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기도 믿음의 글들 24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루이스의 글을 읽을 때마나 느끼게 되는 ‘상쾌한’ 통찰력들로 그득하다! 흐드러진 잔치를 벌인 기분이다. 루이스는 생각을 자극하는 작가다!(괄호 안은 페이지) 생각! 생각!


1. 예배에 대한 통찰력!(8-10) “성직자들은 끊임없이 예배 분위기를 유쾌하게 하거나 밝게 바꾸고, 예배시간을 늘이거나 줄이고, 예배형식을 간소화하거나 복잡하게 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아.

새로움 그 자체는 오락적 가치밖에 없네. 그런데 대다수 교인들은 오락을 목적으로 교회에 가는 게 아니거든. 그리고 이 일을 가장 잘 하도록 해 주는 예배란 오랜 시간 동안 친숙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도 몰입할 수 있는 예배일세. 스텝에 신경 쓰느라 몇 걸음인지 일일이 세어야 한다면 그건 춤추는 게 아니라 춤을 배우는 거라고 해야겠지. 완벽한 교회 예배는 그 형식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예배, 그래서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예배일 거야.

그런데 예배에 도입하는 새로운 요소들이 이것을 방해한다네.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거든. ‘예배를 신(神)보다 더 중시하는 건 지독한 우상숭배일세.’

더 나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네. 새로운 요소 때문에 예배 자체도 아니고 예배 인도자에게만 온통 신경이 쓰일 수도 있단 말일세.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하셨지, ‘내 쥐들로 실험하라’ 혹은 ‘공연하는 개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다.”

- 전적으로 동의한다! 루이스는 마치 현대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후에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현대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해내고 있다!


2. 기도문(기도서)에 대한 생각

1) 최신판으로 만든다는 것(11, 20) “일상어로 된 ‘기도서’라면 시대에 맞춰 계속 달라져야겠지. 그렇지 않다면 결국 이름난 일상어 기도서가 될 테니까. ‘시간을 초월한 영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야. 살아 있는 언어는 절대 시간을 초월할 수 없네.” - 영문학자다운 지적! 문학에 대한 이해는 어쩌면 다른 것들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는지도...

2) 개정할 때의 주의점(11) “나는 기도서에 꼭 필요한 변화가 가능한 한 서서히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이루어졌다면 가장 좋았을 거라고 보네. 셰익스피어 작품의 개정판이 나올 때 철자가 조금씩 바뀌는 것처럼 여기 조금 저기 조금, 한 세기에 사어(死語) 한 단어 정도 바꾸는 식으로 말이야.” - 이런 방식을 성경의 번역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3) 기도문의 유익(20) “첫째, 건전한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준다는 거야. 둘째, 내게 마땅히 기도할 바를 되새기게 해준다네. 끝으로 기성품 기도문은 의식(儀式)의 요소를 제공하네.” - 저자의 견해처럼(“내 경우엔 ‘내 말도 된’ 기도를 주식으로 하고 기존 기도문을 약간 추가하는 것이 가장 낫더라고.” 19) 하는 것이 좋을 듯...


3. ‘스토아 학파의 오류’(18) “가끔 할 수 있는 일을 늘 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 - 좋은 개념이다! 내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일반화의 오류’와 일치하는 듯...


4. 죽은 자를 ‘향한’ 기도(24) & 죽은 자를 ‘위한’ 기도(158-)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요청할 수 있다면, 죽은 자들에게도 그렇게 못할 이유는 없지 않나?” “물론 나는 죽음 자들을 위해 기도하네. 이 일은 내 안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러나고 거의 불가피한 것이어서 이 일을 중단하려면 매우 강력한 신학적 반론이 있어야 할 걸세.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금지된다면 내가 드리는 나머지 기도가 살아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우리 나이가 되면 가장 사랑하는 이들 대부분이 저세상 사람 아닌가. 내가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없다면 하나님과 어떤 종류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겠나?”

-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그리고 생각해본 적조차 없는 논리다! 그동안 루이스의 책을 여러 권 보아 오면서 모종의 ‘차이점’을 느끼긴 했지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전혀 예상 밖이다. 신앙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 배경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기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기에 하나님 외에는 누구를 향해서도 기도하는 것이 불가하며, 죽은 자는 이미 우리의 영역을 떠났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오히려 이것들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가톨릭이나 성공회에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옹호하는 근거 구절은 세 가지다(여러 성인들의 말은 성경 구절만큼의 권위를 갖지 않는 것이므로 그냥 넘어가자). 성경 구절로는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을 언급하는 고린도전서 15:29과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기록하는 베드로전서 4:6이 있다. 하지만 두 구절 모두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가르치지는 않고 있다. ‘유추’의 실마리(그것도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이 교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은 마카비2서 12:45이지만, 이 책은 개신교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외경이기에 ‘교리’의 근거 구절로 사용할 수 없다고 본다. 루이스는 이것들이 잘못되었다는 ‘매우 강력한 신학적 반론’을 요구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이것들이 옳다는 ‘매우 강력한 신학적 반론’이 필요해 보인다.


5. 기도와 몸(28)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몸도 기도해야 마땅하니까.” - 우리는 많은 경우 기도에 있어서 몸의 역할 또는 의미를 간과한다. 루이스의 지적은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6.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기도(30) “전지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기도는 많은 경우 그분에게 뭔가 알려 드리는 내용이라는 거지.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잊은 채로 기도해선 안 된다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하네(마 6:32).” - 기도를 단순히 ‘정보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기도는 ‘정보 제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다. 거기에서 정보는 교제의 매개체로도 사용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시시콜콜 들으시기를 좋아하시는 ‘여성적’ 성향(^^;)도 가지고 계신다.


