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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왕의 전설
라우라 가예고 가르시아 지음, 권미선 옮김 / 평사리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1. 처음 [떠돌이 왕의 전설]이라는 제목을 접하면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아라고른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는 ‘스트라이더’로 불리고 있고 그가 결국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왕으로서 귀환한다는 모티프가 겹쳐져 보였다. 실제 내용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부분도 없지 않은 듯...
2.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시(詩)’가 중요한 모티프를 차지하며 나타난다. 마침, 요즘에 시에 대해 공부하고 있어서 그런지 더 관심이 생긴다. 시에 관련된 내용들을 책의 전반에 흩어져서 나온다. 예를 들어, 이들의 시인 ‘카시다’의 형식과 관련된 대한 내용(22p ‘나시브’와 ‘라힐’ 그리고 ‘마디흐’)도 관심을 끌었다. 특별히 시와 관련하여 ‘말의 위력’을 지적한 부분(34p)과 말만으로는 공허하며 거기에 ‘마음’이 더해져야 한다는 지적(37-38, 45p), 그리고 ‘혀’와 ‘마음’을 함께 다룬 부분(134p) 등은 흥미로웠다.
3. 이야기의 구성은 시에서 말하는 ‘봉투형’ 또는 ‘수미일관’ 형태를 취한다. 제일 앞에 나오는 내용과 제일 뒤에 나오는 내용을 ‘동일’하게 하는 형식이 그것이다. 왈리드가 술룩을 만나 죽게 되는 장면은 소설이 시작하면서 제시되고 있으며, 그것은 다시금 소설의 끝 부분에서 다시금 나타난다. 소설이지만 시적인 구조나 형태에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이야기는 모든 면에서 최고와 완벽을 누리던 왈리드 왕자가 유카쓰에서 열리는 시 경연대회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예비적으로 주최한 시 경연대회에서 연속으로 함마드 입븐 알 다드라는 양탄자 짜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패하고 만다. 복수심에 불타는 왈리드는 함마드를 궁정 서기로 임명하면서 복수하고자 한다.
그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함마드를 괴롭히지만, 오히려 함마드의 돌려 보내달라는 요청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며 조롱한다(70p). 여기서 저자는 왈리드가 인용하는 시를 가지고 사실상 왈리드 자신을 묘사하는 역설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거기에 왈리드의 부왕이 유언으로 남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앞으로 전개될 왈리드의 인생에 대한 암시처럼 보인다.
상황이 진전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광기와 같은 복수에 불타던 왈리드는 점차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고(90p), 온순하게 돌아가기만을 소원했던 함마드는 오히려 ‘드진의 광기’(87p)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세계의 역사를 담은 한 장의 양탄자는 완성되고 함마드는 죽고 말지만, 양탄자의 마법(92p)을 두려워 한 왈리드는 그것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버리고 만다.
이후의 이야기는 왈리드의 심복이던 하캄이 추방 당한 것에 대한 복수로 양탄자를 훔쳐간 사건과, 운명처럼 양탄자를 찾아 길을 떠나는 왈리드가 어떻게 결국 양탄자를 찾게 되는가에 대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이 이상의 내용 소개는 스포일이 될 것 같아서 이 정도로만...
5.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저자는 이슬람교도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운명론’을 철저하게 제시한다. 왈리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함마드의 아들들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운명처럼 양탄자를 찾으러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흔히 ‘인샬라’라고 말하는(그것의 원래 발음은 ‘인쉬 알라’로서 ‘알라의 뜻’이라는 의미이다) 알라의 뜻을 운명/숙명처럼 여기고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소설의 전개가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고, 꼭 필요한 순간에 그를 돕는 ‘빨간 터번’의 노인이 나타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부분에 이르면 소설 내용의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결말을 염두에 둔 ‘장치’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결론은 전혀 기대치 못했던 충격적인 내용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소설의 내용을 끌어가는 힘은 ‘운명/숙명’ 그리고 ‘계시’다. 그런데 그렇게 운명에 끌려 길을 가던 왈리드는 최종적으로 그러한 ‘운명’을 단지 ‘가능성’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한다! 이슬람 정신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왈리드의 선언은 폭탄적이다!
6. 책을 받고서는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즘 시간에 쫓기는 나로서는 도저히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이 책이 청소년 소설이라는 점도, 대부분의 소설을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했다. 결국 별 어려움 없이 끝까지 독파할 수 있었다.
청소년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가볍고 흥미 위주의 내용을 다룬 것이 아니어서 좋았다. 이런 내용들도 읽으면서 사고하는 힘을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야기의 흐름이 요즘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환타지적인 요소도 들어있고, 또 재미도 있어서 금상첨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잠깐이나마 소설을 읽는 즐거움, 생각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