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대의 다윈 - 지적 설계 논쟁, 제2판
필립 E. 존슨 지음, 이승엽.이수현 옮김 / 까치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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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최종적인 답변의 기준이고, 진리의 기준이던 시기가 존재했었다. 이에 대한 도전은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처벌을 받았으며 그 처벌의 수준은 죽음에 까지 이를 정도로 종교는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전능한 위치에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 중의 하나인 호기심은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 최종적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도전을 시작했다. 너무도 강해서 깨질 것 같지 않던 기독교적 세계관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등에 의해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래도 ‘창세기’는 흔들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창세기’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생긴다. 1859년 찰스 다윈에 의해 시작된 ‘진화론’은 ‘신에 의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근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시대 진화론으로 인한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을 것이다. 신이 인간을 현재의 모습대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단세포 동물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를 해왔다고 다윈은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부모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고 믿어왔던 기독교의 믿음이 더 이상 발붙일 수 있는여지를 없애버렸던 것이다.

이후에 진화론은 유전학을 비롯한 분자 생물학의 발전에 따라 그 이론의 탄탄함은 더해져 갔으며, 현재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치에 있는 ‘진화론’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진화론의 약점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진화론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미국의 몇몇 주에서 공립학교 교육에서 진화론을 몰아내고 창조론을 채택하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국가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교육이 특정 종교의 이론을 가르쳐서는 안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즉 ‘진화론’은 과학이고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이라는 것이 법적인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 책 <심판대의 다윈>(까치.2006년)의 저자인 필립 E. 존슨은 대학에서 법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는 1987년 영국의 한 서점에서 진화론에 관련된 생물학자의 두 서적을 발견한다. 그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과 마이클 덴턴의 <진화론과 과학>이었다. 도킨스는 “진화란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유전자들 사이의 긍정적 변화들이 우연히 쌓여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거꾸로 덴턴은 진화론에 반대했다. 존슨은 <눈먼 시계공>이 명석한 수학적 기교로 쓰여졌다고 판단했다. “증거는 없고, 가설로서 결론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게 변호사들이 익숙하게 하는 일과 같았다.” 고 얘기하며 법학자로서 자신이 이 일이 뛰어든 이유를 설명했다.

존슨은 진화론에 대해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1991년 이 책을 출판하기에 이르렀으며,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고 비평한다. 그의 이론의 핵심에는 이 복잡한 우주와 생명에 대해 진화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이나 카를 포퍼의 과학에 대한 정의와 과학 방법론을 거론하며 진화론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형이상학이라고 말하고, 또 진화론은 어쩌면 종교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하는 등 진화론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단어를 사용하며 진화론자측을 몰아붙인다. 물론 이러한 존슨의 견해에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은 저명한 진화론자들은 강력히 반발한다. 이러한 반론도 이 책의 뒷부분에 수록되어 있어, 양측의 주장을 같이 비교하며 볼 수 있다.

이 책은 침체에 빠져있었던 창조론자들에게는 가뭄 끝에 만난 소낙비와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환영 받지 못하고 있던 창조론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의 입장을 계속한다. 그 새로운 이름은 ‘지적 설계론’이다. 이 책은 ‘지적설계론’을 탄생시킨 책이다.

이 지적설계론은 창조론과는 달리 자연주의적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진화론이 진짜 과학인지’ 묻는 논쟁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이 책은 진화론의 여러 가지 문제점만을 제기했을 뿐 나름대로의 대안 이론은 전혀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가치를 낮추는 이유가 될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이 자신만의 공약을 발표하지는 않고, 상대방 후보의 공약에 대해 평가를 한 것과 거의 비슷하게 보여진다. 그렇지만 창조론자들에게는 이 책이 구세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두 진영의 견해를 같이 살펴볼 수 있었던 기회는 내게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지적설계론’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여겨졌으며, 아직도 과학으로서의 모습을 전혀 갖추지 못한 불평 불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므로 심판대의 다윈은 아직도 당당하며, 재판정에서의 다윈은 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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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환경주의자
이상돈 지음 / 브레인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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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초에 신문에 이러한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지구 구할 시간 8년 남았다”

2007년 4월30일부터 태국 방콕에서 열린 유엔산하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가 5월4일 ‘기후 변화 완화(Mitigation of Climate Change)’라는 제목의 3차 보고서를 채택하고 폐막했는데, 이 보고서에는 올 2월과 4월에 각각 발표된 1·2차 보고서와 달리 지구 온난화에 따른 지구적 재앙을 막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와 행동 강령을 담고 있었다.

