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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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프리카 중앙부에 위치한 르완다공화국은 1885년 독일의 식민지였다가 1919년 벨기에의 위임통치와 신탁통치를 거쳐 1961년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다음해 독립한 나라로, 면적은 2만 6338㎢이고, 인구는 838만 명(2003년)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조그만 나라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영화로 책으로 르완다라는 나라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이 르완다에서 1994년 100만 명 이상의 ‘투치족’이 살해되었다. 그들은 적과의 전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웃에 사는 ‘후투족’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왜 후투족은 투치족을 학살했을까? 투치족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는 식민지 지배를 편하게 하려는 벨기에의 식민지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의 투치족(15%)만을 대상으로 한 고등교육정책을 실시함으로 벨기에는 식미지 지배 체제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지만, 이에 소외된 후투족들은 그 가슴속에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몇 번에 걸쳐 두 인종 간 큰 대립을 낳게 된 것이다.


한 마을에서 사이좋은 이웃으로, 또한 학교에서 동기, 선후배로 살아온 그들에게 이러한 불만이 과연 집단 학살을 일으킬 만한 이유가 될까?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기본적으로 나를 포함한 ‘우리’라는 집단과 ‘다른 집단’을 편을 갈라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다. 그러나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남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도덕률의 지배를 받는다. 그렇기에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외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범죄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닌 동물이나 벌레를 죽이는 것이라면 이런 도덕적, 윤리적 죄책감도 없고, 또한 법원에 의한 심판을 받을 일도 아니다. 이런 상태여야만 인간은 부담 없이 주변에 잘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를 벌레나 동물도 생각하면 쉽게 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르완다에서 벌어진 것이다.


후투족은 투치족 사람들을 바퀴벌레라고 칭하면 살해하도록 후투족 사람들을 부추긴다. 후투족은 일말을 거리낌 없이 정말 바퀴벌레를 소탕하듯이 100만 명 이상의 투치족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다. 방송으로 또 주변사람들의 말에 의해 투치족을 죽이는 이 ‘집단적 광기’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이럴 수는 없다’라며 격분할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심정으로 이 책을 읽어나갔다. 살해자 집단인 후투족 내에서도 이러한 일에 반대하며 투치족을 보호하고자 그들을 숨겨주고 살인을 말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 집단의 광기 속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집단의 광기 앞에서 우리 인간의 이성은 얼마나 무너지게 쉬운 것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인간은 이 ‘집단의 광기’에 휘말려 쉽게 살인자가 될 수도 있으며, 곤경에 빠진 이웃을 돕기 위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본성 안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성향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천사, 악마와 함께 살고 있는 현장을 독자들은 목도할 수 있다.


이 집단적인 살인의 현장에서 목사와 천사와 같은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이때의 상황을 임마꿀레는 우리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독자들은 임마꿀레가 처한 어려움을 보며 어떻게 인간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까하고 분노하며, 또 임마꿀레의 삶에 대한 의지와 강인한 정신력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드라마보다도 오히려 더 드라마 같은 이 책의 전개는 한순간도 손에서 책을 떨어지지 못하게 한다.


이 책의 원 제목이 <Left to tell>이다. 즉 ‘말하기 위해 살아남다’이다. 임마꿀레는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며 자신이 이 상황에서 살아남은 이유를 이 책의 제목에 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있는 우리들에게 인종간 갈등과 종교간 갈등은 현재에도 그대로 분쟁의 불씨로 남아있다. 언제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르완다 내전과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또 르완다에서의 내전은 항상 재연될 위험성이 있다.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저자인 임마꿀레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부질없는 보복을 막는 방법은 사람들 스스로 용서의 신성함을 깨닫게 하는 길뿐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용서하는 마음을 얻도록 돕는 일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인생의 큰 숙제였다.”


