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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사극’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잘 풀어 쓴 말투도 그런 느낌이 들게 했고… (왕과 신하 사이의 글을 통한 대화가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그러면서도 왕과 신하 사이의 간격도 크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 기본적으로 책문의 주제가 제시되고, 그에 대해 답변하는 책문이 소개된다. 그리고 끝에는 저자의 설명이 따라 나온다. 저자는 옛 글을 참 자연스럽게 잘 풀어 쓰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현대적(?)으로 풀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옛날 방식이기는 하지만 원문을 각주로 처리하기 보다는 본문에 제시한 후에 그것을 풀어놓은 내용을 함께 소개했다면 그 둘을 비교하면서 좀 더 객관적으로 본문을 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 나라를, 백성을 잘 살게 하겠다는 동일한 생각 속에서 나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읽으면서 왠지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에… 책을 읽으며 느끼는 답답함! 우리 민족은 ‘지도자 복’이 없다고들 한다.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 책문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되는 어려운 나라와 백성의 모습! 고민하지만, 감히 목숨을 걸고 간책하지만… 여전히 의인은 배척 받고 간신배가 판치는 세상… 서글프다! 답답하다! 오늘날의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 죽을 각오로! 직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데, 임금의 한 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시절에는 오죽했으랴! 그러나 이들은 그 힘든 일을 했다! 선비의 절개! 군자의 도!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을까?!
* 마지막 주제에서만 같은 책제(策題)에 대한 여러 답변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것들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여러 시각들과 답변들을 비교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련만! 아쉬웠지만, 저자는 “이처럼 같은 주제의 대책이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392p)고 말한다. 아쉬움! 정민 교수의 책에서 보았던 옛 사람들의 깐깐하고 꼼꼼한 ‘글 모으기’ 습관이 어째 여기에서는 발휘되지 않았을고!
* 427페이지에 [춘추(春秋)]의 기록 중 ‘미언대의(微言大義)’란 말이 소개된다. ‘아주 미묘한 표현 속에 사실은 깊은 뜻이 들어 있다는 말’인데, 사실상 우리로서는 한문으로 된 글을 읽기에도 벅차고 그 뜻을 풀어 놓은 것을 볼지라도 그 ‘적은 말’ 속에 들어가 있는 ‘큰 뜻’을 파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책문을 작성한 이들은 그 뜻을 밝히 드러내 주고 있으니 과연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답다! 예를 들어, 35-39에는 연거푸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이것은 ~한 것입니다.”라는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읽은 글은 미언이지만, 그것이 품은 대의를 풀어주고 있는 대목이다. 아, 우리에게도 이런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가!!!
* 부록과 책 사진들은 좋았다. 옛 사람들과 옛 책들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 각주가 미주 형태로 책 끝부분에 있어서 일일이 찾아보는 것이 번거로웠다. 언제부터인가 ‘독자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각주’가 ‘미주’ 현태로 전환되었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는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이다. 각주 보는 것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각주를 붙였더라도 읽지 않고 그냥 넘어갈 것이니 굳이 해당 페이지에 넣는다고 해도 그다지 ‘편의’를 해치는 일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보고자 하는 습성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번거롭기도 하고 때론 짜증까지 나기도 한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지금 논술을 공부하는 목적은 세상과 삶을 이해하는 통찰력과 분석의 능력을 길러서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일부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하는 방법의 하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 정말로 논술을 공부하자면 표현하는 방법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 곧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공부해야 한다!(18) - 당연하다! 문제는 그 당연한 것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2. 묻기를 좋아하고 일상적인 말을 잘 돌아보았던 순 임금처럼 살피시고,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했던 우 임금처럼 잘못을 간하는 사람을 존중하셔야 합니다.(46) - 공자 자신이 이 시기를 황금시기로 여기고 있기에, 유학을 한다하는 이들이 순이나 우 임금을 최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예를 들고 있는 것처럼 했다면, 그들은 정말 좋은 지도자였으리라. 여전히 문제는 그것의 실천이다.
