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ㅣ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책 표지와 속표지 *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나로서는 특이하다는 생각과 함께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과연 어떻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속표지를 넘기자 “나는 내가 평문을 써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적혀 있다. 상당히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문장이다. 평문을 써야 하는데, 그런 책을 샅샅이 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 읽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일까?
* 목차와 뒷표지 *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목차가 나오는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비독서의 방식들’, 두 번째 ‘담론의 상황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대처 요령’이 나온다. 목차를 보면서 과연 이 책은 ‘독서’에 대한 책일까, ‘말하기’에 대한 책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 뒤표지로 넘어가 본다. 움베르토 에코의 평은 이렇다. “이 책은 불완전한 독서와 비독서를 포함한 온갖 읽기방식의 창조적 국면에 주목한다.” 온갖 읽기 방식의 창조적 국면이라... 어쨌든 ‘읽기’에 대한 내용이라고 소개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밑에 더 길게 나와 있는 방민호 교수는 이 책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 같”지만, “그런 값싼 기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읽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하는 헛된 낭비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러면서도 책과 지식과 진실을 숭상해온 전통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지켜나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평이 옳은지는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
* 프롤로그 *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다루는 내용이 ‘금기시되는 주제’(12p)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독서의 좋은 점을 자랑하는 텍스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세 가지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① 독서의 의무, ② 정독해야 할 의무, 그리고 ③ 책들과 관한 담론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누군가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그리고 “경우에 따라 심지어 어떤 책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독하지 않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는 편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13p)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그럴 수 있을까? 흥미가 생긴다.
프롤로그 끝부분에서 저자는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보아야만 그 책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러므로 나로서는 내가 접하는 책들에 대해 비록 내가 그것들을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책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것이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기본적인 전제이리라. 그런데 한편으로는 흥미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1부 1장, 무질의 사서 *
‘비독서의 방식들’의 1장에서 저자는 무질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서를 소개하면서 “어떤 책을 읽는 것 - 이는 괜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 보다는 책들 전체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22p)고 말한다.
저자는 “독서는 비(非)독서라 할 수 있다”고 규정지어 말한다. ‘독서=비독서’? 대학시절 철학 개론 시간에 들었던 소피스트와 동양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백마비마’ 흰 말은 말이 아니라는 말. 상당히 흡사해 보인다. 어쩌면 저자 역시 소피스트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닐까? 하지만 아직 단정하긴 이르다.
사서의 말을 들어보자 “책의 내용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도서관에서 일하긴 글러먹은 사람이오! 그는 절대로 총체적 시각을 가질 수 없단 말입니다!”(27p) 도서관에 너무 많은 책들이 있어서 다 읽을 수도 없고, 읽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읽지 않아야 알 수 있다고? 그래야 총체적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사서’의 경우라면 이런 이야기가 통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도 통할까?
저자는 이 사서를 두둔한다. “이 사서는 책 속으로 들어가는 걸 삼가지만, 우리가 짐작하듯 책에 무관심한 사람이 결코 아니며 책을 적대시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신중한 태도로 책 주변에만 머무르는 것은 오히려 책들을 - 모든 책을 - 사랑해서요, 그 책들 중 어느 한 책에 너무 관심을 기울인다면 다른 책들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게 두려워서인 것이다.”(28p)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옳은가? 총체적이란 말은 결국 겉핥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
“교양을 쌓은 많은 이들이 비독서자라면, 역으로 말해 많은 비독서자들이 교양인들이라며, 그것은 곧 비독서가 독서의 부재가 아님을 의미한다.”(34p) 정말 그럴까? 저자는 궤변을 말하는 것 같다. 결국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말았다. 제목과 목차를 읽는 것도 읽는 것이요, 책들의 관계를 설정한 카탈로그를 읽는 것도 역시 읽는 것이다! ‘독서=읽기’라고 한다면, 무엇이든 읽는 것은 독서다. ‘독서≠읽기’라고 한다면 무엇도 읽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자는 분명히 ‘읽지 않은 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결국 무질의 사서가 취한 태도는 “무수한 일반 독서가보다 훨씬 지혜로운 태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보다 책을 훨씬 더 존중하는 태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35p)라고 말하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궤변이다. 어떻게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책을 존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 1부 2장, 발레리 *
