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왕의 전설
라우라 가예고 가르시아 지음, 권미선 옮김 / 평사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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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처음 [떠돌이 왕의 전설]이라는 제목을 접하면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아라고른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는 ‘스트라이더’로 불리고 있고 그가 결국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왕으로서 귀환한다는 모티프가 겹쳐져 보였다. 실제 내용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부분도 없지 않은 듯...

 

2.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시(詩)’가 중요한 모티프를 차지하며 나타난다. 마침, 요즘에 시에 대해 공부하고 있어서 그런지 더 관심이 생긴다. 시에 관련된 내용들을 책의 전반에 흩어져서 나온다. 예를 들어, 이들의 시인 ‘카시다’의 형식과 관련된 대한 내용(22p ‘나시브’와 ‘라힐’ 그리고 ‘마디흐’)도 관심을 끌었다. 특별히 시와 관련하여 ‘말의 위력’을 지적한 부분(34p)과 말만으로는 공허하며 거기에 ‘마음’이 더해져야 한다는 지적(37-38, 45p), 그리고 ‘혀’와 ‘마음’을 함께 다룬 부분(134p) 등은 흥미로웠다.

 

3. 이야기의 구성은 시에서 말하는 ‘봉투형’ 또는 ‘수미일관’ 형태를 취한다. 제일 앞에 나오는 내용과 제일 뒤에 나오는 내용을 ‘동일’하게 하는 형식이 그것이다. 왈리드가 술룩을 만나 죽게 되는 장면은 소설이 시작하면서 제시되고 있으며, 그것은 다시금 소설의 끝 부분에서 다시금 나타난다. 소설이지만 시적인 구조나 형태에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이야기는 모든 면에서 최고와 완벽을 누리던 왈리드 왕자가 유카쓰에서 열리는 시 경연대회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예비적으로 주최한 시 경연대회에서 연속으로 함마드 입븐 알 다드라는 양탄자 짜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패하고 만다. 복수심에 불타는 왈리드는 함마드를 궁정 서기로 임명하면서 복수하고자 한다.

그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함마드를 괴롭히지만, 오히려 함마드의 돌려 보내달라는 요청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며 조롱한다(70p). 여기서 저자는 왈리드가 인용하는 시를 가지고 사실상 왈리드 자신을 묘사하는 역설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거기에 왈리드의 부왕이 유언으로 남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앞으로 전개될 왈리드의 인생에 대한 암시처럼 보인다.

상황이 진전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광기와 같은 복수에 불타던 왈리드는 점차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고(90p), 온순하게 돌아가기만을 소원했던 함마드는 오히려 ‘드진의 광기’(87p)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세계의 역사를 담은 한 장의 양탄자는 완성되고 함마드는 죽고 말지만, 양탄자의 마법(92p)을 두려워 한 왈리드는 그것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버리고 만다.

이후의 이야기는 왈리드의 심복이던 하캄이 추방 당한 것에 대한 복수로 양탄자를 훔쳐간 사건과, 운명처럼 양탄자를 찾아 길을 떠나는 왈리드가 어떻게 결국 양탄자를 찾게 되는가에 대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이 이상의 내용 소개는 스포일이 될 것 같아서 이 정도로만...

 

5.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저자는 이슬람교도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운명론’을 철저하게 제시한다. 왈리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함마드의 아들들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운명처럼 양탄자를 찾으러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흔히 ‘인샬라’라고 말하는(그것의 원래 발음은 ‘인쉬 알라’로서 ‘알라의 뜻’이라는 의미이다) 알라의 뜻을 운명/숙명처럼 여기고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소설의 전개가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고, 꼭 필요한 순간에 그를 돕는 ‘빨간 터번’의 노인이 나타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부분에 이르면 소설 내용의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결말을 염두에 둔 ‘장치’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결론은 전혀 기대치 못했던 충격적인 내용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소설의 내용을 끌어가는 힘은 ‘운명/숙명’ 그리고 ‘계시’다. 그런데 그렇게 운명에 끌려 길을 가던 왈리드는 최종적으로 그러한 ‘운명’을 단지 ‘가능성’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한다! 이슬람 정신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왈리드의 선언은 폭탄적이다!

 

6. 책을 받고서는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즘 시간에 쫓기는 나로서는 도저히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이 책이 청소년 소설이라는 점도, 대부분의 소설을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했다. 결국 별 어려움 없이 끝까지 독파할 수 있었다.

청소년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가볍고 흥미 위주의 내용을 다룬 것이 아니어서 좋았다. 이런 내용들도 읽으면서 사고하는 힘을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야기의 흐름이 요즘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환타지적인 요소도 들어있고, 또 재미도 있어서 금상첨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잠깐이나마 소설을 읽는 즐거움, 생각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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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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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책 표지와 속표지 *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나로서는 특이하다는 생각과 함께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과연 어떻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속표지를 넘기자 “나는 내가 평문을 써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적혀 있다. 상당히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문장이다. 평문을 써야 하는데, 그런 책을 샅샅이 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 읽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일까?

 

* 목차와 뒷표지 *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목차가 나오는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비독서의 방식들’, 두 번째 ‘담론의 상황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대처 요령’이 나온다. 목차를 보면서 과연 이 책은 ‘독서’에 대한 책일까, ‘말하기’에 대한 책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 뒤표지로 넘어가 본다. 움베르토 에코의 평은 이렇다. “이 책은 불완전한 독서와 비독서를 포함한 온갖 읽기방식의 창조적 국면에 주목한다.” 온갖 읽기 방식의 창조적 국면이라... 어쨌든 ‘읽기’에 대한 내용이라고 소개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밑에 더 길게 나와 있는 방민호 교수는 이 책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 같”지만, “그런 값싼 기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읽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하는 헛된 낭비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러면서도 책과 지식과 진실을 숭상해온 전통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지켜나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평이 옳은지는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

 

* 프롤로그 *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다루는 내용이 ‘금기시되는 주제’(12p)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독서의 좋은 점을 자랑하는 텍스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세 가지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① 독서의 의무, ② 정독해야 할 의무, 그리고 ③ 책들과 관한 담론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누군가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그리고 “경우에 따라 심지어 어떤 책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독하지 않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는 편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13p)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그럴 수 있을까? 흥미가 생긴다.

프롤로그 끝부분에서 저자는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보아야만 그 책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러므로 나로서는 내가 접하는 책들에 대해 비록 내가 그것들을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책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것이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기본적인 전제이리라. 그런데 한편으로는 흥미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1부 1장, 무질의 사서 *

‘비독서의 방식들’의 1장에서 저자는 무질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서를 소개하면서 “어떤 책을 읽는 것 - 이는 괜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 보다는 책들 전체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22p)고 말한다.

저자는 “독서는 비(非)독서라 할 수 있다”고 규정지어 말한다. ‘독서=비독서’? 대학시절 철학 개론 시간에 들었던 소피스트와 동양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백마비마’ 흰 말은 말이 아니라는 말. 상당히 흡사해 보인다. 어쩌면 저자 역시 소피스트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닐까? 하지만 아직 단정하긴 이르다.

사서의 말을 들어보자 “책의 내용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도서관에서 일하긴 글러먹은 사람이오! 그는 절대로 총체적 시각을 가질 수 없단 말입니다!”(27p) 도서관에 너무 많은 책들이 있어서 다 읽을 수도 없고, 읽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읽지 않아야 알 수 있다고? 그래야 총체적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사서’의 경우라면 이런 이야기가 통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도 통할까?

저자는 이 사서를 두둔한다. “이 사서는 책 속으로 들어가는 걸 삼가지만, 우리가 짐작하듯 책에 무관심한 사람이 결코 아니며 책을 적대시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신중한 태도로 책 주변에만 머무르는 것은 오히려 책들을 - 모든 책을 - 사랑해서요, 그 책들 중 어느 한 책에 너무 관심을 기울인다면 다른 책들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게 두려워서인 것이다.”(28p)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옳은가? 총체적이란 말은 결국 겉핥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

“교양을 쌓은 많은 이들이 비독서자라면, 역으로 말해 많은 비독서자들이 교양인들이라며, 그것은 곧 비독서가 독서의 부재가 아님을 의미한다.”(34p) 정말 그럴까? 저자는 궤변을 말하는 것 같다. 결국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말았다. 제목과 목차를 읽는 것도 읽는 것이요, 책들의 관계를 설정한 카탈로그를 읽는 것도 역시 읽는 것이다! ‘독서=읽기’라고 한다면, 무엇이든 읽는 것은 독서다. ‘독서≠읽기’라고 한다면 무엇도 읽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자는 분명히 ‘읽지 않은 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결국 무질의 사서가 취한 태도는 “무수한 일반 독서가보다 훨씬 지혜로운 태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보다 책을 훨씬 더 존중하는 태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35p)라고 말하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궤변이다. 어떻게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책을 존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 1부 2장, 발레리 *

2장 첫머리에서 저자는 스스로 “무질의 사서가 취하는 태도는 물론 일반인과는 별 상관이 없는 극단적인 한 경우를 나타낸다.”(36p)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문제는 이러한 솔직성과는 반대로, 저자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고 있으며, 그러한 극단적인 경우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행해져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2장의 제목은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인데, 이것은 분명 ‘독서 행위’이다. 이 경우에 그 대상이 되는 책은 ‘읽지 않은 책’일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장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지는 본문을 펼치고 읽어보지 않는 한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훑어본다고 해서 책에 대한 평을 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37p)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평이 얼마나 정확하냐는 점에서는 차이가 전혀 없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발레리가 문학 비평의 영역에서 유명해진 것은 작품과 저자 사이에 공통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19세기의 비평계는 저자를 잘 알아야 작품을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저자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는 것이 전통이었다.”(38p) 내가 보기에는 19세기 비평계의 주장이 맞는 것 같은데… 그게 옳은 거 아닌가?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158페이지에 다시 나온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 것은 발레리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프루스트나 발레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작품과 저자를 분리해야 한다는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주장과는 달리, 책이란 하나의 운석이나 혹은 숨겨진 ‘자아’의 산물이 아니다. 종종 책은 우리가 아는 사람의 연장이며(물론 그를 아는 데 따르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뎀프시처럼 저자를 자주 만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그가 쓴 책에 대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138p) 음… 저자는 자신의 주장에 합치된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끌어다 쓰는 내용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어도 그것을 자기 주장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아니면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발레리가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 전혀 읽지 않는 경우가 더욱 잦다 - 는 사실은 그가 모르는 저자들에 관해 분명한 견해를 갖거나 그들에 관해 길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39p) 어떻게? 이것이 저자의 기본 전제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아할 뿐이다. 저자는 발레리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을 평한 것을 예로 든다. “나는 다행히 시간을 내어 읽어볼 수 있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약간의 내용만으로도 우리 문학이 최근 뛰어난 문인을 한 명 잃었다는 사실을 안다.”(40p) 하지만… 전혀 이 경우 발레리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전혀 안 읽은 것은 아니다. 일부분, 약간의 내용으로도 저자의 탁월함은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약간의 내용’만으로 극찬한다는 것은 그것이 ① 진정한 찬사일 가능성과 함께 ② 빈말에 불과한 것일 가능성을 함께 가진다!