“온실가스 감축 노력은 향후 20~30년이 성패를 좌우할 것”… “앞으로 8년 후인 2015년을 정점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줄어들기 시작해야 한다”고 이 보고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IPCC에서는 꾸준히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이산화탄소를 들고 있다. 지구온난화 여러 부분에서 그 결과가 나타나는데, 일단 남극과 북극 또 높은 산의 만년설이 녹아 해수면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에 가장 상징적인 곳이 바로 투발루이다. 투발루는 남태평양에 9개의 환초로 이뤄진 26㎢의 섬나라이다. 이 섬은 바닷물 속에 잠기고 있는 사진이 꾸준히 신문에 나오고 있다.

투발루는 지금과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불과 15년에서 30년 사이라고 한다. 즉 섬 전체가 15~30년 사이에 바닷물에 잠겨버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투발루의 국민 1만1천800여명 전원이 대피해야 하는데, 호주에서는 이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뉴질랜드에서는 이들 전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된 요인은 바로 지구온난화라고 환경주의자들은 이야기하고 있으나

비판적 환경주의자들은 “투발루의 여러 산호섬의 해안이 침식된 것은 해수면이 상승해서가 아니라 주민들이 집을 짓기 위해 모래를 퍼 썼기 때문이다. 섬에는 도무지 먹을 물도 변변치 않은 데 연료라고는 나무밖에 없으니 주민들은 코코넛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써버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두 개의 그룹은 같은 현상을 보고 전혀 다른 견해를 내 비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들은 누구의 말이 맞을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비판적 환경주의자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그리 걱정스럽지 않다. 환경주의자들 때문에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인류는 지금과 같이 이 지구에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주의자들이 맞는다면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다. 아니 암담한 정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구에서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 두려운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비판적 환경주의자들의 말이 진실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모든 정황적인 증거는 환경주의자들의 견해가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이 책 <비판적 환경주의자>(브레인북스.2006년)의 저자는 환경법을 전공한 대학교수이며, 환경에 관한 글을 꾸준히 써온 학자이다. 이 책에 있는 내용도 <첨단환경기술>이라는 제목의 환경관련 잡지에 6동 동안 게재한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은 환경에 관한 위선과 가식을 털어내고 진실을 알리게 하는 데에 있다고 ‘머리말’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환경주의자들이 선동적이고 인기영합적이고 지나치게 지구의 미래를 극단주의적으로 끌고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정부에서 그 동안 환경관련 정책들이 잘못되었다고 메스를 대고 있으며, 잘못된 원인은 NGO란 이름의 환경주의자들 때문에 국가의 정책이 포풀리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에 관한 근거로 많은 자료들을 이 책에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글 중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그가 환경주의자들을 극단주의자로 몰고 있듯이 저자 또한 극단주의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에는 균형이 중요하다. 새의 날개가 한쪽만 발달해서는 제대로 날 수 없을 것이고, 사람의 신체도 균형을 잃는다면 똑바로 걷거나 뛸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균형을 얘기하는 이유는 환경주의자의 의견도 필요하지만 저자처럼 비판적 환경주의자의 의견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의 균형은 아마도 진실을 찾아야 이루어질 것이다. 나도 그런 목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

아직도 우리인간이 신앙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의 수준으로 기후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비판적 환경주의자들은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의 원인이라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사실에 의햐면 이산화탄소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한다.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말은 결코 옳은 말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과학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잘 모른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과 같은 비판적 환경주의자들의 견해를 한 번 들어보는 것도 독자들의 균형감각을 느끼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 읽고는 이들의 신념대로 지구가 그렇게 낙관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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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1 - 진옥섭의 예인명인
진옥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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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유학생활 중에서, 각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끼리의 축제가 벌어졌는데, 거의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나라의 전통적인 춤이나 노래를 했는데 자신은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정말 창피했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우리 나라와 같이 급속한 현대화가 진행되고 성공한 나라는 우리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서양에서 200년이 걸린 산업화를 불과 한 두 세대 만에 해치춰버렸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는 많은 것을 얻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그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러한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세상은 결코 공짜가 없다. 우리가 읽어버린 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삶에 내재해있던 우리 선조의 정신세계이고 그들의 체취였으며, 또  애환과 기쁨이었다.

산업화 이전 우리나라는 농업이 근본인 사회였고 또 계급이 존재한 사회였다. 그러한 환경에서 우리네 전통적인 예술이 태어났던 것이었고, 이를 모두가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속한 산업화는 우리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여유로움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예술 세계는 ‘빨리빨리’를 외치는 세태에서는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빨리빨리’에서 한 숨을 돌릴 여유를 갖자 우리는 주위에 많은 것들이 없어졌음을 이제서야 깨닳고 그것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그들을 인간문화재란 이름으로 대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들은 가족에게 까지 자시의 과거를 감추려고 하고 있다. 그들의 춤이나 노래는 옛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을 주었지만 천한짓이었고, 그들은 천한사람이었다. 귀천이 없어진 세상이지만 아직 사람들의 마음속엔 귀천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이 책 저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자신의 목소리와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노력의 결과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명인들의 공연을 알리는 각 보도자료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들은 무당, 광대, 기생, 한량이었다. 우리가 읽어버린 것을 찾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만큼이나 저자인 진옥섭의 글쓰기 솜씨는 훌륭했다. 현란한 어휘 사용능력이나 언어의 유희는 독자들이 부러워할만큼 멋지다.