7. 기도와 조언, 설교(31) “어떤 사람이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사실상 진단에 이어 치료방법을 하나님께 거반 알려 드리는 조언이나 다름없었네.” - 때로 우리는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의 성경 지식이나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설교하거나 조언, 심지어는 책망하는 투로 말하기까지 한다. 기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매우 인격적인 수단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8. 어떤 하나님?(33) “사람이 어떤 하나님을 만나느냐는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어느 정도 달려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 안에서 열리는 문은 그 사람이 노크한 문이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 동감한다. 한참 ‘입신’이나 ‘천국에 갔다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그들이 갔다 왔다는 천국의 모습이 다르다는 점과 관련하여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100%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설사 정말로 갔다 왔다 할지라도 그들은 광대한 천국의 일부분만을 보고 왔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은 ‘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상(像)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9. 신인동형적 표현 vs 추상적 표현(34) “신인동형론적 이미지들이 우리의 약함을 참작한 궁여지책인 반면 추상개념은 문자적 진리인 양 오해하지는 말게. 둘 다 똑같이 궁여지책이고 각각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두 개념이 서로를 교정해 주는 거니까.” - 루이스의 글에서 간간히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통찰력! 그의 ‘시편’에 대한 책을 읽다가도 ‘문서설’에 대한 반론(‘문학’ 전공자도 아닌 사람들이 ‘문학’ 운운하며 ‘문서’를 분류하는 어리석을 지적하는...)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둘 다 궁여지책이라...


10. 마음에 가득한 B vs 허울로 간구하는 A(36) “실제로는 마음이 B에 대한 소원으로 가득 차 있는데 허울뿐인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A를 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지. 우리는 우리 속에 있어야 마땅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하네.” - 좋고 건전한 사상, 그리고 귀에 착착 감기는 좋은 문장!


11. 듣지 않으려 애쓰는 소음(37)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음만큼 크게 들리는 소리도 없다.” - 좋은 ‘단어’, 좋은 ‘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숨은 보화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12. 작은 일들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37) “때로 우리가 작은 일들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체면 때문일 듯 싶네.” - 전적으로 그 이유만을 들 수는 없지만, 간과하고 있던(어쩌면 내심 무시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한다.


13. 첫 번째 감동 vs 열두 번째 감동(41) “하나님께서 영광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 주시는데 우리는 그걸 거부하며 옛날 것만 찾는 거야. 물론 우리는 그것을 얻지 못하지. <리시다스>를 열두 번째 읽으면서 처음 읽던 때의 감동을 다시 느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네. 그렇지만 열두 번째 나름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거야.” - 늘 ‘첫 사랑’을 회복시켜 달라고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첫 사랑은 과연 회복될 수 있는가? 해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사랑을 느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옛날 것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좋지 못하다.


14. 삶 전체를 무제한으로 요구하는 종교(47) “현실생활에서도 종교라는 개념 자체에 위험요소가 들어 있네. 종교라는 단어가 삶의 또 한 영역 즉 경제적, 사회적, 지적, 오락적 영역과 기타 모든 영역에 덧붙여진 여분의 영역이라는 인상을 주거든. 그러나 삶 전체를 무제한으로 요구하는 종교가 삶의 한 영역에 머무를 수는 없네. 종교는 환각 아니면 삶 전체를 포괄하는 것, 둘 중 하나이지. 우리에게 종교와 관계없는 활동이란 없네. 종교적 활동과 반(反) 종교적 활동만 있을 뿐이야.” - 심지어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도 다르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기독교는 ‘삶의 일부분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포괄하는 삶의 체제이다!


15. “조용히 해! 수다쟁이야!”(54) “우리의 양심이 당면문제를 다루지 않고 애매하게 잘못을 지적하거나 잘했다고 칭찬하기만 한다면, 허버트처럼 양심을 향해 ‘조용히 해, 수다쟁이야’라고 말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네.” - 어쩌면 상황에 맞는 문장들을 이렇게 척척 갖다 대는지!


16. 요청은 요청!(56) “주님이... 단서를 달고 기도하셨다고 해도 그분 기도에서 청원적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세. 요청은 요청이네. 다이아몬드가 연수정보다 훨씬 값진 것이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연수정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네.” - 청원 기도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종류의 기도이다.


17. 십자가를 피한 선례!!!(65)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순간, 주님께 긴장과 염려가 찾아왔네. 희망을 품을 때 찾아오는 고통들이지. 주님은 그 극한의 공포를, 어쩌면 혹시라도 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품게 되신 거야. 선례(先例)가 있었거든. 바로 이삭이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그것도 마지막 순간에 이삭은 목숨을 건졌네.” -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향! 내용! 그러나 이 이야기는 충분히 타당성을 가진다!!!


18. 두 번씩 토론한 페르시아인들(69) “모든 문제를 두 가지 상태 모두에서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싶어.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모든 일에 대해 두 번씩 토론했다지. 술에 취한 상태로 한 번, 정신이 말짱한 상태로 또 한 번.” - 다방면의 시각을 위한 시도...


