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 구약역사서의 문예적-신학적 서론
김지찬 지음 / 생명의말씀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책은 ‘구약 역사서의 문예적-신학적 서론’이라는 부제처럼 구약의 역사서를 문예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는 ‘서론’적인 책이다. 역사서의 각 책들이 어떠한 구조로, 또 어떤 문예적인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본문의 구체적인 예들을 들어가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 읽으면서 생각한 것…

1. 구약과 신약의 연결! 더 나아가 현재와의 연결! 구약은 구약 만으로가 아니라 현재와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신약을 거쳐야만 한다! 이것이 구약의 한계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무리한 적용도 문제요, 구약에만 집중하고 신약이나 현재에 무관심 하는 것도 문제다.

2. 문예적 읽기는 상당히 관심을 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선택과 구원의 교리만을 강조한 채 언약의 사명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이 결국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음을 묘사하면서, 언약을 저버린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은 끝내 이방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강력한 웅변으로 제시한다.

… 하나님께서 왜 굳이 과거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지… 첫째, 성경의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며, 둘째,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과거 역사를 기억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18-19) - 문예적, 신학적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적인 부분을 전혀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학이 한동안 지나치게 역사를 주장하고 거기에 매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발적으로 역사를 멀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2. 역사 이야기는 한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역사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의도하셨다. 자신의 과거 역사를 잃어버리는 ‘기억 상실증’ 환자들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다고 한다. 기억 상실증 환자는 ‘의식’이나 ‘지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상실하는 병이다. 의식과 지능이 있음에도 기억을 상실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상실케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과거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보여준다.(21) - 상당히 공감 되는 예를 들고 있다. 기억의 중요성! 역사의 중요성!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기억 상실’로 묘사하는 것은 마이클 호튼과 유사하다.

3. 히브리 전통에서 역사서를 ‘전선지서’라고 부르는 것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역사서는 단지 과거의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한 ‘역사 보고’(historical report)가 아니라, 선지자적 관점의 역사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며,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지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고, 셋째, 그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선포이기에 그 성격상 ‘선지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선지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좋은 명칭이라 할 수 있다.(26) - 히브리 전통에 대한 ‘변명’? ‘옹호’? ^^;

4. 등장인물, 배경, 플롯 같은 용어들을 들으면 근본주의자들은 이같이 질문하기 마련이다. “만일 구약성경 본문이 성스러운 역사라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세속적이고 심미적인 문학적 접근 방법을 위해 개발된 카테고리로 어떻게 성경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가?” 흔히 성경은 역사이거나 문학 작품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다. 문예적 기교와 정확한 역사적 진술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 역사는 실재를 사실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해석이 들어간 ‘그림으로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결코 허구의 문학 작품이 아니다. 성경은 실제 일어난 역사에 기초함 정확무오한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구약 역사서는 단순한 실재 복사의 사진이 아니다. 문예성을 통해 감동적으로 해석이 가미되었기에 사진보다 더 완벽한 실재의 재현일 수도 있다. ‘그림으로서의 역사’이다. 문예성은 정확한 역사적 진술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정확한 역사를 오늘을 위한 교훈으로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되는 가치 표현 채널이라고 볼 수 있다.(38-39)

- 나는 근본주의자인가? 나 자신을 근본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나는 근본주의자인가보다. … 그런데 저자의 이 지적은 역사서를, 또는 성경을 ‘문예적, 신학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가장 근저(根底)에 깔려 있는 전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저자가 지적하는 ‘근본주의’적인 반감(反感)은 아마도 ‘문학’을 ‘허구’로 여기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성경의 기록은 논픽션으로, 문학(흔히 말하는 소설이나 시)은 픽션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특별히 ‘문예적’ 해석을 꺼리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성경이 허구의 문학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내용에 귀가 솔깃해 진다. 그것을 ‘허구’가 아닌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만 본다면 짐짓 문예적 해석을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는 태도를 버리기가 쉬워지지 않을까?

