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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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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을 볼 수 있어. 하지만 문제는, 그들도 나를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불안한 낙원> p209


본다는 것은 시선을 상대에게 고정시키는 것 이상으로 상대의 표정, 행동을 보고 상대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행위이다. 본다는 행위가 상대의 실체를 어느정도 드러낼지 알 수 없다. 내 시선이 그 안에 섞여들어가서 공유되는데 어디까지가 내 시선이고 어디까지가 상대의 존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내가 파악한 상대는 상대이면서 아직 나다. 내가 아는 만큼 상대를 본다. 내가 겪은 일 만큼 상대가 보인다.  

<불안한 낙원>의 한나가 아프리카 땅에서, 흑인들도 백인들도 아닌 경계선에서 모두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떤 권력 밑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 땅에서 백인으로서, 부유한 사람으로서 군림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사람을 신뢰하고 싶어하기에, 사람들을 신뢰하려고 하고, 사람들이 신뢰를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백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놓은 체계 안에 갇혀 있다. 

그녀는 낯선 아프리카 땅에서 얻은 강자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를 끊임없이 위협하거나 이용하려는 주변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백인으로서 흑인을 차별하면서 두려워했고, 백인에게 핍박받는 흑인을 보면서 가난한 처지이면서 약자였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녀의 삶 속에서 다양한 계층의 감정을 경험했고, 주어진 권력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녀는 나뉘어진 세계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려고 했기에 그 위화감을 가볍게 넘기지 못했다. 사람을 신뢰하려고 했기에 신뢰가 불가능한 사회의 단면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 곁에 다가오는 사람들이, 그녀가 신뢰하려는 사람들이 실재와 말을 다르게 사용한다는 것을 바라보았다. 흑인은 백인의 잔혹함을 두려워하여 말을 삼키고, 백인은 흑인이 연합하여 복수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유색인종은 이 무언의 규칙을 깨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피하는 말만 내뱉는다. 이들은 ‘불신’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같은 그룹 사람들끼리 만든 규칙을 지키면서, 그것을 유지해야 그룹이라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불신하는 상황을 막으려고 규칙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깨뜨리려는 사람을 배척하려고 한다. 서로는 상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거울이 되지 못하고, 불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다. 

그녀에게 매음굴은 ‘불안한 낙원’이었다. 잠시 머물다 갈 곳이었지만, 나중에 그녀가 그곳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아무도 그녀를 거스르지 않았고, 돈이 많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 상황 자체가 그녀에게 신뢰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서도 모순이 생겼다. 그녀는 몸을 파는 사람들의 이익을 챙겨야 하고 그것이 그들의 공동의 목표였는데, 그녀는 여성으로서 그 일을 지지할 수 없었다. 그 상황 자체가 이미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백인 남편에게 배신당하여 그를 살해한 흑인 여성을 돕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매음굴을 찾지 않게 되고, 매음굴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들도 그녀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그들의 차별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연결될 수도 있는데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돈이 많고 시간이 많은 한나는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들에게는 생계를 포기하면서까지 그 일을 할 이유가 없다 느낄 수도 있었나보다. 


이성복시인 무한화서 397번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어젯밤 방 안에 들어온 벌레를 살려주려고, 쓰레받기에 쓸어 담고 창을 열어 던져주었어요. 그 틈에 나방 한 마리가 들어와 휘젓고 다니기에, 빗자루로 때려잡아 바깥에 내버렸어요. 지금까지 제가 한 좋은 일은 늘 그런 식이었어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릇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세상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고, 세상을 품으려면 어떤 것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것이 때때로 내 욕구를 배신하는 일일지라도. 거대한 생명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사는 길은 그뿐인걸까 하고 의문을 품었지만 반박할 길은 없었다. 나는 최근에 이 의문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내가 육체를 가지고 이 몸뚱아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 한, 나는 이 안에서 숨쉬어야 한다. 이 몸뚱이를 지키고, 이 몸뚱이와 관계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면, 누군가를 배척할 수밖에 없고, 때때로 그건 누군가의 욕구를, 나아가 생계를 위협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최대한 자제하겠지만, 내 손에서 벗어나 벌어진 일들 모두를 내가 책임지고 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나쁘고 싶지 않아도 “복잡하게 나쁜 사람”(김영하가 쓴 표현)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한나의 처지도 이와 비슷해보였다. 그녀 자신과, 타자를 위해서도 그 일이 결과적으로 좋을 지는 몰라도, 어떤 규칙 아래서는 그것을 당장 동의할 수 없는 상황. 


결국 한나는 경계선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싸움은 전적으로 그녀가 강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싸움이고, 그렇기때문에 한편으로는 위선적이고 비극적이었다. 