19. 소리 내어 기도하기 & 소리 내어 읽기(71) “제자들이 기록으로 남긴 기도 내용을 소리 내어 말한다면 채 3초도 안 걸릴 걸세. 주님은 ‘돌 던질 만큼’만 떨어져서 기도하셨네. 밤이었으니 사방은 고요했어. 그리고 주님이 큰 소리로 기도하셨을 거라고 확신하네. 당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리 내어 했거든. 그로부터 몇 세기가 지난, 훨씬 발전된 사회에서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자네도 기억하지 않는가. (속으로) 뭔가를 읽고 있는 암브로시우스 바로 옆에 섰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깜짝 놀랐다는 대목 말일세.” -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도 책 읽는 재미의 하나다. 소리 내어 하는 기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소리 내어 읽는 것과 관련된 정보는 새롭다!


20. 펠라기우스주의 vs 어거스틴주의(75) “엄밀한 인과적 사고방식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적용할 때 그것은 더욱 부적절해지네. 그 신비로운 지점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과적으로 정의하려 한 시도가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한 커다란 수수께끼를 만들어 냈네. 그러나 성경은 그 문제 위를 유유히 날아가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것은 순수한 펠라기우스주의일세.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건 순수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야. 이 두 구절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세운 전제들 때문일 수도 있네.” -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성경이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믿는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어느 것이 우선적이고, 어느 것이 더 무게를 가지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아직도 남아 있지만... 그러나 둘 다 인정하는 것은, 양쪽 편 모두에 의해서 공격 받는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21. de-mythologing vs re-mythologing(79-) “추상 개념은 거의 전적으로 소극적 가치밖에 없네. 하나님의 발자국은 바위나 광물 찌꺼기 더미보다는 옥토에서 더욱 잘 보이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기독교의 ‘비신화화 de-mythologing’는 ‘재신화화 re-mythologing’가 되기 십상이야. 빈약한 신화가 풍부한 신화를 대체하는 꼴이지.” - 불투만의 비신화화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재신화화’는 처음 듣는다. 그런데도 왠지 낯설지가 않다. 이것은 신학의 영역 이외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개념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작가는 성경의 가르침을 많은 경우 ‘비신화화’시키지만 그것은 사실 ‘재신화화’이며, 빈약한 신화로 풍부한 신화를 대체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겠다.


22. 우리 기도를 ‘참작/고려’하시는 하나님(80) “우리의 기도를 ‘원인’으로만 보면 청원기도의 중요성이 오로지 요청한 것을 이루는 데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걸세. 그러나 신앙생활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참작’ 또는 ‘고려’하시는 것이 청원한 것을 주시는 것보다 더 중요하네.” - 우리는 기도의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가?


23. 경배/관상 기도에 대한 글이 청원기도에 대한 글보다 많은 이유?(88-) “어째서 경배기도와 관상기도를 주제로 쓴 글은 많으면서, 청원기도에 관해서는 ‘미숙하고’ ‘유치한’ 글도 찾아보기가 어려운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거네. 경배기도와 관상기도가 더 고상한 형태의 기도일 수도 있겠지.” - 기본을 낮추어 보거나 우습게 보는 것은 위험스럽다.


24. 신비주의자들은 과연 ‘같은 것’을 발견했는가?(96-) “요즘 널리 퍼지고 있는 정말로 그럴싸한 주장이 있다. 온갖 다양한 종교적 배경에서 출발한 신비주의자들이 모두 동일한 것을 발견한다는 거야. 그렇게 보면 신비주의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가 되겠군. 그리고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들은 망상에 불과하거나 기껏해야 초월적 실재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수많은 현관일 뿐인 거지.

그렇지만 나는 이 주장의 전제가 의심스럽다네. 플로티누스와 노리치의 줄리안과 십자가의 성 요한이 정말 ‘같은 것들’을 발견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내용의 유사성을 일부분 인정한다 해도, 모든 신비주의의 진정한 공통 요소는 따로 있어. 우리의 통상적인 시공간 의식과 논증적 지성이 잠시 깨어진다는 점이야. 이런 부정적 경험의 가치는 결국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는 긍정적 경험의 본질에 달려 있는 걸세.

나는 신비 체험을 결코 환상으로 여기지 않네. 그런 체험은 죽기 전에 소위 ‘이 세상’을 벗어날 길, 무대 밖으로 나갈 길이 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해. 하지만 여기를 벗어나 어디로 간다는 걸까? 항해를 시작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지. 참된 종교가 먼저 있어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신비주의도 가치가 있는 걸세. 신비주의가 나타난다고 그 토대가 되는 종교가 쓸모없어지는 건 아니지.

누군가가 악마적 신비주의나 마약이 위대한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체험과 구별되지 않는 체험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해도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을 걸세. 출발은 모두 똑같은 거니까. 항해의 절정은 상륙일세. 그가 신비주의를 실천했다는 사실이 그의 거룩함을 입증하지는 못하지.”