“만약 우리가 발레리를 뻔뻔스럽다고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진지성을 헤아린다면, 이 서문에 이어 전개되는 프루스트에 관한 그의 몇 쪽의 글들이 결코 진실이 결여된 게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41p). 진실이 결여되지 않았다고?!! 아니, 결여되었다! 음식을 먹지도 않고, 슬쩍 맛만 보고서는 (그리고 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최고, 최상의 요리라고 극찬한다면 그에게 진실성이 결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발레리의 교묘한 능력은 바로 프루스트의 작품의 가치가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어도 문제없이 읽힐 수 있다는 데 있음을 설명해내는 데 있다.”(43p) 저자는 ‘교묘한 능력’을 긍정의 의미로 사용하나, 나는 부정의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싶다. 그것은 교묘한 말장난, 뻔뻔한 주장에 불과하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여기서 우리는 책을 깊이 탐독하되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책 속으로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독자인지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무엇이 비독서이고 무엇이 독서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란 어렵다.”(56p)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겁한 비교’! ‘일방적 비교’!에다가 의도적인 ‘논점 흐리기’일 뿐이다! 물론 책을 깊이 탐독하지만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어떤 책도 읽지 않으면서도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저자는 너무 극단적인 예들을 들면서 자기 주장을 합리화시키는데 이건 비겁한 짓이다!

 

* 1부 3장, 에코 *

3장에서 저자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인 바스커빌의 기욤(바스커빌은 그의 출생지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후로 기욤이라는 그의 이름을 제쳐두고 그의 출생지인 바스커빌을 이름처럼 사용한다. --;; 나는 제대로 된 이름인 기욤을 사용하겠다.)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저자는 기욤이 범인은 잡은 것보다는, 그가 숨겨진 책인 [시학 2권]을 알아맞히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우리도 “한 번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책에 대해서도 제법 정확하게 애기할 수 있다는 것”(67p)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모든 책은 어떤 하나의 논리를 따른다는 애기요, 발레리도 바로 그 논리에만 관심을 기울여 여러 결론들을 도출한다. …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예감한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제1권의 큰 줄기들을 연장함으로써 그 책의 전체적 관념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67-68p) 그럴 것이다. 우리도 기욤처럼 너끈히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고, 결코 잡을 수 없을 것 범인도 척척 잡아낼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저자는 과연 일반적인 사람들이 모두 기욤의 수준에 필적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편, ‘많은’ 책들이 하나의 논리를 따른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책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책에서 그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울 수가 없게 된다. 이 책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이 책을 읽지도 않고서 서평을 쓴다는 것이 말이 될까? 게다가 목차를 보며 어떤 내용이 전개되리라는 예측은 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니 그러한 예측이 그리 정확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1부 4장, 몽테뉴 *

4장은 몽테뉴를 다룬다. 그리고 이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독서는 단순히 어떤 텍스트를 인식하는 것, 혹은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은 아니다. 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는 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한 독서다.”(77p)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책에 대해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당면 상황에 따라 다시 손질된 불명확한 기억들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78p)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무엇을 읽든지 읽은 것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독서를 통한 ‘배움’은 불가능해진다.

저자는 몽테뉴가 독서의 흔적을 간직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그 자신의 글을 인용하여 말한다. “내가 좀 배운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기억으로 간직하는 데는 영 젬병이다.”(79p)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몽테뉴는 자신의 ‘독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저자는 계속 몽테뉴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책들을 뒤적거릴 뿐, 그것들을 탐구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뭔가 남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의 판단에 도움이 된 것은 단지 바로 그것, 즉 판단에 영향을 준 그 담론들과 상상력들이다. 그밖에 저자며 장소, 말들과 다른 여러 정황들, 나는 그것들을 마구 잊어버린다.”(80p)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좋은 독서 태도요 방법이다. 우리가 어떤 책을 통해서 무엇을 배운다면 그것을 즉시로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움의 요소 외의 것들은 잊어버린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저자는 이런 몽테뉴의 말을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망각은 풍요화의 또 다른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몽테뉴가 읽은 것을 서둘러 까먹는 것은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80p) 어쩌면 이렇게 다르게 읽을 수가 있는가! 몽테뉴가 단순히 ‘망각’의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 저자에게 와서는 그러한 ‘망각’이 ‘의도적인 것’이 되어 버렸으며, ‘망각’을 통해서 ‘풍요화’와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드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되고 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왜곡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자 하는가?

하지만 저자는 다시금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어떤 책을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하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몽테뉴만의 독특한 점이자 그의 기억 장애의 정도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81p) 그렇다! 앞의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몽테뉴의 경우 역시 ‘독특한’ 것일뿐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기억 장애’를 들어 그 ‘기억 장애’가 ‘지식의 획득과 풍요화’를 가져오는 도깨비 방망이인 듯이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2부 1장, 사교 생활 *

2부는 우리가 읽지 않은 책을 말해야 하는 상황들을 다루고 있는데, 1장은 그리ㅣ엄 그린이 쓴 소설의 주인공인 마틴스를 예로 들고 있다. 그는 다른 도시에 가서 비슷한 이름을 가진 유명 작가로 오해를 받아,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자신이 읽거나 알지도 못하는 책에 대해 인터뷰를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사교 생활 가운데서 때론 우리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며, 우리도 마틴스가 한 것처럼 우리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저자는 이 소설에서 “보게 되는 강연 상황은 극단적인 경우라 해야겠지만”(106p)이라고 인정한다. 저자는 어째서 매번 극단적이고 독특한 예만을 골라 들면서 그것이 보편화, 일반화 되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일까? 게다가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마틴스는 자신이 ‘읽지(쓰지) 않는 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 것 아닌가! 마틴스가 취한 태도는 결국 자신의 체면을 위해(92p)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속임수와 거짓말을 한 것 뿐이다. 그러니 결국 저자는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속임수와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2부 2장, 선생 앞에서 *

여기서는 로라 보헤넌이라는 인류학자가 [햄릿]을 읽어 주었던 서아프리카의 티브 족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처음으로 듣는 햄릿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내용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 좀비도 아닌데 움직이고 말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그들은 유령의 존재를 믿지 못한다) 그 외에 자신들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반박한다.

저자는 이 점을 들어 이렇게 말한다. “티브 족은 [햄릿]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이 극작품에 대해 몇 가지 분명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내가 강의하는 텍스트를 읽지 않은 나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문제없이 그 작품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하기까지 하고 있다.”(118p) 이런 주장은 매우(!) 실망스럽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란 말인가? 생전 처음 듣는 어떤 이야기에 대해서도 우리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겨우 이것을 말하고자 했단 말인가?

저자는 할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한다. “티브 족이 자신들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편파적인 독법을 제의한다고 해서 그 독서가 왜곡되었다거나 흥미로울 게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티브 족이 그 책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다른 문화권에 있다는 점은 오히려 그들을 그 책에 대해 제대로 된 논평을 할 수 있는 특권적인 상황에 위치시킨다.”(122p) 아니!! 티브 족은 책에 대해 논평한 것이 아니다. 책에 나오는 ‘문화적인 부분’, 그것도 자신들의 문화적인 것과 이질적인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했을 뿐이지 결코 [햄릿]을 논평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그 책에 대한 ‘제대로 된 논평’이라고 할 수 있는가! 궤변이다.

 

* 2부 3장, 작가 앞에서 *

저자는 누군가를 인터뷰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인터뷰할 작가들의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한다(124-125p). 이 부분은 일본의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성실한 태도(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인터뷰 대상의 책들을 읽은 후에야 인터뷰를 한다는…)와는 정반대되는 불성실한 태도이다! 사실상 인터뷰를 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추기 위해서 전부는 아니라도 몇 권의 저작 정도는 읽고서 인터뷰에 나서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 아닌가!

여기서도 저자는 매우 특이한 예를 들고 있다. 그 책의 저자로 되어 있지만, 정작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작가 이야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피에르 시냑의 탐정 소설 [페르디노 셀린느]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도솅은 졸지에 유명한 작가가 된다. 하지만 그와 또 다른 사람(가스티넬)과의 공저로 발표된 책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의 원고에서 채택된 것은 두 등장인물의 이름 뿐이요, 실재 내용은 셀린느 페르디노라는 여자에 의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진다(129p). 그러니 작가인 도셍은 자신이 지었다고 한 책을 읽어보지도 못한 괴이한 작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 대해서도 저자는 솔직하게 이것이 ‘사실 같지 않은 상황’(129p)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도솅은 결코 ‘저자’일 수 없다. ‘명목상’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저자는 셀린느이기 때문이다.

작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저자의 조언은 이렇다. “우선, 작가의 책에 대해 말을 하거나 그 책을 정확하게 기억함에 있어서 과연 작가가 우리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가 하는 점이 생각과는 달리 그리 확실치 않다. 사람들이 자기 글을 인용할 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몽테뉴의 에는 작가라 해도 일단 글을 쓴 뒤 자신의 글로부터 분리된 뒤에는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게 해준다. … 바로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지 말고 좋게 말해주라는 것이다.”(138p) 이건 웬 처세술적인 발언인가!

 

* 2부 4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

여기서 저자는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의 예를 들고 있는데,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자신은 읽지 않았으나 상대가 좋아하는 책 얘기를 하는 것”(140p)이다.

