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복도의 맨 끝에 있는 방문을 열었을 때 그 여학생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이 들었을까. 문소리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픈 사람처럼 한쪽 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2층 침대의 그늘 속에 누워 있는 모습이 어쩐지 죽은 사람처럼 섬뜩했다. 한때는 나와 한 몸이었다가 너무 일찍 둘로 나뉘어 버린 아메바처럼 이상한 끌림이 느껴졌다. 바닥에 흩어진 은회색 수은 덩어리처럼 그 옆에 눕는다면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합쳐질 것 같았다. - P176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긴 하지만 가까이하려 하진 않아.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주위에 있는 사람의 밝고 빛나는 기운을 훔쳐 가거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걸 알아. 피하는 거지." - P181

최군이 사라지고 나서야 모르고 있었던 그의 미덕이 하나 둘 떠올랐다. 무슨 대단한 경영자라고 같이 일 나가면 하는 시늉만 하고선 뒤처리를 모두 그에게 맡겼었다.
하루에 한 건 이상 하는 일은 나머지가 모두 그의 차지였다. 그런데도 다정한 아우처럼 불평 없이 그 일을 해 주었다. 그럴 나이긴 했지만 피곤을 몰랐다. 정말이지 그가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여자를 만나 두 마리 바퀴벌레처럼 질기디질기게 살아가길 바랐다. 죽음은 그가 올해 안에 갈라파고스 제도로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더 실현이 희박해 보이는 생의 시간표였다. - P185

만약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자신의 앞에 놓인 어떤 사건이 나머지 생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안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 갈 수 있는 것일까. 그럴까. 누구도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지구의 자전축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대개 자신의 운명에 결정적인 일일수록 그것에 대해 전혀 무력하다. 확실한 것은 없다. - P192

뭐 희미해진 건 그의 이름만이 아니다. 습기가 그려 놓은 그 벽화 아래서 우리가 나누었던 얘기들, 지나고 보니 지독히 가벼웠던 맹세들, 새끼 원숭이들처럼 서로를 핥으며 맛보았던 짭조름한 땀의 미각, 사랑하고 다투고 다시 사랑했던 그토록 달콤했던 투쟁의 순간들, 그 모든 것들도 이 사진처럼 제 색깔과 촉감을 잃어버리고 기억 저편에서 나리꽃 빛으로 몽롱할 뿐이었다. 필름을 망가뜨린 건 시간이 아니라 그 지독했던 습기일 것이다. - P202

하긴 인생에서 무엇이든 한 가지만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을까. 탄 고기와 지나친 음주가 연합하여 종양을 만들고 폭우와 허술한 둑이 만나야 재앙이 시작되며 돈과 사랑이 둘 다 사라졌을 때 연인들은 헤어지게 되지.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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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고통의 이면에는 부끄럽다는 느낌이 포함 된다. 지상의 삶에 무능한 인간이라는. - P147

말해질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니야.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참을 수 있다는 거야. 살다 보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 말을 해 주고 싶다. - P158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삶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을. 어떤 흐트러진 무늬 일지라도 한 사람의 생이 그려 낸 것은 저리게 아름답다는 것을, 살아 있다는 것은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경이로움이라는 것을. - P161

그를 쳐다보자 오래전 수업 시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러분, 우주 공간엔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 아름다운 천상의 음악 소리가 흐르고 있어. 별들이 부르는 노래라고나 할까. 당신들 말이야, 언젠가 그대들 삶의 절정에서 그 음악 소리를 듣길 바라. 나는 어쩌면 지난 어느 날 그 천상의 음률을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 아빠 눈 속에 별이 있어, 그 속삭임 말이다.
그러자 나는 어딘가 이 방처럼, 초침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하고 어둑한 구석으로 가서 좀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유리잔처럼 깨어져 어지럽게 흩어진 내 생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가혹한 선택에 대해, 걸을 때마다 뒤꿈치에 불이 켜지는 야광 운동화를 신어 보지 못한 채 떠나 버린 딸아이를 생각하며, 무엇보다 이 사람을 처음 만난 날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잃어 버린 것들에 대해. - P161

