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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도 ㅣ 믿음의 글들 24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루이스의 글을 읽을 때마나 느끼게 되는 ‘상쾌한’ 통찰력들로 그득하다! 흐드러진 잔치를 벌인 기분이다. 루이스는 생각을 자극하는 작가다!(괄호 안은 페이지) 생각! 생각!
1. 예배에 대한 통찰력!(8-10) “성직자들은 끊임없이 예배 분위기를 유쾌하게 하거나 밝게 바꾸고, 예배시간을 늘이거나 줄이고, 예배형식을 간소화하거나 복잡하게 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아.
새로움 그 자체는 오락적 가치밖에 없네. 그런데 대다수 교인들은 오락을 목적으로 교회에 가는 게 아니거든. 그리고 이 일을 가장 잘 하도록 해 주는 예배란 오랜 시간 동안 친숙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도 몰입할 수 있는 예배일세. 스텝에 신경 쓰느라 몇 걸음인지 일일이 세어야 한다면 그건 춤추는 게 아니라 춤을 배우는 거라고 해야겠지. 완벽한 교회 예배는 그 형식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예배, 그래서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예배일 거야.
그런데 예배에 도입하는 새로운 요소들이 이것을 방해한다네.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거든. ‘예배를 신(神)보다 더 중시하는 건 지독한 우상숭배일세.’
더 나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네. 새로운 요소 때문에 예배 자체도 아니고 예배 인도자에게만 온통 신경이 쓰일 수도 있단 말일세.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하셨지, ‘내 쥐들로 실험하라’ 혹은 ‘공연하는 개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다.”
- 전적으로 동의한다! 루이스는 마치 현대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후에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현대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해내고 있다!
2. 기도문(기도서)에 대한 생각
1) 최신판으로 만든다는 것(11, 20) “일상어로 된 ‘기도서’라면 시대에 맞춰 계속 달라져야겠지. 그렇지 않다면 결국 이름난 일상어 기도서가 될 테니까. ‘시간을 초월한 영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야. 살아 있는 언어는 절대 시간을 초월할 수 없네.” - 영문학자다운 지적! 문학에 대한 이해는 어쩌면 다른 것들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는지도...
2) 개정할 때의 주의점(11) “나는 기도서에 꼭 필요한 변화가 가능한 한 서서히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이루어졌다면 가장 좋았을 거라고 보네. 셰익스피어 작품의 개정판이 나올 때 철자가 조금씩 바뀌는 것처럼 여기 조금 저기 조금, 한 세기에 사어(死語) 한 단어 정도 바꾸는 식으로 말이야.” - 이런 방식을 성경의 번역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3) 기도문의 유익(20) “첫째, 건전한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준다는 거야. 둘째, 내게 마땅히 기도할 바를 되새기게 해준다네. 끝으로 기성품 기도문은 의식(儀式)의 요소를 제공하네.” - 저자의 견해처럼(“내 경우엔 ‘내 말도 된’ 기도를 주식으로 하고 기존 기도문을 약간 추가하는 것이 가장 낫더라고.” 19) 하는 것이 좋을 듯...
3. ‘스토아 학파의 오류’(18) “가끔 할 수 있는 일을 늘 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 - 좋은 개념이다! 내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일반화의 오류’와 일치하는 듯...
4. 죽은 자를 ‘향한’ 기도(24) & 죽은 자를 ‘위한’ 기도(158-)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요청할 수 있다면, 죽은 자들에게도 그렇게 못할 이유는 없지 않나?” “물론 나는 죽음 자들을 위해 기도하네. 이 일은 내 안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러나고 거의 불가피한 것이어서 이 일을 중단하려면 매우 강력한 신학적 반론이 있어야 할 걸세.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금지된다면 내가 드리는 나머지 기도가 살아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우리 나이가 되면 가장 사랑하는 이들 대부분이 저세상 사람 아닌가. 내가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없다면 하나님과 어떤 종류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겠나?”