 

* 3부 1장, 부끄러워하지 말 것 *

3부는 ‘대처 요령’을 다루며, 1부는 ‘부끄러워하지 말 것’이라는 요령이다. 무엇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일까? “어떤 책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독서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154p)는 점을 기억하고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데이비드 롯지의 소설을 예로 들면서 “책을 꼭 읽지 않아도 우리는 그 책에 대한 분명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대강이 아니라 심지어는 꽤 내밀하게 그 책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다. 홀로 고립된 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58p)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그 ‘견해’란 그 사람 나름의 주관적인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지, 대화의 주제가 되는 그 책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과 그것에 근거한 견해는 아닌 것이다.

저자의 결론은 이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진실보다는 자기 진실이 훨씬 중요하다.”(174p) ‘비독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우리 문화(160p)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집중하라는 것이다. 책을 안 읽었어도 얼마든지 자신 있게, 그 책을 읽은 사람들보다도 더 자신 있게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으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것이 “부끄러움 없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라는 유혹의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 3부 2장,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

여기서는 [잃어버린 환상]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인 샤르동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프랑스의 문인들 사이에 만연한 글쓰기의 행태를 보여준다. 책을 보지 않고도 서평을 쓰는 법(177p), 극단적으로 악평을 하거나 찬사를 보내는 법(183p) 등이 나온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책이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유동적인 오브제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 우리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책이라는 거울을 통해 바로 우리 자신의 불확실성, 즉 우리의 고아기와 대면케 하기 때문이다.”(195p) 하지만 책이 아니라, 평하는 사람의 생각이 ‘유동적’인 것이다! 책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놓고서는, 그 책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의 생각(그러나 그 생각은 주제가 된 텍스트에 근거하지 않는 주관적인 생각이다!)을 말하는 것은 그저 말장난일 뿐이요, 더 거칠게 말하는 거짓이요 사기일 뿐이다.

 

* 3부 3장, 책을 꾸며낼 것 *

이번엔 일본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예로 든다. 고양이의 주인과 미학자의 대화는 기가 막히다. 미학자가 엉터리 평론을 했다는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그따위 엉터리를 말했다가, 만일 상대방이 읽었다면 어떡할 작정인가?’ 마치 남을 속이는 건 상관없고, 다만 속임수가 들통이 났을 땐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투다. 미학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뭐 그때 다른 책과 헷갈렸다고 하든지 하면 되거든.’ 하고 그는 가가대소하며 말했다.” 이어서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책에 대해 신중치 못한 언사를 하여 누가 그 말에 반박을 하더라도 착각을 했다고 말하면 그뿐이다.”(202p) 이젠 무책임하기까지!! 이쯤 되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이런 책을 쓴 것일까 하는 의아한 생각마저 든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끝부분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사람들은 그 금테 안경을 쓴 미학자를 비난하듯, 내가 책을 읽지도 않고 떠들어댄다거나 혹은 순수한 의미에서 책에 나오지 않은 사건들을 얘기한다며 나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책들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떤 주관적인 진실을 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214p) 철면피!! 교묘한 논리! 궤변! 소피스트! 결국 중요한 건 ‘느낌’이라는 단어다! 느낌을 말하고 느낌이 들고… 그것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것도 아주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그럼에도 저자는 그것을 (주관적인) ‘진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궤변일 뿐이다. 그 책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있는지 읽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일반화시켜서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말하는 것이 어떻게 진실일 수 있을까!!! 그건 ‘주관적인 진실’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 3부 4장, 자기 얘기를 할 것 *

이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오스카 와일드의 이야기를 한다. 그가 사람들이 절대로 읽지 않았으면 하는 책들을 소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217p)은 설득력도 있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독서라는 것이 반드시 이롭기만 한 과정이 아니라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발상이다.”(217p)라는 저자의 지적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글에서 “어떤 포도주의 산지와 특질을 알기 위해서 한 통의 술을 모두 마실 필요는 없네. 반 시간 정도면 어떤 책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어렵잖게 알아낼 수 있네. 형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실 6분이면 충분하네. 무거운 책의 진창 속에서 생고생을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220p)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동감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말한 ‘형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이며,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과연 모든 사람들이 6분만에 어떤 책의 가치를 알아낼 수 있는지 의문이 된다. 그런데다, 저자는 이러한 와일드의 말을 더 확대 해석하여 “어떤 책을 아는 데 6분이면 충분하다는 이 주장”(220p)이라고 말하는데, 와일드가 말한 것은 ‘책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지 그 책 전부를 ‘아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조금 더 뒤로 가면 저자가 책의 맨 앞에 인용했던 와일드의 문장을 다시 소개한다. “나는 내가 논해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가 이런 ‘도발적인 발언’을 한 것은, “책은 읽는 사람의 생각을 움직일 수 있고, 동시에 그가 가진 가장 독창적인 부분으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228p)는 점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책이 사람의 생각을 움직일 때에는 꼭 그런 부정적인 쪽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가진 가장 독창적인 부분을 일깨워줄 수도 있지 않은가!

저자의 결론과 같은 말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텍스트에 대한 거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이다.”(230p) 이것이 단지 ‘자기 생각을 말하기’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 주장도 그런대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특정한 책에 대해 말하기’와 관련된 것이라면 텍스트에 대한 것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텍스트에 대한 거짓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근거해서, 텍스트에 근거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도 저자는 학생들에게 “‘책을 꾸며낼’ 권리”(236p)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책을 꾸며낼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미 남이 쓴 책을 자기 멋대로 꾸며낼 권리는 학생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주어져서는 안 되는 권리이다. ‘창작’에 있어서는 꾸며낼 권리가 있다고 하겠지만, ‘독서’에 있어서 그런 권리란 없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헤집고 떠다닌 문장,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고 당당하게 거짓을 진실인 듯 말하라’는 주장에 다름이 아니다. 매번 극단적이고 독특한 예들만을 골라 들면서, 그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억지. 사실에는 무관심하고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저자의 태도. 결국 이 책은 ‘독서’에 대한 책이요 ‘말하기’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거짓’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거짓’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도록 권유하는 책…

 

* 오타 및 탈자가 몇 개 눈에 띈다. *

31p 세 번째 단락 ‘모른다고 하라도’ -> ‘모른다고 하라도’

93p 마지막 줄 ‘전후(後)’ -> ‘전후(後)’라고 해야 맞는 것 같다. 94페이지의 “전후의 혼란한 틈을 타”라는 문장으로 보건대...

122p 마지막 줄 ‘분명하는 것이다.’ -> ‘분명하는 것이다.’

180p 중간 ‘판업자’ -> ‘판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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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 구약역사서의 문예적-신학적 서론
김지찬 지음 / 생명의말씀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책은 ‘구약 역사서의 문예적-신학적 서론’이라는 부제처럼 구약의 역사서를 문예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는 ‘서론’적인 책이다. 역사서의 각 책들이 어떠한 구조로, 또 어떤 문예적인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본문의 구체적인 예들을 들어가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 읽으면서 생각한 것…

1. 구약과 신약의 연결! 더 나아가 현재와의 연결! 구약은 구약 만으로가 아니라 현재와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신약을 거쳐야만 한다! 이것이 구약의 한계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무리한 적용도 문제요, 구약에만 집중하고 신약이나 현재에 무관심 하는 것도 문제다.

2. 문예적 읽기는 상당히 관심을 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선택과 구원의 교리만을 강조한 채 언약의 사명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이 결국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음을 묘사하면서, 언약을 저버린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은 끝내 이방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강력한 웅변으로 제시한다.

… 하나님께서 왜 굳이 과거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지… 첫째, 성경의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며, 둘째,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과거 역사를 기억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18-19) - 문예적, 신학적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적인 부분을 전혀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학이 한동안 지나치게 역사를 주장하고 거기에 매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발적으로 역사를 멀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2. 역사 이야기는 한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역사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의도하셨다. 자신의 과거 역사를 잃어버리는 ‘기억 상실증’ 환자들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다고 한다. 기억 상실증 환자는 ‘의식’이나 ‘지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상실하는 병이다. 의식과 지능이 있음에도 기억을 상실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상실케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과거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보여준다.(21) - 상당히 공감 되는 예를 들고 있다. 기억의 중요성! 역사의 중요성!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기억 상실’로 묘사하는 것은 마이클 호튼과 유사하다.

3. 히브리 전통에서 역사서를 ‘전선지서’라고 부르는 것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역사서는 단지 과거의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한 ‘역사 보고’(historical report)가 아니라, 선지자적 관점의 역사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며,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지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고, 셋째, 그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선포이기에 그 성격상 ‘선지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선지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좋은 명칭이라 할 수 있다.(26) - 히브리 전통에 대한 ‘변명’? ‘옹호’? ^^;

4. 등장인물, 배경, 플롯 같은 용어들을 들으면 근본주의자들은 이같이 질문하기 마련이다. “만일 구약성경 본문이 성스러운 역사라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세속적이고 심미적인 문학적 접근 방법을 위해 개발된 카테고리로 어떻게 성경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가?” 흔히 성경은 역사이거나 문학 작품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다. 문예적 기교와 정확한 역사적 진술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 역사는 실재를 사실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해석이 들어간 ‘그림으로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결코 허구의 문학 작품이 아니다. 성경은 실제 일어난 역사에 기초함 정확무오한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구약 역사서는 단순한 실재 복사의 사진이 아니다. 문예성을 통해 감동적으로 해석이 가미되었기에 사진보다 더 완벽한 실재의 재현일 수도 있다. ‘그림으로서의 역사’이다. 문예성은 정확한 역사적 진술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정확한 역사를 오늘을 위한 교훈으로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되는 가치 표현 채널이라고 볼 수 있다.(38-39)

- 나는 근본주의자인가? 나 자신을 근본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나는 근본주의자인가보다. … 그런데 저자의 이 지적은 역사서를, 또는 성경을 ‘문예적, 신학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가장 근저(根底)에 깔려 있는 전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저자가 지적하는 ‘근본주의’적인 반감(反感)은 아마도 ‘문학’을 ‘허구’로 여기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성경의 기록은 논픽션으로, 문학(흔히 말하는 소설이나 시)은 픽션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특별히 ‘문예적’ 해석을 꺼리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성경이 허구의 문학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내용에 귀가 솔깃해 진다. 그것을 ‘허구’가 아닌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만 본다면 짐짓 문예적 해석을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는 태도를 버리기가 쉬워지지 않을까?