- 신비주의, 특히 신비 체험에 대한 루이스의 지적은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매우 정확하고 받아들일 만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유명 작가의 경우 그의 책 [타나토노트]에서 ‘영계 탐사’의 결과 세상의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모두가 종교와 신앙과 관계없이 ‘영계’(소설에서 말하는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가정’ 내에서 가능한 일이다. 루이스의 지적대로 말한다면... ‘영계 탐사’를 시도한 이들은 ‘같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25. 영적인 것에 대한 잘못된 욕구(99)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탐욕스러운 욕구가 있을 수 있는 거야. 우리의 다른 욕망들처럼 그 욕구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네.” - 영적 욕구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물론 ‘중독’(addiction)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사랑’이나 ‘신앙’도 중독된다는 부분은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영적 욕구... 잘못된 영적 욕구... 그것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26. 중보기도의 악용/약점(100) “내가 중보기도를 쉽게 생각하는 데는 그리 선량하지 못한 이유가 두 가지 있어. 하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해 줘야 할 일을 기도로 때우려 할 때가 많다는 거야. 또 다른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네. 자네가 습관적인 죄를 이겨 낼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자네를 위해 기도한다고 해보세. 글쎄, 그럼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ㄴ과 자네의 몫이 되네.” - 중보기도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얻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는 하나님이 우리가 중보기도하는 대상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채 함부로 중보기도하지 말 것을 배웠고... 여기에서는...


27. 하나님으로부터의 고립(104) “아널드는 우리 각자가 ‘인생의 바다’ 위에 뜬 ‘고립된’ 섬이라고 말했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와 ‘고립될’ 순 없네. 내가 자네와 분리된 것처럼 하나님과 분리된다면 멸절하고 말 걸세.” - 불신자의 상태와 신자의 상태를 구별하면서 주의해서 생각해야 하는 주제다. ‘일반은총’적인 측면에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보편적인 개념을 벗어나면,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어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로 나뉜다.


28. 죄란...(104) “모든 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어넣으신 에너지를 뒤틀어 버린 것임을 기억하는 거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부으시는 포도주를 못 쓰게 만들고, 우리를 악기 삼아 연주하기 원하시는 곡조를 죽여 버리네. 우리는 그분이 그리기 원하시는 자화상을 우스꽝스럽게 망쳐 버린다네. 따라서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죄는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지.” -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까지도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 이유가 이 부분에서 설명될 수 있을 듯... 물론 그것이 답변의 전부는 아니지만...


29. 범신론의 성경적 변형(106) “범신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만유all이시네. 그러나 창조는 하나님이 만유가 되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보여주네. 그분은 ‘만유 안에 만유’가 되려to be all in all 하시네.” - 절묘한 변형!


30. 하나님과 피조물에게 동일한 ‘존재’라는 단어 사용은 불가!(110) “나는 오언의 견해를 고수하겠네. 천사로부터 원자에 이르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다르다네. 비할 바 없이, 같은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이 다르네. 심지어 ‘존재하다’라는 단어 하나도 하나님과 피조물에게 정확히 똑같은 의미로 적용할 수 없어.” - 신학에서 말하는 ‘무한한 질적 차이’에 대한 친절한 설명. ^^;


31. 그리스도인의 두 전선(111)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적어도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네. 범신론자들 사이에 있을 때는 피조물의 구별됨과 상대적 독립성을 강조해야 하지. 이신론자들 사이에 있을 때는, 또는 울리치의 평신도들이 하나님을 실제로 하늘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곳에서도 내 이웃, 개, 양배추 밭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해야 하네.” - 균형!


32. 편재의 방식!(111-112) “또한 편재는 하나님이 모든 것에 계시지만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구분을 흐려 놓는다네. 하나님이 축성된 떡과 포도주 안에 계신 방식과 사람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고, 악인과 선인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고, 사람과 짐승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고, 짐승과 나무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고, 나무와 무생물 안에 계신 방식이 다르네. 고등한 피조물일수록 하나님이 그 안에 더 계시기도 하고 덜 계시기도 하다는 걸세. 은혜로는 더 많이 계시지만, 힘 자체로는 덜 계시거든(일종의 자진퇴위랄까). 하나님은 고등한 피조물에게 그분의 뜻을 원할 수 있는(‘그리고 작은 삼지창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을 주시네. 하등한 피조물은 단지 그분의 뜻을 자동적으로 수행할 따름이지.”

- 신학이 말하는 기본적인 ‘편재’에 대한 설명에서는 끄집어낼 수 없는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 그런데 이 부분을 읽어가면서 마음이 두근거린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와 보고는 ‘정신이 현황’했다고 했던 그 ‘현황함’을 느낀다.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상당한 타당성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말 그럴듯하다!


33. 임재 vs 회피, 보호 vs 방해(113)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생각이 대개는 달갑지 않다는 점이야. 어디에나 임하시는 그분의 임재에 대한 반증 아니겠나. 내가 기도 중에 하나님을 부르면 그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실 때가 많지 않을까. 아니, 나는 분명 그럴 거라고 보네. ‘하지만 너는 지난 몇 시간 동안 나를 피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들어 올릴 뿐 아니라 낮추고 부정하고 저지하기 위해서도 오시는 거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보호prevent하소서’라는 기도는 방해prevent를 구한 듯 응답될 때가 많다네. 우리가 일부러 회피하는 임재는 다들 알다시피 하나님의 진노의 임재일세.”


34. 노예적 두려움 vs 길들여진 신(114) “노예적인 두려움은 가장 열등한 종교이네. 그러나 노예적인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 신, 안전한 신, 길들여진 신은 공상에 불과하다네.” - 마크 부캐넌이 쓴 [열렬함(YOUR GOD IS TOO SAFE)](규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너무 안전한, 길들여진 하나님...