-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그리고 생각해본 적조차 없는 논리다! 그동안 루이스의 책을 여러 권 보아 오면서 모종의 ‘차이점’을 느끼긴 했지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전혀 예상 밖이다. 신앙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 배경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기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기에 하나님 외에는 누구를 향해서도 기도하는 것이 불가하며, 죽은 자는 이미 우리의 영역을 떠났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오히려 이것들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가톨릭이나 성공회에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옹호하는 근거 구절은 세 가지다(여러 성인들의 말은 성경 구절만큼의 권위를 갖지 않는 것이므로 그냥 넘어가자). 성경 구절로는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을 언급하는 고린도전서 15:29과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기록하는 베드로전서 4:6이 있다. 하지만 두 구절 모두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가르치지는 않고 있다. ‘유추’의 실마리(그것도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이 교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은 마카비2서 12:45이지만, 이 책은 개신교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외경이기에 ‘교리’의 근거 구절로 사용할 수 없다고 본다. 루이스는 이것들이 잘못되었다는 ‘매우 강력한 신학적 반론’을 요구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이것들이 옳다는 ‘매우 강력한 신학적 반론’이 필요해 보인다.
5. 기도와 몸(28)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몸도 기도해야 마땅하니까.” - 우리는 많은 경우 기도에 있어서 몸의 역할 또는 의미를 간과한다. 루이스의 지적은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6.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기도(30) “전지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기도는 많은 경우 그분에게 뭔가 알려 드리는 내용이라는 거지.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잊은 채로 기도해선 안 된다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하네(마 6:32).” - 기도를 단순히 ‘정보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기도는 ‘정보 제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다. 거기에서 정보는 교제의 매개체로도 사용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시시콜콜 들으시기를 좋아하시는 ‘여성적’ 성향(^^;)도 가지고 계신다.
7. 기도와 조언, 설교(31) “어떤 사람이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사실상 진단에 이어 치료방법을 하나님께 거반 알려 드리는 조언이나 다름없었네.” - 때로 우리는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의 성경 지식이나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설교하거나 조언, 심지어는 책망하는 투로 말하기까지 한다. 기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매우 인격적인 수단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8. 어떤 하나님?(33) “사람이 어떤 하나님을 만나느냐는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어느 정도 달려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 안에서 열리는 문은 그 사람이 노크한 문이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 동감한다. 한참 ‘입신’이나 ‘천국에 갔다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그들이 갔다 왔다는 천국의 모습이 다르다는 점과 관련하여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100%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설사 정말로 갔다 왔다 할지라도 그들은 광대한 천국의 일부분만을 보고 왔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은 ‘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상(像)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9. 신인동형적 표현 vs 추상적 표현(34) “신인동형론적 이미지들이 우리의 약함을 참작한 궁여지책인 반면 추상개념은 문자적 진리인 양 오해하지는 말게. 둘 다 똑같이 궁여지책이고 각각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두 개념이 서로를 교정해 주는 거니까.” - 루이스의 글에서 간간히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통찰력! 그의 ‘시편’에 대한 책을 읽다가도 ‘문서설’에 대한 반론(‘문학’ 전공자도 아닌 사람들이 ‘문학’ 운운하며 ‘문서’를 분류하는 어리석을 지적하는...)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둘 다 궁여지책이라...
10. 마음에 가득한 B vs 허울로 간구하는 A(36) “실제로는 마음이 B에 대한 소원으로 가득 차 있는데 허울뿐인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A를 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지. 우리는 우리 속에 있어야 마땅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하네.” - 좋고 건전한 사상, 그리고 귀에 착착 감기는 좋은 문장!
11. 듣지 않으려 애쓰는 소음(37)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음만큼 크게 들리는 소리도 없다.” - 좋은 ‘단어’, 좋은 ‘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숨은 보화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12. 작은 일들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37) “때로 우리가 작은 일들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체면 때문일 듯 싶네.” - 전적으로 그 이유만을 들 수는 없지만, 간과하고 있던(어쩌면 내심 무시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한다.