5. 구약 역사서는 실제적인 역사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연대기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경 기자는 자기의 메시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때로는 연대순에 어긋나게 사건을 배열하기 때문이다.(40) - 문예적인 성격을 가진 성경과 과거의 역사적인 성격을 가진 성경에 대한 개념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적인 역사 개념에 의하면 성경은 ‘역사 기록’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성경을 띈 기록’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어디선가… 아! 로버트 넬슨의 [열왕기상하] 주석에 그런 표현이 나온다. ‘우연히 역사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그 ‘우연히’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성경의 기록이 순수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다. 물론 역사 기록이라고 해서 꼭 연대순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말이다.

6.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것이다. 결국 설교자의 과업은 과거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해석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구약 역사서는 인식 주체인 우리가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할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다.

… 구약 역사서는… 이미 적용된 진리요, 이미 해석된 선포이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성경 기자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며, 성경 기자의 선포에 주의를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크레이다누스(S. Greidanus)는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설교를 설명과 적용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용적 설명으로 보는 판 데이크의 제안이 장점이 많다. 말씀은 교회에 전달되기 때문에 말씀과 교회 사이에는 긴장이 없다. 말씀은 적실하기에 적실한 것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적용은 본문의 설명에 덧붙여야 하는 독립적 요소가 아니다.(43) - 우리가 성경을 읽기도 해야 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말씀을 해석하기도 해야 하지만, 말씀이 우리를 해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경은 그저 ‘설명’으로 가득 찬 책이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적실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적용’이 ‘설명’과 분리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성경 말씀 자체가 ‘적용’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7.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포로가 되게 하고 / 기억은 우리로 자유민이 되게 할 것이다.”(49) - 여기부터 여호수아서에 대한 내용이다. 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인용한 짧은 글. ‘예루살렘 야드봐셈 기념관 출구의 동상 ’욥‘의 받침대 글귀에서’라는 소개가 함께 나와 있다. 뭔가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문구다.

8. “(여호수아서는) 늘상 변하는 상황 속에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가 늘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대화를 나눈 대화의 상대였다.”(57) - J. A. Sanders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다. ‘누구’와 ‘무엇’… 이 두 가지 질문… 참 중요한, 그리고 심오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에 답변하지 못할 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릇된 길로 갈 수밖에 없다.

9.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는 그저 한 민족이 살 땅을 얻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신학적 함축이 강한 첫 번째 단락(1:1-5:12)과 마지막 단락(22-24장)으로 정복과 분배의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호수아서는 권면(1장)으로 시작해서 권면으로 끝이 난다는 점이다. … 결국 여호수아서 기자는 여호수아서 앞뒤에 신학적 스토리를 위치시킴으로써 가나안 땅 정복과 분배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읽도록 하고 있다.(60) - 새삼 여호수아서의 설교를 쓰면서 기업 분배 부분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난감해 하던 일이 떠오른다. 그것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가 아니라면, 그것은 지루한 땅 나누기 기록에 불과했을 것이다.

10. 토라는 흔히 ‘율법’이라고 번역되지만, 사실상 토라란 원어는 이런 좁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토라는 ‘지켜야 할 규칙이나 규범’이 아니라, 일반적 의미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르침이란 모세의 가르침, 그러니까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 모세 오경은 단순한 행동 규칙이나 규정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 오경은 …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을 이끌어 오셨는지를 담고 있는 구원의 이야기이다. … 토라는 ‘모세의 산상수훈’이라고 볼 수 있다.(63-64) -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율법’에 대한 이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신약의 입장에서만 율법을 바라보아 왔던 것은 아닐까? 쓸모없는 것, 나쁜 것, 우리를 얽매는 규칙들… 이런 식으로만 말이다. ‘토라=가르침’이라는 설명은 신선하다.

11. 하나님 나라의 진전 앞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가나안인이 여리고 왕이 아닌 창기 라합이라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하나님 나라의 진전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라합은 목숨을 내걸고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의 운명을 걸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의 헌신이 요구됨을 보인다.(70)

12. 본문은 여리고 정복이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현 사건에 더 가까움을 우리에게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을 도는 행렬은 ‘하나님의 임재를 칭송하는 축하 행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군사적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법궤 자체가 전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분 것은 구약에서는 오직 다른 한 군데 즉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나타난다. … 따라서 여호수아 6:5에서는 시내산 사건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 여리고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순간에 여리고가 멸망한 것이다.(81-82)

13.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삶의 중심에는 자기(자아)가 놓여 있다. 자신의 행복과 번영이 최고의 목적이요 목표이다. 따라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정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신의 인도를 받기 위해 직업적인 점쟁이, 마법사, 요술사, 해몽가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신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운명을 미리 알아내어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120-121) - 우상숭배의 정체를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결국 가나안 종교는 인간의 풍요를 위해서 신을 지배하고자 하는 종교였다. 이렇게 보면 가나안의 종교는 농들에게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종교였다. 현대의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과학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시의 농부들도 바알 숭배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성과 종교의 결합은 많은 이스라엘인들에게 큰 매력이었을 것이다.(162) - 사사기 부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발전되어 나온다.

14. 언뜻 보면 사사기는 여러 사사들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단순한 모음집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사기 본문은 ‘긴밀하게 서로 연결된 통일체’이다. 사사기를 세심하게 읽으면 사사기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 특징적인 질문과 대답, 즉 “누가 먼저 올라가서 …와 싸우리이까?”라는 이스라엘의 질문과 “…가 올라가라”는 여호와의 대답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된다.(145) - 문예 분석은 이런 부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데 항상, 모든 경우라고는 할 수 없지만 때로 이처럼 놀랍고 새로운 통찰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사사기 1장을 보면 크게 유다 단락(1:1-21)과 요셉 단락(1:22-36)으로 나누어진다. 유다 단락은 유다 지파의 승리로 시작하여 베냐민 지파의 실패로 끝이 나는 반면에, 요셉 단락은 요셉 족속의 승리로 시작하여 단 지파의 실패로 끝이 안다. … 사사기 결론부에는 또다시 두 지파의 실패가 무대의 중심에 부각되어 나타난다.(147)

사사기의 제2서곡에서는 단순한 반복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순종적인 1세대 후에 나타난 2세대보다 더 패괴한 제3세대의 등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 이렇게 보면 겉으로 보기에 단순히 악순환의 반복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점차 확산되는 하향 나선형(a widening gyre)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추락의 모습임을 알 수가 있다.(156)

부르짖음의 공식을 살펴보자. 부르짖음 공식은 삼손 스토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사들의 이야기 가운데 나타난다. 삼손 이야기에 아예 부르짖음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예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것은 아닐까? 사사기가 전반적으로 타락의 하강 곡선을 그린다는 점이 이런 우리의 불안을 가속화시킨다.(169)

15.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다”(삿 11:16). 이 단락을 흔히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후회하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웹(Webb)이 ‘근심하다’의 용어 연구를 통해서 잘 지적했듯이 이 용어를 단지 하나님의 후회로 보면 이 에피소드의 ‘극적인 깊이’가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근심하다’는 후회가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견디지 못하는 심정’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 결국 이제 사사기의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회개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하심에 달려 있는 것임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201-202)

16. 입다의 서원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계산적이고 매우 간교한 것이었다. 입다는 여호와께 받은 약속의 말씀이 없었다. 입다의 관점에서 보면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멀리 계시며 아무런 보장도 주시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여호와의 도움을 얻어내기 위해 극단적 서원을 행한 것이었다.(203)

17. 브라이트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고난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 즉 우리의 평안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시는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225) - ……

18.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는 구절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 구절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모두 함축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이 누구나 자기의 눈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평등 사회요 각자 책임을 지는 사회라는 긍정적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회라는 부정적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228)

19. 이런 음울한 배경 가운데서 그래도 강렬한 희망의 빛이 비치고 있다. 그것은 사사기가 이스라엘의 유일한 사사는 여호와 한 분뿐이시며, 그가 신실하심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사라는 히브리어 명칭은 사사들의 이야기 가운데서는 여호와께만 사용되고 있다. 물론 제2서곡에서 사사들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으로 ‘사사’라는 영오가 사용되지만, 개별 사사에게 사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은 없다. 서론을 제외하고는 사사라는 명사는 입다가 암몬 왕과 외교적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여호와의 명칭’으로 한 번만 나온다(삿 11:27). 한글 개역은 ‘사사이신 여호와’를 ‘심판하시는 여호와’로 번역하고 있다.(231) - 새로운 내용! 사사이신 하나님!

 

20. 아기를 안은 나오미의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텅 빈 나오미를 풍요하게 채우셨음을 강조하는 데 목적이 있다. 룻기 1장에서 나오미는 두 아기를 잃었으나, 여기서는 아기를 취하여 품에 안고 있다. … 한글 개역 성경에는 한쪽에는(룻 1:5) 아들로, 다른 한쪽에는(4:16) 아기로 되어 있으므로 연결이 약간 느슨해 보이나, 히브리 성경에서는 둘 다 ‘아기’로 되어 있어 훨씬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245)

21.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다. 삶이 지치고 힘들어질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 인애의 손길을 펴신다는 데 있다.(259) - 얼마나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는 말씀인가!

 

22. 이스라엘 땅을 넘어 보지 못한 채,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예루살렘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오던 이들이,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당시 세계 최고의 대제국의 심장부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엄청난 갈등을 겪게 되었다. 끝을 볼 수 없는 거대한 제국, 솔로몬의 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부, 세계 최강의 군사력, 거대한 신전과 신상을 목도하면서 이들은 바벨론의 신들이 여호와보다 전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367) - 아! 이스라엘은 참으로 질곡 많은 역사를 거쳐 왔다. 신앙을 잃을 위기 상황도 많았고! 우리가 겪는 한계 상황도 이러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열왕기 기자는 “왜 선택된 백성이 이방 땅에 와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 열왕기를 기록하고 있다.(370)

23. 이렇게 부정적인 남의 나라의 왕들의 역사가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 그러나 열왕기는 단순히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기록한 단순한 역사 문서는 아니다. 열왕기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열왕기는 ‘설교된 역사’이다. 열왕기에는 케리그마적 의도, 설교적 의도가 있다. 열왕기는 첫 독자들의 신앙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평가하도록 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열왕기는 역사 기술의 형태를 띤 것뿐이다.