35. 어른이 된 후에 회심한 이들이 느끼는 기도의 어려움(117) “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 즉 어른이 된 후에 회심한 지식인들은 그렇게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기도를 시작할 수가 없어.” - 모태신앙인 사람들, 아주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을 향해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하고 배려해 줄 필요가 분명 있다!


36. 토마스 아퀴나스 “지푸라기!”(124)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년에 자신의 모든 신학이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네. 혹시 그가 그런 순간을 맞은 게 아니었을까.” -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의 모든 말과 사상은 지푸라기에 불과하게 된다.


37. 상상 or 관상의 문제점(127) “하나는 내가 고고학이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 로욜라와는 달리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옷, 가구, 도구들을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 자신 있게 대입할 수 없네. 그 지방의 하늘과 햇빛마저도 북쪽 지방의 내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네. 그렇다고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체 가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했다가는 시각화라는 시도 전체가 부질없는 일이 돼 버릴 걸세.” -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상상’ 또는 ‘관상’(로욜라의 ‘영신 수련’의 기본을 이루는...)의 현대적 적용의 난점. 그렇게 대단하고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38. 연옥?(160-) “여하튼 나는 연옥을 믿네. 잘 듣게. 종교개혁자들에겐 ‘연옥에 관한 천주쟁이들의 교리’를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네.” - 죽은 자들을 향한/위한 기도의 문제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제... 루이스는 개신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문제가 있는 연옥관(觀)을 소개하며, 정당한 연옥에 대한 이론도 소개한다. 하지만 루이스가 연옥을 지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는 우리의 영혼이 연옥의 ‘정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준에 있어서는 논리적인 근거가 아니라 성경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39. 기도와 의무(167-) “어제의 기도 속에 위로와 기쁨이 넘쳤어도, 오늘의 기도는 여전히 어느 정도 부담스럽게 마련일세. 우리가 기도를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 루이스는 죄, 세상일에 불필요하게 몰두하는 것, 정신훈련을 소홀히 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불건전한 두려움 등을 소개한다. 어쩌면 ‘교리적인 문제들’보다도 이것이 정말로 실제적인 문제일 것이다.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가 완전해진다면,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될 것이다(169). 아직은 ‘학생 신분’(171)인 우리는 어찌되었든 기도에 깨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끊임없이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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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리더십
헨리 블랙커비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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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적’ 리더십에 대한 의의(意義)의 제기는 명확했다. 처음부터 방향과 한계가 분명하게 제시되었고, 그것은 독자가 분명한 기대를 가지고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2. 주옥같은 문장들, 가르침들이 많이 나온다. 현대의 리더십의 문제를 과감하게 지적하거나(7, 22, 33), 영적 리더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어떻게 영적 리더로 세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읽어갈수록 동감되는 부분을 많이 발견한다. 책을 읽으면 느끼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이처럼 동일한 생각을 가진 저자를 만나는 일이다!

3.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떠오른 개인적인 생각... 이전 교회에 있을 때에 K집사님이 나에게 이 책이 참 좋다며 추천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스왈드 스미스의 [영적 지도력] 책도 참 좋다며 그 책을 추천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했던 일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냥 그러냐고, 읽어보겠다고 대답해도 되었을 터인데... 나는 왜 그렇게 반응하지 않고 마치 경쟁하듯이, 맞받아치듯이 다른 책을 추천했을까? 그때에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상대방을 끌어내리려는 의도 없이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내가 그렇게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나의 내면에 숨은 또 다른 동기... 그것은 아마도... 책과 관련해서는 내가 누구보다도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보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다음에라도 혹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냥 순순한 마음으로 그러냐고 나도 한 번 읽어보겠다고 답변할 수 있기를...


4. 이 책을 읽으면서 배운 것들...(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목자 vs CEO(22, 83, 102, 156, 286) “이전의 교회가 ‘지상 명령’에 주력했다면 오늘의 교회는 ‘사명 선언문’을 채택한다. 이전의 교회가 ‘교제권’을 얘기했다면 현대 그리스도인 리더들은 ‘팀’을 구성해 팀 조직을 통해 사람들을 돌본다. 이전의 교회가 사람들을 예배로 오게 하려고 교회 간판을 세웠다면 오늘의 교회는 최신 마케팅 원리를 활용해 지역 사회에 접근한다. 대형 교회(일부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목사들은 목자보다는 CEO처럼 군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낸 뒤 그 필요에 부응하는 제품을 개발하는 세상 기업체에서 이것은 당연히 수익성 재고에 좋은 오랜 관행이었다. 이것을 교회들이 시도하고 있다. 필요에 기초한 비전은 분명 장점이 있다. 그러나...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성공하는 기업들은 전적으로 시장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업이 때로 시장을 움직인다.” - yes & Amen! 교회가 세상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움직여야 한다!!!

“교회 프로그램으로 삶이 바뀐 예는 종래 없다. 하나님이 주도하시지 않는 한 교회 활동은 부산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목사님이 한 일이 그렇게 잘못이라면 하나님이 왜 목사님한테 복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물론 이것은 양적 성장과 하나님의 복을 동등시한 결과다. 성장은 건강한 교회의 불가피한 현상이기는 하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복 주심 없이도 수적으로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즉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데는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마케팅 담당자는 사람을 끌어 모을 수는 있지만 교회를 키울 수는 없다. 숫자적 성장이 하나님이 주신 복의 확실한 징표라면 다수의 이단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하나님도 인간처럼 군중에 감격하신다고 믿고 싶은 유혹이 있다.”