그렇다‘용서’가 살아있다면 우리 인간사회는 정의가 승리할 것이다. 용서! 이는 아주 어렵고도 쉬운 결정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분노를 없애버리고 우리 모두를 평화롭게 만드는 이 용서가 우리 인간에게는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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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발견 - 5,000년의 사랑 이야기
이수현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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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7년 이탈리아의 만토바 근처 발다로 유적지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포옹한 두 남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과학자들은 ’발다로의 연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유골을 주변 흙까지 들어내는 방식으로 박물관에 보존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영원한 포옹은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진정한 사랑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들이야말로 지구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발견한 사랑의 조상들이다. 이 이야기는 아득한 빙하기를 배경으로 사랑을 찾아 떠난 그들의 길고도 아름다운 여정을 그렸다.” 이 책 <사랑의 발견>(밀리언하우스.2007년)은 이렇게 시작한다.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이 공존하던 구석기 시대에 물가에서 주로 삶을 영위하는 부족의 ‘릴라’라는 이름의 여성과 바위산에 살던 ‘루가’라는 남자가 있었다. 이들이 살던 지역에 닥친 빙하기 때문에 같이 살던 사람은 모두 죽고, 살아남은 두 사람은 따듯한 곳으로 함께 이동한다. 그런데 이들 둘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마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 즉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둘은 끊임없이 상대방을 오해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둘은 서로 간에 끌리는 것을 느낀다. 어차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둘은 시시각각 다투고 또 돌아서면 서로 간에 지나쳤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서로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만 현실을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남녀가 처한 진실이 아니던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그들이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둘은 또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호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다투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본능의 한계상황인 것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왜 이렇게 다른 존재로 만들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느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너희 인간들에게 다른 동물과 달리 직립하게 한 것은 단순히 도구를 사용하게 한 것 뿐만아니라, 서로 포옹할 수 있게 자유로운 손을 준 것이다.’


자! 인간에게는 포옹이라는 강력한 스킨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책의 첫 장면이 포옹하는 남녀의 유골의 모습이듯이 우리 인간의 남녀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간의 마음의 깊은 곳을 전달해주는 미소와 포옹인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연애시절에는 열심히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해주기도 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이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또 어떤 뜻이 있을까! 이 책을 다 읽고는 이런 생각이 숙제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이 책은 따듯한 나라로 삶을 위한 여정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서로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화해하고 또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은은한 그림처럼 부드럽게 그려냈다. 사랑은 항상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이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에서 어려움도 즐거움도 함께 할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포옹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이 여행은 아마 행복할 것이다. 자! 오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포옹을 한 번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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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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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 1939년 만주국경 분쟁 시 소련군에 붙잡혀 소련군에 편입됐다. 그는 다시 독일군에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을 건설하는데 투입되었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미군의 포로가 됐다. 붙잡혔을 당시 아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으며 미 정보부대에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이야기 했다. 1944년6월5일 프랑스 노르망디 유타 해안에서” 한 장의 사진에 붙어있는 설명서에 이렇게 써있었다. 그리고 한 소설가는 이 사진을 설명한 글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다. 그 소설이 바로 <오! 하느님>(문학동네.2007년>이다.


‘신길만’은 고향에서 일본군에 징집되고, 관동군에 배치되어 만주 몽골 국경부근의 전쟁터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일본군들에게는 보통 전쟁에서 패전 시 포로가 되지 말 것을 지시한다.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자결을 선택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인공인 일본인도 아니다. 그는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보려는 일념으로 살아남아 포로가 된다. 포로 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생긴다. 소련군은 그들을 소련군으로 편입시킨다. 그래야만 그들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설득하면서 말이다. 그들에게는 어느 나라 군복을 입는다는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생명을 보전하여 고향의 가족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소련군의 군복을 입은 그들은 독일과의 전쟁터에 투입된다. 독일의 모스크바 진입 시도  서 그 조선인들은 또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참,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다시 독일군에 편입된 그들은 유럽대륙의 맨 왼쪽인 대서양 부근의 해안에 배치된다. 그 해안의 이름은 바로 ‘노르망디’였다. 2차 세계대전의 역사에서 승패를 가른 분기점이 된 그 전쟁터였다. 그곳에서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된다. 정말 ‘오! 하느님’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누구를 또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는가? 보통 전쟁은 나의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래야만 그들은 적이라는 이름의 상대방을 죽이는데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고, 참전한 것에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적인 일본을 위해 전쟁터에 나간다. 자신이 원해서 군인이 되어 참전했다면 전쟁을 통해서 영웅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도 가지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를 볼 때 남자가 신분의 상승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전쟁과 혼란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정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징집이 되어,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의미 없는 전쟁터에 가게된 것이다. 그들의 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입은 군복과 다른 군복의 사람들과 전쟁을 하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전투의 승리보다도 자신의 생명의 안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생김새가 다른 몇 벌의 군복을 입었던 것이었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의미는 ‘제국주의’도 ‘이데올로기’도 없는 생존에 모든 것을 걸어놓은 총질에 불과했다.