열왕기는 열왕들의 통치를 정치, 경제, 문화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만일 열왕기 기자가 정치적 역사가라면 솔로몬의 통치를 서술할 때 성전 건축과 봉헌보다는 그의 행정 치적과 국제 정치적 치적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을 것이다. 또한 아합보다는 오므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열왕기는 정치적 역사이다. 그러나 열왕기 기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정치’인 것이다.(373-374)

24. ‘두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나, 이를 가리켜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들”이라고 복수 동사를 사용한 것을 보면 여로보암이 다신론을 받아들였음을 보인다.(408) - 하지만 여로보암의 죄는 1계명보다는 2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러니 2계명을 어긴 것을 ‘우상 숭배’나 ‘다신론’으로 보는 것은 좀 그렇다. 그는 다만 하나님을 ‘형상화’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배제하고 다른 신을 내세운 것이 아니다. 그가 세운 금송아지를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신들’로 묘사한 것은 그것이 다른 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25. 이방 지도자인 후람 왕과 스바 여왕의 인정은 여호와의 숨겨진 섭리의 손길을 드러낼 뿐 아니라,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는 열방의 왕도 되심을 부각시킨다. 그러기에 성전은 단지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 처소가 아니라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것이다.(499)

26. 사마리아인들은 군인들에게 강포함을 당한 유다 포로들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먹이고, 입히고, 기름을 바르고,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여리고성으로 데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대하 28:12-15). … 이 스토리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예수께서는 이를 이용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만드셨다.(522) -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아하스 시대의 일을 염두에 두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만드신 것일까?

27. 이제 유다의 몰락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요시야는 낙심하고 주저앉지 않았다. 요시야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언약 갱신을 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복종하게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게 하였다. 유다의 파멸이 변경될 수 없는 사실로 결정되었는데, 이 마당에 무슨 언약 갱신과 유월절 지키기가 필요한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일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유일한 일임을 보인 것이다.(530) - 저자는 앞에서도 이와 유사한 넬슨의 말을 인용했었다. “보상받을 희망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신앙을 지켜라!”(430)

하지만 이것과 관련하여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경건한 왕들이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것(대하 14:9-11; 20:1-13; 32:1)을 볼 때에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 성공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축복은 본질적으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541-542)

 

28. 느 13장은 흔히 학자들에 의해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불만족스런 결론으로 간주된다. 학자들은 느 13장에 나오는 공동체 멤버들의 범죄 행위는 느 10장 이전에 있었던 공동체의 악의 모습이라고 본다. … 이들은 지나치게 역사적으로 혹은 문예적으로만 본문을 읽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621) - 내가 역사 중심적 구약학과 문예 중심적 해석학을 염려스러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과 흡사한 반응인 것 같다. 지나치게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문예적으로만 보는 것에 대한 반대… 전혀 새로운 대안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좋은’ 절충이 필요한 걸까?

29. 느헤미야는 단번의 회개와 개혁으로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 변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 오늘 한국 교회의 부흥사들은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같이 이야기하면서 교인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교인들은 여기서 위안을 받는다.(628) - 평안이 없는데 평안하다고 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그림자가 언뜻 비치는 듯…

 

30. 역사의 페이지는 오늘도 / 하나님의 말씀과 죽은 정통 교리 사이에서 / 은밀히 벌어지고 있는 / 사생결단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다네 / 진리는 언제나 교수대에서 처형당하고 / 불의가 보좌에 앉아 영원히 다스리는 것 같지만 / 실은 그 교수대가 장차 미래를 주관하게 될 것이니 / 이는 하나님께서 / 미지의 그 희미한 그림자 속에 서 계시며 / 자기 백성들을 지켜보시기 때문이라네(634) - 에스더서를 시작하면서 인용하고 있는 제임스 로웰의 ‘현재의 위기’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글 솜씨…

31. 에스더서에 나타나는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잘 맞는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매우 정상적이며, 이적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앞서 살핀 대로, 이 같은 이적의 부재는 반드시 하나님의 부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숨겨진 하나님은 현상적으로는 숨겨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사실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계시며,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675) - 이 글을 읽으면서 디트리히 본회퍼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의 현재의 삶도 그런 전제를 받아들인 상태로 진행되고 있고… 그런데 저자도 그것을 염두에 두었던지, 결론부를 시작하면서 본회퍼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내 생각과 감정은 점차 구약의 생각과 감정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소.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신약보다는 구약을 더 많이 읽게 되었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만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소. 우리가 생명과 땅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들 없이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보일 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부활과 새 땅을 믿을 수 있는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굴복할 때만이 은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오. 하나님의 진노와 보수가 우리의 적들의 머리에 냉엄한 현실로 나타날 때만이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우리의 마음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681) - 정말로 동감 되는, 그리고 감동되는 글이다! 구약이 없는 신약은 없으며, 구약이 신약을 거쳐 우리의 삶의 자리까지 오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강단에서의 구약 경시 태도는 무척이나 잘못된 것이다! 복음의 복음 됨을 막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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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사극’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잘 풀어 쓴 말투도 그런 느낌이 들게 했고… (왕과 신하 사이의 글을 통한 대화가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그러면서도 왕과 신하 사이의 간격도 크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 기본적으로 책문의 주제가 제시되고, 그에 대해 답변하는 책문이 소개된다. 그리고 끝에는 저자의 설명이 따라 나온다. 저자는 옛 글을 참 자연스럽게 잘 풀어 쓰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현대적(?)으로 풀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옛날 방식이기는 하지만 원문을 각주로 처리하기 보다는 본문에 제시한 후에 그것을 풀어놓은 내용을 함께 소개했다면 그 둘을 비교하면서 좀 더 객관적으로 본문을 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 나라를, 백성을 잘 살게 하겠다는 동일한 생각 속에서 나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읽으면서 왠지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에… 책을 읽으며 느끼는 답답함! 우리 민족은 ‘지도자 복’이 없다고들 한다.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 책문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되는 어려운 나라와 백성의 모습! 고민하지만, 감히 목숨을 걸고 간책하지만… 여전히 의인은 배척 받고 간신배가 판치는 세상… 서글프다! 답답하다! 오늘날의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 죽을 각오로! 직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데, 임금의 한 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시절에는 오죽했으랴! 그러나 이들은 그 힘든 일을 했다! 선비의 절개! 군자의 도!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을까?!

* 마지막 주제에서만 같은 책제(策題)에 대한 여러 답변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것들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여러 시각들과 답변들을 비교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련만! 아쉬웠지만, 저자는 “이처럼 같은 주제의 대책이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392p)고 말한다. 아쉬움! 정민 교수의 책에서 보았던 옛 사람들의 깐깐하고 꼼꼼한 ‘글 모으기’ 습관이 어째 여기에서는 발휘되지 않았을고!

* 427페이지에 [춘추(春秋)]의 기록 중 ‘미언대의(微言大義)’란 말이 소개된다. ‘아주 미묘한 표현 속에 사실은 깊은 뜻이 들어 있다는 말’인데, 사실상 우리로서는 한문으로 된 글을 읽기에도 벅차고 그 뜻을 풀어 놓은 것을 볼지라도 그 ‘적은 말’ 속에 들어가 있는 ‘큰 뜻’을 파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책문을 작성한 이들은 그 뜻을 밝히 드러내 주고 있으니 과연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답다! 예를 들어, 35-39에는 연거푸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이것은 ~한 것입니다.”라는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읽은 글은 미언이지만, 그것이 품은 대의를 풀어주고 있는 대목이다. 아, 우리에게도 이런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가!!!

* 부록과 책 사진들은 좋았다. 옛 사람들과 옛 책들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 각주가 미주 형태로 책 끝부분에 있어서 일일이 찾아보는 것이 번거로웠다. 언제부터인가 ‘독자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각주’가 ‘미주’ 현태로 전환되었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는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이다. 각주 보는 것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각주를 붙였더라도 읽지 않고 그냥 넘어갈 것이니 굳이 해당 페이지에 넣는다고 해도 그다지 ‘편의’를 해치는 일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보고자 하는 습성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번거롭기도 하고 때론 짜증까지 나기도 한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지금 논술을 공부하는 목적은 세상과 삶을 이해하는 통찰력과 분석의 능력을 길러서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일부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하는 방법의 하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 정말로 논술을 공부하자면 표현하는 방법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 곧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공부해야 한다!(18) - 당연하다! 문제는 그 당연한 것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2. 묻기를 좋아하고 일상적인 말을 잘 돌아보았던 순 임금처럼 살피시고,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했던 우 임금처럼 잘못을 간하는 사람을 존중하셔야 합니다.(46) - 공자 자신이 이 시기를 황금시기로 여기고 있기에, 유학을 한다하는 이들이 순이나 우 임금을 최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예를 들고 있는 것처럼 했다면, 그들은 정말 좋은 지도자였으리라. 여전히 문제는 그것의 실천이다.

3. 세상에는 생기기 쉬운 폐단과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습니다. 생기기 쉬운 폐단은 사물의 폐단이고,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은 정신의 폐단입니다. 구제하기 어려운 것이 먼저 나타나고, 생기기 쉬운 것은 뒤에 나타납니다. 정신의 폐단은 원인이고, 사물의 폐단은 결과입니다.(67) - 문제를 그 근원부터 미루어 살피는 것은 탐구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방식과 태도이다! 그리고 그것을 적절한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도!

4. 그러므로 성인은 술을 쓰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또 술을 금지할 수 없음도 알기에, 술그릇에조차 조심하라는 뜻을 새겨 놓았습니다. ‘상(觴)’이라는 잔에 술을 채우는 것은 술로 상할까 봐(傷) 경계한 것이고, ‘치(梔)’라는 잔으로 술을 뜨는 것은 술로 위태로워질까 봐(卮) 경계한 것입니다. 이는 모두 그 술잔을 입에 댈 때, 사람들이 환난을 생각하고 예방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성인은 정신의 폐해를 먼저 금지하고, 물질의 폐해를 나중에 금지했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폐해는 생기기도 쉽지만, 구제하기도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71, 431) - 술잔에 써 놓은 경고성 글자가 과연 효과가 있을까? 운치는 있어 보이지만… 현대에 담뱃갑에 해롭다는 문구를 적어 놓은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 그걸 적어 놓았다고 담배 피는 사람들이 담배를 끊을까? 아니면 줄일까? 이 시대에는 술잔에 글자를 새겨 넣는 것이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시대에는? 아니, 어느 시대에는 그것은 효과가 없었을 것 같다! 문자가 사람의 마음의 폐해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니까! 무엇으로 마음의 폐해를 금할 수 있을까?