5. 구약 역사서는 실제적인 역사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연대기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경 기자는 자기의 메시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때로는 연대순에 어긋나게 사건을 배열하기 때문이다.(40) - 문예적인 성격을 가진 성경과 과거의 역사적인 성격을 가진 성경에 대한 개념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적인 역사 개념에 의하면 성경은 ‘역사 기록’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성경을 띈 기록’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어디선가… 아! 로버트 넬슨의 [열왕기상하] 주석에 그런 표현이 나온다. ‘우연히 역사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그 ‘우연히’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성경의 기록이 순수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다. 물론 역사 기록이라고 해서 꼭 연대순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말이다.

6.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것이다. 결국 설교자의 과업은 과거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해석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구약 역사서는 인식 주체인 우리가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할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다.

… 구약 역사서는… 이미 적용된 진리요, 이미 해석된 선포이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성경 기자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며, 성경 기자의 선포에 주의를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크레이다누스(S. Greidanus)는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설교를 설명과 적용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용적 설명으로 보는 판 데이크의 제안이 장점이 많다. 말씀은 교회에 전달되기 때문에 말씀과 교회 사이에는 긴장이 없다. 말씀은 적실하기에 적실한 것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적용은 본문의 설명에 덧붙여야 하는 독립적 요소가 아니다.(43) - 우리가 성경을 읽기도 해야 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말씀을 해석하기도 해야 하지만, 말씀이 우리를 해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경은 그저 ‘설명’으로 가득 찬 책이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적실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적용’이 ‘설명’과 분리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성경 말씀 자체가 ‘적용’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7.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포로가 되게 하고 / 기억은 우리로 자유민이 되게 할 것이다.”(49) - 여기부터 여호수아서에 대한 내용이다. 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인용한 짧은 글. ‘예루살렘 야드봐셈 기념관 출구의 동상 ’욥‘의 받침대 글귀에서’라는 소개가 함께 나와 있다. 뭔가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문구다.

8. “(여호수아서는) 늘상 변하는 상황 속에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가 늘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대화를 나눈 대화의 상대였다.”(57) - J. A. Sanders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다. ‘누구’와 ‘무엇’… 이 두 가지 질문… 참 중요한, 그리고 심오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에 답변하지 못할 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릇된 길로 갈 수밖에 없다.

9.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는 그저 한 민족이 살 땅을 얻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신학적 함축이 강한 첫 번째 단락(1:1-5:12)과 마지막 단락(22-24장)으로 정복과 분배의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호수아서는 권면(1장)으로 시작해서 권면으로 끝이 난다는 점이다. … 결국 여호수아서 기자는 여호수아서 앞뒤에 신학적 스토리를 위치시킴으로써 가나안 땅 정복과 분배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읽도록 하고 있다.(60) - 새삼 여호수아서의 설교를 쓰면서 기업 분배 부분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난감해 하던 일이 떠오른다. 그것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가 아니라면, 그것은 지루한 땅 나누기 기록에 불과했을 것이다.

10. 토라는 흔히 ‘율법’이라고 번역되지만, 사실상 토라란 원어는 이런 좁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토라는 ‘지켜야 할 규칙이나 규범’이 아니라, 일반적 의미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르침이란 모세의 가르침, 그러니까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 모세 오경은 단순한 행동 규칙이나 규정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 오경은 …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을 이끌어 오셨는지를 담고 있는 구원의 이야기이다. … 토라는 ‘모세의 산상수훈’이라고 볼 수 있다.(63-64) -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율법’에 대한 이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신약의 입장에서만 율법을 바라보아 왔던 것은 아닐까? 쓸모없는 것, 나쁜 것, 우리를 얽매는 규칙들… 이런 식으로만 말이다. ‘토라=가르침’이라는 설명은 신선하다.