이 책은 내게 과연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은 자유의지인데, 그들의 생존과 미래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타자들에 의해 좌우된다. 역사의 소용돌이치는 바퀴살에 튀어나가는 작은 돌부리처럼 그들의 삶은 타자의 의사에 철저히 종속된 채 자신의 가치는 전혀 없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 대부분 보통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정의도 도덕도 존엄도 그 어떤 가치 있는 단어도 그들의 삶에는 투영되어있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생존에 급급한 한 마리의 야생동물의 모습과 지극히도 비슷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위대함이 그들에게 있었던가? 그저 장마 후 쓸려 내려간 토사와 같이 그들은 전쟁이라는 큰 빗속에 산산이 해체돼 자신이 있었던 곳에서 쫓겨나간 하나의 모래와 자갈에 불과했다. 그들이 있었던 자리는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존재가치는 거의 영에 가깝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네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기에 독자들의 그들의 삶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으며, 그 측은함에 깊은 동병상련을 느낀다.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작가의 상상에 의해 쓰인 이 책은 과연 역사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라는 철학적인 의문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으며, 슬픈 코리아의 20세기 초반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정말 그곳에서 죽었을까? 그 한 장의 사진 속에 독일군복을 입는 있는 슬픈 코리안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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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하는 물고기의 상상 - 오늘을 행복하게 하는 36가지 상상
케스투티스 카스파라비키우스 지음, 원지명 옮김 / 예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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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미망인(未亡人) 모씨(某氏)는 두어 자 글로써 침자(針子)에게 고(告)하노니,” 이렇게 시작하는 이 글은 바로 조침문‘(弔針文)’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글은 바늘을 의인화하여 제문(祭文)으로 쓴 글로, 과부가 되었고 또 자식도 없는 한 여인이 선물로 받은 바늘이 부러지자 그 섭섭한 마음이 들어 이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누구하나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던 그녀의 생활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바로 바늘이었는데, 이것이 부러져서 더 이상 그녀와 함께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 친구와 같이 여겼던 바늘이 부러진 것은 마치 사람이 죽은 것처럼 생각하고 제문을 썼던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줄로 알던 시기도 있었다. 또 지구의 주인이 인간인줄로 알던 시기도 있었으며,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지구의 주인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는 인간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를 망가뜨리는 데에 있다. 아니 주인이면 오히려 더 아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인간의 습성 상 임자가 없는 것이라면 마구 쓰는 경향이 있다.


나만 아는 존재인 우리들,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영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기에 그들과 대화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각종 신화와 이야기 거리가  생겨나고, 많은 교훈도 그 안에 녹아있었다. 죽음과 삶이 하나였고, 사물이나 동물들에게 인격을 부여해 그들을 소중히 다루었던 것이 인간의 중요한 삶의 하나였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 표현도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이 모두 하나이다.’라는 의미로 이런 생각이 발전해서 물질을 의인화해서 인격을 부여 하였고, 그들과 즐거움과 애환을 즐겼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성격을 버리고는 나와 우리라는 편가르기는 타인과 사물에 대해 소중한 가치를 박탈해버렸다. 이것이 현대사회를 메마르게 한 이유는 아닌지 모르겠다. 즉 우리만 외치다 보니 우리는 우리 주변의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쓸 틈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나와 우리만 앞으로 달려가기도 바쁘니 옆을 둘러볼 여유조차 우리에게는 사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앞으로만 나가도 보니, 무언가 허전한 기분이 들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우리는 한 번 생각해볼 여유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은 여유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렇게 Fast Life에 매몰된 우리 삶에 인격을 가진 사물들의 이야기는 Slow Life도 우리에게 줄 수 있으며, 잠시나마 여유와 웃음을 우리에게 허용해준다.


이 책 <낚시하는 물고기의 상상>(예담.2007년)은 그런 책이다. 가스레인지에서부터 가죽 구두까지 우리 주변에 흔히 있어 그 존재가치를 잊어버리고 있는 36개의 사물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36개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삶의 가치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리투아니아 사람으로 이름은 ‘캐스투티스 카스파라비키우스’로  어렵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괜스레 구박받고 무시당했던 작은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정중한 사과입니다. 나의 엄한 비난을 묵묵히 감내해주는 주위 물건들에 대한 감사의 편지입니다.”그런 미안함에서 그는 36개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독자들에 감동을 준다.