13. 첫 번째 감동 vs 열두 번째 감동(41) “하나님께서 영광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 주시는데 우리는 그걸 거부하며 옛날 것만 찾는 거야. 물론 우리는 그것을 얻지 못하지. <리시다스>를 열두 번째 읽으면서 처음 읽던 때의 감동을 다시 느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네. 그렇지만 열두 번째 나름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거야.” - 늘 ‘첫 사랑’을 회복시켜 달라고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첫 사랑은 과연 회복될 수 있는가? 해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사랑을 느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옛날 것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좋지 못하다.
14. 삶 전체를 무제한으로 요구하는 종교(47) “현실생활에서도 종교라는 개념 자체에 위험요소가 들어 있네. 종교라는 단어가 삶의 또 한 영역 즉 경제적, 사회적, 지적, 오락적 영역과 기타 모든 영역에 덧붙여진 여분의 영역이라는 인상을 주거든. 그러나 삶 전체를 무제한으로 요구하는 종교가 삶의 한 영역에 머무를 수는 없네. 종교는 환각 아니면 삶 전체를 포괄하는 것, 둘 중 하나이지. 우리에게 종교와 관계없는 활동이란 없네. 종교적 활동과 반(反) 종교적 활동만 있을 뿐이야.” - 심지어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도 다르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기독교는 ‘삶의 일부분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포괄하는 삶의 체제이다!
15. “조용히 해! 수다쟁이야!”(54) “우리의 양심이 당면문제를 다루지 않고 애매하게 잘못을 지적하거나 잘했다고 칭찬하기만 한다면, 허버트처럼 양심을 향해 ‘조용히 해, 수다쟁이야’라고 말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네.” - 어쩌면 상황에 맞는 문장들을 이렇게 척척 갖다 대는지!
16. 요청은 요청!(56) “주님이... 단서를 달고 기도하셨다고 해도 그분 기도에서 청원적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세. 요청은 요청이네. 다이아몬드가 연수정보다 훨씬 값진 것이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연수정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네.” - 청원 기도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종류의 기도이다.
17. 십자가를 피한 선례!!!(65)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순간, 주님께 긴장과 염려가 찾아왔네. 희망을 품을 때 찾아오는 고통들이지. 주님은 그 극한의 공포를, 어쩌면 혹시라도 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품게 되신 거야. 선례(先例)가 있었거든. 바로 이삭이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그것도 마지막 순간에 이삭은 목숨을 건졌네.” -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향! 내용! 그러나 이 이야기는 충분히 타당성을 가진다!!!
18. 두 번씩 토론한 페르시아인들(69) “모든 문제를 두 가지 상태 모두에서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싶어.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모든 일에 대해 두 번씩 토론했다지. 술에 취한 상태로 한 번, 정신이 말짱한 상태로 또 한 번.” - 다방면의 시각을 위한 시도...
19. 소리 내어 기도하기 & 소리 내어 읽기(71) “제자들이 기록으로 남긴 기도 내용을 소리 내어 말한다면 채 3초도 안 걸릴 걸세. 주님은 ‘돌 던질 만큼’만 떨어져서 기도하셨네. 밤이었으니 사방은 고요했어. 그리고 주님이 큰 소리로 기도하셨을 거라고 확신하네. 당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리 내어 했거든. 그로부터 몇 세기가 지난, 훨씬 발전된 사회에서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자네도 기억하지 않는가. (속으로) 뭔가를 읽고 있는 암브로시우스 바로 옆에 섰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깜짝 놀랐다는 대목 말일세.” -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도 책 읽는 재미의 하나다. 소리 내어 하는 기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소리 내어 읽는 것과 관련된 정보는 새롭다!