“하나님이 목사들을 수입이 적은 교회로 부르시는 경우는 한 번도 없고 항상 수입이 더 많은 교회로만 부르시는 것 같으니 왜 그럴까?


2) 비전과 계시(38, 39, 92-95, 99, 107) “영적 리더십의 최대 장애물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공격적 목표를 정하고, 원대한 꿈을 꾸고, 거창한 비전을 내놓는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그 일에 합세하여 자기 노력에 복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며 구한다. 이것은 영적 리더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눈에 보이는 비전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살아가기 원하신다. 비전과 계시는 다르다. 비전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계시는 받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 리더들이 세상 식의 비전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을 놓치고 만다. 그저 피상적으로 잠깐 기도한 뒤 바로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성경의 관련 구절을 몇 군데 찾아보고는 급히 목표 설정 단계로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그 과정에 기도와 성경 말씀을 넣었기 때문에 자기 계획이 하나님한테서 온 줄로 착각한다.”

“영적 리더의 역할은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 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함에 있어서 아랫사람들에게 선봉이 되는 것이다.”

“영적 리더들은 사람들이 비전을 받아들이도록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다. 그것은 비전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비전을 주입하는 과정 자체가 잘못이다. 영적 리더는 비전을 주입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나누고 성령이 그들의 마음에도 똑같은 비전을 확증해 주시리라 믿을 뿐이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일과 약속에 관한 것이라면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에 확증하신다. 비전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3) 하나님의 뜻과 인내(72, 96, 97, 149, 151, 152) “두려움에 빠져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릴 때 하나님은 언제나 어김없이 이루어 주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기다릴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적이다. 거기에는 토의나 수정의 여지가 없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리에 자신의 그럴듯한 생각을 끼워 넣고 싶은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좀 더 성취되기 쉽게 하려고 하나님의 계획을 수정한다든가 과정을 서두르려는 것은 영적 리더십이 미숙하다는 증거다.”

“이동 자체에 매달리느라 목적지를 보지 못하는 리더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랄 정도다.”

“영적 리더의 일차적 목표는 목표 달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리더는 목표를 달성하고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는 어떤 일을 하는가 못지 않게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4) 영적 리더의 기초 - 성품, 만남(75, 128, 233, 252) “리더십 개발의 최우선 진리는 하나님의 지명이 언제나 성품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성품이 훌륭할수록 큰 일이 맡겨진다(눅 16:10).”

“삶이 변화될 만큼 깊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영적 리더가 될 수 없다.” - 단순히 하나님을 ‘만났다’는 정도가 아니다! ①삶의 변화와 ②깊이가 요구되고 있다!

“리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용을 분명히 알 때까지 하나님과 단 둘이 서두르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과 교제가 없는 영적 리더는 자기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5) 리더와 성공, 시간, 계획(81, 123, 237, 245, 246) “성공은 리더의 가장 큰 적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이 전에 특정 방식으로 강력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시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오늘날 많은 조직들이 특정 업무 방식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방법이 여전히 효과적이어서가 아니라 어제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공의 저주이다.”

“영적 성공은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문제인 것이다.”

“리더의 효율성은 시간 관리 능력에 비례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리더라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고생을 면할 수 없다. 훌륭한 리더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안다. 또 영적 리더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의 분량이 그분이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데 충분함을 안다.”

훌륭한 리더는 뛰는 것이 아니라 무난한 속도를 정해 놓고 계속 꾸준히 걷는다(피터 드러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기 때문이다.”

“계획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다.”


6) 판단의 기준(89, 287, 145, 141, 218, 287, 288)!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인가?”

“영적 리더는 늘 자신이 읽는 내용을 성경의 영원한 지혜에 비추어 평가한다. 아울러 성령의 인도를 받아 생각하며, 사회ㅏ의 최신 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자기 생각의 기초로 삼는다.”

“워런 베니스는 오늘날 너무 많은 리더들이 ‘지성의 금욕’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행동만 있을 뿐 바기 행동이 적절하고 효과적인지 좀처럼 멈춰 생각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보다 나는 설교를 줄이고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싶다(빌리 그레이엄).”

“훌륭한 리더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다양한 시각을 고루 듣는다.”

“자신의 사고를 넓혀 줄 책과 기사, 위대한 인물과 사상가들의 전기를 읽는다. 시중에 범람하는 간편 요약의 대중 서적만 골라 읽는 대신 자신의 생각에 도전을 가하고 참신한 통찰을 줄 수 있는 저자들을 찾는다. 리더에게 최근 무슨 책을 읽었는지 물어보라. 진정한 리더라면 현재 익히고 있는 내용을 금방 말해줄 것이다.”

“리더는 독서할 뿐 아니라 사고하는 사람이다. 참된 리더는 주변 사건들을 충분히 생각하고 소화한다.”

찰스 피니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 이야기(125). - 나는 개인적으로 피니를 보며 많은 도전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으며(사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사용하실 수 있다!), 그가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음을 안다. 다만, 나는 그가 자신을 통해 나타난 그러한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올바른 수단을 사용한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7)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35, 230, 259, 261)

“ 리더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시에 응답하는 법을 깨우쳐줄 필요가 있으나 그렇다고 조직을 그들 수준에 맞춰서는 안 된다. 훌륭한 리더는 연약한 구성원들을 버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조직을 그들에 맞춰 하향 조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하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길가에 버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선두를 맡기지도 않는다. 노련한 리더는 리더십의 이 절묘한 균형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리더는 조직에서 의욕 없는 구성원을 전체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리더는 절대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성장하는 생산적인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려 시간을 지혜롭게 투자할 뿐이다.”