5. 공의휴가 고기를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74)는 역주(431)에 더 자세히 나오는데,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들은(맛있는 채소를 뽑아버렸다거나, 베를 잘 짜는 여자를 쫓아내고 베틀을 불살랐다는 이야기) 상당히 과격해서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좋은 쪽으로 풀어서 이해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과격해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들을 통해 자신을 다잡으려 했던 것일까?

6.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도자가 마음으로 인도하지 않고 법으로만 금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위에 있는 사람이 올바른 마음으로 그 폐단을 구제한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도 마음을 바르게 세워 습관을 변화시킬 것입니다.(74) -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단 ‘마음’의 문제라는 점을 바르게 지적하기는 했지만… 과연 지도자가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행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그의 진심에 모두에게 통하게 될까? 역주(432)에서는 위나라 곡조와 순 임금 시대의 소소에 대한 비교를 자세히 소개한 후에, 그것은 “본질이 악하거나 저열한 것은 아무리 임시변통을 하거나 미봉책으로 고친다 하더라도, 근본이 바뀌지 않는 한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저자(이 책문의 저자는 ‘김구’다)는 ‘지도자의 진심’이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비록 ‘진심’이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임시변통과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사람의 근본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의 변화…

7. 군자는 쓰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상 배척과 모욕을 당하며, 소인은 제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상 세상을 어지럽히고 잘못을 저지릅니다. 원하는 건 늘 얻을 수가 없는데, 싫어하는 건 늘 일어나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기는 까닭을 잘 따져보면, 학문을 강론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94~) - 가슴 아픈 현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학문을 강론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에만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는 마치 계몽주의자들의 주장과 흡사하다. 인간은 백지 상태와 같고 어떻게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그래서 교육을 통해서 사람과 세상이 점점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론! 하지만 학문 강론과 진리 추구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여기 나오는 ‘진리 추구’라는 말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우선적으로 학문적인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난 학문적인 진리보다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과 같은 “그것을 위해서 내가 살고 죽을 수도 있는 그러한 진리”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8.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유학을 익힌 지식인들이다. 유학은 [장자]에서도 평가하듯이, 본질적으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이다. 내성외왕이란 안으로 인격을 수양하여 성인이 되고, 밖으로는 왕(지도자)이 되어 남을 다스린다는 것이니,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같은 말이다.

유가의 지식인들은 역사와 철학 같은 학문을 익히고 인격수양에 힘써서 경륜을 쌓고 준비를 하고 있다가, 기회를 얻으면 나아가서 자기가 쌓은 경륜을 실천하여 사회에 봉사한다.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현실이 혼탁하면, 물러나서 학문을 통해 뒷세대를 양성한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더라도 끊임없이 정국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유가적 관점에서 정치란 바로 도를 실천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사서오경은 인륜의 도리를 담은 책이고, 역사서는 도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한 성공과 실패를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유가의 지식인들은 사서오경을 읽어서 보편적 인륜을 몸에 익히고, 역사를 공부하여 도리를 실천하는 지침으로 삼았다.(107 - 이 부분을 보면서 구약성경을 떠올렸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사서오경은 모세오경과 같이 원론을 다루는 책이고, 역사서는 구약의 역사서처럼 그 원론에 기초한 성공과 실패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유가의 지식인들처럼(이 부분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배경 속에서 사람과 사회를 질책하거나 사람을 키우거나 했다. 기회를 얻으면 쌓은 경륜을 실천하여 봉사하고, 기회를 얻지 못하면 물러나서 뒷세대를 양성한다는 부분은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다. 그러한 ‘선비의 삶’을 흠모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이 부분은 뒤의 다른 곳에서도 다시 언급되어지고 있다.

정치와 교육은 유가의 지식인들에게 내려진 지상과제이다. 그래서 유가의 지식인은 기회가 주어지면 나아가서 정치를 행하고, 시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물러나 교육을 했다. 정치는 일시적인 교화이고, 교육은 오랜 세월에 적용되는 정치이다. 정치란 현재에 자기이상을 실현하는 행위이고, 교육이란 미래에 자기이상을 실현하는 행위이다.(295)

9. 공자께서는 본래 가지고 있는 도로써 사람을 이끌었기 때문에 효과를 쉽게 얻을 수 있었고,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써 감화시켰기 때문에 효험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135) - 인간이 ‘본성’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유교는 아마도 ‘성선설’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그러니 ‘본래’의 것을 가지고 움직이면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겠지?

세상의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근본과 말단이 있습니다. 근본을 바로잡는 일이 우회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효력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말단에 매달리는 일이 중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성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137) - 다시금 ‘본성’과 ‘근본’에 대한 강조. 물론, 지당하신 말씀이다!!

도란 뿌리는 하늘에 두되 일상생활에서 사람을 통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의 방도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릴 때 정치의 도를 터득하면, 기강과 법도는 억지로 세우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듣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세워지는 것입니다.(138) - 정말로 저절로 세워질까? 이런 내용들을 읽다보니 저절로 드는 생각! 그러고 보면 사람들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악해지는 게 아닐까? 그 ‘저절로’가 점점 힘들어지는 듯 보이니…

10. 이 말을 들은 김굉필이 얼른 일어나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스승이 아니라, 네가 바로 내 스승이로구나.” 젊은이의 당돌한 말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용기 있게 잘못을 고치는 김굉필의 태도도 본받을 만하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이다. 스승을 뛰어넘지 못하는 제자는 스승을 욕보이는 제자라고 했던가?(145) - 김굉필이 부모님께 드릴 꿩을 지키지 못한 하인을 크게 나무라는 것을 본, 17살의 조광조가 군자는 말씀을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하자 김굉필이 보인 반응이다. 물론 김굉필의 반응은 놀랍고 본받을 만하다! 게다가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에 대한 짤막한 글도 마음 속 깊이 와 박힌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기준으로 보면 요즘 어른들은 다 소인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조광조를 닮아서(?) 애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바른 말’인 듯 거리낌 없이 내뱉는데,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어른은 다 소인배가 아닌가! --; 근본적인 예(禮)가 다시 세워져야 할 필요성…

11. 공자는 [계사전]에서 이 효의 뜻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위태로울까 걱정하는 사람은 자리를 편안히 지킬 수 있다. 망할까 걱정하는 사람은 나라를 지키는 원리를 보존할 수 있다. 어지러울까 걱정하는 사람은 정치의 원리를 지닐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편안하더라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존속하더라도 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며, 잘 다스려지더라도 어지러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몸은 편안해지고, 국가는 보존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162) - 이 대목은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인용되는 것 같다(예를 들어 48페이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인용되고 있다). 한 마디로 유비무환(有備無患). 편안할 때 잘하라는 말이다. ‘아름다운 말’이라는 표현은 다른 면에서 마음에 와 닿는다.

12. 몸을 사려 울지 않는 의장대의 말처럼(184) - 역주(445)에 더 자세한 소개가 나온다. “자기 몸에 화가 닥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의장대의 말은 소리를 내면 곧 교체되는 데서 생긴 말이다. … ‘그대들은 의장대에 서 있는 말을 보지 못했소? 하루 종일 소리도 내지 않고 질 좋은 꼴과 곡물로 만든 먹이를 먹되, 한 번이라도 울면 내쫓기지요.’” 날카로운 지적이다! 성경에도 이와 흡사한 표현이 나온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사 56:10). 짖어야 하는데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 쫓겨날까봐 아무 소리 못하는 의장대의 말!

13.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나라로부터 온갖 혜택을 누린 관리들은 언제나 자기 목숨과 재산과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나라와 백성이 그들에게 그런 온갖 특권을 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특권을 잘 이용하여 나라를 관리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돌보라고 준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관료들은 특권을 누릴 줄만 알고, 특권에 딸린 책임을 질 줄 몰랐다. 정작 나라가 위급하고 어려울 때 목숨을 바쳐가며 나라를 지킨 것은 언제나 민중이었다.(192) - 입맛을 쓰게 만드는… 정녕 변할 수 없는 ‘원리’인 것일까?

14. 사람을 가르칠 때는 먼저 물 뿌리고, 청소하며, 대답하고, 대응하는(灑掃應對) 예절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誠正修齊) 일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이때 교육한 내용은 일상에서 지켜야 할 생활윤리와, 효도하고 공경하며 충직하고 믿음직해야 한다는 도리였습니다. …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교육이 글을 외고 읊으며, 글과 문장을 다듬어, 과거에 응시하고 녹봉을 구하는 방법이 되고 말았습니다.(280) - 이것이 어찌 이 시대만의 폐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까지도 똑같지 않은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사람다워지는 법이 아니라 시험 잘 보는 법, 성공하는 법만을 가르치지 않는가! 공부만 잘하면 인간성이 어떠하든지 관계 안 하며 좋은 대학에 좋은 직장 좋은 대우만이 최고 관심사가 되는… 한편 저자는 앞에 나온 내용들을 318페이지의 설명에서 이것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유교의 전통적 교육체계는 소학과 대학이다. 소학에서는 물 뿌리고 청소하기,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 나아가고 물러나는 몸가짐과 같은 절도와 예절, 음악, 활쏘기, 수레몰기, 글씨와 글자 익히기, 숫자 셈하기와 같은 기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진리를 탐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을 가르친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에게는 바른 몸가짐과 기본적인 생활기술을 익히게 하고, 자라서 성인이 되면 이론과 지식을 가르친다. 그런데 요즘은 연하고 약한 어린아이의 머리에 온갖 지식을 잔뜩 우겨넣는다. 방법이 뒤바뀐 것이다.(318)

15.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근래에 와서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익만 추구하고, 선비들이 학식을 개인적인 목적달성에만 쓰려고 합니다. …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과 봉록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글을 읽고는 글귀를 멋대로 따와서 묻고 답하는 데만 쓰니, 이는 마치 잘 치장한 상자만 사고 정작 사야 할 구슬을 되돌려주는 격입니다. 글을 지어도 괴상하고 과장된 문장으로만 꾸며 과거에 빨리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니, 도리에 위배되고 진리에 어긋날 뿐입니다. 그러니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따지는 것은 일삼지 않고, 예의와 염치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283) - 과거의 폐해를 지적하는 이 내용은 오늘날 입시 정책에 대한 비판인 듯 들린다.