11. 하나님 나라의 진전 앞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가나안인이 여리고 왕이 아닌 창기 라합이라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하나님 나라의 진전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라합은 목숨을 내걸고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의 운명을 걸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의 헌신이 요구됨을 보인다.(70)

12. 본문은 여리고 정복이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현 사건에 더 가까움을 우리에게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을 도는 행렬은 ‘하나님의 임재를 칭송하는 축하 행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군사적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법궤 자체가 전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분 것은 구약에서는 오직 다른 한 군데 즉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나타난다. … 따라서 여호수아 6:5에서는 시내산 사건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 여리고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순간에 여리고가 멸망한 것이다.(81-82)

13.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삶의 중심에는 자기(자아)가 놓여 있다. 자신의 행복과 번영이 최고의 목적이요 목표이다. 따라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정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신의 인도를 받기 위해 직업적인 점쟁이, 마법사, 요술사, 해몽가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신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운명을 미리 알아내어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120-121) - 우상숭배의 정체를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결국 가나안 종교는 인간의 풍요를 위해서 신을 지배하고자 하는 종교였다. 이렇게 보면 가나안의 종교는 농들에게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종교였다. 현대의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과학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시의 농부들도 바알 숭배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성과 종교의 결합은 많은 이스라엘인들에게 큰 매력이었을 것이다.(162) - 사사기 부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발전되어 나온다.

14. 언뜻 보면 사사기는 여러 사사들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단순한 모음집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사기 본문은 ‘긴밀하게 서로 연결된 통일체’이다. 사사기를 세심하게 읽으면 사사기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 특징적인 질문과 대답, 즉 “누가 먼저 올라가서 …와 싸우리이까?”라는 이스라엘의 질문과 “…가 올라가라”는 여호와의 대답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된다.(145) - 문예 분석은 이런 부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데 항상, 모든 경우라고는 할 수 없지만 때로 이처럼 놀랍고 새로운 통찰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사사기 1장을 보면 크게 유다 단락(1:1-21)과 요셉 단락(1:22-36)으로 나누어진다. 유다 단락은 유다 지파의 승리로 시작하여 베냐민 지파의 실패로 끝이 나는 반면에, 요셉 단락은 요셉 족속의 승리로 시작하여 단 지파의 실패로 끝이 안다. … 사사기 결론부에는 또다시 두 지파의 실패가 무대의 중심에 부각되어 나타난다.(147)

사사기의 제2서곡에서는 단순한 반복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순종적인 1세대 후에 나타난 2세대보다 더 패괴한 제3세대의 등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 이렇게 보면 겉으로 보기에 단순히 악순환의 반복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점차 확산되는 하향 나선형(a widening gyre)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추락의 모습임을 알 수가 있다.(156)

부르짖음의 공식을 살펴보자. 부르짖음 공식은 삼손 스토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사들의 이야기 가운데 나타난다. 삼손 이야기에 아예 부르짖음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예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것은 아닐까? 사사기가 전반적으로 타락의 하강 곡선을 그린다는 점이 이런 우리의 불안을 가속화시킨다.(169)

15.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다”(삿 11:16). 이 단락을 흔히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후회하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웹(Webb)이 ‘근심하다’의 용어 연구를 통해서 잘 지적했듯이 이 용어를 단지 하나님의 후회로 보면 이 에피소드의 ‘극적인 깊이’가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근심하다’는 후회가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견디지 못하는 심정’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 결국 이제 사사기의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회개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하심에 달려 있는 것임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201-202)

16. 입다의 서원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계산적이고 매우 간교한 것이었다. 입다는 여호와께 받은 약속의 말씀이 없었다. 입다의 관점에서 보면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멀리 계시며 아무런 보장도 주시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여호와의 도움을 얻어내기 위해 극단적 서원을 행한 것이었다.(203)

17. 브라이트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고난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 즉 우리의 평안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시는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225) - ……

18.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는 구절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 구절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모두 함축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이 누구나 자기의 눈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평등 사회요 각자 책임을 지는 사회라는 긍정적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회라는 부정적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228)