한나는 그 경계선에서 모두를 신뢰하고 싶었기 때문에 배척당했고, 결국 모두를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되려 누구에게나 배척당하는 걸까. 그저 집단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 혹은 우연이 없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한나는 그녀의 존재를 구성하는 말로, 그녀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을 두고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일기장을 작성한다. 그곳에서 그녀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곳의 실상을 적어간다. 그녀는 오로지 그녀의 말만 믿을 수 있었다. 바깥으로 공표된 규칙들의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도,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나가 사랑한 흑인 남자 모세스도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회 안에서는 그에 관해 말 이상의 행동으로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녀는 결국 그 체계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신뢰하는 것들을 자의로, 혹은 타의로 잃어버린다. 그것들을 그녀는 붙잡을 힘이 없다. 그녀 혼자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 있으려고, 아직은 그 체계 안에 남아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잊어버린 게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럼 기억하는 것도 부끄러워야 하지 않겠어요? 제 이름은 반지입니다.” p431


사람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그 사람을 존중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일까. 보통 사람은 어떤 사람을 신뢰할 것인지 신뢰하지 않을 것인지를 판가름한 이후 이름으로 신뢰도를 그것을 기억한다.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는건,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하다. 애초 저 사람을 신뢰할 것인지 아닌지 조차 고민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나는 마지막 즈음 그녀의 소중한 친구였던 카를로스를 묻는 걸 도와준 반지에게 그의 이름을 묻는다. 그를 신뢰하고 기억하겠다는 몸짓일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살아갈 뿐이지만, 그렇다고 인간다운 마음을 잃은 것도 아닌 사람에게,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다하겠다는 듯, 이제까지는 묻지 않던 이름을 묻는다. 그러나 그 물음이 떠나겠다는 결정까지 막지는 않는다. 그녀가 짊어진, 위선으로 이루어진 짐은 그 작은 희망보다 그녀에게 더 컸다. 수많은 아이의 시체를 묻으며 운영되는 매음굴의 주인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서는 그곳에서 살기 어려운데, 매음굴의 주인으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한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이 모순 상황 자체에서 도망치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패배라고만 말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 상황을 보았고, 그녀의 패배에는 패배라고만 지칭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결정이 도피 하나 뿐이었을지라도, 그 결정은 단지 이 이야기가 끝나기 위한 방법으로 보였다. 때때로 노력할 수밖에 없는 일을 노력하고, 그것이 패배로 남는다해도 패배가 아닌 일들이 종종 있듯, 내게는 이 소설의 결말도 그런 식으로 읽혔다. 

한나는 낯선 땅을 떠난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느낀 위선을 수정할 수 있는 공간. 그 사람이 있는 공간이 그녀에게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녀는 결국 가루를 먹고 나비가 되었을까. (가루를 먹으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모세스가 들려주고 자루를 남겨주었다. 모세스는 그녀가 도왔던, 흑인 여성의 오빠이다.)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그냥 살아있는 것 말고, 사람으로서 기능하고 스스로를 키워나가는 건, 모순적인 상황들을 참아낼 수 있는지, 그 상황에서 얼마나 스스로 그 모순을 줄여나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이해하는지, 어떤 집단의 이해에 굴복하지 않고 얼마나 경계선에 잘 서있는지에 따라 좌우되는 걸까.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이 모순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것 같다. 


헤닝 만켈은 이 소설을 쓰면서, 백인 남성으로서 백인 여성이 되어 흑인의 감성까지 읽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도대체 왜 수많은 작가들에게 너무도 쉽게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이는지 불만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마음에 들었으나 제목을 반토막만 표현한 표지디자인때문에 오히려 ‘불안한 낙원’이라는 두 단어가 상충하면서 마음 안에 주는 위화감이 살아있지 않다고 느꼈다. 책을 덮고 나서, 내 생각이 선입견에 가득찬 생각이었다고, 이 책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이 책은 읽을 때 다소 호흡이 빠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해석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기보다, 계속 사건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둔다. 작가는 한나가 무엇을 느끼는지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분히 따라가는 서술방식을 택한다.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내면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정의내린다. 이런 서술방식이 처음에는 단편적인 것처럼 보여서 불편했지만, 가면 갈 수록 서술방식에 대한 생각보다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하게 되었다. 만약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빠르게 훑어가는 형식이 아니었다면, 한나가 이 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명확히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짧고 빠른 호흡에 불만이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문체가 주제를 표현하기에 부족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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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27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1-27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석의 시 `수라(修羅)`에도 화자가 새끼 거미를 밖으로 내보내는 경험에 대한 느낌이 언급됩니다. 처음에 밖으로 버린 새끼 거미를 찾으려고 어미 거미가 나오는데 그 거미마저 밖으로 보냅니다. 화자는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가 재회하기를 빕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다른 새끼 거미가 어미를 찾으려고 헤맵니다. 화자는 슬픈 감정을 느끼면서 이 새끼 거미도 밖으로 내보냅니다.

맥거핀 2016-01-27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저도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작은 기록에서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어떻게보면 참으로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한나는 약자도 강자도 되어보았기 때문에 양쪽의 사이에서 그렇게 불안하게 위치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리뷰를 읽다보니 소설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오르는데 한나가 그 흑인여성을 돕겠다고 나섰을 때 매음굴의 여성들이 보이는 어떤 이중적인 태도 말입니다. 사실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우리들 대부분이 가지는 일반적인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