노름마치란 이 책 제목이 낯설다. 처음들어보는 말이었다. 이 책의 책날개에 그뜻이 이렇게 써있다.  “노름마치란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다. 곧 그와 나와 한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했다. 이렇게 놀음을 미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한다”. 그랬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해당분야의 고수였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갖고 있는 명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곁을 떠나가고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수명으로 100년 이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을고을에 춤이 흔해 전체가 예술의 전당이었을 터이다”(161쪽). 하지만 지금은 서울에 ‘예술의 전당’을 지어놓고 시늉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춤은 이제 박물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흔한 것들을 우리는 잃어버렸고, 아니 외면했는지도 모른며, 볼 기회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춤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숨쉬는 이치에 따라 조화로운 몸놀림으로 허공과 세월에 새기는 문자가 춤이다”(199쪽) 아!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전통 타악기의 소리는 심장의 고동소리와 닮아 있다. 이를 듣는 우리들은 편암함과 아울러 심장의 강렬한 박동 처럼 우리의 신명을 불러 일으킨다. 이럴때에 우리의 선조들은 어깨춤을 추며 자신의 즐거움을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젊은 사람들은 이런 어깨춤의 추임새를 할 수가 없다. 보고 듣고 배운 바가 없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전자 음악을 들으며 도리도리춤을 추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의 것을 알려주는 이러한 책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주변에서 전통예술 공연을 한다면 꼭 가봐야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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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문명기행 - 오아시스로 편
정수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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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기원은 전한 무제 때 흉노와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약자의 입장이었던 한나라가 월지와의 동맹을 통해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張騫)을 파견한다. 장건은 월지와의 동맹을 이루어 내지는 못했지만, 서역으로의 길을 중국에 알려주게 된다. 후에 이 길을 따라 중국의 비단이 서역을 거쳐 로마에 까지 전해진다. 물론 비단 뿐만 아니라 많은 물품과 종교 등 다양한 교류가 있었지만, 비단에 중점을 두고 독일의 지리학자인 리히트호펜은 실크로드라고 작명한다. 보통 이 길을 실크로드 오아시스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실크로드에는 오아시스로가 아닌 다른 길도 있다는 의미이다. 실크로드 초원길이 있는데 이는 남 시베리아의 초원길을 거쳐 로마로 가는 길을 말함이고, 실크로드 해양길도 있다. 이는 뱃길로 로마에 가는 길을 말하는데, 보통 실크로드라고 하면 이중 오아시스로를 말한다.

 

이 책 <실크로드 문명기행>(한겨레출판.2006)은 저자인 정수일과 한겨레신문사의 기자들이 2006년7월17부터 2006년8월25까지 40일간의 여정으로 인천 공항에서 출발해 북경을 거쳐 시안(西安),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통해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이란 이름으로 실크로드 기행에 나선 그 결과이다. 그들은 왜 실크로드로 긴 여행을 떠났을까?

 

깐수란 이름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정수일은 문명교류사 연구 분야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의 수 많은 관련 저작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으며, 이 책은 그의 주된 연구 결과를 해당 지역을 실제로 찾아가서 확인해보는 과정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정수일의 관심분야는 실크로드와 한반도와의 연관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의 초점도 그에 맞추어져 있다.

 

정수일은 실크로드에 있어 우리의 선조인 혜초, 고선지와 같은 인물과 연계하고 있다. 혜초는 신라의 고승으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행문을 쓴 사람이다. <왕오천축국전> 7세기에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가 방문한 각 나라들에 관한 정보를 수록한 것으로 그 시대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유물이다. 또 고선지는 멸망한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지금의 중국 신장 지역의 당나라 군사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그가 패한 전쟁 때문에 그는 인류사에 있어서 커다란 기록을 남긴다. 751년 탈라스에서 이슬람권과의 전쟁은 당나라가 패한다. 이에 당나라 군사들의 많은 수가 포로로 잡히고, 그들 중 제지 기술자에 의해 서역으로 제지 기술이 전파된다. 이것이 유럽의 중세 이후 문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종이 제조기술이 전해진 이 길은 페이퍼 포드인 것이다. 또 목판과 금속 인쇄술에 있어서 최고의 기술을 가졌던 한반도의 기술이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전해져 쿠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연결된다는 가설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이 길은 인쇄 로드가 되는 것이고 한반도는 유럽의 근대화에 큰 힘을 준 것이리라.

