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중에 배어 있는 불편함을 적절히 무시하거나 견디지 못한다면 원룸텔과 같은 성냥갑 생활은 더 숨 막히게 나를 옥죄일 것이었다. 적응하거나 무뎌지는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는 부엌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목례 정도는 했었지만 나중에는 눈과 입과 귀를 다 닫고 살았다. 될 수 있는 한 나 자신이 타인에게도 그림자였으면, 무엇보다 타인이 나에게 그림자보다도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좁은 방보다 더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게 바로 원룸텔 공동생활 구역이었다. 좁은 내 방이 내겐 가장 편한 곳이었다. - P35
앞으로 얘기하게 될 세 번째 원룸텔에서의 기억인데, 거기는 총무를 따로 두지 않고 사장님이 직접 관리하는 곳이었다. 잘 관리된 본인 원룸텔에 꽤 자부심이 있는 분이었고 그 자부심의 근거로 든 것 중의 하나가 ‘우리는 중국인은 받지 않는다‘였다. 왜냐고 물으니 사장님의 경우에는 몇몇 중국인 유학생들을 받으면서 겪은 인상들이 모든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쾌적한 원룸텔을 자랑하면서 내세운 근거가 고작 그런 이유라니. 하지만 사장님의 노골적인 태도를 무례하다고 느끼는 나 역시 이전 원룸텔에서 괜한 심증 을 품었던 이력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 말을 검증된 정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약간 불편하게 생각하고 지나쳤던 그 모순적인 마음을 이 책을 쓰면서 다시 되새겨보니 나 자신의 무지함에 낯이 뜨거워진다. 종특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시대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을 범주화하고 낮춰보는 일이 숨 쉬듯 이루어진다. 잘못된 줄도 모르게, 잘못되었는지 검증할 틈도 없이 말이다. ‘다들 그러니까‘, ‘공공연한 일이니까‘로 치부되는 것들을 머리 힘 바짝 주고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아직 갈 길이 멀다. - P42
싫은 환경과 적당히 화해하는 데에 요령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는 아니고, 그 당시에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에게서 ‘꿈을 이루는 데에 방해가 있다면 너는 부술 거냐, 타협할 거냐‘라는 맥락의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다면 타협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그때 친구는 내 대답이 실망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타협이라도 잘 해내고 싶었던 나는 싫으면 싫은 감정이 얼굴에 다 티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이라도 ‘타협해야지‘라고 말하면 싫은 환경 앞에서 불같이 화내거나 악을 쓰거나 비겁하게 도망치는 대신, 좀 더 세련된 대처 방식을 학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답한 ‘타협‘이란 단어는 화해와 협상의 의미였지만 표면적으로는 타성에 젖은 인상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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