼, 언젠가 내 속에 있는 아픈 덩어리가 날 찢고 나가는 순간 이 모든 가려움도 같이 데리고 가 주겠지. - P45

제 할 말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뱉어 내는 하영의 얼굴을 유선은 홀린 듯 쳐다본다. 못난 영혼일수록 사소한 말에 상처받는다. 누구에게도 귀하지 않은, 도움이 안 되는, 우습게 보이는, 지겹게 발목을 붙드는 인간 이유선. - P46

"일기를 쓸 때 사람들은 누군가가 볼 것을 무의식 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말하자면 일기란 어떤 면에선 자기 검열을 이미 거친 글이야. 난 그런 거 같아."
검열을 거친 글이라고? 유선의 머릿속으로 파일 속의 문장들이 날카롭게 박혀 왔다. - P51

그렇게 많이?
바닷가의 새들은 이렇게 잠이 든대.
뜨거운 어니언 수프.
아아,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 보고 싶다.

그가 선택한 열정의 윤리. 버림받은 혼인의 윤리. 그걸 내가 읽어도 된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유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적어도 그토록 잔혹한 사람은 아니었다. - P51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는 확실히 그런 순간이 있어. 사랑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예민하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하게 만들어 버리는 감정의 알레르기 상태 같은 것이니까. - P52

유선의 목소리는 폐허의 건물 속, 낡은 배관에서 배어 나오는 녹물처럼 띄엄띄엄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는 컴퓨터 파일을 열어 보기 이전의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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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책방에 사람만 들어오면 내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건넨다.
- 책방지기 : 여기 앞에 새로 뭐 들어오는 줄 알아요?
- 손님: 뭐 들어오는데요?
- 책방지기 : 연남동 최고 충격적인 가게! 인형 뽑기 가게!
- 손님 : 어후… 너무 안 어울린다.
- 책방지기 : 그쵸? 그것도 골목 바로 입구에.
- 손님 : 근데 가서 막 인형 뽑고 있는 거 아니에요?!
- 책방지기 : 그러니까. 달인 되고 막. - P203

독립출판물은 애초 데이터베이스 관리시스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비규격, 비정형 책들로 장르 구분도 어렵고, 볼륨도 판형도 개성도 각양각색이다. 심지어 가격까지도. 최근에 입고된 책은 가격이 10,001원이다. 만원 아니고 만일 원. 구 매 손님들에게 1원짜리 동전에 무슨 그림이 새겨져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단다. 이런 괴짜 같은 발상으로 가격을 매기는 게 가능한 세상. 어느 책은 손님이 가격을 고를 수 있다. 손님이 계산을 하려 고 그 책을 가져오면 "이 책의 가격은 네 가지인데 백원, 천 원, 만 원, 십만 원 중 원하시는 가격으로 선택해서 계산하시면 돼요." 내 말에 손님은 당황하면서도 가격을 고르기 위해 고민에 빠진다. 나는 손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재미있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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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 보고 싶다. 이처럼 세상이 아름다우니까.

이 남자는 누구일까. 4월부터 7월까지의 날들을 적어 놓은 이 파일의 기록자는 누구일까. 내가 알았던, 그 사람 의 파일이 맞긴 한 것일까.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살고 아이를 낳고 웃고 때로 울며 함께 살아왔던 그 사람일까.
이건 아니야. 엉망으로 취해서 들어온 날이면 중얼거리던 그의 말처럼, 이건 아니야. 이제는 그의 침묵까지도 점자처럼 더듬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게 투명하다고 믿었는데. - P36

그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둘 사이엔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가 옆에 있을 땐 우물의 존재를 몰랐다. 너무 가까이 있는 건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의 시력이니까. 그 심연 속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도, 결핍도, 원심력도, 구심력도, 피로한 감정의 순간도, 은닉된 삶의 조각들도. 그 조각들을 다 맞추어도 기어이 떠오르지 않는 지난 생의 밑그림. 끝내 찾을 수 없는 몇 개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둘 사이의 우물은 너무 깊고 어둡고 그리고 차갑다. - P37

이건, 일기가 아닌 픽션이 아닐까. 이젠 스스로도 설득할 수 없는, 질문이 될 수 없는 바보 같은 질문만을 가까스로 떠올리며 유선은 일어섰다. 이건 제 팔에 스스로 칼을 꽂은 자의 비명이 가득한 기록. 스스로 그 비명을 즐기는 자의 기록일 뿐이었다. 온몸의 수분이 말라 버린 듯, 무릎이 입안이 어깨가 눈알이 파삭거리며 함부로 발굴된 미라처럼 한순간 삭아 내렸다.
그 밤부터 죽은 숙주 속에서 살아가는 에일리언처럼 가려움이 유선의 몸속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P37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밤이 되면 스멀스멀 시작하는 것이다. 통증보다 견디기 괴로운 것이 지독한 가려움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려운 곳은 피부가 아니다. 몸속 어딘가, 피부 한꺼풀 아래의 어느 지점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일어나 앉아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긁어 대면 가려운 곳은 점점 더 깊은 데로 내려간다. 미친 여자처럼 집중하여 제 살을 긁어 대다 보면 각성제를 먹은 것처럼 정신까지 맑아졌다.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을 때면, 차라리 아픈 게 낫겠어, 중얼거리며 창밖이 해질 때까지 청승스럽게 울 때도 있다. 붉게 부풀어오른 살갗을 쳐다보면 피부 아래 이상한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유선은 가려움을 증오했다.

약을 먹고 30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몽롱해졌다. 칼끝처럼 뾰족하던 신경줄이 말랑말랑하게 풀려나가고 못 견디게 잠이 쏟아졌다. 때론 그 잠의 언저리로 야습하는 적처럼 불쑥 가려움이 덤빌 때도 있지만 몽롱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몇 번 뒤치다 보면 이윽고 끈끈한 잠의 바닷속으로 가려움마저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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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지기 : 너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이보람!
힘든 내가 힘든 나에게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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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소주를 마시며 내 입맛을 무진장하게 확장시켜왔다고 자부한다. 미각적 도약을 거듭한 결과 이제 개고기에서 삭힌 홍어까지 못 먹는 것이 거의 없다. 그렇게 내가 먹는 음식의 가짓수를 날로 늘려나간 것과 반대로 우리 어머니는 어느 날 돌연 금욕적인 종교에 입문해 먹는 음식의 가짓수를 날로 줄여나갔다. 그토록 즐기던 육고기는 물론이고 생선이나 해물조차 거부하는 순수한 채식주의자가 되신 것이다. 어머니는 오래 전의 나처럼 고기 한 점, 멸치 한 마리라도 국물에 들어가면 귀신같이 알고 뱉어내신다. 아마 내가 어머니로부터 예민한 미각을 물려받은 것이겠지만, 그 유난한 편향이 시간상 거꾸로 진행된 탓에 마치 어머니가 나의 어릴 때 미각을 물려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도 어머니는 종종 내가 편식하던 시절에 저질렀던 부끄러운 짓 들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며 기쁨에 젖곤 하시는데, 그 말씀들 속에는 그토록 까다로웠던 딸의 귀족적인 입맛이 짐승의 수준으로 타락한 데 대한 은근한 비난이 숨어 있는 듯도 하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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