"개미나 바퀴를 죽일 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나요?
어때요? 그냥 발바닥에 붙은 흙덩이를 문지르는 느낌인가요? 아니면 사소한 적의라도 가져야 하나요? 이 일을 하려면?"
"적의라, 개미한테 그런 걸 느껴 본 적은 없어요. 모래처럼 작아 보이지만 그들은 모이면 대단한 일을 해내지. 일개미는 일생을 일만 하다 죽어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몸을 도구화해서 큰 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요. 그들의 일생에 자신의 의도라든가 자의식 같은 건 없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일하기 좋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 큰 턱을 휘둘러 죽도록 일만 하다 사라지는 거요. 때로는 자신의 알까지 다른 개미의 먹이로 제공하면서. 그것들은 삶에 대한 개념이 없어. 일상에 대해 한 번도 회의해 보지 않고 아무런 불만 없이 소멸되어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그것들을 죽이는 데 동정심이나 연민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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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맙소사, 맙소사,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녀가 미친 듯한 음악, 취할 듯한 향기, 눈부신 치장… 알코브처럼 어두컴컴하고 서늘한 외딴 규방에서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가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무언가로 막연하게 상상했던 그 눈부신 잔치가 벌어지는데, 바로 그날 밤, 자신은 여느 밤과 마찬가지로, 젖먹이 아기처럼,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어쩌면 캉프 부부에게 딸이 있다는 걸 아는 남자들이 앙투아네트가 어디 있는지 물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녀의 엄마는 그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할 터였다. "오, 그 애는 한참 전에 자러 갔어요." 앙투아네트가 이 땅에서 자기 몫의 행복을 누린다고 해서 엄마에게 해가 될 게 뭐가 있는가? 오! 세상에, 한 번만, 딱 한 번만, 진짜 젊은 아가씨처럼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남자의 품에 안겨 춤을 춰봤으면. 그녀는 절망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장전된 권총의 방아쇠를 가슴에 대고 당기듯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물었다.
"딱 십오 분만, 안 돼요, 엄마?"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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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내게 사랑의 상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내게 남겨진 건 사랑의 상처가 아니다. 내게 새겨진 건 사람이 준 상처이며 기록된 건 사랑이 아니라 환멸의 언어들이다. 나는 누군가가 내 영혼의 자기장 깊숙이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랑 속에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따스함, 열정, 몰입, 기쁨, 까닭 없이 터뜨리는 웃음소리 같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눈부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마치 빙산의 아랫부분처럼 거짓과 권태와 배신과 차가움과 환멸 같은 것들이 수면 아래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다.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거나 한다. 나로서는 그 상처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다시 누군가와 진짜 사랑을 하고 그 이면의 온갖 것들과 새로이 대면하고서야 비명을 지르는 그런 기억상실증 환자 같은 짓은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왜 사람들은 그저 아는 사람, 세 번째 우려낸 차처럼 담백한 관계 같은 그 지점에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 P106

내 능력 이상을 요구하는 그것들을 사 모으면서 내가 뭐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다. 처음 그 칵테일 드레스를 가졌을 때의 느낌, 일상의 남루함이 일순에 사라지는 마술의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이 여겨지는 지나친 눈부심. 다만 그 느낌들을 찾아 헤매왔던 것 같다. 그것들을 가지게 되면 내가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엄마의 삶을 되풀이하게 될 것 같은 끔찍한 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고 회청색 수의 같은 옷만을 입은 채 일생을 보낸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지도 따위는 지워져 버릴 것 같았다. 시의 주변이 아니라, 세상의 주변이 아니라, 더듬는 언어가 아니라, 어쩐지 폐활량이 부족한 듯한 연약함 이 아니라, 미약한 전화기 속의 목소리로도 세상의 중심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그런 강인함을 획득하고 싶었을 뿐이다. - P119