19. 이런 음울한 배경 가운데서 그래도 강렬한 희망의 빛이 비치고 있다. 그것은 사사기가 이스라엘의 유일한 사사는 여호와 한 분뿐이시며, 그가 신실하심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사라는 히브리어 명칭은 사사들의 이야기 가운데서는 여호와께만 사용되고 있다. 물론 제2서곡에서 사사들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으로 ‘사사’라는 영오가 사용되지만, 개별 사사에게 사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은 없다. 서론을 제외하고는 사사라는 명사는 입다가 암몬 왕과 외교적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여호와의 명칭’으로 한 번만 나온다(삿 11:27). 한글 개역은 ‘사사이신 여호와’를 ‘심판하시는 여호와’로 번역하고 있다.(231) - 새로운 내용! 사사이신 하나님!

 

20. 아기를 안은 나오미의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텅 빈 나오미를 풍요하게 채우셨음을 강조하는 데 목적이 있다. 룻기 1장에서 나오미는 두 아기를 잃었으나, 여기서는 아기를 취하여 품에 안고 있다. … 한글 개역 성경에는 한쪽에는(룻 1:5) 아들로, 다른 한쪽에는(4:16) 아기로 되어 있으므로 연결이 약간 느슨해 보이나, 히브리 성경에서는 둘 다 ‘아기’로 되어 있어 훨씬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245)

21.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다. 삶이 지치고 힘들어질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 인애의 손길을 펴신다는 데 있다.(259) - 얼마나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는 말씀인가!

 

22. 이스라엘 땅을 넘어 보지 못한 채,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예루살렘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오던 이들이,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당시 세계 최고의 대제국의 심장부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엄청난 갈등을 겪게 되었다. 끝을 볼 수 없는 거대한 제국, 솔로몬의 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부, 세계 최강의 군사력, 거대한 신전과 신상을 목도하면서 이들은 바벨론의 신들이 여호와보다 전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367) - 아! 이스라엘은 참으로 질곡 많은 역사를 거쳐 왔다. 신앙을 잃을 위기 상황도 많았고! 우리가 겪는 한계 상황도 이러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열왕기 기자는 “왜 선택된 백성이 이방 땅에 와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 열왕기를 기록하고 있다.(370)

23. 이렇게 부정적인 남의 나라의 왕들의 역사가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 그러나 열왕기는 단순히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기록한 단순한 역사 문서는 아니다. 열왕기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열왕기는 ‘설교된 역사’이다. 열왕기에는 케리그마적 의도, 설교적 의도가 있다. 열왕기는 첫 독자들의 신앙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평가하도록 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열왕기는 역사 기술의 형태를 띤 것뿐이다.

열왕기는 열왕들의 통치를 정치, 경제, 문화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만일 열왕기 기자가 정치적 역사가라면 솔로몬의 통치를 서술할 때 성전 건축과 봉헌보다는 그의 행정 치적과 국제 정치적 치적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을 것이다. 또한 아합보다는 오므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열왕기는 정치적 역사이다. 그러나 열왕기 기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정치’인 것이다.(373-374)

24. ‘두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나, 이를 가리켜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들”이라고 복수 동사를 사용한 것을 보면 여로보암이 다신론을 받아들였음을 보인다.(408) - 하지만 여로보암의 죄는 1계명보다는 2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러니 2계명을 어긴 것을 ‘우상 숭배’나 ‘다신론’으로 보는 것은 좀 그렇다. 그는 다만 하나님을 ‘형상화’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배제하고 다른 신을 내세운 것이 아니다. 그가 세운 금송아지를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신들’로 묘사한 것은 그것이 다른 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25. 이방 지도자인 후람 왕과 스바 여왕의 인정은 여호와의 숨겨진 섭리의 손길을 드러낼 뿐 아니라,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는 열방의 왕도 되심을 부각시킨다. 그러기에 성전은 단지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 처소가 아니라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것이다.(499)

26. 사마리아인들은 군인들에게 강포함을 당한 유다 포로들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먹이고, 입히고, 기름을 바르고,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여리고성으로 데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대하 28:12-15). … 이 스토리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예수께서는 이를 이용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만드셨다.(522) -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아하스 시대의 일을 염두에 두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만드신 것일까?