20. 펠라기우스주의 vs 어거스틴주의(75) “엄밀한 인과적 사고방식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적용할 때 그것은 더욱 부적절해지네. 그 신비로운 지점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과적으로 정의하려 한 시도가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한 커다란 수수께끼를 만들어 냈네. 그러나 성경은 그 문제 위를 유유히 날아가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것은 순수한 펠라기우스주의일세.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건 순수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야. 이 두 구절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세운 전제들 때문일 수도 있네.” -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성경이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믿는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어느 것이 우선적이고, 어느 것이 더 무게를 가지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아직도 남아 있지만... 그러나 둘 다 인정하는 것은, 양쪽 편 모두에 의해서 공격 받는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21. de-mythologing vs re-mythologing(79-) “추상 개념은 거의 전적으로 소극적 가치밖에 없네. 하나님의 발자국은 바위나 광물 찌꺼기 더미보다는 옥토에서 더욱 잘 보이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기독교의 ‘비신화화 de-mythologing’는 ‘재신화화 re-mythologing’가 되기 십상이야. 빈약한 신화가 풍부한 신화를 대체하는 꼴이지.” - 불투만의 비신화화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재신화화’는 처음 듣는다. 그런데도 왠지 낯설지가 않다. 이것은 신학의 영역 이외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개념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작가는 성경의 가르침을 많은 경우 ‘비신화화’시키지만 그것은 사실 ‘재신화화’이며, 빈약한 신화로 풍부한 신화를 대체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겠다.
22. 우리 기도를 ‘참작/고려’하시는 하나님(80) “우리의 기도를 ‘원인’으로만 보면 청원기도의 중요성이 오로지 요청한 것을 이루는 데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걸세. 그러나 신앙생활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참작’ 또는 ‘고려’하시는 것이 청원한 것을 주시는 것보다 더 중요하네.” - 우리는 기도의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가?
23. 경배/관상 기도에 대한 글이 청원기도에 대한 글보다 많은 이유?(88-) “어째서 경배기도와 관상기도를 주제로 쓴 글은 많으면서, 청원기도에 관해서는 ‘미숙하고’ ‘유치한’ 글도 찾아보기가 어려운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거네. 경배기도와 관상기도가 더 고상한 형태의 기도일 수도 있겠지.” - 기본을 낮추어 보거나 우습게 보는 것은 위험스럽다.
24. 신비주의자들은 과연 ‘같은 것’을 발견했는가?(96-) “요즘 널리 퍼지고 있는 정말로 그럴싸한 주장이 있다. 온갖 다양한 종교적 배경에서 출발한 신비주의자들이 모두 동일한 것을 발견한다는 거야. 그렇게 보면 신비주의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가 되겠군. 그리고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들은 망상에 불과하거나 기껏해야 초월적 실재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수많은 현관일 뿐인 거지.
그렇지만 나는 이 주장의 전제가 의심스럽다네. 플로티누스와 노리치의 줄리안과 십자가의 성 요한이 정말 ‘같은 것들’을 발견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내용의 유사성을 일부분 인정한다 해도, 모든 신비주의의 진정한 공통 요소는 따로 있어. 우리의 통상적인 시공간 의식과 논증적 지성이 잠시 깨어진다는 점이야. 이런 부정적 경험의 가치는 결국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는 긍정적 경험의 본질에 달려 있는 걸세.
나는 신비 체험을 결코 환상으로 여기지 않네. 그런 체험은 죽기 전에 소위 ‘이 세상’을 벗어날 길, 무대 밖으로 나갈 길이 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해. 하지만 여기를 벗어나 어디로 간다는 걸까? 항해를 시작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지. 참된 종교가 먼저 있어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신비주의도 가치가 있는 걸세. 신비주의가 나타난다고 그 토대가 되는 종교가 쓸모없어지는 건 아니지.
누군가가 악마적 신비주의나 마약이 위대한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체험과 구별되지 않는 체험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해도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을 걸세. 출발은 모두 똑같은 거니까. 항해의 절정은 상륙일세. 그가 신비주의를 실천했다는 사실이 그의 거룩함을 입증하지는 못하지.”