2장 첫머리에서 저자는 스스로 “무질의 사서가 취하는 태도는 물론 일반인과는 별 상관이 없는 극단적인 한 경우를 나타낸다.”(36p)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문제는 이러한 솔직성과는 반대로, 저자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고 있으며, 그러한 극단적인 경우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행해져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2장의 제목은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인데, 이것은 분명 ‘독서 행위’이다. 이 경우에 그 대상이 되는 책은 ‘읽지 않은 책’일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장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지는 본문을 펼치고 읽어보지 않는 한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훑어본다고 해서 책에 대한 평을 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37p)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평이 얼마나 정확하냐는 점에서는 차이가 전혀 없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발레리가 문학 비평의 영역에서 유명해진 것은 작품과 저자 사이에 공통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19세기의 비평계는 저자를 잘 알아야 작품을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저자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는 것이 전통이었다.”(38p) 내가 보기에는 19세기 비평계의 주장이 맞는 것 같은데… 그게 옳은 거 아닌가?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158페이지에 다시 나온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 것은 발레리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프루스트나 발레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작품과 저자를 분리해야 한다는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주장과는 달리, 책이란 하나의 운석이나 혹은 숨겨진 ‘자아’의 산물이 아니다. 종종 책은 우리가 아는 사람의 연장이며(물론 그를 아는 데 따르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뎀프시처럼 저자를 자주 만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그가 쓴 책에 대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138p) 음… 저자는 자신의 주장에 합치된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끌어다 쓰는 내용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어도 그것을 자기 주장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아니면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발레리가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 전혀 읽지 않는 경우가 더욱 잦다 - 는 사실은 그가 모르는 저자들에 관해 분명한 견해를 갖거나 그들에 관해 길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39p) 어떻게? 이것이 저자의 기본 전제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아할 뿐이다. 저자는 발레리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을 평한 것을 예로 든다. “나는 다행히 시간을 내어 읽어볼 수 있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약간의 내용만으로도 우리 문학이 최근 뛰어난 문인을 한 명 잃었다는 사실을 안다.”(40p) 하지만… 전혀 이 경우 발레리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전혀 안 읽은 것은 아니다. 일부분, 약간의 내용으로도 저자의 탁월함은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약간의 내용’만으로 극찬한다는 것은 그것이 ① 진정한 찬사일 가능성과 함께 ② 빈말에 불과한 것일 가능성을 함께 가진다!
“만약 우리가 발레리를 뻔뻔스럽다고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진지성을 헤아린다면, 이 서문에 이어 전개되는 프루스트에 관한 그의 몇 쪽의 글들이 결코 진실이 결여된 게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41p). 진실이 결여되지 않았다고?!! 아니, 결여되었다! 음식을 먹지도 않고, 슬쩍 맛만 보고서는 (그리고 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최고, 최상의 요리라고 극찬한다면 그에게 진실성이 결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발레리의 교묘한 능력은 바로 프루스트의 작품의 가치가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어도 문제없이 읽힐 수 있다는 데 있음을 설명해내는 데 있다.”(43p) 저자는 ‘교묘한 능력’을 긍정의 의미로 사용하나, 나는 부정의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싶다. 그것은 교묘한 말장난, 뻔뻔한 주장에 불과하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여기서 우리는 책을 깊이 탐독하되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책 속으로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독자인지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무엇이 비독서이고 무엇이 독서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란 어렵다.”(56p)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겁한 비교’! ‘일방적 비교’!에다가 의도적인 ‘논점 흐리기’일 뿐이다! 물론 책을 깊이 탐독하지만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어떤 책도 읽지 않으면서도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저자는 너무 극단적인 예들을 들면서 자기 주장을 합리화시키는데 이건 비겁한 짓이다!
* 1부 3장, 에코 *
3장에서 저자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인 바스커빌의 기욤(바스커빌은 그의 출생지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후로 기욤이라는 그의 이름을 제쳐두고 그의 출생지인 바스커빌을 이름처럼 사용한다. --;; 나는 제대로 된 이름인 기욤을 사용하겠다.)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저자는 기욤이 범인은 잡은 것보다는, 그가 숨겨진 책인 [시학 2권]을 알아맞히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우리도 “한 번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책에 대해서도 제법 정확하게 애기할 수 있다는 것”(67p)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모든 책은 어떤 하나의 논리를 따른다는 애기요, 발레리도 바로 그 논리에만 관심을 기울여 여러 결론들을 도출한다. …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예감한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제1권의 큰 줄기들을 연장함으로써 그 책의 전체적 관념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67-68p) 그럴 것이다. 우리도 기욤처럼 너끈히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고, 결코 잡을 수 없을 것 범인도 척척 잡아낼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저자는 과연 일반적인 사람들이 모두 기욤의 수준에 필적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편, ‘많은’ 책들이 하나의 논리를 따른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책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책에서 그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울 수가 없게 된다. 이 책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이 책을 읽지도 않고서 서평을 쓴다는 것이 말이 될까? 게다가 목차를 보며 어떤 내용이 전개되리라는 예측은 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니 그러한 예측이 그리 정확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1부 4장, 몽테뉴 *
4장은 몽테뉴를 다룬다. 그리고 이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독서는 단순히 어떤 텍스트를 인식하는 것, 혹은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은 아니다. 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는 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한 독서다.”(77p)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책에 대해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당면 상황에 따라 다시 손질된 불명확한 기억들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78p)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무엇을 읽든지 읽은 것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독서를 통한 ‘배움’은 불가능해진다.