3. 세상에는 생기기 쉬운 폐단과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습니다. 생기기 쉬운 폐단은 사물의 폐단이고,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은 정신의 폐단입니다. 구제하기 어려운 것이 먼저 나타나고, 생기기 쉬운 것은 뒤에 나타납니다. 정신의 폐단은 원인이고, 사물의 폐단은 결과입니다.(67) - 문제를 그 근원부터 미루어 살피는 것은 탐구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방식과 태도이다! 그리고 그것을 적절한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도!
4. 그러므로 성인은 술을 쓰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또 술을 금지할 수 없음도 알기에, 술그릇에조차 조심하라는 뜻을 새겨 놓았습니다. ‘상(觴)’이라는 잔에 술을 채우는 것은 술로 상할까 봐(傷) 경계한 것이고, ‘치(梔)’라는 잔으로 술을 뜨는 것은 술로 위태로워질까 봐(卮) 경계한 것입니다. 이는 모두 그 술잔을 입에 댈 때, 사람들이 환난을 생각하고 예방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성인은 정신의 폐해를 먼저 금지하고, 물질의 폐해를 나중에 금지했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폐해는 생기기도 쉽지만, 구제하기도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71, 431) - 술잔에 써 놓은 경고성 글자가 과연 효과가 있을까? 운치는 있어 보이지만… 현대에 담뱃갑에 해롭다는 문구를 적어 놓은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 그걸 적어 놓았다고 담배 피는 사람들이 담배를 끊을까? 아니면 줄일까? 이 시대에는 술잔에 글자를 새겨 넣는 것이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시대에는? 아니, 어느 시대에는 그것은 효과가 없었을 것 같다! 문자가 사람의 마음의 폐해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니까! 무엇으로 마음의 폐해를 금할 수 있을까?
5. 공의휴가 고기를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74)는 역주(431)에 더 자세히 나오는데,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들은(맛있는 채소를 뽑아버렸다거나, 베를 잘 짜는 여자를 쫓아내고 베틀을 불살랐다는 이야기) 상당히 과격해서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좋은 쪽으로 풀어서 이해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과격해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들을 통해 자신을 다잡으려 했던 것일까?
6.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도자가 마음으로 인도하지 않고 법으로만 금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위에 있는 사람이 올바른 마음으로 그 폐단을 구제한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도 마음을 바르게 세워 습관을 변화시킬 것입니다.(74) -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단 ‘마음’의 문제라는 점을 바르게 지적하기는 했지만… 과연 지도자가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행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그의 진심에 모두에게 통하게 될까? 역주(432)에서는 위나라 곡조와 순 임금 시대의 소소에 대한 비교를 자세히 소개한 후에, 그것은 “본질이 악하거나 저열한 것은 아무리 임시변통을 하거나 미봉책으로 고친다 하더라도, 근본이 바뀌지 않는 한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저자(이 책문의 저자는 ‘김구’다)는 ‘지도자의 진심’이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비록 ‘진심’이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임시변통과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사람의 근본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의 변화…
7. 군자는 쓰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상 배척과 모욕을 당하며, 소인은 제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상 세상을 어지럽히고 잘못을 저지릅니다. 원하는 건 늘 얻을 수가 없는데, 싫어하는 건 늘 일어나니,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기는 까닭을 잘 따져보면, 학문을 강론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94~) - 가슴 아픈 현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학문을 강론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데’에만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는 마치 계몽주의자들의 주장과 흡사하다. 인간은 백지 상태와 같고 어떻게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그래서 교육을 통해서 사람과 세상이 점점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론! 하지만 학문 강론과 진리 추구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여기 나오는 ‘진리 추구’라는 말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우선적으로 학문적인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난 학문적인 진리보다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과 같은 “그것을 위해서 내가 살고 죽을 수도 있는 그러한 진리”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8.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유학을 익힌 지식인들이다. 유학은 [장자]에서도 평가하듯이, 본질적으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이다. 내성외왕이란 안으로 인격을 수양하여 성인이 되고, 밖으로는 왕(지도자)이 되어 남을 다스린다는 것이니,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같은 말이다.