 

이렇게 한반도와 관련한 것들이 서쪽으로만 간 것은 아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한반도로 전래된 것들도 아주 많이 있음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명한 신라의 황금보검이나 유리 그릇 등은 로마나 페르시아로부터 한반도로 전래된 것들이고. 신라 괘릉의 무인석은 아랍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즉 물품만 전래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까지도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교류 부분에 보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근교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와 둔황 벽화에 나와 있는 조우관을 쓴 사람은 분명히 한반도에서 간 사신의 모습이다. 신라인인지 아니면 고구려인인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한반도에서 간 사람임은 확실하다.

 

실크로드는 단순히 비단만 전해진 길이 아니라 도자기, 제지술, 인쇄술이 전래된 길이며. 또 종교가 전래되었고, 칭기스칸에게는 전쟁을 위한 길이었으며, 지중해에서 태평양까지 연결된 인류 문명 교류의 큰 길이었다.

 

이렇듯 한반도와 먼 거리에 있는 로마까지 우리의 선조들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그들과 교역을 하고 사람이 왕래했음을 알 수 있으며, 실크로드 곳곳에 한반도의 자취가 어려있음에 독자들은 많이 놀랄 것이다. 그곳에 가면 한반도가 보이는 것이다.

 

200여 장에 달하는 실크로드의 멋진 사진이 들어있어 보는 즐거움까지 독자들에게 주는 책이다. 다 읽고는 정수일의 다음 여행은 경주에서 시작하여 북한을 육로로 통과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실제로 실크로드 동단인 경주에서 서단인 이스탄불까지 제대로 된 실크로드 탐방이 될 것이다. 또 이 책이 오아시스로 편이라고 다음에는 초원로와 해양로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 책들이 기다려지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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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 - 글쓰기에 대한 사유와 기록 조선 지식인 시리즈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 엄윤숙 지음 / 포럼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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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 하는데 글은 못 쓰는 사람도 있고. 또 말은 잘 못하나 글은 잘 쓰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즉 말하기와  글 쓰는 재능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언어능력은 선천적인 부분으로 우리 유전자내에 프로그램 되어 있으나, 글을 표현하는 문자는 발명된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유전자내에 인간의 본능으로 진화할 시간이 없었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가설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글쓰기 능력은 후천적으로 충분히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여진다.


물론 말 잘하는 것도 선천적인 능력이라 여겨지지만 후천적으로 기술(수사학)을 배우면 잘 할 수 있다고 하니 글쓰기 능력은 배움에 따라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쓸수 있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글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해뜨는 장면이나 어떤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을 보고는 그때에 느낀 감정을 우리는 필설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즉 기본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언어(어휘)가 부족함을 느낀다. 아마 이런 느낌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어휘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글쓰기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문자로 표현해 남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좋은 글쓰기란 글속에 녹아든 이치와 논리로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라고 이 책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포럼.2007년)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좋은 글이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이를 위해선 그 글속에 논리적인 일관성과 자명한 이치가 기본으로 깔려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일관성이라 글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고, 자명한 이치란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글의 형식을 위해서는 ‘독서와 사색’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머리말에 나와 있으며, 좋고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영향을 주기 위한 글의 내용을 위해서도 독서와 사색은 필요할 것이다.


“좋은 문장은 마음 깊은 곳에 쌓아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책 17쪽에 나오는 말로 다산시문집에 있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지식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독서와 사색과 아울러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서와 사색,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면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최한기는 <인정>에서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 글쓰기의 왕도를 알려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렇다면 진정 왕도는 없는 것일까?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들은 느낌도 글쓰기에 왕도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제서(經濟書)를 즐겨 읽어야 한다”고한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은 여러 책에서 인용되는 만큼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 문장이다. 이 글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시키려면 일단 경학에 해당하는 고전이나 인문서를 우선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역사서와 기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라는 의미이다. 이래야만 글을 쓸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장이 이 책 전체의 주제에 해당하지 않나 하고 생각이 된다. 이런 긴 절차를 겪어야 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니 정말 왕도는 없다.


내가 이 책을 읽고는 느낀 것은 좋은 글을 쓰는 데에 왕도는 없지만, 다만 몇 가지 기술은 알아낼 수 있었다.


“글은 반드시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문장을 꾸미거나 기교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왕성순의 <여한십가문초>

짧은 글일지라도 다시 다듬고 고쳐라” 김창협의 <농암잡지>

“글이란 자신의 마음과 뜻을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쉽고 간략하게 글을 써야 한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이 책의 가치는 독자들에게 글쓰기의 기술을 알려주는 것에도 있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쓴 좋은 문장과 아울러 독서 방법을 전해주는 것에 오히려 더 좋은 책으로 여겨진다. 좋은 글을 읽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데 기본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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