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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상
동아일보사 출판국 지음 / 제3공간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 기본적으로 여러 ‘분야’로 나뉘어져 있고(이 상권은 사상/역사‧지리/사회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분야에서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된 책들에 대한 소개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각의 아티클 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졌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다양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글쓴이에 따라서 편차가 심하다. 잘된 설명이 있는가 하면 불친절한 설명,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친 내용까지도 발견된다.
* 오타가 종종 눈에 띈다. 꼼꼼하게 교정하지 않고 성급하게 책을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어쨌든 책을 낼 때에는 최선을 다해서 완성도 높은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흔히 말한다. 고전은 따분하고, 읽기 어렵다고. 오늘날처럼 변화가 심하고 가벼움이 선호되는 상황에서는 이런 말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결코 놀이나 장난이 아니듯, 우리의 정신적 무게 또한 그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모색,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다.(6) - 머리말에 나오는 글이다. 정말 우리의 삶에 대한 자세는 보다 진지해져야 하고 보다 투철해져야 한다. 현대인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염려한다.
2. 신들에 대한 일반적 찬가 이외에 철학적 사색이 깃든 찬가도 있다. 훌륭한 찬가로 신들의 관심을 얻고, 그 결과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생각이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15) - ‘베다’에 관한 글의 한 대목이다. 신들을 찬양하고, 그들의 찬양할 만한 점들을 사색한 내용으로 신을 기쁘게 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진술이요 지적이다. 어떤 것이 신(神)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지극히 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의 위치에서부터 시작한(일반적인 종교에 있어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만!) 방향과 방법의 모색. 그러나 결국 신을 기쁘게 하는 모든 행위, 그리고 모든 종교의 의도와 목적은 결국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소원 성취!) 것이라는 결론(?). 이것이 일반적인 종교가 가지는 한계이리라.
3. 제식의 종류는 매우 많고, 그 조직‧규칙도 극히 복잡해서 옛날에는 제사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빌며, 그 은총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브라흐마나] 시대에는 제식은 신들을 강제하는 독자적 힘을 가진 원리가 되고, 사제가 교만의 극에 달해 스스로 일종의 신이라고 자칭하기에 이르렀다. 신들은 인간의 이상적인 형상상에 불과했고, 그들도 일찍이 제사를 행하여 그로 인해 승천하여 지금과 같은 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제식의 주목적은 제주인 왕후 귀인이 사후 승천하여 신들처럼 불사(不死)가 되는 데에 있다. 물론 현세적인 가지가지의 원망과 성취도 그 안에 포함되지만, 한 걸음 나아가 이러한 욕망이 성취된 내세에 있어서 다시는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 염원이다.(16) - 일반적인 종교의 흐름과 그것의 결론적인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불사에 대한 추구, 그리고 신성(神性)에 대한 동경, 물론 현세적인 소원의 성취는 기본이고… 나로서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읽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계시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가 이러한 일반적인 종교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래서 J. B. 필립스는 [네 하나님은 너무 작다, Your God is too small]라는 책을 썼고, 또 그 책을 전제로 하여 마크 부캐넌이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안전하다, Your God is too safe]라는 책(한국에서는 [열렬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을 쓴 것이다. 너무 작은 하나님, 너무 안전한 하나님… 내가 내 주머니 속에 넣고 마음대로 조정하고 나를 축복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믿고 싶은가?!
4. 오늘날의 사상적 경향은 ‘본질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을 추구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나, 실증되지 않은 것은 무의미하다는 논리적 실증주의나, 효용성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실용주의나, 관념의 뿌리는 물질적인 것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모두 본질보다는 실제적인 것 내지 감각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다.(35) - 플라톤의 [대화론]을 설명하는 중에 나온 글이다. ‘본질’과 ‘현실’이라…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질’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본질’에 치중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본질을 무시하는 듯이 보이는 ‘현실’ 치중자들을 염려스러운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가 가지는 그 강력한 의미에 동감하지만 그것의 치우침을 염려하고, 실용주의의 ‘천박함’을 멸시하게 된다. 물론 그러는 나 역시 ‘밥’ 먹고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본질이 아닌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치중하는 현대와 현대인들의 모습은 매우 위태롭게 보인다. 이렇게 주장하면 ‘현실 감각’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면에서 나는 ‘예언자적 현실주의’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본질’을 추구하되 인간 사회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지적하면서 ‘본질’로 이끌어가고자 했던 구약의 선지자들의 태도!