그랬다. 오해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다만 시에 대한 연민을 말했을 뿐인데 그는 연민과 함께 다른 어떤 것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오해에 대해서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피와 땀과 찢어지는 가슴한 조각의 레슨비를 제 스스로 지불해 가며 깨달아야만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어쨌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모르는 게 낫다. 알게 되면 고칠 수도 없 는 제 지병의 흔적을 더듬으며 끝없이 자책하는 일만 남게 되므로. - P121

봄이었다. 봄이 온 지는 꽤 됐을 것이다. 회색 콘크리트 벽에 붙어서 핀 개나리꽃 덤불을 도심에서 스칠 때면 지나친 집중을 요구하는 노랑이 징그럽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산자락에 잇대어 서 있는 여기서는 아무래도 끝내 봄빛을 외면하긴 어렵다. 이른 봄꽃들이 피었다 진 자리엔 이파리들이 초록 애벌레들처럼 꼬물꼬물 기어 나와 메마른 가지를 뒤덮고 있었다. 목덜미에 감기는 바람이 섬모를 문질러 대는 거대한 환형동물처럼 느껴져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캠퍼스는 쳐다보기도 눈부신 연두와 붉고 흰 철쭉 으로 뒤덮여, 내 귀에만 들리지 않는 생명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찬 듯하다.
봄이 올 듯 올 듯하며 오지 않았던 지난겨울의 끝에 이 렇게 5월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던 밤이 있었다. 그 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이 여기 이렇게 쉽게 와 있다. 딸은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가 버렸는데. 차마 못 볼 것을 본 듯 나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담배 한 대를 피우려다 주머니에서 도로 손을 뺐다. 고객 앞에서 니코틴 냄새를 풍기는 건 보험맨의 예의가 아니지. 연구소의 동향 창들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다. 실눈을 떠야 할 만큼 눈부시게 환한데 나는 여기가 어쩐지 밤 같다. 숲 그늘에서, 누군가 잿빛 잔돌을 한 움큼 집어 던진 듯 작은 새들이 재잘거리며 흩어졌다. 순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진저리가 났다. - P127

아이는 키가 줄어드는 대신 나날이 영악해져 갔다. 무섭도록 눈치가 빨랐다. 병실에 밝은 얼굴로 들어서면, 더 나빠졌대? 물어볼 만큼.
그 밤에, 어린이날은 광년(光年)의 거리처럼 아득한 곳에 있었다. 이토록 쉽게 그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나는 그날 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끝내 하지 못하고 병실을 나오고 말았다.
너는, 고통스럽게라도 여기,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니? - P131

돌이켜 보면 내 지난 생애에 그때처럼 씩씩한 목소리로 살았던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전화기 속에서 나는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가며 조금도 어렵지 않은 사람처럼 밝고 큰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밤의 병실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도 명랑하고 가벼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느 밤 복도 끝에서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얼굴은 저게 아니야. 우울하게 처진 눈매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입을 가진 누군가가 어두운 창밖에서 어린새처럼 조잘대는 날 쳐다보고 있었다. - P137

협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고통이란 내 몫이 아님을 시위해야 한다. 아빠 눈 속에 별이 있어, 조잘거리던 딸아이 앞에서 끝내 밝은 목소리를 잃지 않았던 그 밤처럼. - P141

사람은 모든 불행이 자신은 비껴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그런 열등한 운명의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기사란 결코 나나 내 주위 사람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결국은 확률의 문제일 뿐이라는 걸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행에 대해 고통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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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의도적인 열정이 아니듯, 환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구나. - P78

나는 내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는, 무언가를 조잘거리듯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것들이 테두리를 따라 빼곡하게 박혀 있는 시계의 타원형 자판을 내려다본다.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 이상의 것이 확실히 이 시계에는 존재하고 있다. 이 시계가 주는 느낌은 뭐랄까,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이룬 땀 냄새나는 부유함이 아니라 자생하는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절대적인 부의 오만함 같은 것이다. 뭇별 속에서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을 때 다른 무엇이 있어 이걸 대체해 줄까. - P89