저자는 몽테뉴가 독서의 흔적을 간직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그 자신의 글을 인용하여 말한다. “내가 좀 배운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기억으로 간직하는 데는 영 젬병이다.”(79p)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몽테뉴는 자신의 ‘독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저자는 계속 몽테뉴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책들을 뒤적거릴 뿐, 그것들을 탐구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뭔가 남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의 판단에 도움이 된 것은 단지 바로 그것, 즉 판단에 영향을 준 그 담론들과 상상력들이다. 그밖에 저자며 장소, 말들과 다른 여러 정황들, 나는 그것들을 마구 잊어버린다.”(80p)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좋은 독서 태도요 방법이다. 우리가 어떤 책을 통해서 무엇을 배운다면 그것을 즉시로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움의 요소 외의 것들은 잊어버린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저자는 이런 몽테뉴의 말을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망각은 풍요화의 또 다른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몽테뉴가 읽은 것을 서둘러 까먹는 것은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80p) 어쩌면 이렇게 다르게 읽을 수가 있는가! 몽테뉴가 단순히 ‘망각’의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 저자에게 와서는 그러한 ‘망각’이 ‘의도적인 것’이 되어 버렸으며, ‘망각’을 통해서 ‘풍요화’와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드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되고 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왜곡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자 하는가?
하지만 저자는 다시금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어떤 책을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하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몽테뉴만의 독특한 점이자 그의 기억 장애의 정도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81p) 그렇다! 앞의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몽테뉴의 경우 역시 ‘독특한’ 것일뿐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기억 장애’를 들어 그 ‘기억 장애’가 ‘지식의 획득과 풍요화’를 가져오는 도깨비 방망이인 듯이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2부 1장, 사교 생활 *
2부는 우리가 읽지 않은 책을 말해야 하는 상황들을 다루고 있는데, 1장은 그리ㅣ엄 그린이 쓴 소설의 주인공인 마틴스를 예로 들고 있다. 그는 다른 도시에 가서 비슷한 이름을 가진 유명 작가로 오해를 받아,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자신이 읽거나 알지도 못하는 책에 대해 인터뷰를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사교 생활 가운데서 때론 우리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며, 우리도 마틴스가 한 것처럼 우리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저자는 이 소설에서 “보게 되는 강연 상황은 극단적인 경우라 해야겠지만”(106p)이라고 인정한다. 저자는 어째서 매번 극단적이고 독특한 예만을 골라 들면서 그것이 보편화, 일반화 되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일까? 게다가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마틴스는 자신이 ‘읽지(쓰지) 않는 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 것 아닌가! 마틴스가 취한 태도는 결국 자신의 체면을 위해(92p)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속임수와 거짓말을 한 것 뿐이다. 그러니 결국 저자는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속임수와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2부 2장, 선생 앞에서 *
여기서는 로라 보헤넌이라는 인류학자가 [햄릿]을 읽어 주었던 서아프리카의 티브 족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처음으로 듣는 햄릿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내용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 좀비도 아닌데 움직이고 말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그들은 유령의 존재를 믿지 못한다) 그 외에 자신들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반박한다.
저자는 이 점을 들어 이렇게 말한다. “티브 족은 [햄릿]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이 극작품에 대해 몇 가지 분명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내가 강의하는 텍스트를 읽지 않은 나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문제없이 그 작품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하기까지 하고 있다.”(118p) 이런 주장은 매우(!) 실망스럽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란 말인가? 생전 처음 듣는 어떤 이야기에 대해서도 우리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겨우 이것을 말하고자 했단 말인가?