5. 문자로 된 글을 읽고, 그 문자를 통해 하고 싶은 질문을 던질 수가 없다.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을 향해 물을 수 없는 것처럼 글로 쓰여진 언어를 향해 물어 보아도 그것은 언제나 같은 신호만을 볼 뿐이다. 그 같은 기록된 언어에 비해 대화를 통한 언어는 활력성을 갖는다. 직접적인 대화는 “생명을 가진, 영혼을 가진 언어인데 비해 기록된 언어는 그것들의 그림자이다”라고 플라톤은 표현했다.(38) - 나는 ‘글/책’을 통해 배우는 부류의 사람들이고, 내가 아는 누구는 ‘대화/사람’을 통해 배우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꼭 어느 것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화가 좋다고 해도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누는 대화는 결국 ‘무지의 잔치’에 불과하다. 책이 좋다고는 하나 표현되는 ‘신호’ 이외의 것을 읽을 줄 모르는 자에게는 ‘오해로 오도’하는 잘못된 선생이 될 수도 있다. 내 경우는 책을 통해 배우고, 대화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6. 장주(莊周)는 탁월한 천재성, 초인적인 상상력, 고매한 인격, 그리고 낭만적인 사람으로, 그가 붓을 잡으면 그의 앞뒤의 이치가 바뀐 듯이 나오고 예측을 허락하지 않는 기묘한 곡절이 생겨 마침내 독특한 문체를 이룩해 놓았다. 이러한 그의 문체는 그의 동시대는 물론 지금에 이르는 2000여 년 동안에도 그것을 흉내 낼 만한 문장가 내지는 시인이 나오지 못했을 정도로 특이하다.
그는 글을 쓰는 데 있어 아무런 법칙에도 구애됨 없이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여 중첩하는 어구가 괴이하고 기묘한 글자와 익살을 섞고 교묘한 우언을 짜 넣어 그의 글은 유례없이 힘차다.
묵자는 지나치게 논리를 따져 글이 답답하고, 맹자는 지칠 줄 모르고 늘어놓는 통에 글에 깊은 맛이 적다. 장자의 글은 이러한 폐단이 거의 없다. 물론 우리가 어쩌다 장자 원문을 펼쳐 보면 굉장히 난해하고 읽기 어려움을 느끼게 되지만 주석을 참고하여 글자의 뜻과 글의 대의를 이해한 후에 반복해서 보면 은연중에 경이와 희열을 느끼게 된다.(46-47) - 장자가 이렇게 탁월한 ‘문장가’이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좋은 점을 배웠다. 묵자와 맹자 그리고 장자에 대한 비교를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는데… 그것은 현재 내가 모이는 독서 모임의 구성원들의 모습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
7. 군대에 정규군과 비정규군이 있듯이 신학자에도 정규 신학자와 비정규 신학자가 있다고 한다. 이는 스위스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칼뱅과 루터를 비교하며 한 말로서, 칼뱅의 사상은 조직적이고 체계가 정연하며, 하나의 완결된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루터는 비조직적이며 완결되어 있지 않고 결론이 언제나 개방적이다.(84) - 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꼭 조직적이고 완결된 것만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나는 장로교 소속이지만 오히려 루터의 개방적인 태도에 더 마음이 끌리는데…
8. 데카르트는 기하학이 사용하는 연역적 방법을 내세운다. 그는 연역법의 대담한 해석자이다. 그는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추론식을 평한다. 그는 삼단 논법의 결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는 추리에 도움을 주지만, 아직 모르는 것을 연구하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연역적인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논리는 외면하고, 그의 독자적인 논리 방식을 기하학에서 찾아내어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최초의 단순한 진리로부터 출발하여, 우선 최초의 진리에 포함되었던 제2차 진리로, 다음에는 제3의 진리로, 더 나아가 제4의 진리로 나아가는 연쇄적인 추론을 통찰한 것이다.(99) - 음, 그럴 듯!!
9. 헤겔은 “진리는 객관성이다. 객관성이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데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주체성이다. 주체성이 진리이다”고 주장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체적 진리를 강조한다. 주체적 진리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진리인 것, 그것을 위해서 내가 살고 죽을 수도 있는 그러한 진리”가 나의 주체적 진리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진리요 나의 진리이다. 내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힘을 주고, 구제 해탈의 빛을 주고, 내게 행동 원리를 제시하고, 내게 기쁨과 의의와 보람을 주는 진리, 그것이 나의 주체적 진리이다. 키에르케고르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객관적 진리에 대한 주관적 진리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역설한다.(128) - 대학원 다닐 때 키에르케고르에 한참 취해 있었다. 서점에는 없는 [순간]이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개인적으로 복사해 놓고 읽었을 정도로… 지금도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이 가져온 결과와 오도(誤導)된 내용들에 대해서는 염려스럽기도 하다. 지나친 주관성에 대한 주장으로 객관성을 거의 잃어버린 현대의 실존주의와 그에 따른 결과물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 부분이야말로 ‘균형’이 필요한 부분이다.
10. 그 첫 저작인 [시간과 자유]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요, 가장 독창적인 그의 인식론이다. … 베르그송은 그 시대의 가장 심각한 요구에 따라 새로운 철학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했다. 그의 문장은 명석하고도 예술적인 표현을 가졌으며, 인상 깊은 비유로 사람을 설득하는 힘을 가졌다. … 베르그송은 [시간과 자유]에서 서양 사상상 중요 문제 중 하나인 ‘자유’를 다루되 시간론에 의하여 해결하려 했다. … 위와 같은 철학적 원리를 갖고 그는 현대 철학의 중요한 논란인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아니 해결한다기보다 그 문제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 관념론자가 생각하듯이 자아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요, 고정된 것도 아니다. “자유는 유동적 진행이므로, 자아와 능동 그것은 살아 있는 참 실재와 마찬가지로 부단한 생성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해 가고 있다.” … 자아를 고정한 인식 기능, 즉 이성으로 보는 칸트의 관념론을 극복한 것이다.(137~) - 베르그송의 [시간과 자유]에 대한 설명은 이해하기 힘들다. 주제에는 관심이 가는데… 중간에 제시되는 설명이 너무 어렵다. 뭔가 설명하고 있기는 한데, 배경 지식이 없이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가 거의 불가능한, 쉽게 다가오지 않는 필자 혼자만의 설명이다. --; 그에 반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대한 설명(144~)은, 프로이트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까지도 찬찬히 잘 설명해주고 있다. 좋은, 친절한 소개라고 생각된다. 내가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과 선행 지식을 조금이나마 갖고 있어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까?