이 책에는 책의 제목처럼 낚시하는 물고기도 나오고, 감기 걸린 수도꼭지도 나온다. 제일 처음에 나오는 주방이야기를 한 번 살펴보자. 주방장인 커다란 냄비는 지금 수프를 끓이는 중이고, 부주방장인 작은 냄비는 채소를 데치고 있다. 신참인 프라이펜 소녀는 팬케이크를 굽느라 바쁘다. 그녀의 주특기는 펜케이크를 공중 삼회전 시키는 기술이다. 하지만 그녀는 실수를 해서 공중으로 던진 펜케이크가 수프 속으로 떨어진다. 이 상황을 보고 그 옆에 있던 부주방장이 정신없이 웃다가 자신이 삶고 있던 야채가 몽땅 타버렸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상대의 허물을 비웃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허물로 비웃음을 당하게 됩니다.”


“잘난 사람을 칭찬하기는 쉽지만 못난 사람을 격려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격려가 절실히 필요합니다.”라는 이야기는 27번째에 수록된  찻잔 이야기에서 나오는 교훈이다.


“멀리 떠나보면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지만 너무 멀어지면 돌아오는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는 31번째에 수록된  테디 베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다.


영문 제목은 <Silly Stories>로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내가 보기에는 등장하는 사물들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이야기인 것으로 느껴진다. 작고 가벼운 책이지만 내용은 크고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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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07-05-25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의 허물을 비웃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허물로 비웃음을 당하게 됩니다.”
너무 와닿는 말입니다.
 
캐리커처로 본 여성 풍속사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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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이야기(Herstory)는 치장의 역사였다. 그 시대(16세기 ~ 20세기 초) 그 곳(프랑스, 독일, 영국)의 여성들은 왜 치장을 했을까? 그것은 ‘성’을 획득하기 위한 제일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성'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본능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모든 생물의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다. 이 번식을 위해 새들은 노래하며, 반딧불은 자신의 몸을 밝히고 있으며, 공작은 화려한 꼬리날개를 펼쳐 보인다. 그런데 노래하고, 몸을 밝히고, 몸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아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쉽게 말해서 포식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켜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버릴 위험이 따르는 행동이나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이 동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번식 즉, 성에 있기에 이를 얻기 위해 큰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다만 이 동물들과 인간이 다른 것이라고는 이렇게 노래하고, 몸을 밝히고, 화려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모두 수컷이다. 다른 동물들은 성선택의 주체는 바로 암컷이다. 하지만 인간은 암컷만이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선택의 주체는 남성이다. 반면 여성의 힘이 커진 요즈음은 남성들이 치장을 하기도 한다. 그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꽃미남인 것이다. 꽃미남은 여성 상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인 것이다.