- 신비주의, 특히 신비 체험에 대한 루이스의 지적은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매우 정확하고 받아들일 만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유명 작가의 경우 그의 책 [타나토노트]에서 ‘영계 탐사’의 결과 세상의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모두가 종교와 신앙과 관계없이 ‘영계’(소설에서 말하는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가정’ 내에서 가능한 일이다. 루이스의 지적대로 말한다면... ‘영계 탐사’를 시도한 이들은 ‘같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25. 영적인 것에 대한 잘못된 욕구(99)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탐욕스러운 욕구가 있을 수 있는 거야. 우리의 다른 욕망들처럼 그 욕구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네.” - 영적 욕구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물론 ‘중독’(addiction)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사랑’이나 ‘신앙’도 중독된다는 부분은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영적 욕구... 잘못된 영적 욕구... 그것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26. 중보기도의 악용/약점(100) “내가 중보기도를 쉽게 생각하는 데는 그리 선량하지 못한 이유가 두 가지 있어. 하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해 줘야 할 일을 기도로 때우려 할 때가 많다는 거야. 또 다른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네. 자네가 습관적인 죄를 이겨 낼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자네를 위해 기도한다고 해보세. 글쎄, 그럼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ㄴ과 자네의 몫이 되네.” - 중보기도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얻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는 하나님이 우리가 중보기도하는 대상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채 함부로 중보기도하지 말 것을 배웠고... 여기에서는...
27. 하나님으로부터의 고립(104) “아널드는 우리 각자가 ‘인생의 바다’ 위에 뜬 ‘고립된’ 섬이라고 말했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와 ‘고립될’ 순 없네. 내가 자네와 분리된 것처럼 하나님과 분리된다면 멸절하고 말 걸세.” - 불신자의 상태와 신자의 상태를 구별하면서 주의해서 생각해야 하는 주제다. ‘일반은총’적인 측면에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보편적인 개념을 벗어나면,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어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로 나뉜다.
28. 죄란...(104) “모든 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어넣으신 에너지를 뒤틀어 버린 것임을 기억하는 거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부으시는 포도주를 못 쓰게 만들고, 우리를 악기 삼아 연주하기 원하시는 곡조를 죽여 버리네. 우리는 그분이 그리기 원하시는 자화상을 우스꽝스럽게 망쳐 버린다네. 따라서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죄는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지.” -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까지도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 이유가 이 부분에서 설명될 수 있을 듯... 물론 그것이 답변의 전부는 아니지만...
29. 범신론의 성경적 변형(106) “범신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만유all이시네. 그러나 창조는 하나님이 만유가 되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보여주네. 그분은 ‘만유 안에 만유’가 되려to be all in all 하시네.” - 절묘한 변형!
30. 하나님과 피조물에게 동일한 ‘존재’라는 단어 사용은 불가!(110) “나는 오언의 견해를 고수하겠네. 천사로부터 원자에 이르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다르다네. 비할 바 없이, 같은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이 다르네. 심지어 ‘존재하다’라는 단어 하나도 하나님과 피조물에게 정확히 똑같은 의미로 적용할 수 없어.” - 신학에서 말하는 ‘무한한 질적 차이’에 대한 친절한 설명. ^^;
31. 그리스도인의 두 전선(111)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적어도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네. 범신론자들 사이에 있을 때는 피조물의 구별됨과 상대적 독립성을 강조해야 하지. 이신론자들 사이에 있을 때는, 또는 울리치의 평신도들이 하나님을 실제로 하늘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곳에서도 내 이웃, 개, 양배추 밭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해야 하네.” - 균형!
32. 편재의 방식!(111-112) “또한 편재는 하나님이 모든 것에 계시지만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구분을 흐려 놓는다네. 하나님이 축성된 떡과 포도주 안에 계신 방식과 사람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고, 악인과 선인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고, 사람과 짐승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고, 짐승과 나무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고, 나무와 무생물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네. 고등한 피조물일수록 하나님이 그 안에 더 계시기도 하고 덜 계시기도 하다는 걸세. 은혜로는 더 많이 계시지만, 힘 자체로는 덜 계시거든(일종의 자진퇴위랄까). 하나님은 고등한 피조물에게 그분의 뜻을 원할 수 있는(‘그리고 작은 삼지창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을 주시네. 하등한 피조물은 단지 그분의 뜻을 자동적으로 수행할 따름이지.”