유가의 지식인들은 역사와 철학 같은 학문을 익히고 인격수양에 힘써서 경륜을 쌓고 준비를 하고 있다가, 기회를 얻으면 나아가서 자기가 쌓은 경륜을 실천하여 사회에 봉사한다.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현실이 혼탁하면, 물러나서 학문을 통해 뒷세대를 양성한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더라도 끊임없이 정국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유가적 관점에서 정치란 바로 도를 실천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사서오경은 인륜의 도리를 담은 책이고, 역사서는 도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한 성공과 실패를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유가의 지식인들은 사서오경을 읽어서 보편적 인륜을 몸에 익히고, 역사를 공부하여 도리를 실천하는 지침으로 삼았다.(107 - 이 부분을 보면서 구약성경을 떠올렸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사서오경은 모세오경과 같이 원론을 다루는 책이고, 역사서는 구약의 역사서처럼 그 원론에 기초한 성공과 실패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유가의 지식인들처럼(이 부분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배경 속에서 사람과 사회를 질책하거나 사람을 키우거나 했다. 기회를 얻으면 쌓은 경륜을 실천하여 봉사하고, 기회를 얻지 못하면 물러나서 뒷세대를 양성한다는 부분은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다. 그러한 ‘선비의 삶’을 흠모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이 부분은 뒤의 다른 곳에서도 다시 언급되어지고 있다.
정치와 교육은 유가의 지식인들에게 내려진 지상과제이다. 그래서 유가의 지식인은 기회가 주어지면 나아가서 정치를 행하고, 시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물러나 교육을 했다. 정치는 일시적인 교화이고, 교육은 오랜 세월에 적용되는 정치이다. 정치란 현재에 자기이상을 실현하는 행위이고, 교육이란 미래에 자기이상을 실현하는 행위이다.(295)
9. 공자께서는 본래 가지고 있는 도로써 사람을 이끌었기 때문에 효과를 쉽게 얻을 수 있었고,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써 감화시켰기 때문에 효험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135) - 인간이 ‘본성’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유교는 아마도 ‘성선설’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그러니 ‘본래’의 것을 가지고 움직이면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겠지?
세상의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근본과 말단이 있습니다. 근본을 바로잡는 일이 우회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효력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말단에 매달리는 일이 중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성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137) - 다시금 ‘본성’과 ‘근본’에 대한 강조. 물론, 지당하신 말씀이다!!
도란 뿌리는 하늘에 두되 일상생활에서 사람을 통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의 방도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릴 때 정치의 도를 터득하면, 기강과 법도는 억지로 세우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듣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세워지는 것입니다.(138) - 정말로 저절로 세워질까? 이런 내용들을 읽다보니 저절로 드는 생각! 그러고 보면 사람들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악해지는 게 아닐까? 그 ‘저절로’가 점점 힘들어지는 듯 보이니…
10. 이 말을 들은 김굉필이 얼른 일어나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스승이 아니라, 네가 바로 내 스승이로구나.” 젊은이의 당돌한 말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용기 있게 잘못을 고치는 김굉필의 태도도 본받을 만하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이다. 스승을 뛰어넘지 못하는 제자는 스승을 욕보이는 제자라고 했던가?(145) - 김굉필이 부모님께 드릴 꿩을 지키지 못한 하인을 크게 나무라는 것을 본, 17살의 조광조가 군자는 말씀을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하자 김굉필이 보인 반응이다. 물론 김굉필의 반응은 놀랍고 본받을 만하다! 게다가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에 대한 짤막한 글도 마음 속 깊이 와 박힌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기준으로 보면 요즘 어른들은 다 소인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조광조를 닮아서(?) 애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바른 말’인 듯 거리낌 없이 내뱉는데,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어른은 다 소인배가 아닌가! --; 근본적인 예(禮)가 다시 세워져야 할 필요성…
11. 공자는 [계사전]에서 이 효의 뜻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위태로울까 걱정하는 사람은 자리를 편안히 지킬 수 있다. 망할까 걱정하는 사람은 나라를 지키는 원리를 보존할 수 있다. 어지러울까 걱정하는 사람은 정치의 원리를 지닐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편안하더라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존속하더라도 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며, 잘 다스려지더라도 어지러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몸은 편안해지고, 국가는 보존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162) - 이 대목은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인용되는 것 같다(예를 들어 48페이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인용되고 있다). 한 마디로 유비무환(有備無患). 편안할 때 잘하라는 말이다. ‘아름다운 말’이라는 표현은 다른 면에서 마음에 와 닿는다.