여성의 치장 역사에서도 보면 인간의 암컷은 아름다움을 위해 건강까지도 버렸다. 얼굴이 하얗게 보이려고 수은까지도 얼굴에 발랐던 것이다. 그녀들은 얼굴에만 치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의복이 자기 표현 수단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의복은 하나의 포장 수단으로 의복 안에 있는 내용물인 몸의 가치를 높여주기 위한 가식적이고 과장된 치장이 바로 의복이 상징하는 바다. 그렇다면 몸의 어떤 가치를 보여주기 위함인가? 생식의 기본 요소인 임신과 수유를 위한 부분을 강조한 것이 서양 근대 여성복의 역사였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골반과 가슴을 크게 보이게 하려고 개미 허리를 만들었다. 저자는 이러한 의복은 '여성의 관능'을 위한 것이라고 꼭 집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여성의 모습을 캐리커처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그 시대의 상황을 읽어주고 있다. “캐리커처의 어원은 ‘과장된 것, 왜곡된 것’ 등의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 ‘caricatura’에서 나온 말로 풍자화 희화 만화 등도 캐리커처의 일종이다. 대개 조소(嘲笑) 우의(寓意) 등을 수반한 과장된 표현으로 시국을 풍자하고 권위에 반항하며 위선을 폭로하는 등의 성격을 띤다.”고 사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 책에 있는 캐리커처로 본 여성 풍속사는 치장의 역사였고, 성을 획득하기 위한 성 풍속사였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는 말이 있다. 즉 남성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터에서 주변의 여자들은 모두 적군인 것이다. 그들을 누르고 승리하기 위한 조건은 경쟁자들보다 뛰어난 무엇이 필요한 것이다. 즉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남성의 눈에 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복이나 장신구, 헤어스타일들이 중요한 경쟁 요소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한마디로 "늘! 새롭게"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대량생산에 발 맞추어 이 책의 흐름 중에 하나인 '모드'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드의 형태는 '여성의 성적 특성을 나타내는 육체의 선을 잘 드러내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가슴, 허리, 엉덩이'의 비 이상적인 과장된 조합이 바로 그것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일본의 고유 의상은 이러한 서양의 표현형과는 전혀 다르다. '가슴, 허리, 엉덩이' 선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또 지금도 원시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아마존과 같은 오지의 부족들의 벗은 모습에서도 서양과 같은 과장은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를 저자는 "문화가 발달한 백인 민족에게는 여성의 가슴이 매력의 본질이고, 잘 발달한 가슴을 여성의 육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식으로 인식했다"고 한 슈트라츠(L. Stratz)의 서술을 인용하고 있다. 이 책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서술한 책이라 인종차별적인 오리엔탈리즘이 눈에 띄는 장면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도 여자들은 자신의 가슴을 강조하기 위해 뽕브라를 하고 있다. 이는 이 책에서와 같이 서구 지향의 미적 기준에 우리도 빠져 있음을 알아챌 수 있는 부분이다.

"여성들의 노출은 관능적인 매력을 남성들에게 행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에 아마도 페미니스트들은 발끈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말은 영원한 진리로 생각이 된다. 짝을 찾기 위해 치르는 비용은 획득하는 가치에 비하여 항상 적은 것이니 말이다. '비용이 클수록 획득되는 가치도 크다'라는 말이 항상 진리이기에 '모드'는 21세기에 이 땅에서도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시대마다 나라마다 그 시공간에 지배적인 정치 경제적인 상황에 따라 헤어스타일에서부터 구두의 모습까지 그 형태는 수도 없이 변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관능미'였다. 모든 패션 모드의 목적은 바로 섹스어필이었음은 21세기 한국에서도 동일하다. 여성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아름답다'는 말보다 오히려 '섹시하다' 말이라고 하니 말이다.

16세기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독일, 영국의 500여 장의 캐리커처를 통해서 그 시대의 여성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시대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대체되는 시기였으며, 또한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 사회가 탄생하는 등 변화가 많은 시대였다. 그런 정치 경제적인 격변기에 역시 여성의 복장이나 치장도 크게 변화했다는 것을 독자들은 글과 캐리커처를 통해서 알아낼 수가 있다. 이것이 이 책 1장에 나와 있는 여성의 성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2부에서는 여성의 일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캐리커처로 표현이 되어있으나 캐리커처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초기의 캐리커처는 주로 낮은 계층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후기로 가면서 캐리커처의 대상은 최고 계층에 이르기도 한다. 이는 이 시기 시민계급의 탄생에 따른 시민의식의 향상과 언론의 자유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근대의 여성 풍속사에는 이처럼 정치적, 경제적인 변화에 따른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과 그들의 진솔한 삶이 투영되어 있다. 과장된 면은 있을지언정 그 삶의 본질은 그 안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시대 유럽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그들은 낮은 지위를 벗어나기 위해 결혼은 필수적이었던 것이고, 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로 여성의 정숙함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이 금기를 깨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 바로 부정이었던 것이다. 지금 시대에 말하는 성해방과는 조금 차이가 나는 것으로 느껴진다.
21세기인 지금 신문에서 우리는 캐리커처를 볼 수 있다. 대부분이 정치가들의 모습인데, 정치가들의 모습은 항상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정치가들의 모습은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복잡화된 현대사회의 모순과 불합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캐리커처의 존재의의는 크게 느껴진다.

이 책에 수록된 캐리커처에는 유명한 화가들도 만날 수 있다. 고야도 있고 툴루즈-로트랙도 비어즐리도 마네의 그림도 있어서 독자들에게 명화를 보는 즐거움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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