……쿠바에서 노년을 보내던 헤밍웨이는 밤이면 오랜 친구들인 어부들을 불러 놓고 문맹인 그들을 위해 자신의 소설을 읽어 주었다지요. 밤바람에 검푸르게 일렁이는 풀사이드에서 끊임없이 독주를 마시면서 말이에요. 헤밍웨이가 자신의 소설을 연극배우처럼 읽어 내릴 때면 갈라파고스의 거북처럼 검고 질기고 주름진 목을 가진 어부들은 그저 경외와 낡은 사랑만을 눈빛에 담고 그를 바라보았습 니다. 노벨상을 탄 그는 상금을 아바나의 성당에 전액 기부하며, 당신이 무엇을 소유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었을 때, 라고 말했다지요. 그 무렵의 그는 거의 글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자신의 삶의 서사시를 그렇게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밤의 작은 음악』을 사랑하는 여러분, 가진 것을 모두 누군가에게 줌으로써 스스로 충만해지는 삶의 비밀을 우리는 언제쯤 알게 될까요. - P90

시를 쓰는 일이 내 속에 있는 빈약한 샘에서 근근이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라면 이 일은 누군가에게 줄 한 컵의 물을 위해 개울이나 정수기나 유통기한이 지난 생수병에서, 혹은 하수구에서라도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을 무차별적으로 떠오는 일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혹은 이 일은 조각 천을 모아 눈부신 꽃밭 형상의 베드 스프레드를 만들어 내는 퀼트와도 닮았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 조각 천을 어디서 주워 왔건 원래의 용도나 섬유의 원단 조성 비율이나 뒷면의 이어 붙인 자국 같은 건 문제 되지 않는다. 색상을 잘 배치하고 흔적 없이 꿰매어 현실의 꽃밭보다 더 매혹적인 걸 만들어 놓으면 되는 것이다. 내 영혼에서 퍼낸 샘물이거나 내가 밭 갈고 씨 뿌려 키워 낸 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대해 근거 없는 애정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고 그 언어의 진실성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 P91

언젠가 서류를 찾으러 간 구청에서 엄마를 본 적이 있다. 엄마가 돌아볼까 봐 재빨리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회청색 유니폼을 입은 엄마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지 워지지 않고 여태 남아 있다. 선명치 못한 푸른색 옷은 내 게 수인(囚人)의 그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엄마는 여전히 자신의 형량도 모른 채 그 옷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엄마의 통장 속에 든 알량한 푼돈은 결국 그녀의 고통을 덜어 내는 대가로 동그라미를 하나씩 지워 나갈 것이다. - P97

바깥은, 봄이라기보단 겨울의 끝에 가까웠다. 바람이 몹시 차다. 버린 우편물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 가슴에 와서 얹힌다. 고개를 저으며 나는 다른 그림을 떠올린다. - P99

자정 5분 전. 허공에 걸려 만월처럼 둥글게 빛나는 시계. 분침은 자정 쪽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다. 초록 융단 같은 잔디밭 위로 밤은 별 하나 없이 칠흑으로 어둡고, 눈부신 유리 구두를 오른발에 신은 채 한 여자가 달려가고 있다. 둥근 시계는 밤의 한가운데 박혀 있다. 꿈결 같은 드레스 자락은 미풍에 마구 흩날리고 뒤로 뻗은 아름다운 왼발엔 신발이 없다. 초록색 잔디 위 어디에도. 어디로 간 것일까. 나에 대한 사랑으로 눈먼 왕자님만이 그 신발을 줍게 될 것이다. 밤의 신데렐라. 그토록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이 어느 순간 달리의 그림처럼 뜨겁게 녹아내린다. 갈망과 특별함에 대한 집착과 사물에 대한 욕정도 뜨거울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보다 더.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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