12. 몸을 사려 울지 않는 의장대의 말처럼(184) - 역주(445)에 더 자세한 소개가 나온다. “자기 몸에 화가 닥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의장대의 말은 소리를 내면 곧 교체되는 데서 생긴 말이다. … ‘그대들은 의장대에 서 있는 말을 보지 못했소? 하루 종일 소리도 내지 않고 질 좋은 꼴과 곡물로 만든 먹이를 먹되, 한 번이라도 울면 내쫓기지요.’” 날카로운 지적이다! 성경에도 이와 흡사한 표현이 나온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사 56:10). 짖어야 하는데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 쫓겨날까봐 아무 소리 못하는 의장대의 말!
13.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나라로부터 온갖 혜택을 누린 관리들은 언제나 자기 목숨과 재산과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나라와 백성이 그들에게 그런 온갖 특권을 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특권을 잘 이용하여 나라를 관리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돌보라고 준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관료들은 특권을 누릴 줄만 알고, 특권에 딸린 책임을 질 줄 몰랐다. 정작 나라가 위급하고 어려울 때 목숨을 바쳐가며 나라를 지킨 것은 언제나 민중이었다.(192) - 입맛을 쓰게 만드는… 정녕 변할 수 없는 ‘원리’인 것일까?
14. 사람을 가르칠 때는 먼저 물 뿌리고, 청소하며, 대답하고, 대응하는(灑掃應對) 예절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誠正修齊) 일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이때 교육한 내용은 일상에서 지켜야 할 생활윤리와, 효도하고 공경하며 충직하고 믿음직해야 한다는 도리였습니다. …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교육이 글을 외고 읊으며, 글과 문장을 다듬어, 과거에 응시하고 녹봉을 구하는 방법이 되고 말았습니다.(280) - 이것이 어찌 이 시대만의 폐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까지도 똑같지 않은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사람다워지는 법이 아니라 시험 잘 보는 법, 성공하는 법만을 가르치지 않는가! 공부만 잘하면 인간성이 어떠하든지 관계 안 하며 좋은 대학에 좋은 직장 좋은 대우만이 최고 관심사가 되는… 한편 저자는 앞에 나온 내용들을 318페이지의 설명에서 이것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유교의 전통적 교육체계는 소학과 대학이다. 소학에서는 물 뿌리고 청소하기,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 나아가고 물러나는 몸가짐과 같은 절도와 예절, 음악, 활쏘기, 수레몰기, 글씨와 글자 익히기, 숫자 셈하기와 같은 기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진리를 탐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을 가르친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에게는 바른 몸가짐과 기본적인 생활기술을 익히게 하고, 자라서 성인이 되면 이론과 지식을 가르친다. 그런데 요즘은 연하고 약한 어린아이의 머리에 온갖 지식을 잔뜩 우겨넣는다. 방법이 뒤바뀐 것이다.(318)
15.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근래에 와서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익만 추구하고, 선비들이 학식을 개인적인 목적달성에만 쓰려고 합니다. …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과 봉록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글을 읽고는 글귀를 멋대로 따와서 묻고 답하는 데만 쓰니, 이는 마치 잘 치장한 상자만 사고 정작 사야 할 구슬을 되돌려주는 격입니다. 글을 지어도 괴상하고 과장된 문장으로만 꾸며 과거에 빨리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니, 도리에 위배되고 진리에 어긋날 뿐입니다. 그러니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따지는 것은 일삼지 않고, 예의와 염치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283) - 과거의 폐해를 지적하는 이 내용은 오늘날 입시 정책에 대한 비판인 듯 들린다.