조광조가 지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서 정식 문과 시험을 거치지 않고 유능하고 뛰어난 인재를 천거에 의해 특별 채용하는 방법인 현량과를 실시했고, 율곡 이이가 기회 있을 때마다 과거 이외의 방법으로 인재를 등용하려고 노력한 것도, 기존 훈구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의 하나로 볼 수 있다.(291) - 세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 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기 위한 노력이다. 이런 부분은 이미 12페이지에서 소개됐었다. “다산 정약용이 과거의 폐단과 모순을 심각하게 느끼고, 추천을 통한 인재선발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했을 때,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오히려 과거야말로 철인이 다스리는 이상국가의 인재선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16. “하늘이 세상에 인재를 내지 않았다고들 하지만, 한 시대가 부흥하는 것은 반드시 그 시대에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세상에 인재를 냈다고들 하지만, 한 시대가 쇠퇴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을 구제할 만큼 유능한 보좌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인재가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하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구하면 항상 남아돌아갑니다. 또한 세상에 인재가 없었던 적이 없다고 하지만, 인재를 구하는 올바른 방법을 잃어버리면 늘 부족합니다.(302) - 이 부분을 보면서 head-hunter라는 최근에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직업이 떠올랐다. 인재는 늘 있지만 그들을 발굴해서 쓰는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평범하게 살다 죽을 것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해줄 수 있는 배경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김진홍 목사가 자주 말하는 사무엘이 그런 사람이고, 사무엘이 다윗을 세운 것 같은 일을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이 논란의 여지를 가진 듯 보이기는 하지만, 교회는 교회다운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쳐야(사회로부터 분리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하지 말고)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17. “온 세상에 인재는 한없이 많다. 그러니 임금은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인재를 존중해야 한다.”(310) - ‘다양한 기준’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기준이 고정되어 버리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인재’로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라면 온갖 일에 필요한 다양한 인재를 발굴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건 꼭 임금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리라.

18. [설문해자]에 따르면 ‘교(敎)’는 위에서 베푸는 것을 아리에서 본받는 것이고, ‘육(育)’은 자식을 길러서 착하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위에서 베푸는 것이란 어른이 모범되는 것을 어린이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아래에서 본받는 것이란 어린이가 어른이 전해준 모범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319) - 서양식 교육법만이 최고는 아니다. 새것을 받아들이느라 옛것을 몽창 내던져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를 들어, 서양식 교육법이 들어오면서 고유의 ‘암기식’ 교육이 문제가 많다고 내던져버렸지만, 기본적인 사항이 암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건전한 학문 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다시 인정되고 있지 않은가!

19. 좋은 인재가 주위에 많기를 바란다면 인재가 저절로 찾아들도록 먼저 자신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주가 덕을 숭상하면서 바른 몸가짐과 생각을 갖고 올바르게 판단하면, 군자가 모여들어 나라가 발전한다. 하지만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아첨과 참소만 받아들이고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인이 모여들어 나라가 망한다.

그래서 궁궐을 산책하는 군왕이 주위에 군자가 모여드는가, 소인이 모여드는가 하는 것을 자기 탓으로 반성하라고,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정자를 세워두었다고 한다.(323) -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있는 누각에 대한 설명이다. ‘창랑의 물 맑으니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니 발을 씻는다네’라는 말처럼 물이 어떠하냐에 따라 누가 거기에 모여드느냐가 결정된다는 것. 이것은 인재의 문제만이 아니라 친구나 연인, 부부에게도 해당된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좋은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 [서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혜 밝은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분별없는 얼간이가 되고, 얼간이라도 생각을 하면 성인처럼 될 수 있다.” … 생각이 신중한가 아닌가에 성인과 얼간이의 싹이 보이는 것입니다.(334-335) - 생각! 하지만 이 세대는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세대가 아닌가!

21. 이윤은 태갑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느님은 친하게 대하는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오직 경건한 사람을 친하게 대해줄 뿐입니다.”(336) - 마치 성경을 읽는 기분! 유가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나 ‘경건’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이일 터… 번역이 너무 현대적인 것 아닌가?

22. 이른바 “황제‧요‧순이 일어나 인간사회와 자연의 변화를 잘 파악해 백성들이 게으르지 않게 했고, 신령스럽게 교화시켜 백성들이 윤리를 잘 따르게 했다.”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임금들은 마음을 간직하는 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을 줄 모르고, 항상 법에만 의지해 정치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일단 법에 폐단이 생기고 나면 다시는 구제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혼란해지고 망했던 것입니다.(356) - 노장 사상의 흐름을 반영하는 주장인 듯…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노자에는 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인간사회와 자연의 변화에 순응한 다스림과 법에만 의지하는 다스림은 이처럼 다르다. 하지만 사람이 점점 악해져가니 법을 세우지 않을 수도 없다. ‘법의 심장에 흐르는 피’를 의식하는 것이 필요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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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상
동아일보사 출판국 지음 / 제3공간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 기본적으로 여러 ‘분야’로 나뉘어져 있고(이 상권은 사상/역사‧지리/사회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분야에서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된 책들에 대한 소개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각의 아티클 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졌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다양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글쓴이에 따라서 편차가 심하다. 잘된 설명이 있는가 하면 불친절한 설명,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친 내용까지도 발견된다.

* 오타가 종종 눈에 띈다. 꼼꼼하게 교정하지 않고 성급하게 책을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어쨌든 책을 낼 때에는 최선을 다해서 완성도 높은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흔히 말한다. 고전은 따분하고, 읽기 어렵다고. 오늘날처럼 변화가 심하고 가벼움이 선호되는 상황에서는 이런 말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결코 놀이나 장난이 아니듯, 우리의 정신적 무게 또한 그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모색,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다.(6) - 머리말에 나오는 글이다. 정말 우리의 삶에 대한 자세는 보다 진지해져야 하고 보다 투철해져야 한다. 현대인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염려한다.

2. 신들에 대한 일반적 찬가 이외에 철학적 사색이 깃든 찬가도 있다. 훌륭한 찬가로 신들의 관심을 얻고, 그 결과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생각이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15) - ‘베다’에 관한 글의 한 대목이다. 신들을 찬양하고, 그들의 찬양할 만한 점들을 사색한 내용으로 신을 기쁘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진술이요 지적이다. 어떤 것이 신(神)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지극히 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의 위치에서부터 시작한(일반적인 종교에 있어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만!) 방향과 방법의 모색. 그러나 결국 신을 기쁘게 하는 모든 행위, 그리고 모든 종교의 의도와 목적은 결국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소원 성취!) 것이라는 결론(?). 이것이 일반적인 종교가 가지는 한계이리라.

3. 제식의 종류는 매우 많고, 그 조직‧규칙도 극히 복잡해서 옛날에는 제사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빌며, 그 은총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브라흐마나] 시대에는 제식은 신들을 강제하는 독자적 힘을 가진 원리가 되고, 사제가 교만의 극에 달해 스스로 일종의 신이라고 자칭하기에 이르렀다. 신들은 인간의 이상적인 형상상에 불과했고, 그들도 일찍이 제사를 행하여 그로 인해 승천하여 지금과 같은 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제식의 주목적은 제주인 왕후 귀인이 사후 승천하여 신들처럼 불사(不死)가 되는 데에 있다. 물론 현세적인 가지가지의 원망과 성취도 그 안에 포함되지만, 한 걸음 나아가 이러한 욕망이 성취된 내세에 있어서 다시는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 염원이다.(16) - 일반적인 종교의 흐름과 그것의 결론적인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불사에 대한 추구, 그리고 신성(神性)에 대한 동경, 물론 현세적인 소원의 성취는 기본이고… 나로서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읽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계시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가 이러한 일반적인 종교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래서 J. B. 필립스는 [네 하나님은 너무 작다, Your God is too small]라는 책을 썼고, 또 그 책을 전제로 하여 마크 부캐넌이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안전하다, Your God is too safe]라는 책(한국에서는 [열렬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을 쓴 것이다. 너무 작은 하나님, 너무 안전한 하나님… 내가 내 주머니 속에 넣고 마음대로 조정하고 나를 축복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믿고 싶은가?!

4. 오늘날의 사상적 경향은 ‘본질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을 추구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나, 실증되지 않은 것은 무의미하다는 논리적 실증주의나, 효용성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실용주의나, 관념의 뿌리는 물질적인 것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모두 본질보다는 실제적인 것 내지 감각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다.(35) - 플라톤의 [대화론]을 설명하는 중에 나온 글이다. ‘본질’과 ‘현실’이라…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질’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본질’에 치중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본질을 무시하는 듯이 보이는 ‘현실’ 치중자들을 염려스러운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가 가지는 그 강력한 의미에 동감하지만 그것의 치우침을 염려하고, 실용주의의 ‘천박함’을 멸시하게 된다. 물론 그러는 나 역시 ‘밥’ 먹고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본질이 아닌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치중하는 현대와 현대인들의 모습은 매우 위태롭게 보인다. 이렇게 주장하면 ‘현실 감각’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면에서 나는 ‘예언자적 현실주의’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본질’을 추구하되 인간 사회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지적하면서 ‘본질’로 이끌어가고자 했던 구약의 선지자들의 태도!