저자는 할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한다. “티브 족이 자신들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편파적인 독법을 제의한다고 해서 그 독서가 왜곡되었다거나 흥미로울 게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티브 족이 그 책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다른 문화권에 있다는 점은 오히려 그들을 그 책에 대해 제대로 된 논평을 할 수 있는 특권적인 상황에 위치시킨다.”(122p) 아니!! 티브 족은 책에 대해 논평한 것이 아니다. 책에 나오는 ‘문화적인 부분’, 그것도 자신들의 문화적인 것과 이질적인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했을 뿐이지 결코 [햄릿]을 논평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그 책에 대한 ‘제대로 된 논평’이라고 할 수 있는가! 궤변이다.
* 2부 3장, 작가 앞에서 *
저자는 누군가를 인터뷰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인터뷰할 작가들의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한다(124-125p). 이 부분은 일본의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성실한 태도(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인터뷰 대상의 책들을 읽은 후에야 인터뷰를 한다는…)와는 정반대되는 불성실한 태도이다! 사실상 인터뷰를 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추기 위해서 전부는 아니라도 몇 권의 저작 정도는 읽고서 인터뷰에 나서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 아닌가!
여기서도 저자는 매우 특이한 예를 들고 있다. 그 책의 저자로 되어 있지만, 정작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작가 이야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피에르 시냑의 탐정 소설 [페르디노 셀린느]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도솅은 졸지에 유명한 작가가 된다. 하지만 그와 또 다른 사람(가스티넬)과의 공저로 발표된 책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의 원고에서 채택된 것은 두 등장인물의 이름 뿐이요, 실재 내용은 셀린느 페르디노라는 여자에 의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진다(129p). 그러니 작가인 도셍은 자신이 지었다고 한 책을 읽어보지도 못한 괴이한 작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 대해서도 저자는 솔직하게 이것이 ‘사실 같지 않은 상황’(129p)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도솅은 결코 ‘저자’일 수 없다. ‘명목상’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저자는 셀린느이기 때문이다.
작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저자의 조언은 이렇다. “우선, 작가의 책에 대해 말을 하거나 그 책을 정확하게 기억함에 있어서 과연 작가가 우리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가 하는 점이 생각과는 달리 그리 확실치 않다. 사람들이 자기 글을 인용할 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몽테뉴의 에는 작가라 해도 일단 글을 쓴 뒤 자신의 글로부터 분리된 뒤에는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게 해준다. … 바로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지 말고 좋게 말해주라는 것이다.”(138p) 이건 웬 처세술적인 발언인가!
* 2부 4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
여기서 저자는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의 예를 들고 있는데,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자신은 읽지 않았으나 상대가 좋아하는 책 얘기를 하는 것”(140p)이다.
* 3부 1장, 부끄러워하지 말 것 *
3부는 ‘대처 요령’을 다루며, 1부는 ‘부끄러워하지 말 것’이라는 요령이다. 무엇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일까? “어떤 책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독서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154p)는 점을 기억하고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데이비드 롯지의 소설을 예로 들면서 “책을 꼭 읽지 않아도 우리는 그 책에 대한 분명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대강이 아니라 심지어는 꽤 내밀하게 그 책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다. 홀로 고립된 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58p)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그 ‘견해’란 그 사람 나름의 주관적인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지, 대화의 주제가 되는 그 책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과 그것에 근거한 견해는 아닌 것이다.
저자의 결론은 이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진실보다는 자기 진실이 훨씬 중요하다.”(174p) ‘비독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우리 문화(160p)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집중하라는 것이다. 책을 안 읽었어도 얼마든지 자신 있게, 그 책을 읽은 사람들보다도 더 자신 있게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으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것이 “부끄러움 없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라는 유혹의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 3부 2장,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
여기서는 [잃어버린 환상]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인 샤르동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프랑스의 문인들 사이에 만연한 글쓰기의 행태를 보여준다. 책을 보지 않고도 서평을 쓰는 법(177p), 극단적으로 악평을 하거나 찬사를 보내는 법(183p) 등이 나온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책이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유동적인 오브제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 우리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책이라는 거울을 통해 바로 우리 자신의 불확실성, 즉 우리의 고아기와 대면케 하기 때문이다.”(195p) 하지만 책이 아니라, 평하는 사람의 생각이 ‘유동적’인 것이다! 책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놓고서는, 그 책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의 생각(그러나 그 생각은 주제가 된 텍스트에 근거하지 않는 주관적인 생각이다!)을 말하는 것은 그저 말장난일 뿐이요, 더 거칠게 말하는 거짓이요 사기일 뿐이다.