조광조가 지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서 정식 문과 시험을 거치지 않고 유능하고 뛰어난 인재를 천거에 의해 특별 채용하는 방법인 현량과를 실시했고, 율곡 이이가 기회 있을 때마다 과거 이외의 방법으로 인재를 등용하려고 노력한 것도, 기존 훈구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의 하나로 볼 수 있다.(291) - 세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 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기 위한 노력이다. 이런 부분은 이미 12페이지에서 소개됐었다. “다산 정약용이 과거의 폐단과 모순을 심각하게 느끼고, 추천을 통한 인재선발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했을 때,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오히려 과거야말로 철인이 다스리는 이상국가의 인재선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16. “하늘이 세상에 인재를 내지 않았다고들 하지만, 한 시대가 부흥하는 것은 반드시 그 시대에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세상에 인재를 냈다고들 하지만, 한 시대가 쇠퇴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을 구제할 만큼 유능한 보좌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인재가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하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구하면 항상 남아돌아갑니다. 또한 세상에 인재가 없었던 적이 없다고 하지만, 인재를 구하는 올바른 방법을 잃어버리면 늘 부족합니다.(302) - 이 부분을 보면서 head-hunter라는 최근에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직업이 떠올랐다. 인재는 늘 있지만 그들을 발굴해서 쓰는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평범하게 살다 죽을 것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해줄 수 있는 배경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김진홍 목사가 자주 말하는 사무엘이 그런 사람이고, 사무엘이 다윗을 세운 것 같은 일을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이 논란의 여지를 가진 듯 보이기는 하지만, 교회는 교회다운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쳐야(사회로부터 분리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하지 말고)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17. “온 세상에 인재는 한없이 많다. 그러니 임금은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인재를 존중해야 한다.”(310) - ‘다양한 기준’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기준이 고정되어 버리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인재’로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라면 온갖 일에 필요한 다양한 인재를 발굴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건 꼭 임금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리라.
18. [설문해자]에 따르면 ‘교(敎)’는 위에서 베푸는 것을 아리에서 본받는 것이고, ‘육(育)’은 자식을 길러서 착하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위에서 베푸는 것이란 어른이 모범되는 것을 어린이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아래에서 본받는 것이란 어린이가 어른이 전해준 모범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319) - 서양식 교육법만이 최고는 아니다. 새것을 받아들이느라 옛것을 몽창 내던져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를 들어, 서양식 교육법이 들어오면서 고유의 ‘암기식’ 교육이 문제가 많다고 내던져버렸지만, 기본적인 사항이 암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건전한 학문 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다시 인정되고 있지 않은가!
19. 좋은 인재가 주위에 많기를 바란다면 인재가 저절로 찾아들도록 먼저 자신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주가 덕을 숭상하면서 바른 몸가짐과 생각을 갖고 올바르게 판단하면, 군자가 모여들어 나라가 발전한다. 하지만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아첨과 참소만 받아들이고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인이 모여들어 나라가 망한다.
그래서 궁궐을 산책하는 군왕이 주위에 군자가 모여드는가, 소인이 모여드는가 하는 것을 자기 탓으로 반성하라고,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정자를 세워두었다고 한다.(323) -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있는 누각에 대한 설명이다. ‘창랑의 물 맑으니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니 발을 씻는다네’라는 말처럼 물이 어떠하냐에 따라 누가 거기에 모여드느냐가 결정된다는 것. 이것은 인재의 문제만이 아니라 친구나 연인, 부부에게도 해당된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좋은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 [서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혜 밝은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분별없는 얼간이가 되고, 얼간이라도 생각을 하면 성인처럼 될 수 있다.” … 생각이 신중한가 아닌가에 성인과 얼간이의 싹이 보이는 것입니다.(334-335) - 생각! 하지만 이 세대는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세대가 아닌가!
21. 이윤은 태갑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느님은 친하게 대하는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오직 경건한 사람을 친하게 대해줄 뿐입니다.”(336) - 마치 성경을 읽는 기분! 유가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나 ‘경건’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이일 터… 번역이 너무 현대적인 것 아닌가?
22. 이른바 “황제‧요‧순이 일어나 인간사회와 자연의 변화를 잘 파악해 백성들이 게으르지 않게 했고, 신령스럽게 교화시켜 백성들이 윤리를 잘 따르게 했다.”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임금들은 마음을 간직하는 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을 줄 모르고, 항상 법에만 의지해 정치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일단 법에 폐단이 생기고 나면 다시는 구제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혼란해지고 망했던 것입니다.(356) - 노장 사상의 흐름을 반영하는 주장인 듯…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노자에는 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인간사회와 자연의 변화에 순응한 다스림과 법에만 의지하는 다스림은 이처럼 다르다. 하지만 사람이 점점 악해져가니 법을 세우지 않을 수도 없다. ‘법의 심장에 흐르는 피’를 의식하는 것이 필요할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