8) 잘못된 권리/리더에 대한 복종 문제(117) “권위에 있는 사람이 옳은지 아닌지는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직접 책임질 일인 까닭이다. 아랫사람들은 그저 순종만 하면 된다. 주님은 잘못된 순종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대신 위임하신 권위자에게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물으신다. 그러나 불순종은 반역이다.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은 그 점에서 하나님께 책임진다.” - 이 부분은 반론의 여지가 많다. 이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태도이기는 하지만... 나는 사무엘 루더포드나 디트리히 본회퍼, 프란시스 쉐퍼의 태도가 더 성경적이라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잘못된 리더에 대한 ‘불복종권’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얻은 자가 하나님을 거슬러 그 ‘권세’를 행사한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 그 ‘권세’를 휘두를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한다.


9) 리더와 기도(179, 184, 214) “리더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당연 기도다.”

“기도하는 리더 밑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다. 리더는 늘 사람들에게 자신이 기도해 줄 부분을 묻고 기도가 응답되면 사람들과 함께 기뻐해야한다.” - 적용할 것!

“기도 생활을 간과하는 것은 리더의 무모한 교만이다.”


10) 리더와 긍정적인 태도(202, 208, 284) “비관적 리더란 표현 자체가 모순이다. 리더는 역할의 본질상 긍정적 태도를 심어 줘야 하는 자다. 성공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최악의 사태를 겁내는 리더는 당장 태도를 바꾸거나 참 리더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 지레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면서 그것을 현실 감각으로 착각하는 리더들이 있다.”

“위대한 리더들은 변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황을 호전시킨다. 현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닥쳐오는 난관을 못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낙심하지 않을 뿐이다. 위대한 리더는 아랫사람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고 비난하는 대신 그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데리고 간다.”

“리더는 절대 냉소적 태도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영적 리더의 냉소적 태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뜻이다. 또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다.”


11) 리더와 사람, 위임(168, 258, 248, 303, 304, 321-323).

“리더는 타인의 성공을 인정한다. 리더가 공로자를 따로 명시하지 않으면 은연중 성공이 리더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 매우 실제적 지침이다!

“리더가 되려면 사람에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리더가 위임해서는 안 되는 일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직을 그분 뜻대로 이끄는 것이다. 업무 수행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도 리더 고유의 책임이다. 이런 중요한 책임에 주력할 시간을 내기 위해 리더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위임해야 한다.”

“나이든 리더는 차세대 리더를 잘 축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이든 리더는 차세대 리더에게 최고의 지지자가 돼주어야 한다. 후임자를 간섭하고 비판하는 일을 각별히 삼간다면 그들은 차세대 리더에게 값진 지혜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위대한 리더는 주변 사람들까지 훌륭하게 만든다. 리더는 자신의 성품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람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고 조직 없이 지속되는 일은 없다(진 모네트).”

“중요하면서도 흔히 간과되는 리더의 책임으로 후임자가 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12) 리더가 주의할 것들

탁월함(153) “탁월함을 매사에 완벽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다.”

어려움 vs 기회(230) “이런 리더는 어려운 문제가 사라지기를 바라며 일을 연기할 때가 많은데, 안타깝게도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어려움이 아니라 기회일 때가 많다.”

자만!(278) “젊은 리더들은 아직 경험을 통해 배운 바가 없기에 자신만 믿는 덫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마땅히 물정을 알 만한 나이든 리더들도 자만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미 성공의 이력이 있는 만큼 남의 조언과 지원 없이도 잘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3) 리더와 비판(290, 292, 293) “비판을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리더십을 넘보지 말 일이다. 어떤 행동을 취하든 비난이 불가피하기에 리더의 선택은 그만두든지, 하나님이 입증해 주시리라 믿고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밀고 나가든지 둘 중 하나이다.”

“참된 리더는 자신의 인기보다 바른 일을 행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비판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14) 좋은 tip!

결정하지 않겠다는 결정(167)이라는 내용은 은 내게 큰 도전이 되었다!

떠남(172) “리더가 자리를 떠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는 오직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가 있을 때뿐이다. 리더 자리를 떠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버리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자문해 보아야한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176)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지켜보는 세상에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낼 때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리더와 모범에 대한 자질구레하게 보이는 내용들(188-)은 매우 실제적이다! 특히 트루먼 이야기(200)는 내게 큰 도전을 주었다.


15) 신임 목사가 부임한 교회의 역사를 살피는 것의 중요성(142, 222, 223)에 대한 지적은 매우 유용하게 생각된다.

“신임 목사가 임지에 도착하면서 하나님도 자기와 함께 도착하셨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님은 진공 상태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신임 목사가 이전 회의록을 쭉 읽으면서 교인들이 현시점까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느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오래된 교인들과 대화하거나 교회 역사를 읽어 보는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 행동에는 지금껏 교회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새 목사가 경솔하게 팽개치지 않는다는 것을 교인들에게 보여 주는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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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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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무]를 읽은 지는 한참 되었지만 그 책을 읽으면서 여러 방면으로 사고(思考)에 자극을 받았던 터라 기대감을 가지고 구입한 책이다. 하지만 기대에 비해서 책을 읽는 즐거움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주를 항해하는 초대형 범선, 그 안에 탄 14만4천명(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를 반영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천년동안의 여행(이것 역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년왕국을 반영하는 것일까?)...