27. 이제 유다의 몰락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요시야는 낙심하고 주저앉지 않았다. 요시야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언약 갱신을 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복종하게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게 하였다. 유다의 파멸이 변경될 수 없는 사실로 결정되었는데, 이 마당에 무슨 언약 갱신과 유월절 지키기가 필요한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일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유일한 일임을 보인 것이다.(530) - 저자는 앞에서도 이와 유사한 넬슨의 말을 인용했었다. “보상받을 희망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신앙을 지켜라!”(430)

하지만 이것과 관련하여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경건한 왕들이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것(대하 14:9-11; 20:1-13; 32:1)을 볼 때에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 성공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축복은 본질적으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541-542)

 

28. 느 13장은 흔히 학자들에 의해 에스라-느헤미야서의 불만족스런 결론으로 간주된다. 학자들은 느 13장에 나오는 공동체 멤버들의 범죄 행위는 느 10장 이전에 있었던 공동체의 악의 모습이라고 본다. … 이들은 지나치게 역사적으로 혹은 문예적으로만 본문을 읽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621) - 내가 역사 중심적 구약학과 문예 중심적 해석학을 염려스러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과 흡사한 반응인 것 같다. 지나치게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문예적으로만 보는 것에 대한 반대… 전혀 새로운 대안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좋은’ 절충이 필요한 걸까?

29. 느헤미야는 단번의 회개와 개혁으로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 변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 오늘 한국 교회의 부흥사들은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같이 이야기하면서 교인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교인들은 여기서 위안을 받는다.(628) - 평안이 없는데 평안하다고 했던 거짓 선지자들의 그림자가 언뜻 비치는 듯…

 

30. 역사의 페이지는 오늘도 / 하나님의 말씀과 죽은 정통 교리 사이에서 / 은밀히 벌어지고 있는 / 사생결단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다네 / 진리는 언제나 교수대에서 처형당하고 / 불의가 보좌에 앉아 영원히 다스리는 것 같지만 / 실은 그 교수대가 장차 미래를 주관하게 될 것이니 / 이는 하나님께서 / 미지의 그 희미한 그림자 속에 서 계시며 / 자기 백성들을 지켜보시기 때문이라네(634) - 에스더서를 시작하면서 인용하고 있는 제임스 로웰의 ‘현재의 위기’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글 솜씨…

31. 에스더서에 나타나는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잘 맞는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매우 정상적이며, 이적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앞서 살핀 대로, 이 같은 이적의 부재는 반드시 하나님의 부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숨겨진 하나님은 현상적으로는 숨겨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사실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계시며,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675) - 이 글을 읽으면서 디트리히 본회퍼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의 현재의 삶도 그런 전제를 받아들인 상태로 진행되고 있고… 그런데 저자도 그것을 염두에 두었던지, 결론부를 시작하면서 본회퍼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내 생각과 감정은 점차 구약의 생각과 감정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소.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신약보다는 구약을 더 많이 읽게 되었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만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소. 우리가 생명과 땅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들 없이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보일 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부활과 새 땅을 믿을 수 있는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굴복할 때만이 은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오. 하나님의 진노와 보수가 우리의 적들의 머리에 냉엄한 현실로 나타날 때만이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우리의 마음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681) - 정말로 동감 되는, 그리고 감동되는 글이다! 구약이 없는 신약은 없으며, 구약이 신약을 거쳐 우리의 삶의 자리까지 오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강단에서의 구약 경시 태도는 무척이나 잘못된 것이다! 복음의 복음 됨을 막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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