11. 캇시러에게 ‘상징’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징’과 비슷한 뜻으로 ‘신호(sign)’가 있다. 신호에 대하여 동물이나 인간은 즉각적인 반응을 한다. 사려하는 일 없이 행동으로 나아간다. 이와 반대로 상징은 우리를 깊은 생각으로 이끌어 가고, 반응을 더디게 한다. 인간은 그 정신생활의 여러 가지 의미를 상징에 담는다. 인간은 깊고 복장한 정신생활, 즉 생각하는 생활을 하므로 인간의 세계에는 무수한 상징이 있다. 인간은 갖가지 상징을 만들며 그 상징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래서 캇시러는 인간을 ‘상징의 동물’이라고 정의했다.(168) - 캇시러 역시 흥미를 끄는 인물이다. 그의 ‘상징’과 ‘신호’, 그리고 ‘반응’에 대한 내용은 무척 흥미롭다.
12. 캇시러에게 있어서는 언어도 역시 상징이다. 언어는 기성물이 아니라, 우리가 쉴 새 없이 현실 세계와 관계하고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요 그러한 활동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언어의 차이는 발음이나 낱말들의 차이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태도의 차이이다. 궁극에 있어, 언어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 실현의 길이요 방편이다.(170) - 언어의 차이는 세계를 보는 태도의 차이!!!
13. 마키아벨리의 일생, 그리고 그가 [군주론]을 공표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간단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참모습이 그에 관한 일반적 인상과는 판이하다는 것, 그리고 그의 [군주론]이 그의 직접적인 행동의 결과라기보다도 한낱 그의 지적 관찰의 결과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뜻하지 않은 정변으로 관직을 잃고 한가로운 전원생활로 쳐지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그가 지난날에 만났던 권력자들의 인품, 행태, 그리고 그들이 처한 정치 상황을 조용히 되새겨 보고, 그들이 왜 권력을 얻고, 왜 잃었는가를 한층 높은 입장에 서서 객관적으로 평가한 결과가 바로 그의 [군주론]이라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소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52) - 편견 그리고 사실…
14. 이러한 관찰, 분석, 종합 과정에서 그는 바로 자연 과학자가 자연 현상을 관찰하듯이 일체의 윤리적 도덕적 선입견의 개입을 배제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가 비도덕적인 냉혈한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냉혹한 정치 현실을 철저히 과학적 태도로 관찰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마키아벨리는 통치자들을 위하여 치국책의 교본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정치학이 한 과목으로 성립할 수 있는 초석을 처음으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공적은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254)
15. 모든 사회 이론은 그 소박하고 단편적인 형태로 본다면 이미 고대로부터 존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구론]도 예외가 아니다. 단 그것이 체계화되어 하나의 이론으로 성립한 것은 18세기 말 영국의 맬서스를 통해 비롯했다. 동시에 모든 사회 이론은 진공 상태에서 별안간 솟아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후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역사적 산물이며, 맬서스의 [인구론] 또한 예외는 아니다.(298) - 모든 사상가들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하지만 때론 자신이 시대를 넘어서는 사람들도 발견된다. 자신의 시대를 발판으로 삼되 그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사상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의 극복은 지엽적이고 자극적인 주제가 아닌 본질적인 부분을 다룬 이들에게서 발견된다는 점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16. 괴테의 유명한 금언인 “벗이여, 이론은 무미건조하고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란, 그것이 이론에 대한 생명이 우위와 위선, 그리고 현실 자체가 차지하는 정신적 반영에 대한 우위와 우선을 표현하는 한 진실이다.(310) - 이론과 생명, 위선과 현실… 때로 ‘본질’을 주장하는 것이 현실과 현실 속의 생명을 무시하는 이론과 위선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본질을 주장하다가 그런 잘못된 길에 빠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기까지 함께 버려서야 되겠는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 법! 잘못된 몇몇 때문에 그것 자체를 무시하거나 반대해서는 안 될 일이다.
17. 밀은 마지막 장에서 인간 생활에서 아무리 자유가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노예로 팔아 버리려는, 즉 자기를 포기해 버리려는 자유마저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런 경우에는 말하는 자유란 종래의 자유주의에서 생각하던 ‘강제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이다. 이상과 같이 생각해볼 때, 밀은 자유주의를 이상주의 위에 건설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318) - 무제한의 자유란 없다. 자유는 늘 어떠한 한계를 가지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