책은, 베르베르의 책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파피용이 발진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조금은 지루한 듯도 하지만 그런대로 읽을 만하다. 2부는 발진 이후 목표로 했던 행성까지의 여행 과정을 다루는데, 1부가 좀 지루한 느낌이었다고 하면 2부는 천년의 기간을 지나치게 간략하게 묘사하고 지나간다는 느낌이다. 3부는 그나마 좀 새로운 발상들을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인간]에서 보게 되는 구도가 적용되면서도 그것을 조금 비틀어 보이고는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에야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발견하게 되는 창세기와 또 그와 관련된 유대의 전설에서 채용한 이야기의 변용(變容).

2. 실험! 이것은 실험이다. 사람이 세대교체가 빠른 동물이나 식물을 놓고 몇 대에 걸친 실험을 하듯... 천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기록이다. 그러나 정작 그 실험의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제한’된다.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상상력이 튀어 나가는 방향을 예상할 수 있는가?), 다른 한 편으로는 작가의 생각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용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베르베르가 그동안 썼던 책들의 내용들이 부분부분 채용되고, 그 가운데서 발견되었던 작가의 경향성은 이 책 전반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파피용에 승선시킬 필요조차 없다고 배제되었던 부류(정치인, 군인, 그리고 종교인)... 그렇지만 이들은 천년의 역사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출연한다. 그리고 14만4천의 인류는 ‘자연스럽게’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6명으로, 그리고 다시 2명으로 줄어든다.

한편 작가는 이야기의 결말을 의도적으로 ‘창세기’와 그와 관련된 유대 전승들과 연결시킨다. 야훼, 아담, 릴리트, 뱀, 이브(에와-하와)... 작가는 성경의 내용을 ‘비신화화’(de-mythologie) 한다. 하지만 작가는 결국 그렇게 해서 스스로 벗겨낸 이야기를 다시금 ‘재신화화’(re-mythologie)하고 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가서 한 마디 한다.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렇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인류 역사의 ‘반복’에 대한 기록에 불과하다. 그토록 탈출하고 싶어 했지만 결코 탈출할 수 없었던 ‘인간성’! 과연 반복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단지 ‘소망’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3. “사람들에게는 노예 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 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216p) 엘리자베트의 말이다. 사람의 심성, 마음이 가는 길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자유를 두려워하는...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것이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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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 DVD 세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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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베르베르의 책 가운데 처음으로 보는 ‘희곡’이다. 하지만 그동안 보아왔던 베르베르의 글들에 비하면 그다지 특별함이나 독특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2. 왜 책의 제목을 [인간]이라고 했을까 생각해본다. 지구가 멸망한 후 최후로 남은 두 인간... ‘유리 감옥’ 안에서 보여지는 두 사람의 다양한 모습들... 지구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외계인 앞에서는 ‘유리 감옥’ 안의 애완동물로 전락할 수 있는 존재...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아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보다는 그냥 우리 생각에 어떤 충격 내지는 새로운 시각(‘외래적 시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3. 지구의 멸망이나 최후에 남은 두 사람의 남녀,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갈등과 화해 등의 구도는 [파피용]에 나오는 구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

4. “의심을 의심하면 믿음이 생길 거야.”라는 사만타의 말(37p). 흠... 과연 의심을 의심하면 믿음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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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천사들의 제국]에 나오는 자끄가 소설을 쓰면서 건축물의 구조를 채용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것을 보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뇌]를 읽으면서 그것이 가지는 구조를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개의 이야기 흐름이 ‘>’ 형태로 점점 좁혀지면서 만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도 단순히 보였고 다시 두 개의 반원이 겹쳐지는 구조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나선형 구조를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도 건축학적인 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책. ^^

2. 인간과 컴퓨터를 비교하는 내용(꿈과 인공 의식... 310p)은 뇌와 컴퓨터를 비교하는 내용(467p)과 함께 묶여지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가능하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

3. 상권에서 광기가 ‘창조적 에너지’로 소개된 반면(259p), 하권에서는 ‘용’으로 비유되고 있다(362p). 물론 결국은 그것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용’의 비유는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4.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 중의 하나는 영혼을 평화롭게 하는 권능이 고해 신부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나 정신분석가에게 맡겨져 있다는 겁니다.”(384p)로 시작하는 내용에는 상당히 공감이 간다. 평소에 생각하던 내용과도 일치하고... 다만 이 이야기를 하는 데우스 이라이가 뤼크레스를 속이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에, 이러한 발언 역시 모종의 ‘거짓’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 아쉽다. ^^;

5. “데카르트가 데카르트주의자가 아니었듯이, 에피쿠로스는 에피쿠로스주의가 아니었던 셈이군요.”(386p)라는 말은 또 다른 ‘지적 즐거움’을 준다.

6. 무책임한 소설가들에 대한 언급(476p)은 베르베르식의 유머... ^^

7. 컴퓨터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484p)는 [천사들의 제국]에 나오는 ‘컴퓨터 교황’ 이야기의 발전된 형태인 듯...

8. “양심이 빠진 과학은 영혼의 폐허일 뿐이다.(라블레)”(5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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