* 3부 3장, 책을 꾸며낼 것 *
이번엔 일본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예로 든다. 고양이의 주인과 미학자의 대화는 기가 막히다. 미학자가 엉터리 평론을 했다는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그따위 엉터리를 말했다가, 만일 상대방이 읽었다면 어떡할 작정인가?’ 마치 남을 속이는 건 상관없고, 다만 속임수가 들통이 났을 땐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투다. 미학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뭐 그때 다른 책과 헷갈렸다고 하든지 하면 되거든.’ 하고 그는 가가대소하며 말했다.” 이어서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책에 대해 신중치 못한 언사를 하여 누가 그 말에 반박을 하더라도 착각을 했다고 말하면 그뿐이다.”(202p) 이젠 무책임하기까지!! 이쯤 되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이런 책을 쓴 것일까 하는 의아한 생각마저 든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끝부분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사람들은 그 금테 안경을 쓴 미학자를 비난하듯, 내가 책을 읽지도 않고 떠들어댄다거나 혹은 순수한 의미에서 책에 나오지 않은 사건들을 얘기한다며 나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책들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떤 주관적인 진실을 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214p) 철면피!! 교묘한 논리! 궤변! 소피스트! 결국 중요한 건 ‘느낌’이라는 단어다! 느낌을 말하고 느낌이 들고… 그것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것도 아주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그럼에도 저자는 그것을 (주관적인) ‘진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궤변일 뿐이다. 그 책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있는지 읽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일반화시켜서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말하는 것이 어떻게 진실일 수 있을까!!! 그건 ‘주관적인 진실’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 3부 4장, 자기 얘기를 할 것 *
이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오스카 와일드의 이야기를 한다. 그가 사람들이 절대로 읽지 않았으면 하는 책들을 소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217p)은 설득력도 있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독서라는 것이 반드시 이롭기만 한 과정이 아니라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발상이다.”(217p)라는 저자의 지적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글에서 “어떤 포도주의 산지와 특질을 알기 위해서 한 통의 술을 모두 마실 필요는 없네. 반 시간 정도면 어떤 책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어렵잖게 알아낼 수 있네. 형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실 6분이면 충분하네. 무거운 책의 진창 속에서 생고생을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220p)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동감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말한 ‘형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이며,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과연 모든 사람들이 6분만에 어떤 책의 가치를 알아낼 수 있는지 의문이 된다. 그런데다, 저자는 이러한 와일드의 말을 더 확대 해석하여 “어떤 책을 아는 데 6분이면 충분하다는 이 주장”(220p)이라고 말하는데, 와일드가 말한 것은 ‘책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지 그 책 전부를 ‘아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조금 더 뒤로 가면 저자가 책의 맨 앞에 인용했던 와일드의 문장을 다시 소개한다. “나는 내가 논해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가 이런 ‘도발적인 발언’을 한 것은, “책은 읽는 사람의 생각을 움직일 수 있고, 동시에 그가 가진 가장 독창적인 부분으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228p)는 점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책이 사람의 생각을 움직일 때에는 꼭 그런 부정적인 쪽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가진 가장 독창적인 부분을 일깨워줄 수도 있지 않은가!
저자의 결론과 같은 말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텍스트에 대한 거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이다.”(230p) 이것이 단지 ‘자기 생각을 말하기’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 주장도 그런대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특정한 책에 대해 말하기’와 관련된 것이라면 텍스트에 대한 것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텍스트에 대한 거짓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근거해서, 텍스트에 근거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도 저자는 학생들에게 “‘책을 꾸며낼’ 권리”(236p)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책을 꾸며낼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미 남이 쓴 책을 자기 멋대로 꾸며낼 권리는 학생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주어져서는 안 되는 권리이다. ‘창작’에 있어서는 꾸며낼 권리가 있다고 하겠지만, ‘독서’에 있어서 그런 권리란 없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헤집고 떠다닌 문장,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고 당당하게 거짓을 진실인 듯 말하라’는 주장에 다름이 아니다. 매번 극단적이고 독특한 예들만을 골라 들면서, 그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억지. 사실에는 무관심하고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저자의 태도. 결국 이 책은 ‘독서’에 대한 책이요 ‘말하기’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거짓’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거짓’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도록 권유하는 책…
* 오타 및 탈자가 몇 개 눈에 띈다. *
31p 세 번째 단락 ‘모른다고 하도라도’ -> ‘모른다고 하더라도’
93p 마지막 줄 ‘전후(前後)’ -> ‘전후(戰後)’라고 해야 맞는 것 같다. 94페이지의 “전후의 혼란한 틈을 타”라는 문장으로 보건대...
122p 마지막 줄 ‘분명하는 것이다.’ -> ‘분명하다는 것이다.’
180p 중간 ‘풀판업자’ -> ‘출판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