- 신학이 말하는 기본적인 ‘편재’에 대한 설명에서는 끄집어낼 수 없는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 그런데 이 부분을 읽어가면서 마음이 두근거린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와 보고는 ‘정신이 현황’했다고 했던 그 ‘현황함’을 느낀다.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상당한 타당성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말 그럴듯하다!
33. 임재 vs 회피, 보호 vs 방해(113)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생각이 대개는 달갑지 않다는 점이야. 어디에나 임하시는 그분의 임재에 대한 반증 아니겠나. 내가 기도 중에 하나님을 부르면 그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실 때가 많지 않을까. 아니, 나는 분명 그럴 거라고 보네. ‘하지만 너는 지난 몇 시간 동안 나를 피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들어 올릴 뿐 아니라 낮추고 부정하고 저지하기 위해서도 오시는 거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보호prevent하소서’라는 기도는 방해prevent를 구한 듯 응답될 때가 많다네. 우리가 일부러 회피하는 임재는 다들 알다시피 하나님의 진노의 임재일세.”
34. 노예적 두려움 vs 길들여진 신(114) “노예적인 두려움은 가장 열등한 종교이네. 그러나 노예적인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 신, 안전한 신, 길들여진 신은 공상에 불과하다네.” - 마크 부캐넌이 쓴 [열렬함(YOUR GOD IS TOO SAFE)](규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너무 안전한, 길들여진 하나님...
35. 어른이 된 후에 회심한 이들이 느끼는 기도의 어려움(117) “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 즉 어른이 된 후에 회심한 지식인들은 그렇게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기도를 시작할 수가 없어.” - 모태신앙인 사람들, 아주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을 향해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하고 배려해 줄 필요가 분명 있다!
36. 토마스 아퀴나스 “지푸라기!”(124)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년에 자신의 모든 신학이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네. 혹시 그가 그런 순간을 맞은 게 아니었을까.” -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의 모든 말과 사상은 지푸라기에 불과하게 된다.
37. 상상 or 관상의 문제점(127) “하나는 내가 고고학이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 로욜라와는 달리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옷, 가구, 도구들을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 자신 있게 대입할 수 없네. 그 지방의 하늘과 햇빛마저도 북쪽 지방의 내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네. 그렇다고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체 가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했다가는 시각화라는 시도 전체가 부질없는 일이 돼 버릴 걸세.” -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상상’ 또는 ‘관상’(로욜라의 ‘영신 수련’의 기본을 이루는...)의 현대적 적용의 난점. 그렇게 대단하고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38. 연옥?(160-) “여하튼 나는 연옥을 믿네. 잘 듣게. 종교개혁자들에겐 ‘연옥에 관한 천주쟁이들의 교리’를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네.” - 죽은 자들을 향한/위한 기도의 문제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제... 루이스는 개신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문제가 있는 연옥관(觀)을 소개하며, 정당한 연옥에 대한 이론도 소개한다. 하지만 루이스가 연옥을 지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는 우리의 영혼이 연옥의 ‘정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준에 있어서는 논리적인 근거가 아니라 성경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39. 기도와 의무(167-) “어제의 기도 속에 위로와 기쁨이 넘쳤어도, 오늘의 기도는 여전히 어느 정도 부담스럽게 마련일세. 우리가 기도를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 루이스는 죄, 세상일에 불필요하게 몰두하는 것, 정신훈련을 소홀히 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불건전한 두려움 등을 소개한다. 어쩌면 ‘교리적인 문제들’보다도 이것이 정말로 실제적인 문제일 것이다.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가 완전해진다면,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될 것이다(169). 아직은 ‘학생 신분’(171)인 우리는 어찌되었든 기도에 깨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끊임없이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