5. 문자로 된 글을 읽고, 그 문자를 통해 하고 싶은 질문을 던질 수가 없다.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을 향해 물을 수 없는 것처럼 글로 쓰여진 언어를 향해 물어 보아도 그것은 언제나 같은 신호만을 볼 뿐이다. 그 같은 기록된 언어에 비해 대화를 통한 언어는 활력성을 갖는다. 직접적인 대화는 “생명을 가진, 영혼을 가진 언어인데 비해 기록된 언어는 그것들의 그림자이다”라고 플라톤은 표현했다.(38) - 나는 ‘글/책’을 통해 배우는 부류의 사람들이고, 내가 아는 누구는 ‘대화/사람’을 통해 배우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꼭 어느 것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화가 좋다고 해도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누는 대화는 결국 ‘무지의 잔치’에 불과하다. 책이 좋다고는 하나 표현되는 ‘신호’ 이외의 것을 읽을 줄 모르는 자에게는 ‘오해로 오도’하는 잘못된 선생이 될 수도 있다. 내 경우는 책을 통해 배우고, 대화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6. 장주(莊周)는 탁월한 천재성, 초인적인 상상력, 고매한 인격, 그리고 낭만적인 사람으로, 그가 붓을 잡으면 그의 앞뒤의 이치가 바뀐 듯이 나오고 예측을 허락하지 않는 기묘한 곡절이 생겨 마침내 독특한 문체를 이룩해 놓았다. 이러한 그의 문체는 그의 동시대는 물론 지금에 이르는 2000여 년 동안에도 그것을 흉내 낼 만한 문장가 내지는 시인이 나오지 못했을 정도로 특이하다.

그는 글을 쓰는 데 있어 아무런 법칙에도 구애됨 없이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여 중첩하는 어구가 괴이하고 기묘한 글자와 익살을 섞고 교묘한 우언을 짜 넣어 그의 글은 유례없이 힘차다.

묵자는 지나치게 논리를 따져 글이 답답하고, 맹자는 지칠 줄 모르고 늘어놓는 통에 글에 깊은 맛이 적다. 장자의 글은 이러한 폐단이 거의 없다. 물론 우리가 어쩌다 장자 원문을 펼쳐 보면 굉장히 난해하고 읽기 어려움을 느끼게 되지만 주석을 참고하여 글자의 뜻과 글의 대의를 이해한 후에 반복해서 보면 은연중에 경이와 희열을 느끼게 된다.(46-47) - 장자가 이렇게 탁월한 ‘문장가’이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좋은 점을 배웠다. 묵자와 맹자 그리고 장자에 대한 비교를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는데… 그것은 현재 내가 모이는 독서 모임의 구성원들의 모습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

7. 군대에 정규군과 비정규군이 있듯이 신학자에도 정규 신학자와 비정규 신학자가 있다고 한다. 이는 스위스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칼뱅과 루터를 비교하며 한 말로서, 칼뱅의 사상은 조직적이고 체계가 정연하며, 하나의 완결된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루터는 비조직적이며 완결되어 있지 않고 결론이 언제나 개방적이다.(84) - 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꼭 조직적이고 완결된 것만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나는 장로교 소속이지만 오히려 루터의 개방적인 태도에 더 마음이 끌리는데…

8. 데카르트는 기하학이 사용하는 연역적 방법을 내세운다. 그는 연역법의 대담한 해석자이다. 그는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추론식을 평한다. 그는 삼단 논법의 결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는 추리에 도움을 주지만, 아직 모르는 것을 연구하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연역적인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논리는 외면하고, 그의 독자적인 논리 방식을 기하학에서 찾아내어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최초의 단순한 진리로부터 출발하여, 우선 최초의 진리에 포함되었던 제2차 진리로, 다음에는 제3의 진리로, 더 나아가 제4의 진리로 나아가는 연쇄적인 추론을 통찰한 것이다.(99) - 음, 그럴 듯!!

9. 헤겔은 “진리는 객관성이다. 객관성이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데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주체성이다. 주체성이 진리이다”고 주장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체적 진리를 강조한다. 주체적 진리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진리인 것, 그것을 위해서 내가 살고 죽을 수도 있는 그러한 진리”가 나의 주체적 진리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진리요 나의 진리이다. 내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힘을 주고, 구제 해탈의 빛을 주고, 내게 행동 원리를 제시하고, 내게 기쁨과 의의와 보람을 주는 진리, 그것이 나의 주체적 진리이다. 키에르케고르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객관적 진리에 대한 주관적 진리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역설한다.(128) - 대학원 다닐 때 키에르케고르에 한참 취해 있었다. 서점에는 없는 [순간]이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개인적으로 복사해 놓고 읽었을 정도로… 지금도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이 가져온 결과와 오도(誤導)된 내용들에 대해서는 염려스럽기도 하다. 지나친 주관성에 대한 주장으로 객관성을 거의 잃어버린 현대의 실존주의와 그에 따른 결과물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 부분이야말로 ‘균형’이 필요한 부분이다.

10. 그 첫 저작인 [시간과 자유]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요, 가장 독창적인 그의 인식론이다. … 베르그송은 그 시대의 가장 심각한 요구에 따라 새로운 철학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했다. 그의 문장은 명석하고도 예술적인 표현을 가졌으며, 인상 깊은 비유로 사람을 설득하는 힘을 가졌다. … 베르그송은 [시간과 자유]에서 서양 사상상 중요 문제 중 하나인 ‘자유’를 다루되 시간론에 의하여 해결하려 했다. … 위와 같은 철학적 원리를 갖고 그는 현대 철학의 중요한 논란인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아니 해결한다기보다 그 문제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 관념론자가 생각하듯이 자아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요, 고정된 것도 아니다. “자유는 유동적 진행이므로, 자아와 능동 그것은 살아 있는 참 실재와 마찬가지로 부단한 생성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해 가고 있다.” … 자아를 고정한 인식 기능, 즉 이성으로 보는 칸트의 관념론을 극복한 것이다.(137~) - 베르그송의 [시간과 자유]에 대한 설명은 이해하기 힘들다. 주제에는 관심이 가는데… 중간에 제시되는 설명이 너무 어렵다. 뭔가 설명하고 있기는 한데, 배경 지식이 없이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가 거의 불가능한, 쉽게 다가오지 않는 필자 혼자만의 설명이다. --; 그에 반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대한 설명(144~)은, 프로이트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까지도 찬찬히 잘 설명해주고 있다. 좋은, 친절한 소개라고 생각된다. 내가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과 선행 지식을 조금이나마 갖고 있어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까?

11. 캇시러에게 ‘상징’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징’과 비슷한 뜻으로 ‘신호(sign)’가 있다. 신호에 대하여 동물이나 인간은 즉각적인 반응을 한다. 사려하는 일 없이 행동으로 나아간다. 이와 반대로 상징은 우리를 깊은 생각으로 이끌어 가고, 반응을 더디게 한다. 인간은 그 정신생활의 여러 가지 의미를 상징에 담는다. 인간은 깊고 복장한 정신생활, 즉 생각하는 생활을 하므로 인간의 세계에는 무수한 상징이 있다. 인간은 갖가지 상징을 만들며 그 상징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래서 캇시러는 인간을 ‘상징의 동물’이라고 정의했다.(168) - 캇시러 역시 흥미를 끄는 인물이다. 그의 ‘상징’과 ‘신호’, 그리고 ‘반응’에 대한 내용은 무척 흥미롭다.

12. 캇시러에게 있어서는 언어도 역시 상징이다. 언어는 기성물이 아니라, 우리가 쉴 새 없이 현실 세계와 관계하고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요 그러한 활동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언어의 차이는 발음이나 낱말들의 차이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태도의 차이이다. 궁극에 있어, 언어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 실현의 길이요 방편이다.(170) - 언어의 차이는 세계를 보는 태도의 차이!!!

13. 마키아벨리의 일생, 그리고 그가 [군주론]을 공표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간단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참모습이 그에 관한 일반적 인상과는 판이하다는 것, 그리고 그의 [군주론]이 그의 직접적인 행동의 결과라기보다도 한낱 그의 지적 관찰의 결과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뜻하지 않은 정변으로 관직을 잃고 한가로운 전원생활로 쳐지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그가 지난날에 만났던 권력자들의 인품, 행태, 그리고 그들이 처한 정치 상황을 조용히 되새겨 보고, 그들이 왜 권력을 얻고, 왜 잃었는가를 한층 높은 입장에 서서 객관적으로 평가한 결과가 바로 그의 [군주론]이라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소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52) - 편견 그리고 사실…

14. 이러한 관찰, 분석, 종합 과정에서 그는 바로 자연 과학자가 자연 현상을 관찰하듯이 일체의 윤리적 도덕적 선입견의 개입을 배제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가 비도덕적인 냉혈한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냉혹한 정치 현실을 철저히 과학적 태도로 관찰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마키아벨리는 통치자들을 위하여 치국책의 교본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정치학이 한 과목으로 성립할 수 있는 초석을 처음으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공적은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254)

15. 모든 사회 이론은 그 소박하고 단편적인 형태로 본다면 이미 고대로부터 존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구론]도 예외가 아니다. 단 그것이 체계화되어 하나의 이론으로 성립한 것은 18세기 말 영국의 맬서스를 통해 비롯했다. 동시에 모든 사회 이론은 진공 상태에서 별안간 솟아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후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역사적 산물이며, 맬서스의 [인구론] 또한 예외는 아니다.(298) - 모든 사상가들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하지만 때론 자신이 시대를 넘어서는 사람들도 발견된다. 자신의 시대를 발판으로 삼되 그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사상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의 극복은 지엽적이고 자극적인 주제가 아닌 본질적인 부분을 다룬 이들에게서 발견된다는 점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16. 괴테의 유명한 금언인 “벗이여, 이론은 무미건조하고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란, 그것이 이론에 대한 생명이 우위와 위선, 그리고 현실 자체가 차지하는 정신적 반영에 대한 우위와 우선을 표현하는 한 진실이다.(310) - 이론과 생명, 위선과 현실… 때로 ‘본질’을 주장하는 것이 현실과 현실 속의 생명을 무시하는 이론과 위선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본질을 주장하다가 그런 잘못된 길에 빠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기까지 함께 버려서야 되겠는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 법! 잘못된 몇몇 때문에 그것 자체를 무시하거나 반대해서는 안 될 일이다.

17. 밀은 마지막 장에서 인간 생활에서 아무리 자유가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노예로 팔아 버리려는, 즉 자기를 포기해 버리려는 자유마저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런 경우에는 말하는 자유란 종래의 자유주의에서 생각하던 ‘강제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이다. 이상과 같이 생각해볼 때, 밀은 자유주의를 이상주의 위에 건설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318) - 무제한의 자유란 없다. 자유는 늘 어떠한 한계를 가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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